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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43화 (443/473)

엔딩메이커 442화

SS #36 레지나 바이엘(3)

왕도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

왕도로 떠날 채비를 단단히 갖춘 레지나는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린 채 흥분한 얼굴로 숨을 크게 삼켰다.

‘이사 가는 것 같아.’

물론 정말로 바이엘 백작가가 이사를 가려면 마차 수십 대가 아니라 수백 대가 필요할 터였지만,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규모이기는 했다.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가 함께 이동하다 보니 왕도로 향해야 할 가족 수도 많은데다가 한 달 가까이 체류할 예정이었기에 필요한 짐 역시 많았기 때문이다.

‘같이 가는 기사들이랑 메이드 언니들도 많고.’

그야말로 우글우글.

십여 년 전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가 왕도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같이 가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대 바이엘 백작과 소 바이엘 백작, 대 체이스 백작과 소 체이스 백작 이렇게 네 명에 기사들과 메이드들도 서너 명 수준이었기에 일행의 규모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았다.

자연 필요한 마차의 수도 세 대 정도면 충분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소 바이엘 백작 내외.

두 사람의 아이들인 엠버와 에이든.

대 체이스 백작.

소 체이스 백작 내외.

두 사람의 외동딸인 벨라.

‘그리고 나.’

가족들의 숫자만 벌써 아홉 명이었는데,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십여 년 전과 달리 지금은 여자가 다섯 명이나 되었다.

일반적으로 귀족들이 여행을 떠날 때 여자들의 짐이 남자들의 짐보다 훨씬 더 많은 편이었다.

단순한 이유였는데, 필요한 것들이 훨씬 더 많고 물건들의 크기도 컸기 때문이다.

‘드레스들이 바보같이 컸으니까.’

거기다 화장품은 또 종류가 얼마나 많던가.

체류 기간이 무려 한 달이나 되다 보니 두 백작가의 짐만으로 마차 세 대가 나온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그래봐야 세 대이기는 했다.

이것저것 다 고려하면 그래도 마차 열 대 정도면 차고 넘칠 일행이었는데 마차가 수십 대나 필요하게 된 것은 어떤 남자의 결정 때문이었다.

-조금의 위험과 불편도 용납하지 않겠다.

아더 체이스.

대 체이스 백작.

대 바이엘 백작이 백작 부인과 함께 사랑의 여행을 떠난 지금 그는 바일룬의 최고 권력자인 동시에 두 가문의 웃어른이었고, 그의 결정은 곧 하늘의 결정과 다름이 없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메이드 수십 명이 동행하게 되었다.

안전을 위해 체이스 기사단이 사실상 총동원되었고, 일행의 숫자는 아홉 명에서 순식간에 칠십여 명으로 폭증하였다.

자연 필요한 짐들의 숫자와 마차들 역시 폭증하였고 말이다.

“흥,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면 즉시 말하거라.”

도열한 마차들을 보며 손주들에게, 그리고 총애하는 며느리인 실비아에게 한마디를 남긴 그는 선두 마차에 홀로 들어섰고, 레지나는 언제나 참 재밌으면서 멋있는 삼촌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실비아 언니도 멋져.’

소 체이스 백작 부인인 동시에 크로스벨 백작.

북부를 넘어 왕국의 금융업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르는 황금의 여인.

하늘색 머리칼을 길게 기른 그녀는 보랏빛 여행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린 레지나의 눈으로 보기에도 정말 아름답고 우아하였다.

‘그래, 우아.’

사실 예쁜 사람이야 주변에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실비아에게는 독보적인 우아함이 있었다.

진짜 귀족이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렇다고 아델리아 언니는 귀족 안 같다는 건 아니지만.’

애당초 ‘군인’이었던 아델리아인 터라 실비아와는 다른 종류의 우아함이-

‘아니지, 아델리아 언니는 우아함이 아니라 근엄함인가.’

어찌 되었든 우아한 실비아.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작은 벨라.

이제 아홉 살인 소 체이스 백작 내외의 무남독녀.

아버지인 소 체이스 백작보다는 어머니인 크로스벨 백작을 쏙 빼닮은 하늘색 머리칼의 소녀는 정말로 작고 귀여워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도 무척이나 얌전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레지나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문득 시선을 돌린 실비아는 우아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레지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알았죠?”

“네, 실비아 언니.”

레지나가 저도 모르게 뺨을 붉히며 답하자 실비아는 다시 후훗 하고 웃었고, 벨라 역시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시작된 왕도로의 여정.

총평하자면 재미있었다.

마차 안에만 있기 갑갑할 때도 있었지만 뭔가 다 같이 어딘가로 가는 행동 자체가 즐겁다고 해야 할까?

밖에서 먹는 도시락에 특별한 맛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보니, 레지나. 알고 있었어?”

“뭐가?”

