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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44화 (444/473)

엔딩메이커 443화

SS #36 레지나 바이엘(4)

“흥, 여전히 작고 비리비리하네.”

“오빠,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해봤자 추해질 뿐이야.”

엠버가 나직한 목소리로 작게 말하자 에이든은 움찔하는가 싶더니 자기가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너무 억지 같아서 뭔가 미묘했던 표정을 서둘러 고쳤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고, 사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에이든을 쳐다본 것은 레지나뿐이었고, 그나마도 잠시뿐이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이야, 유리아.”

“오랜만이야, 엠버 언니.”

엠버와 유리아가 서로 웃으며- 조금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엠버는 우아하게, 유리아는 아주 작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 모두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소녀들이었던 터라 웃는 얼굴들만 보면 화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레지나는 어쩐지 모를 서늘함- 아니, 싸늘함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

아까부터 묘하게 기분이 나빠 보이던 엠버와 어쩐지 모르게 자신과 단둘이 있었을 때와 달리 묘하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아.

‘서, 설마 나 때문인가?’

유리아는 몰라도 엠버가 삐진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으니까.

자기들이랑 안 있고 유리아 기다린다면서 쪼르르 달려 나갔다.

그러지 말고 같이 저택이나 돌아보자고 했지만 마찬가지로 거절하고 혼자 정문으로 향했다.

‘아니, 무슨 에이든이야?! 그런 걸로 삐지게?!’

더욱이 유리아는 무려 이 년 만에 보는 것이 아니던가.

레지나 자신의 나이는 이제 열세 살이었으니 인생의 1/6이나 되는 시간을 지난 끝에 겨우 만나게 된 유리아였다.

이 정도면 유리아를 우선해도 좀 이해해 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으으음…… 그치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해.’

레지나 자신도 엠버나 에이든이 갑자기 유리아를 더 챙기면 좀 섭섭할 것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섭섭한 것과 삐지는 것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존재했다.

생각해 보니 엠버는 유리아보다 무려 네 살이나 연상이 아니었던가.

유리아는 이제 열한 살이었으니 엠버는 유리아보다 무려 인생을 1/3이나 더 산 셈이었다.

“레지나, 아까부터 뭐 해?”

“레지나?”

“어? 어어어.”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찮은(?) 계산을 이어가던 레지나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엠버와 에이든과 유리아 셋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 그냥. 아무튼 오랜만이잖아? 다 친척들이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응?”

레지나가 모처럼 고모다운 얼굴로 조카들에게 말했지만, 정작 그 조카들은 딱히 레지나가 원하는 반응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레지나 고모,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맞아, 레지나. 그럼 마치 우리가 싸우기라도 한 것 같잖아.”

유리아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했고, 에이든은 언제나처럼 흥흥거렸다.

엠버는 여우짓(?)을 하는 유리아를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고 말이다.

‘우씨, 방금까지만 해도 막 서로 눈빛 공격하고 장난도 아니었으면서!’

하지만 여기서 니네 방금까지 분위기 안 좋았잖아!- 해봐야 고모로서의 위엄이 살기는커녕 분위기만 정말 이상해질 따름이었기에 레지나는 인내하기로 하였다.

생각해 보면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어른인 레지나 자신이 아니던가.

‘후, 그래.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머리칼을 쓸어 올린 레지나는 훗 하고 웃었고, 에이든은 미간을 좁혔다.

“고모, 약이라도 먹었어?”

“아니거든? 이건 어른의 미소거든?”

“열은 없는데.”

에이든이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자 레지나는 얼른 치우라는 듯 으르렁거렸고, 엠버와 유리아는 다시 서로를 돌아보았다.

기본적으로 게일을 닮기는 했지만 황금야차 아델리아의 피 역시도 물려받은 엠버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유더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유리아.

엠버는 우아한 귀족 영애였고, 유리아는 소위 말하는 쿨뷰티 계열의 인형 같은 소녀였다.

약간의 언짢음이 엿보이는 엠버의 표정과 차분하고 태연한- 그래서 어쩐지 모르게 보는 사람에게 화를 유발하는 유리아의 표정.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한 그 순간이었다.

“잘들 쉬고 있나.”

문이 벌컥 열리며 붉고 거대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 체이스 백작.

