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47화 (447/473)

엔딩메이커 446화

SS #36 레지나 바이엘(7)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른 아침.

전속 메이드 루나의 상냥한 인사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레지나는 생각했다.

‘망했다. 진짜 한숨도 못 잔 것 같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슴이 정말 두근두근해서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았으니까.

소풍 가기 전날에도 잠을 잘 못 자는 레지나에게 있어 건국기념 무도회- 그것도 ‘운명의 사람’을 만나게 될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날을 앞두고 곤히 푹 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유리아가 이런 레지나를 본다면 ‘고모, 나는 파트너…… 그러니까 댄스 파트너 이야기한 거거든?’이라 말했겠지만 방년 12세 레지나에게 있어 댄스 파트너는 곧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본 사랑 이야기 주인공들은 대부분 그랬으니까.

“루나, 어떡하지?”

“네? 뭐…… 괜찮지 않을까요? 거기다 아가씨는 어려서…… 하루 정도 밤 새운 걸론 별로 티도 안 나고요.”

“그, 그래? 티 많이 안 나?”

“네, 안 나요.”

반색하며 말하는 레지나의 뺨을 가볍게 꼬집어준 루나는 배시시 웃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바이엘 백작가는 참 직업 만족도가 높은 직장이었다.

“자자,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아가씨. 준비할 게 많다구요.”

“응, 알았어.”

이미 깬 지 오래였기에 레지나는 순순히 일어선 뒤 루나에게 문자 그대로 몸을 맡겼다.

그리고 네 시간 뒤.

간단한 아침 식사와 꾸미기 활동 후 마차 앞에 선 레지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완전 멋져! 완전 예뻐!’

무도회에 가기 위해 그야말로 힘을 잔뜩 준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의 사람들.

사실 평소에도 워낙에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었지만 확실히 힘을 주고 안 주고의 차이는 현격했다.

‘와, 에드워드 오빠도 이렇게 보니까 엄청 잘생겼었네.’

게일 오빠야 예전부터 멋진 거 잘 알았지만 에드워드 오빠조차도 이렇게 멋졌을 줄이야.

항상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뭔가 푹 절인 느낌의 모습만 봐왔는데, 제대로 각 잡고 꾸민 모습을 보니 에드워드 오빠도 체이스 백작가 사람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와중에 가장 빛나는 것은- 아니,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은 역시 아델리아 언니와 실비아 언니였지만 말이다.

‘진짜 너무 예뻐. 다들 공주님 같아.’

아델리아는 검정색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깨끗하고 하얀 피부와 화려한 금발이 검정 드레스와 대비되어 각각을 서로 부각시켜 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와 가슴과 등.

크게 파여서 과감한 노출을 하고 있었는데, 그냥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 아델리아에게 나이가 열다섯인 자식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하리라.

‘애당초 아델리아 언니는 천사고.’

인간이 아닌 천사.

그래서 과감한 노출에도 야해 보인다기보다는 그냥 굉장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델리아의 얼굴에 어린 자신감 넘치는 미소도 그렇고 말이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레지나는 괜히 가슴께를 어루만진 뒤 실비아 쪽을 보았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하늘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아델리아와 마찬가지로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색도 하얀색인데다 노출도도 낮아 꽤나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굉장한 건 똑같아.’

다시 한번 가슴께를 만진 레지나는 특유의 청순한 미모 덕분에 여신같이 느껴지는 실비아에게서 간신히 눈을 뗀 뒤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치마폭이 크고 넓은 드레스를 입어서 작은 요정처럼 보이는 벨라와 어제도 놀랐지만 오늘도 놀라게 하는 분홍 드레스의 유리아.

그리고-

‘와! 엠버도 완전 천사!’

그랬다. 엠버는 자신이 체이스 백작가의- 그것도 아델리아의 피를 강하게 이었다는 것을 그야말로 온몸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빨간색 벨 라인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레지나는 처음으로 ‘엠버는 어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유리아나 비비안은 물론이고 레지나 자신도 꽤 성숙한 편이었지만 결국엔 아이인 반면 엠버는 정말 어른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에이든.

살짝 긴장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늠름하니 참 멋있었다.

엠버도 그렇고 에이든도 그렇고 이제 다 커서 정말 어른들 같았다.

‘후, 고모는 정말 만족했어요.’

성장한 조카들을 보며 오랜만에 고모다운 기분을 만끽한 레지나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폭신폭신 웃으며 마차 위에 올랐다.

