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51화
SS #37 강유진(4)
눈이 마주친 것은 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흠칫 놀란 유진이 얼른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유리아야, 진짜 유리아.’
0과 1로 만들어진, 풀 다이브 가상현실 속의 NPC 유리아가 아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진짜 유리아.
‘예쁘다.’
진짜 예쁘다.
정말로 진짜 너무 예쁘다.
사람인지 의심될 정도로 예쁘다.
천사보다 예쁘다.
나타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한 그때 실시간으로 얼굴이 빨개진 유진은 열심히 심호흡을 해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유리아와의 첫 만남이었는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리아 마음에 안 들면 전부 취소다!
무서운 얼굴로 으름장을 놓던 유더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았기에 유진은 마른침을 삼킨 뒤 의식을 집중했다.
‘알렉세이 도와줘요!’
제게 힘을.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도록 강철 같은 의지를!
알렉세이는 역시 효과가 좋았다.
사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어린 시절부터 침착함을 되찾기 위한 ‘스위치’로 ‘알렉세이 도와줘요!’를 사용한 덕분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침착함을 되찾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유진은 다시 고개를 들어 유리아를 보려 했지만 어딘가로 이동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 갔지?’
깜짝 놀라 눈동자를 굴리던 유진은 이내 다시 숨을 헉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유리아 때문이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 때문이었다.
영웅전기2 리메이크의 진주인공들.
즉, 유진과 인생을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두 사람.
아니, 그런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홀 안에 자리한 천 명도 넘는 사람들과 같은 이유였다.
플레이아데스의 수호신들.
문자 그대로 신들이 펼치는 무도.
아름답고 성스러웠다.
그렇기에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유리아를 마주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멍하니 유더와 코델리아를 바라보던 유진은 어느 순간 눈을 깜박였고, 마치 혼을 토해내듯 작은 숨을 토했다.
춤이 끝났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였지만, 시간은 분명히 흘렀고, 춤추기를 마친 유더와 코델리아는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박수갈채.
주변 사람들과 같이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던 유진은 어느 순간 다시 흠칫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사라졌던 유리아가 다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안기는 유리아.
두 사람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유리아.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았고, 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 자신을 보며 유리아가 ‘호오-’ 하는 소리를 낸 것 같았지만 착각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다시 몇 초.
훈련을 통해 타고난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갈고닦은 유진은 알 수 있었다.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아, 너한테 소개시켜 줄 아이가 있어.”
코델리아가 다정하게 말했다.
유진은 아예 숨을 멈추었고, 연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유진아.”
엄마- 홍유희의 부름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그제야 자신이 나타샤의 등 뒤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유진이는 겁쟁이 아니지?”
작고 다정한 나타샤의 목소리와 미소 섞인 눈빛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 자신에게 있어 알렉세이와 비등한 힘을 가진 나타샤의 응원에 용기를 얻어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까운 거리.
고작해야 몇 미터.
아니, 이제는 그것조차 되지 않았다.
유리아가 자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안녕, 유리아라고 해.”
“으응, 난 유진이야. 강유진.”
약간 떨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리고 유진은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유리아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심이 담긴 환한 미소.
도도함 속에 감춰져 있던 순수함.
“대장! 시, 심장이 뛰지 않습니다!”
유진의 머릿속.
길드 하우스는 혼란의 도가니와 다름이 없었다.
부관 강유진의 외침에 길드 마스터 강유진은 단호하게 외쳤다.
“착각이다! 심장은 지금도 뛰고 있다!”
“하, 하지만 대장! 금방 멎을 것 같습니다!”
“안 돼! 유리아가 내 약혼녀인데 심장마비로 죽는다고?! 아, 아직 손도 못 잡아봤는데!”
절규하는 사춘기 직전 강유진의 외침에 길드 하우스 안의 강유진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에이잇! 정신들 차려! 다들 외치는 거다! 부관! 선창!”
대장 강유진의 명령에 부관 강유진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아, 알렉세이!”
“도와줘요!”
“알렉세이!”
“도와줘요!!!!!!!”
길드 하우스 안의 강유진들이 있는 힘껏 외친 그 순간이었다.
강유진의 심장은 거칠게 뛰었고, 강유진의 얼굴과 귀와 목을 향해 열심히 피를 보내주었다.
“대장!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급한 불은 껐지만 상황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부관 강유진의 물음에 대장 강유진은 고뇌했고, 이내 답을 내놓았다.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유진은 웃었다.
홍유희에게 이어받은 태양 같은 미소를.
그리고 그 미소에 유리아가 아주 약간이지만 뺨을 붉혔다.
달인 그녀가 태양에 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유더가 코델리아에게 그러했고, 강진호가 홍유희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리아는 유리아였다.
금방 다시 도도함으로 무장한 그녀는 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유진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유리아는 다시 쿡쿡하고 웃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유진이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듯 흠칫했기 때문이다.
‘귀여워.’
속으로만 생각한 그녀는 도도함을 살짝 낮추고 대신 다정함을 높이며 말했다.
“우리도 춤추자. 춤출 줄 알지?”
