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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46화 (446/473)

엔딩메이커 445화

SS #36 레지나 바이엘(6)

왕도에서의 매일은 레지나에게 있어서는 축제나 다름이 없었다.

평소에는 보지 못하는 친구들과 하루 종일 놀려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용돈도 받고!’

북부의 부를 쓸어 담고 있는 바이엘 백작가였지만 대 바이엘 백작도, 실질적인 가주인 소 바이엘 백작도 근면 성실한 무인이었던 터라 레지나 역시도 자연스럽게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용돈도 딱 필요한 정도만 받다 보니 평소에는 용돈 기입장까지 써가며 효율적인 소비를 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며 아델리아가 용돈을 잔뜩 줬기 때문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스칼렛이 ‘세상에 어떤 귀족이 바이엘을 무시할 수 있냐’며 황당해했지만 아델리아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바이엘이기 때문이야.

명가로 이름 높은 바이엘 백작가의 영애인 레지나가 돈 아껴야 한다며 용돈 기입장 적고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는가.

청렴하다고 칭찬하는 게 아니라 바이엘 백작이 째째하네부터 시작해서 있는 놈들이 더한다, 바이엘 백작부인이 늦둥이를 괄시한다 등등 별의별 이상한 소문이 나돌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건국기념회니까. 모처럼의 왕도고, 모처럼의 친구들이니까 재미있게 놀렴.

아델리아에게 있어 레지나는 딸뻘인 아가씨였고, 레지나에게 있어 아델리아는 작은어머니나 다름이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용돈 주머니를 내미는 아델리아에게 기운차게 답한 레지나는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행복한 것은 레지나만이 아니었다.

-모처럼 친구들 만난 거잖아? 동생들은 나한테 맡기고 누나는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아.

월터 흐레스벨그.

누나랑 같이 놀고 싶다며 칭얼대는 동생들을 제지하며 그가 꺼낸 말에 비비안은 감동하고 또 감동했다.

-있잖아, 있잖아. 우리 월터 진짜 멋있지 않아?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크고, 성격도 너무너무 좋고, 검술도 뛰어나고, 진짜 최고야, 최고.

-평소에도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좋은데. 가끔은 동생이 아니라 오빠가 있는 것 같다니까?

-흐레스벨그령 근방에서는 벌써부터 인기가 좋아. 하, 진짜…… 나중에 약혼녀나 여자 친구 데려오면 내가 면접 보고 시험도 볼 거야.

-후…… 우리 월터. 월터랑도 놀러 다니고 싶다.

-덩치는 산만 해도 여전히 귀엽다니까? 잠자기 전에 뺨에 키스해 주면 막 부끄러워하는데 그 와중에 어린애처럼 웃는 건 또 귀엽고.

-내가 우리 월터가 착한 어린이상 받았을 때 이야기 해줬던가?

-아, 진짜! 그만 좀 해! 이 브라콘 같으니! 넌 에이든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어!

쭉 비비안이다가 마지막만 레지나.

사실 레지나도 처음에는 참으려 했다.

제3자의 눈으로 봐도 훈훈한 월터의 마음 씀씀이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비비안이랑 놀러 갈 수도 있었고.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아까부터 월터 이야기밖에 안 하는 거 알아? 내, 내가 월터 속옷이 몇 종류고, 무슨무슨 색이 있는지를 대체 왜 알아야 하는데!”

“아니, 그보다 비비안이 그걸 알고 있는 게 이상한 게 아닐까.”

레지나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소리치자 조용히 있던 유리아가 날카로운 찌르기를 첨가했다.

하지만 비비안은 얼굴은 붉힐지언정 제법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흥, 그야 난 누나잖아. 이 정도는 보통이지.”

“아닌데, 절대로 보통 아닌데, 지금 완전 이상한 건데.”

“열 살도 넘었는데 동생이랑 같이 목욕하는 건 좀…… 이상하긴 하지.”

유리아가 이번에도 상식적인 발언을 하자 레지나 역시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해를 연발했다.

하지만 비비안은 굴하지 않고 다시 흥흥거리며 말했다.

“우리 집은 온 가족이 다 같이 목욕을 한단 말이야.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집에 온천도 있어. 가족끼린데 뭐가 어때서. 레지나 너도 바이엘 백작님이랑 같이 목욕하고 그랬잖아.”

“그거야 어릴 때니까!”

“흥, 지금도 어리거든?”

“으으…… 말이 안 통해. 벽이랑 말하는 기분이야.”

레지나가 좀 도와달라는 눈으로 유리아를 돌아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계산이 빠른 유리아는 이미 진즉에 대화를 포기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몸은 이 자리에 있는데 정신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해야 할까?

비비안 역시 이 사실을 인지했는지 유리아는 내버려 두고 오직 레지나에게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아무튼 우리 월터가 잘생기고 멋지고 착하고 최고인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아우…… 우씨. 사실이니까 부정도 못 하겠네.”