붉은폭풍 아더 체이스.

“할아버지!”

체이스 백작이 등장한 그 순간이었다.

유리아는 방금까지의 차가운 표정은 전부 연기라도 된 것처럼 환한- 그야말로 상큼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깜찍한 얼굴로 체이스 백작에게 달려가 그대로 꼭 하고 백작의 허리를 안았다.

“정말정말 보고 싶었어요!”

약간 혀 짧은 목소리까지 내며 유리아는 체이스 백작의 허리에 뺨을 비볐고, 엠버와 에이든과 레지나는 유리아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저거?’

에이든은 너무 놀라 생각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엠버는 아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체이스 백작을 보았고, 엄격 근엄 진지한 가운데 가까스로 미소를 억누르는 것 같은 체이스 백작의 표정에서 우려했던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흥, 여전히 작고 귀엽구나.”

흥흥거리며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체이스 백작은 다시 잠깐이지만 흐뭇하면서도 흐물흐물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유리아가 뺨을 부풀리더니 살짝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아닌데, 아닌데. 많이 컸는데. 유리아는 작고 귀엽지 않거든요?”

흥흥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유리아에게 적대적이던 에이든조차도 순간 뺨을 붉힐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놀란 것은 엠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리아의 애교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유리아가 사용한 수법 때문이었다.

‘3인칭화!’

어느덧 열다섯이 되어버린 엠버 자신은 더 이상 쓸 수 없는, 차마 사용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비장의 기술.

하지만 유리아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이었다.

외모만 보면 레지나보다도 성숙해 보였지만, 이러나저러나 열한 살인 것은 분명했고, 그러니 3인칭화라는 부끄러운 기술을 서슴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3인칭화의 효과는 굉장했다.

“커흠, 흠.”

체이스 백작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표정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사이 숨길 수 없는 진한 미소가 드러났고, 엠버와 레지나가 그것을 포착한 순간 유리아는 단순 포착을 넘어 추가타를 넣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할아버지 정말 좋아요! 유리아가 할아버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왕도로 오는 내내 심장이 두근두근했다구요!”

과했다.

이번에는 조금 과했다.

하지만 그건 범인들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스 백작은 할아버지- 그것도 손주들을 엄청 아끼는 할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흐, 흥. 숙녀다운 인내심이 아직 부족하구나.”

바로 흥흥거리지 못하고 흐, 흥 하고 끊은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유리아는 체이스 백작의 지적에 또다시 ‘아닌데, 아닌데, 유리아는 숙녀인데’ 같은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유더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유리아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치만 할아버지가 너무 좋은걸요. 유리아는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요.”

그리고 다시 꼭 하고 체이스 백작의 허리를 안는 유리아.

그리고 그런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해하는 체이스 백작.

“흥, 녀석. 그러고 보니 오다 주운 것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택 복도를 걷다가 저런 것들을 줍는 것일까 의구심이 마구 샘솟는 물건들을 잔뜩 꺼낸 체이스 백작은 늘 그랬던 것처럼 유리아의 품 안 가득 선물을 안겨주었다.

“사이좋게들 놀거라.”

“네, 할아버지.”

유리아가 꾸벅 배꼽 인사를 하자 체이스 백작은 다시 흥 소리를 낸 뒤 방을 나섰다.

흥이 한 번이니 몹시도 흐뭇하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다시 1초, 2초, 3초.

유리아의 표정이 다시 처음의 쿨뷰티- 차가운 도시 소녀로 돌아가자 레지나와 에이든은 눈을 껌벅였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엠버는 달랐다.

그녀는 완전히 꼬리 셋 달린 여우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유리아를 째려보았고, 유리아는 그런 엠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 필요할 땐 해야 한다고. 그리고…….”

말끝을 흐린 유리아는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뜨더니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정말 좋으니까. 레지나도, 엠버도, 에이든도 모두 정말 좋아해.”

저택의 정문에서 레지나가 보았던 바로 그 화사한 미소였다.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미소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레지나와 에이든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아니, 둘뿐만 아니라 엠버조차도 뺨을 붉힐 정도로 맑고 순수한, 그러면서도 사랑스러운 유리아의 미소였다.