건국기념회 자체는 오후에 진행될 예정이었고, 무도회는 다프네 왕세녀의 왕위계승식 이후에 시작될 예정이라 아직 한참이나 남은 셈이었지만, 식장 자체에는 점심 전후로 도착해야 차질 없이 일정들을 소화할 수 있었다.

‘마차들 진짜 많네.’

세일룬 왕국 전역의 귀족들이 다 모인 만큼 마차들의 줄이 그야말로 끝도 없이 이어졌다.

드레스랑 화장 망가진다는 루나의 엄중한 경고 때문에 꼼짝없이 바른 자세를 유지한 채 창밖을 바라보던 레지나는 돌연 저도 모르게 푸흡 하고 웃음을 흘렸다.

다른 마차들보다 훨씬 더 긴 행렬을 이루고 있는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마차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동생들도 다 나온다고 했지?’

비비안이 동생들 자랑을 엄청 하고 갔기에-물론 자랑의 칠할 정도는 월터였지만- 레지나는 아직 실제로 본 적도 없음에도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머리는 어떻게 꾸몄는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북부12가문들도 다 모였네.’

코델리아 교의 열정적인 신자로 유명한 엠마 파이커스의 마차에 이어 듀란 후작가의 마차를 발견한 레지나는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았다.

‘듀란 후작 부인이랑 실비아 언니가 친하다고 했었지? 코델리아 언니도 그렇고.’

보라색 머리칼을 길게 기른 살짝 우울한 인상의 듀란 후작 부인을 떠올린 레지나는 다시 마차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국 분들은 다른 길로 오시나?’

이번 건국기념회는 다프네 왕세녀의 즉위식도 함께 했기 때문에 단순히 세일룬 왕국의 귀족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인접 국가들의 귀빈들 역시 대거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파라곤, 파라곤, 파라곤…… 에이, 못 찾겠다.’

나름 열심히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애당초 정체 중인 마차 안에서의 관찰이라 볼 수 있는 범위가 꽤나 한정된 상태였다.

거기다 정말로 다른 길로 오거나 시간대를 달리한다면 애당초 볼 수도 없었고 말이다.

‘하아, 그나저나 유더 오빠랑 코델리아 언니는 진짜 오시긴 하는 걸까.’

유리아는 물론이고 달리아와 마이아 역시도 ‘며칠 뒤에 오실 거야’라고 해서 ‘무도회 전날에는 오시겠지?’ 했는데 아직까지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유리아가 딱히 걱정 안 하는 거 보면 안 오는 건 아닐 텐데.’

유더 오빠는 극적인 순간을 좋아하니까 진짜 딱 맞춰 오려나?

‘어쩌면 이미 도착했는데 그냥 숨어 있는 걸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잇던 레지나는 벌써 꼬박 1년째 얼굴을 못 본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 역시 떠올렸다.

단둘이서 사랑의 여행을 떠나야겠다며 집을 나선 두 분.

애당초 세계 일주를 하겠다며 나선 분들이라 이번 무도회에 참석하실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지금쯤 동방에 계시겠지? 바람은 항상 자유로운 법이니까.’

후훗 웃고 계신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품에 꼭 안겨서 해맑게 웃으시는 어머니를 떠올린 레지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프네 왕세녀의 즉위식은 실로 화려했다.

천장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홀에서 이뤄진 즉위식에는 세일룬 왕국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외국의 여러 귀족들까지도 참석하였는데, 어림 세어도 그 숫자가 수백을 우습게 넘어 일천을 헤아릴 지경이었다.

‘왕궁 밖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겠지?’

당장 다프네 왕세녀의 즉위 인사를 받기 위해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수십만은 된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수십만…….’

상상조차 하기 힘든 대인파를 억지로나마 떠올려 보던 레지나는 이내 포기하고 즉위식이 거행될 단상을 바라보았다.

세일룬 왕국의 근간을 이루는 세 지역 가운데 하나인 북부- 그중에서도 이름 높은 북부12가문의 3강 가운데 하나인 터라 바이엘 백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옆의 칸에 자리한 비비안과 그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슬쩍 살펴본 레지나는 숨을 크게 삼킨 뒤 단상을 향해 발걸음을 딛고 있는 다프네 왕세녀를 바라보았다.

‘사자의 여왕.’

즉위 자체는 이제야 하지만 이미 근 십 년 전부터 실질적인 국왕으로 활동해 온 다프네 왕세녀였다.

사자의 여왕.

다프네 왕세녀의 이명을 떠올린 레지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 대 중반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십 대 중후반의 미모를 간직한 그녀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여인이 아니었다.