“흐흐흥, 드디어 인정했구나. 우리 월터가 최고라는 걸.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으니까 레지나 너 정도면 약혼녀 후보에 입후보하는 걸 허락해 줄게.”

“아니, 괜찮아. 사양할게. 그냥 비비안 네가 월터랑 약혼하고 결혼하고 다 해.”

지쳤다는 투로 고개를 내저은 레지나는 ‘차라리 다른 동생들 이야기를 꺼내면 어떨까?’라는 역발상을 떠올렸고, 실행에 옮긴 뒤 3분 만에 스스로의 결정을 후회했다.

‘비비안 완전 팔불출 수다쟁이!’

나머지 동생들 이야기는 월터 정도로 길고 장황하며 애정이 넘쳐 나지는 않았지만 레지나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비비안에게 동생이 무려 여덟 명이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스칼렛과 루카스의 면모를 동시에 이어받은 비비안이다 보니 동생들 사랑도 넘쳤고 동생들 이야기도 끝이 없었다.

“다 왔다.”

레지나가 반쯤 울면서 안젤라의 귀여움과 그런 안젤라를 잘 돌봐주는 월터의 멋짐에 대한 강론을 듣고 있을 때.

창밖을 바라보며 홀로 도도히 있던 유리아가 귀에 꽂고 있던 마도구- 이어폰을 빼며 말하자 레지나는 헉 소리를 내며 일어나 마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진짜다! 진짜 다 왔어! 해방이야! 해방!”

“칫, 아직 월터의 첫 키스 이야기가 남았는데.”

“애기 때 누나랑 한 뽀뽀 같은 건 안 궁금해! 하나도 안 로맨틱하고! 그건 노카운트야!”

“레지나 고모는 역시 성실하네.”

레지나, 비비안, 유리아.

저 답 없는 중증 브라콘 이야기를 전부 다 들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상식적인 답변까지 해주다니.

레지나는 역시 착하고 성실해.

바이엘 백작가의 사람다워.

작게 감탄한 유리아는 차분히 마차 문을 열었고, 레지나는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해서 브라콘 지옥 마차를 탈출했다.

“흥, 아쉽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체이스 백작가 사람처럼 흥흥거린 비비안은 마차에서 내려 레지나 옆에 섰다.

세 사람이 자리한 곳은 왕도의 시가지에 자리한 커다란 건물 앞이었는데, 이 건물의 주인과 만날 약속이 잡혀 있었다.

“아저씨! 저 왔어요!”

“오, 비비안 아가씨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비안이 회장실 문을 벌컥 열며 활기차게 외치자 안에 자리하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똑같이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중년남의 이름은 주페.

이렇게만 설명하고 넘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 못 할 남자의 정체는 바로 왕도의 어둠을 주름잡는 ‘푸른 달’의 길드마스터이자 로그 마스터의 빅팬이며, 십 년 전에 드디어 비서이자 2인자였던 재니퍼와 결혼한 자였다.

비비안이 굳이 친구들까지 데리고 주페를 만나러 온 이유는 단순했다.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같이 성지순례를 나서보죠.”

“좋아요!”

핑크폭탄 성지순례.

전대 로그 마스터 핑크폭탄이 왕도에서 활약한 곳들을 돌아보며 마음속의 팬심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더욱 성장시키는 뜻깊은 이벤트.

빌트바인 영웅전의 등장인물들 다음으로 핑크폭탄을 좋아하는 비비안은 집에 핑크폭탄 코스튬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핑크폭탄에 진심인 소녀였다.

“우리 엄마는 핑크폭탄 이야기만 나오면 질색을 한단 말이지.”

“흐흐, 스칼렛 님께는 라이벌이셨으니까요.”

스칼렛이 당대의 로그 마스터라는 사실은 당연히 비밀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칼렛이 차기 로그 마스터로 키우고 있는 비비안 역시 스칼렛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말이다.

‘핑크폭탄이 누군지도 알려주시면 좋을 텐데.’

전대 로그 마스터인 핑크폭탄과 당대 로그 마스터인 스칼렛 사이에 벌어진 ‘밤의 결투’라든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았지만 스칼렛은 절대 핑크폭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비비안이 동생들까지 동원해 가며 졸랐음에도 말이다.

-애당초 핑크폭탄 동화책까지 나돌고 있는 게 다 블랙망토 그 속이 새카만 놈 때문이야.

언젠가 스칼렛이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가슴을 두드리며 꺼냈던 말.

‘어머니도 진짜로 핑크폭탄이랑 블랙망토를 싫어하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랄까, 애증이라고 할까? 블랙망토의 경우엔 ‘증’ 쪽이 훨씬 더 강한 것 같았지만.

어찌 되었든 핑크폭탄 동화책은 실존했고, 인기 또한 매우 많았기에 레지나와 유리아 역시 어릴 때부터 보아온 핑크폭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 부모님들은 어떠셔? 핑크폭탄 싫어하셔?”

“응? 우리 부모님은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느낌?”

