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44화
SS #36 레지나 바이엘(5)
바이엘, 체이스, 흐레스벨그.
북부삼강이라 불리는 세 가문 가운데 일각을 차지하는 흐레스벨그 백작가에는 남다른 점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 무력.
북부 야생의 땅과 관계가 개선되어 무역까지 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렇다 하여 북부를 지키던 갈까마귀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여전히 변경백이었고, 백작가의 휘하에는 썬더둠 요새와 수만에 달하는 군사들이 그대로 자리했다.
더욱이 이들을 이끄는 소 흐레스벨그 백작- 루카스 흘레스벨그는 세일룬 왕국 최강의 검사이자 십검호의 필두인 하늘의 검성이었으니, 단순히 무력만을 놓고 본다면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북부삼강 가운데서도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둘째, 맹주.
북부12가문의 맹주는 예나 지금이나 흐레스벨그 백작가였다.
체이스 백작가와 바이엘 백작가가 지난 십 년 사이에 실로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흐레스벨그 백작가 역시 야생의 땅과의 평화, 그에 따라 새로이 개척된 제국과의 교역로 등으로 크게 발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체이스 백작가와 바이엘 백작가 모두와 매우 양호한 관계를 유지 중인 터라 북부12가문의 맹주로서의 지위는 무척이나 굳건하였다.
셋째, 다산.
대대로 손이 귀한 흐레스벨그 백작가였지만 이번 대는 아니었다.
마치 막혀 있던 혈이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문의 아이들이 순풍순풍 태어났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소 흐레스벨그 백작- 루카스 흐레스벨그에게 ‘북부의 정력왕’이란 별칭이 붙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흐레스벨그 군단’이라 불리고.”
흐레스벨그 군단.
엠버의 입에서 나온 별칭에 레지나는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잘 어울리는 별칭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짜 많으니까.’
북부12가문은 대부분 천사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 손이 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보통 하나에서 둘.
정말 많아도 셋 낳는 게 보통인 와중에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다시 어설픈 웃음을 흘린 레지나는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앉아 있던 유리아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다.
“온다.”
“응? 설마 흐레스벨그 백작가?”
“응, 오고 있어.”
유리아가 마이아를 연상케 하는 차분하면서도 청아한 얼굴로 답하자 엠버와 에이든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일행은 어디 언덕 같은 곳에라도 올라 흐레스벨그 백작가가 언제 오나 하고 관찰 중인 게 아니라 저택 한쪽에 자리한 방에 앉아 보드게임을 하던 중이었으니 말이다.
“유리아, 어떻게 알아? 마법 같은 거라도 쓴 거야?”
“아니, 그냥 감으로.”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감이라니.
하지만 레지나는 어쩐지 유리아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더 오빠도 자주 그러지 않았던가.
코델리아 언니의 감은 짐승 수준이라고.
‘물론 그때마다 진짜 짐승은 유더 오빠라고 코델리아 언니가 뭐라뭐라 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좀 이상한 이야기였다.
유더 오빠가 왜 짐승이라는 걸까.
오빠는 엄청 멋지고 도시적인 남자인데.
어찌 되었든 다른 누구도 아닌 코델리아 언니의 딸인 유리아였다.
그런 유리아가 감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니 어쩐지 정말로 그럴 것만 같았다.
“어, 그럼 마중 나갈 준비 해야 하나?”
“아니, 잠깐. 그냥 감이라는데 마중을 나간다고?”
에이든이 묻자 엠버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리아는 무어라 논리를 펼치는 대신 레지나를 보며 말했다.
“레지나 고모, 난 마중 나갈 건데 같이 갈 거야?”
“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레지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엠버와 에이든이 ‘우리야 쟤야? 응? 우리야 쟤야.’-같은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 어떡하지.’
심정적으로는 어쩐지 모르게 유리아 말이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유리아 편을 들면 엠버랑 에이든이 또 삐질 것만 같았다.
‘에이든이야 툭 하면 삐지니까 상관없지만 엠버는 삐지면 진짜 오래가는데. 달래기도 어렵구.’
하지만 유리아는 어떨까.
여기서 엠버랑 에이든 편을 들면 유리아가 삐지는 게 아닐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레지나의 고민을 단박에 해결해 줄 구원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아가씨. 흐레스벨그 백작가가 거의 도착했다고 해요.”