왕의 위엄.

지고의 자리에 선 자만이 발할 수 있는 특유의 아우라.

여전히 결혼하지 않고 홀몸인 그녀에게는 남편도, 자식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레지나는 문득 ‘그런 게 뭐가 중요하지?’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 자체로 완벽한 여왕이었으니 말이다.

레지나는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살짝 누른 뒤 단상 주변을 조금 더 넓게 살펴보았다.

다프네 왕세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홀몸인 디온 왕자.

왕국의 재상이기도 한 그는 즉위식을 위해 붉은 카펫 위를 걷고 있는 다프네 왕세녀를 보며 감동하고 있었고, 그 옆에 자리한 보탄 공작 부인- 다리안 전 왕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국왕 전하는 신나셨네.’

헨리2세.

대견함과 기특함이 섞인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의 곁에는 세일룬 왕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1왕비 유스티아가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하고 있었다.

즉위식은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헨리2세에게 왕관을 넘겨받은 다프네 왕세녀- 사자의 여왕은 귀족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왕의 탄생을 선언하였고, 광장에 모여 있던 인파들은 새로운 여왕의 등극에 아낌없는 축복을 보내며 기뻐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여.

마침내 무도회의 시간이 다가왔다.

* * *

바이엘 백작가의 영애답게 어릴 때부터 여러 무도회에 참가한 레지나였지만 오늘의 무도회에는 마치 사교장에 처음 나가본 어린아이처럼 뺨을 붉히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여왕을 필두로 한 왕족들이 자리하고, 전국의 귀족들이 모두 모인 어마어마한 무도회.

높이가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높은 천장과 거대한 샹들리에를 보며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 레지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고, 이내 움찔하며 숨을 삼켰다.

무도회장의 음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시, 시작한다.’

댄스 타임이.

레지나는 다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게일 오빠가 아델리아 언니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홀로 나아가고 있었고, 에드워드 오빠도 오늘만큼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실비아 언니를 인도하고 있었다.

‘엠버랑 에이든도.’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남자들을 가벼운 미소로 돌려보낸 엠버가 에이든의 손을 잡고 홀로 나아갔다.

첫 춤은 에이든이랑 출 거라더니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춤추기 시작한 엠버와 에이든을 본 레지나는 어쩐지 모를 조급함이 들어 다시 시선을 돌리다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완전 신났네.’

월터와 함께 홀에 나선 비비안이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월터의 표정도 무척이나 좋았고 말이다.

누가 보면 남매가 아니라 서로 좋아 죽는 약혼자들끼리 춤추러 나선 줄 알 것 같았다.

‘동생들도 엄청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네.’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역시 시스콘들과 브라콘들의 소굴이 분명한 것 같았다.

제1부인- 그러니까 카이사 흐레스벨그와 춤을 추기 시작한 흐레스벨그 백작을 잠시 살펴본 레지나는 사람들의 술렁거림을 따라 다시 시선을 돌렸고, 사람들이 왜 웅성웅성거렸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달리아와 마이아가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들끼리 추는 춤이었지만 달리아는 수호의 천사답게 기사들의 정복 차림이었던 터라 드레스 차림의 마이아와 남녀 구분이 확실하였고, 이러나저러나 천사인 두 사람의 춤이었기에 절로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헉! 이게 아니지!’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보던 레지나는 얼른 다시 시선을 돌려 유리아를 찾았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도도하면서도 색기가 넘치면서도 아직 앳된, 모순의 결합체 같으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에게 이목이 쏠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당연함을 증명하듯 댄스 신청이- 심지어 어른들까지 포함된 댄스 신청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지만 유리아는 우아하면서도 단호한 미소로 그 모든 신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왜일까.

역시 오늘 만날 것 같다는 운명의 사람 때문인 걸까?

일단 레지나 자신도 그래서 들어오는 댄스 신청을 다 거절하고는 있는데.

‘아가씨! 뭐 하시는 거예요! 계속 거절만 하시고!’라는 뜻이 담긴 루나의 시선이 자꾸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았지만 레지나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유리아의 표정을 보며 열심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아의 직감이었으니까.

기다려야지.

기다렸다가 운명의 사람이랑 첫 댄스를 춰야지.

새삼 두 주먹을 불끈 쥔 레지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어깨와 가슴을 폈다.

그리고 다시 십여 분.

기껏 활짝 펴졌던 레지나의 어깨가 다시 움츠러들고 주먹 쥔 손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을 때.

“여신의 화신께서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궁내부원들의 목소리가 홀 전체를 진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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