레지나가 되묻자 벨라를 인형처럼 안고 있던 엠버는 후훗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십여 년 전에는 사람들이 사랑의 도주를 하지 않았대.”

“어? 진짜로?”

“응, 진짜로.”

사랑의 도주.

약혼식, 혹은 결혼식을 마친 커플이 자신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편지로 남긴 뒤 단둘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랑의 의식.

규모와 여정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세일룬 왕국에서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 두루 수행하는, 그야말로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십여 년 전만 해도 사랑의 도주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냥 안 한 수준이 아냐. 사랑의 도주를 하는 쪽이 이상한 취급을 받았다고 해.”

에이든까지 거들고 나서자 레지나는 눈을 깜박였다.

두 사람의 말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런 세상이 상상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레지나의 반응에 엠버는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쿡쿡 웃더니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벨라의 뺨을 살짝 꼬집어 주며 말했다.

“코델리아 이모랑 유더 이모부가 시작하신 일이래.”

“두 분이서?”

“응, 두 분이 시작하신 일인데, 너도 알잖아? 두 분이 세기의 커플이신 거. 그래서 세일룬 왕국 사람들이 두 사람을 따라 사랑의 도주를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아예 전통이 된 거래.”

“와아.”

역시 유더 오빠랑 코델리아 언니는 대단해.

나도 언젠가 사랑의 도주를 떠나야지.

누구랑 갈지가 의문이지만.

그리고 보니 유리아는 잘 있을까?

엠버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잇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카의 얼굴이 떠오른 레지나였다.

유리아 어거스트 바이엘.

엠버와 에이든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실 레지나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조카님.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이 년 전이었는데 어떻게 지내려나.

‘빨리 보고 싶다.’

빨리.

하루라도 일찍.

“레지나? 무슨 생각해?”

“흥, 저녁에 뭘 먹을지 정도 생각하고 있었겠지.”

“아닌데, 다른 생각 했는데. 그보다 에이든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맨날 먹는 생각만 하는 돼지 같아?”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레지나가 마음이 상했다는 듯 눈을 흘겨 뜨며 말하자 에이든은 급격히 당황했고, 엠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레지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에이든이 아까 요리장한테 오늘 저녁 메뉴를 물어보고 왔거든. 레지나 좋아하는 걸로 해달라고 부탁도 하고. 그래서 그래.”

“그, 그런 적 없거든?”

더더욱 당황한 에이든이 소리치자 레지나는 바로 미간을 좁혔다.

“그런 적 없다는데?”

“부끄러워서 거짓말하는 거야. 에이든이 레지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렇지 벨라?”

엠버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묻자 벨라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레지나는 흐으응-거리며 놀리듯이 에이든을 보았다.

에이든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묵비권을 행사했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엠버의 품에 안겨 꾸벅꾸벅 졸던 레지나는 어느 순간 퍼뜩 고개를 들었고, 곤히 잠든 엠버의 품을 빠져나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왕도다.”

왕도.

세일룬 왕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발전한 도시.

“엠버! 에이든! 일어나 봐! 왕도야! 왕도!”

레지나는 일단 엠버를 가볍게 흔들어 깨운 뒤 에이든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왕도에…… 도착한…… 거야?”

대체로 우아했지만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는 우아하지 못한 엠버의 말에 바로 다시 고개를 끄덕인 레지나는 다시 잠들려는 에이든의 뺨을 찰싹찰싹 때려서 정신을 들게 했다.

“흥, 별것도 없구만. 바일룬보다 별로 크지도 않네.”

양쪽 뺨이 모두 발갛게 달아오른 에이든이 흥흥거렸지만 레지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솔직하지 못한 태도일 테니 말이다.

“레지나, 고마워. 덕분에 왕도에 입성하는 순간을 볼 수 있었어.”

엠버의 감사에 레지나는 헤헤헷 웃은 뒤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왕도.

핑크폭탄의 성지.

유더 오빠랑 코델리아 언니가 왕족들을 구하고 영웅이 된 도시.

레지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듯 가슴을 가볍게 움켜쥐며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북부의 귀족들 가운데서 왕도에 저택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는 그 극소수에 속했다.

‘본래는 유더 오빠랑 코델리아 언니의 저택이었다고 했지?’

왕도에서 공을 세운 두 사람을 치하하기 위해 왕족들이 내렸다는 저택.

두 사람이 사랑의 도주를 떠나 버리는 바람에 실제로 머문 적은 없지만 이러나저러나 해도 두 사람이 가진 첫 번째 집이었고, 상당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리아도 여기로 오겠지? 생각해 보니 그럼 유더 오빠랑 코델리아 언니도 오는 건가?’

세 사람을 생각하니 가슴의 두근거림이 자꾸만 커지는 레지나였다.