전속 메이드 루나의 등장에 레지나는 마음속으로나마 환호했고, 엠버와 에이든은 깜짝 놀라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유리아는 여전히 청아한 얼굴로- 하지만 스칼렛이 보았다면 속이 시커멓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 같은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고 말이다.
“아무튼 빨리 가자. 인사해야지.”
“으응.”
레지나의 재촉에 엠버와 에이든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유리아는 부드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잠시 후, 저택의 입구에 선 레지나는 커다란 마차에서 줄줄이 내려서는 ‘흐레스벨그 군단’의 모습에 어설픈 미소를 흘렸다.
* * *
비비안 흐레스벨그.
12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장녀.
어머니인 스칼렛 흐레스벨그를 꼭 빼닮은 붉은 머리칼의 소녀 옆에는 비비안과 대비되는 검은 머리칼의 작은 소녀가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안젤라 흐레스벨그.
4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막내.
어린 동생을 새삼 돌아본 비비안은 눈매를 날카로이 하더니 우글우글거리는 동생들에게 날카롭고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얌전히 있어. 월터, 쌍둥이들 특히 좀 챙기고.”
“응, 누나.”
똑 부러진 비비안의 말에 바로 답한 것은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장남이자 둘째인 월터 흐레스벨그였다.
비비안과 겨우 몇 달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그렇기에 12살인 건 똑같은 그였지만 겉모습만 보면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당장 또래보다 성숙한 편에 속하는 비비안보다도 머리 두 개는 더 클 정도로 키가 큰데다가 어깨 또한 넓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금발과 남방 가문 특유의 옅은 갈색 피부를 가진 소년은 아버지를 닮아 무척이나 성실한 성격이었다.
누나의 말에 무어라 토를 다는 대신 알았다고 답한 뒤 엄격한 눈으로 동생들을 돌아보았다.
“번호.”
“1.”
“2.”
“3.”
한 명씩 답하며 도열하는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았다.
비비안 흐레스벨그.
12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장녀, 스칼렛 소생.
월터 흐레스벨그.
12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장남, 카이사 소생.
윌리엄 흐레스벨그.
11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차남, 카이사 소생.
스티븐 흐레스벨그와 랜돌프 흐레스벨그.
10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삼남과 사남, 카이사 소생.
쌍둥이.
마커스 흐레스벨그
8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오남, 카이사 소생.
빅터 흐레스벨그
7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육남, 스칼렛 소생.
제이스 흐레스벨그
6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칠남, 카이사 소생.
안젤라 흐레스벨그
4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차녀이자 막내, 카이사 소생.
7남 2녀.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일렬로 도열하니 그게 또 장관이었다.
더욱이 장녀인 비비안의 뒤를 따라 쪼르르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어미 따라 이동하는 새끼 오리들 같아서 무척이나 귀여웠고 말이다.
‘물론 윌터랑 윌리엄이랑 쌍둥이는 안 귀엽지만.’
네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들 너무 컸으니까.
어찌나 키와 덩치들이 좋은지 열다섯 살인 에이든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클 지경이었다.
당연히 비비안보다는 훨씬 더 컸고 말이다.
하지만 비비안은 흐레스벨그 군단의 군단장이었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스칼렛의 딸이었다.
옆에서 슥 보기만 해도 다들 비비안의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대 체이스 백작님께 인사드립니다.”
“인사드려요.”
비비안이 선창하자 월터를 비롯한 나머지 아이들이 후창하며 예를 표했고, 체이스 백작은 흐뭇함과 부러움이 숨겨진 엄격한 얼굴로 아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스 백작이 과거에 꿈꾸던 광경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체이스 백작은 약간의 무례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메시지 마법을 사용하였다.
[자네, 혹시 비결이라도 있나?]
머릿속에 들려온 체이스 백작의 물음에 하늘의 검성- 루카스 흐레스벨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전음으로 답했다.
[그,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것 같습…… 니다.]
그냥 열심히.
최선을 다해.
교과서적인 루카스의 대답에 약간의 실망감을 느낀 체이스 백작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 성격에 비밀을 숨길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정말 열심히 한 결과 같았기 때문이다.
“들어들 와라. 차를 내줄 테니.”
“감사합니다.”
세일룬 왕국 최강의 검사로 이름 높은 하늘의 검성이었지만 막상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에 불과했다.