“으응, 알아. 오기 전에 배웠어.”
“그래? 그럼 기대할게.”
여우처럼 웃은 유리아는 그대로 유진을 인도했고, 유진은 수줍음과 민망함과 기쁨과 어색함이 뒤섞인 얼굴로 그런 유리아를 따라갔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강유진. 승리 조건을 잊지 말자.’
유진은 습관적으로 생각했지만 무리였다.
유리아의 손이 너무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 장갑이다! 유리아는 장갑을 끼고 있다! 그러니 이 부드러움은 실크의 부드러움이란 말이다!”
대장 강유진이 일갈했지만 길드 하우스 안의 강유진들은 이미 하나둘 정신줄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장 강유진은 나자빠지기 시작한 부하들을 보며 탄식했지만 그 역시도 더 이상은 버티기가 어려웠다.
유리아가 유진의 손을 자신의 허리 위에 얹어놓았기 때문이다.
가냘프지만 단단하다.
부드럽고 낭창낭창하다.
순식간에 정신줄을 놔버릴 뻔한 대장 강유진은 스스로의 허벅지를 때려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알렉세이를 부르짖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여기서 헤롱헤롱하기만 하면 안 된다.
겨우 손 좀 잡고 그랬다고 정신줄을 놓고 흐느적거리면 유리아가 자신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겠는가.
그럼 전부 끝이었다.
그러니 이 시련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다행히 춤 자체는 어찌어찌 이어지고 있었다.
유진의 정신이 반쯤 가출 상태인 것과 별개로 그의 몸은 반복된 훈련의 성과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유리아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직 무리였지만, 그래도 정신줄을 유지하는 것 정도는 어찌어찌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급한 불은 끈 건가.’
춤이 끝났다.
유진은 강철 같은 의지를 발해 유리아의 허리와 손에서 손을 떼었고, 유리아는 그런 유진을 보며 여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왜일까.
왜 저렇게 웃는 것일까.
예쁘긴 정말 예쁜데.
저렇게 예쁘게 웃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진의 의문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유리아가 예기치 못한 기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팔짱.
그랬다.
유리아가 유진의 팔을 살짝 끌어안았고, 유진은 생각지 못한 스킨십과 팔뚝을 통해 전해지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합친 것 같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에 다시 한번 정신이 나갈 뻔하였다.
다행히 이번에도 구원의 손길은 있었다.
아니, 구원의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정신을 차리게 할 자극이 있었다.
살기.
등 뒤에서 찌르듯이 닥쳐온 유더의 살기.
물론 진짜 살기는 아닐 터였다.
그랬다면 유진은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라 반대로 정신이 나가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을 테니까.
어찌 되었든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유진의 귓가에 유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른들이 계속 쳐다보니까 좀 그런데…… 장소를 옮길까?”
“어?”
장소를 옮기자고?
유진이 눈을 깜박이며 되묻자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옮겼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옮길게.”
유리아가 하자는데 해야지.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유진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유리아와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유진의 대답에 유리아는 기분 좋은, 그러면서도 도도한 미소를 짓더니 유진의 팔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내가 유도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리고 내가 신호하면 내 품에 안기는 거야. 알았지?”
“어? 아, 안기라고?”
“응, 안겨. 내 목을 끌어안으면서.”
이게 무슨 말인 것일까.
하지만 되물을 시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창가- 정확히는 발코니를 향해 빠르게 이동 중인 유진과 유리아의 등 뒤로 최종보스- 아니, 유더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유리아.”
유더가 목소리를 낸 그 순간이었다.
유리아는 달리기 시작했고, 유진 역시 얼결에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발코니.
질주하기 시작한 두 사람의 모습에 유더는 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지면을 박찼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아니, 좁히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코델리아?!’
‘좀 놔둬, 응? 좀!’
코델리아의 염동력 때문에 간발의 차로 유진과 유리아를 놓친 유더는 미간을 좁히며 발코니 쪽을 보았고,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것은 코델리아를 비롯한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진이 유리아에게 안겨 있었다.
정확히는 유진을 공주님 안기로 안은 유리아가 발코니를 박차 밤하늘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유리아!”
“괜찮아! 유진이는 아마도 신사일 테니까!”
“뭐, 뭐라고?!”
유리아의 외침에- 아니, 내용에는 천하의 유더조차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고, 유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텔레포트!”
마도구를 이용한 장거리 공간도약.
유진을 안은 유리아가 빛이 되어 사라졌고, 유더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시, 신사? 신사니까 괜찮아? 하, 하지만 아마도인데?”
유더가 고장 난 인형처럼 중얼거린 그때.
어느새 다가온 마이아와 달리아가 유더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정한 최종보스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찾아내라.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부의 붉은폭풍.
아더 체이스.
대 체이스 백작.
눈앞에서 손녀를 납치당한- 정확히는 손녀가 남의 집 자식을 납치한 상황이었지만 - 체이스 백작이 무서운 얼굴로 명령했고, 유더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다른 장소.
공간도약을 마친 유리아가 유진을 품에 안은 채 지면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