물론 스칼렛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굴을 붉히면서도 ‘저저저! 속이 시커먼 미소를 봐! 블랙망토 딸이 분명하다니까!’- 같은 소리를 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유더와 유리아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유리아에게는 코델리아의 피 역시 흐른다는 사실이었다.

유리아의 미소는 정말로 순수했고, 모두를 좋아한다는 말 역시 사실이었다.

“흥, 사촌은 사촌이니까.”

엠버가 입술을 삐쭉이며 작게 말하자 유리아는 더더욱 맑게 웃었고, 레지나는 새삼 엠버의 몸에도 체이스 백작가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유리아는 검술을 배우는 거야? 마법은 안 배우고?”

레지나를 인형처럼 끌어안은 엠버의 물음에 유리아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답했다.

“마법도 배우긴 하는데 검술이 더 좋아. 엠버 언니는 마법이지? 에이든 오빠도 그렇고.”

“우린 마법이 적성에 맞으니까. 바람의 검은 레지나 고모가 계승할 거고.”

쌍둥이 모두가 마법을 택하자 제법 시무룩한 모습을 보인 적도 있는 게일이었지만 잠깐일 뿐이었다.

엠버의 말마따나 바람의 검을 계승할 레지나가 있었으니 말이다.

“나도 나중에 십검호가 될 거야.”

레지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포부를 밝히자 엠버는 짝짝짝 박수를 쳤고, 에이든은 언제나처럼 흥흥거렸다.

그런데 유리아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응? 유리아?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엄마가- 그러니까 코델리아가 이상하게 십검호를 싫어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으니까.

-잊지 마렴, 유리아. 십검호를 만나면 일단 의심부터 하는 거란다. 엄마 말 알았지? 이건 통계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니까 꼭 유의하렴.

-네, 엄마. 그렇게 할게요.

잠시 엄마와의 대화를 떠올린 유리아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마이아 님과 달리아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레지나의 전속 메이드인 루나가 흥분한 기색을 채 감주치 못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건 엠버와 에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호의 천사 달리아와 미의 천사 마이아.

신성국의 유력 상품 가운데 하나인 ‘천사돌’의 시초격인 두 사람!

집에 마이아의 화보집은 물론이고 피규어까지 갖고 있는 에이든은 서둘러 옷매무시를 가다듬었고, 레지나와 엠버 역시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졌다.

두 사람을 매일 보는 유리아는 홀로 태연했고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저택의 응접실.

“체이스 백작 각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이제는 긴 머리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수호의 천사- 달리아가 예를 표하자 옆에 자리한 마이아 역시 허리를 숙이며 함께 예를 표했고, 체이스 백작은 언제나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흥, 건강한 것 같구나.”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달리아는 빙긋 웃었고, 마이아는 언제나처럼 아주 옅은 미소만 머금은 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자태에 레지나는 순간 유리아의 평소 표정이 누구를 닮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베이스는 마이아 님이구나!’

미의 천사 마이아는 유리아의 대모인 동시에 유모이기도 했으니까.

‘새삼스럽지만 진짜 대단하네.’

대륙을 뒤흔든 천사돌이 매일같이 돌봐주는 아가씨가 유리아라니.

레지나 자신도 나름 검성의 딸인 동시에 야생신의 딸이며 본인 스스로도 야생신이라는 엄청난 스펙의 소유자였지만 아무래도 유리아에게는 좀 밀리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는 교황이자 플레이아데스의 수호신인 동시에 스스로 신성을 손에 넣은 신이었고, 어머니는 천계의 대천사인 동시에 여신의 화신인 동시에 진짜 여신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냥 신이네, 신.’

유리아 진짜 천사.

진짜 신.

레지나가 그렇게 잠시 딴생각에 빠져들 때였다.

“백작 각하, 소(小) 흐레스벨그 백작이 인사드리러 온다고 합니다.”

“흥, 그래야지.”

마이아와 달리아가 오는 길에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마차와 조우했는데, 저택에 짐을 푼 뒤 인사하러 오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소 흐레스벨그 백작.

루카스 흐레스벨그.

세일룬 왕국 최강을 자랑하는 하늘의 검성.

달리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레지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유리아도 오랜만이었지만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을 보는 것 역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군단- 아니, 아이들이 저택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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