더욱이 무척이나 동안이었기에 이십 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건 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십검호의 일원이자 세일룬 왕국에서 유일한 여자 검성인 ‘검후 스칼렛’과 과거 남부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바다의 신수 카이사.
이미 아이를 몇이나 낳은 두 사람이었지만 겉모습만 보면 전혀 아니었다.
특히 스칼렛의 경우엔 비비안이 또래보다 성숙한 것도 있어서인지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모녀가 아니라 자매로 보일 따름이었다.
루카스가 체이스 백작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뒤를 따르자 스칼렛은 얼른 아이들 쪽을- 정확히는 비비안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애들 잘 부탁할게.]
‘네, 엄마.’
비비안이 소리 없이 답하자 독순술로 대답을 확인한 스칼렛은 빙긋 웃은 뒤 루카스를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자제분들은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안내 감사해요.”
안내를 맡은 메이드에게 웃으며 말한 비비안은 다시 월터를 돌아보았고, 월터는 군인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동생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척척척.
메이드를 따라 마치 군대처럼 이동하는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을 바라본 레지나는 언제나처럼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아무튼…… 우리도 갈까?”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과 인사도 하고 같이 놀기도 해야 했으니까.
엠버의 말에 레지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 뒤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잘 지냈어?”
“동생들 보살피는 게 엄청 빡센 거 빼고는 잘 지냈어.”
아이들의 방.
체이스 백작은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이 무얼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아이들 방에 특급 도우미를 파견하였다.
마이아와 달리아.
두 천사의 등장에 아이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평소보다 훨씬 더 고도의 집중력과 얌전함을 발휘하였고, 덕분에 여유가 생긴 비비안은 한 걸음 물러서서 레지나 일행과 잡담을 나눌 수 있었다.
‘비비안은 언니가 아니라 엄마 같아.’
레지나 자신의 엄마가 아니라 흐레스벨그 백작가 아이들의 작은 엄마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더욱이 외모가 성숙해서 그런지 목을 주무르며 애들 키우기 빡세다고 말하는 비비안의 모습은 육아에 지친 젊은 엄마 그 자체였다.
“말들 잘 듣는 거 같던데 속이라도 썩여?”
동생이 없는 무남독녀이기 때문일까, 유리아가 평소보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묻자 비비안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대체로 다 잘 듣기는 하는데 쌍둥이가 가끔. 그래도 월터가 잘 도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월터 없었으면 두 배…… 아니, 세 배로 힘들었을 테니까. 남자애들이란 참…….”
고개를 흔들며 말하는 모습이 도저히 12살짜리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월터도 무슨 동생이 아니라 애 키우는 거 잘 도와주는 남편처럼 느껴졌고 말이다.
물론 진짜 애를 키우는 것은 루카스와 스칼렛과 카이사, 그리고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메이드들이겠지만 그렇다고 장녀인 비비안이 고생을 안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그나저나 마이아 님은 진짜 예쁘시네. 우리 엄마도 어디 가서 안 빠지는 미모인데, 솔직히 마이아 님한테는 좀 밀리는 것 같아.”
“흐흥.”
비비안의 말에 유리아가 마치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살짝 흥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아도 역시 우리 핏줄이구나.’
정확히는 체이스 백작가의.
방금 모습은 에이든이나 코델리아 언니가 종종 보여주는 바로 그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들 이제 보니 책을 한 권씩 안고 있네?”
“어? 어어. 며칠 전에 빌트바인 영웅전 신간 나왔거든.”
비비안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자 유리아와 레지나는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이 다들 빌트바인 영웅전 마니아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흐레스벨그 백작령에는 빌트바인 랜드도 있다던데. 언제 한번 가보고 싶다.’
꿈과 희망이 넘쳐 나는 놀이공원이라나.
“너희는 빌트바인 영웅전 안 읽어?”
“어? 어어. 읽긴 읽는데 막 바로바로 찾아보진 않아.”
“진짜로? 신기하네.”
비비안이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하자 레지나는 어쩐지 모르게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유리아 쪽을 돌아보았다.
새삼 유리아도 빌트바인 영웅전을 읽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도 읽기는 읽어. 스승님이 좋아하시거든.”
“검귀께서?”
“응, 정말 좋아하셔서 팬픽……·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쓰시는 것도 본 적이 있어.”