엠버는 그런 레지나를 보며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지었고, 에이든은 대놓고 흥흥거렸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쪽의 눈치는 제법 둔감한 레지나였기에 두 사람의 섭섭함을 바로 알아차리진 못하였다.

그리고 다시 반나절.

짐 풀기도 모두 끝나고 해질녘이 다가오는 시간.

저택 입구에 자리한 분수대에 앉아 ‘신성국’의 일행을 기다리던 레지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오늘 중에 도착할 거란 게일 오빠의 말을 듣고 쭉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이든 많이 삐친 것 같던데.’

평소에는 흥을 한 번만 하는데 생각해 보니 오늘은 흥흥흥 하고 세 번이나 했던 것 같다.

엠버도 한 번인가 흥 했던 것 같고.

어떻게 달래줘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레지나가 발걸음을 내디딘 때였다.

“레지나 고모.”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레지나는 순간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지만 잠깐뿐이었다.

마차는 오지 않았지만, 저 목소리는 분명 알고 있는 목소리였으니 말이다.

“유리아!”

크게 소리치며 돌아선 레지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그렸다.

정말로 유리아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아 어거스트 바이엘.

유델리아 신성국의 왕녀.

레지나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조카님.

나이는 이제 열한 살로 레지나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열 세 살인 레지나 자신보다 더 성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키가 컸어!’

아니, 키만 큰 게 아니었다.

고작 이 년 안 봤는데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레지나는 눈을 깜박이며 유리아를 보았다.

유리아는 굳이 따지자면 유더 오빠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여자가 된 유더 오빠라고 해야 할까?

하얗고 단정한 얼굴은 우아한 동시에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그러니까, 그러니까-

‘야, 야하다?’

야하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야릇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엠버가 보았다면 ‘전반적으로 도도한데 눈에 색기가 있네.’-라고 표현했겠지만 레지나에게는 아직 그 정도의 표현력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오빠랑 언니 닮아서 엄청 예쁜 얼굴과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파란 눈동자.

검고 긴 머리칼은 허리에 닿을 만치 길었고, 늘씬하면서도 날렵한 느낌이 드는 몸 역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옷.

드레스 대신 입은 승마복과 그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한 자루의 검.

“검? 유리아 요즘 검 배워?”

“응, 배우고 있어.”

레지나가 깜짝 놀라 묻자 유리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레지나는 다시 놀라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 뭔가 두근두근해.’

사람 홀리는 미소라고 해야 할까.

스칼렛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주 속이 시커먼 미소라고 했을 터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유리아의 미소에서 마이아를 떠올릴 바이엘 백작가의 사람들 역시 없었고 말이다.

“유더 오빠한테 배우는 거야?”

“아버지께도 배우지만…… 카마엘 님께 배우고 있어.”

“카마엘 님? 어, 그러니까 파라곤의 대영웅? 검귀?”

“응, 설화십이검을 배우고 있거든.”

“우와! 설화십이검!”

검귀 카마엘의 검술.

다시 한번 이 자리에 스칼렛이 있었다면 아직 어린 유리아에게서 묘한 색기가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설화십이검- 정확히는 극한의 힘 때문이라는 것을 언급했을 터였지만 여전히 자리에 없는 그녀였기에 레지나는 그저 우와우와 할 뿐이었다.

“아, 맞다. 유리아. 설마 혼자 온 거야?”

퍼뜩 정신을 차린 레지나가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유리아는 우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리아 언니랑 마이아 언니가 함께 왔어. 부모님은 잠시 들렀다 올 곳이 있어서 며칠 뒤에 오실 거고.”

달리아와 마이아.

수호의 천사와 미의 천사.

유리아의 대모인 두 사람.

“어, 두 분은 그럼 어디 계시는데?”

여전히 마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레지나의 물음에 유리아는 약간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빨리 오고 싶어서 중간부터 날아왔어.”

“날아서?”

“응, 날아서.”

그리 말하며 유리아가 살짝 어깨를 으쓱하자 등 뒤로 새하얀 빛의 날개가 펼쳐졌다.

“우와아.”

예쁘다. 진짜진짜 예쁘다.

유리아 진짜 천사.

레지나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감탄하자 뺨을 살짝 붉힌 유리아는 날개를 다시 거둔 뒤 레지나 쪽으로 다가섰다.

“언니들은 곧 도착할 거야. 먼저 들어가서 인사들 드리고 싶은데 안내 부탁해도 될까?”

“응? 응!”

사실 안내할 정도로 저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무튼 엠버나 에이든에게 데려가면 되겠지.

기운차게 답한 레지나는 유리아의 손을 덥석 잡았고, 유리아는 다시 조용한 미소를 지어 레지나의 뺨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럼 가자, 유리아.”

“응, 고모.”

예쁘게 답한 유리아는 레지나와 함께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흥, 여전히 작고 비리비리하네.”

“오빠,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해봤자 추해질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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