레지나가 먼저 답하자 비비안은 ‘너는?’ 하는 눈으로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리아는 대답하기에 앞서 몇 년 전에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봐봐, 핑크폭탄은 소설 주인공 이름이 맞지?

-그래, 맞아요. 맞아. 소설 주인공이에요. 우리 집 사기꾼이 또 거짓말을 사실로 만들어 버렸어요.

평소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말씀하시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못 말린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웃음을 흘리시던 어머니.

“유리아?”

“응? 아, 우리 집은 좋아하시는 편이야. 집에 핑크폭탄 코스튬도 있고.”

“진짜? 완전 부럽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진심으로 부러운지 파란 눈동자에서 부러움이 뚝뚝 흐를 것 같은 비비안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성지순례를 마친 일행은 비비안의 동생들에게 줄 과자를 잔뜩 산 뒤 숙소로 돌아갔다.

* * *

세일룬 왕국의 오랜 전통인 검의 연회는 이번 해에도 어김없이 개최되었다.

“오빠! 나한테도 초대장이 왔어!”

스펜서 공작가의 문장이 박힌 초대장을 들고 게일에게 달려온 레지나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고, 게일은 웃으며 그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검의 연회에 초대받은 것은 레지나만이 아니었다.

북부의 최고 유망주로 손꼽히는 비비안과 월터, 그리고 월터의 바로 아래 동생인 윌리엄 역시 초대장을 받았다.

“유리아는?”

“난 성왕국 사람이니까.”

“아…….”

그랬다.

검의 연회는 세일룬 왕국의 유망주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외국인인 유리아는 애당초 참가 자격 자체가 없는 셈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잘 갔다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다녀와서 이야기해 주고.”

“응, 꼭 그럴게.”

유리아의 손을 꼭 잡으며 다짐한 레지나는 순간 이번에도 비비안과 같은 마차에 타야 한다는 사실에 흠칫했지만 눈치 빠른 유리아가 금방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괜찮아, 월터도 같이 갈 테니까.”

“아, 그러네.”

월터 본인이 있으니 굳이 자기 앞에서 월터 이야기를 하진 않겠지.

유리아와 일별한 레지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마차 위에 올랐고, 오른 지 5분도 되지 않아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좀 꽁냥거려!’

대체 왜 동생이랑 꽁냥거리는 건데!

윌리엄도 한심하다는- 아니, 저건 부럽다는 얼굴인데.

어찌 되었든 레지나는 이번에도 브라콘과 시스콘들의 집합체인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고통받아야만 했다.

검의 연회 자체는 무난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언제나처럼 처음엔 각지의 유망주들이 모여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바로 토너먼트가 개최되었다.

서로 자기가 우승할 거라고 흥흥거린 레지나와 비비안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둘 모두 결승은커녕 16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검의 연회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모든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둘보다 나이가 네다섯 살은 많은 유망주들이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16강까지 올라간 게 대단한 거예요. 두 분 모두 대단하세요.”

달리아가 활기차게 웃으며 위로했지만 레지나와 비비안은 입술을 삐쭉거릴 뿐이었다.

‘유리아가 나갔으면 어땠을까?’

아직 유리아가 검을 들고 싸우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는 레지나였지만, 어쩐지 모르게 유리아라면 우승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하루하루 계속해서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건국기념회 직전 날.

“음, 좋아. 잘 어울려.”

“흥, 조금은 봐줄 만하네.”

건국기념 무도회에 입고 나갈 푸른 드레스를 입은 레지나의 모습에 엠버는 우아하게 웃었고, 에이든은 언제나처럼 뺨을 살짝 붉힌 채 흥흥거렸다.

레지나가 입은 드레스는 치마가 짧지만 대신 부풀어 올라 무척이나 귀엽다는 느낌을 주는 미니 드레스였는데, 가슴께에 달린 푸른 장미 장식이 특히 마음에 든 레지나였다.

“예쁘네. 잘 어울려, 레지나.”

유리아의 단정한 목소리에 레지나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유리아의 칭찬에 부끄러워진 것도 있었지만, 정작 저렇게 말하는 유리아가 어마어마하게 예뻤기 때문이다.

유리아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놀라웠다.

기본적으로 도도한 느낌이 나는 유리아였던 터라 귀엽거나 사랑스러운 옷은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었고, 옷걸이가 좋으면 어떤 옷이든 커버가 되게 마련이었다.

유리아가 살짝살짝 웃을 때마다 오히려 숨겨져 있던 귀여움이 폭발하는 기분이었기에 레지나는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유리아 완전 천사!’

그리고 그런 유리아 뒤에 서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진짜 천사들.

엠버와 에이든이 입고 갈 의상까지 구경한 레지나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정말 중요한 날인 만큼 푹 자두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지나는 쉬이 잠들 수 없었다.

문득 유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레지나도 파트너를 만나게 될 거야.

누굴 이야기 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파트너.

운명의 사람.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쿵거리는 심장 때문에 습관처럼 가슴을 움켜쥔 레지나는 눈을 꼭 감은 뒤 억지로나마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건국기념 무도회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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