유리아의 말에 레지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검귀가 손수 팬픽을 작성할 정도라니.
빌트바인 영웅전은 사실 레지나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책인 게 아닐까?
“궁금하네. 검귀께서 쓰신 팬픽이라니. 언젠가 한번 보고 싶다.”
비비안의 말에 레지나는 이번에는 정말로 동의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라곤의 대영웅들 중에서도 특히 차갑고 고독한 분위기로 유명한 검귀와 영웅소설의 팬픽을 쓰는 빅팬 사이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미지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가 얼마나 오갔을까.
레지나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작게 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비비안. 비비안도 무도회 나갈 거지?”
“건국기념 무도회?”
“응, 건국기념 무도회.”
“당연히 나가겠지? 이래 봬도 내가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장녀니까.”
“그럼 파트너는 정했어?”
레지나가 모처럼 소녀다운 질문을 하자 비비안은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파트너는 없어. 그리고 사실 우리 이제 겨우 열두어 살이잖아? 파트너 데리고 무도회 갈 나이는 아직 아니지. 약혼자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그런가?”
“보통은 그래. 왜, 레지나는 같이 가고 싶은 남자라도 있어?”
“나? 아, 아니. 없는데.”
레지나가 당황해서 눈을 깜박이자 비비안은 귀엽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치, 그럼 비비안은? 비비안은 없어?”
“나도 없어. 애석하게도 동생들 보살피느라 바빠서. 주변에 멋진 남자도 딱히 없고.”
열두 살짜리 아이의 발언치고는 꽤 어폐가 있어 보였지만 어차피 이야기를 듣는 레지나는 열세 살이었고, 유리아는 열한 살이었다.
그랬기에 레지나는 나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있잖아, 에이든은 어때?”
“에이든? 네 조카?”
“응, 우리 조카님. 우리 조카님이지만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도 제법 좋고, 상냥하고…….”
“응응,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래도 싫어.”
“왜?”
“걔 시스콘이잖아.”
“어?”
시 뭐?
레지나가 눈을 깜박이며 묻자 비비안은 휘휘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시스콘은 월터…… 그리고 나머지 동생들만으로 충분해. 난 여자 형제 없는 남자를 만날 거야.”
“으응.”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인 레지나는 비비안 대신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유리아는 파트너 없어?”
“없어. 하지만…… 어쩌면 생길지도 몰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레지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비비안 역시 관심이 있다는 듯 유리아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유리아는 특유의 신비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딱히 정해진 건 없어. 그냥 감이야.”
“또?”
“응, 또. 그리고 아마 레지나의 파트너도 생길 거야.”
“응? 나?”
“응, 레지나의.”
유리아가 예쁘게 답하자 레지나는 당혹스러움과 기대감이 섞인 얼굴로 두근대기 시작한 가슴을 움켜쥐었고, 비비안은 제법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코델리아의 감은 짐승의 감이라 무시할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누가 되었든 무도회에서 유리아의 파트너가 나타난다면…… 진짜 대륙급 이슈겠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아였으니까.
여신의 화신과 교황 사이에서 태어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아이.
세일룬 왕가는 물론이고 아르곤 황가조차도 함부로 혼사를 청할 수 없는 미친 가문의 하나뿐인 외동딸.
그런 아이의 무도회 파트너가 등장한다?
‘진짜 나타나면 재미있겠네.’
월터는 안 되려나?
월터도 멋지고 잘생기고 착하고 아무튼 최고인데.
키도 크고, 유리아랑 나이도 잘 어울리고.
응응, 내 동생이지만 정말 멋진 월터니까.
에이든에게 시스콘 운운했지만 정작 본인이야말로 중증의 브라콘인 비비안이었다.
‘레지나의 파트너도 궁금하네.’
유리아가 워낙에 거물이라 그렇지 사실 거물인 것은 레지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유리아와 레지나의 파트너.
정말 나타난다면 누구일까.
누구 정도 되어야 두 사람에게 어울릴 수 있을까.
‘뭐, 나는 아마 그냥 월터랑 추겠지만.’
사실 월터보다 멋진 녀석이 있을지도 의문이고.
다시 한번 브라콘 끼를 발휘한 비비안은 여전히 두근두근하고 있는 레지나의 뺨을 꼬집으며 동생들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틀 뒤 오후.
건국기념회를 닷새 앞둔 왕도에 새로운 얼굴들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