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52화
SS #37 강유진(5)
“엘윈 S 파라곤입니다.”
“레, 레지나 바이엘이에요.”
“함께할 영광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부, 부탁드려요.”
유진과 유리아가 어른들의 시선을 받으며 홀로 나아가고 있을 때, 자신보다 덩치가 두 배- 아니, 세 배는 될 것 같은 소년 앞에 선 레지나는 수줍음과 부끄러움과 즐거움과 민망함과 넋 나감이 뒤섞인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을 마주한 순간 레지나는 ‘운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소년이 커다란 손으로 레지나의 허리를 안았고, 다른 한 손으로 레지나의 손을 잡았다.
둘의 덩치 차이만큼이나 키 차이도 상당했기에 완전히 소녀와 어른, 미녀와 야수의 조합이었지만 양쪽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풋풋함이 모든 것을 상쇄했다.
그저 귀여운 커플로만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레지나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허리를 다 덮을 정도로 커다란 소년의 손과 넓고 단단한 가슴, 키 차이 때문에 올려다봐야만 하는 얼굴에서 에이든이나 월터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어른의 듬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른. 진짜 어른.’
또래보다 훨씬 성숙한 외모 덕분에 열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레지나였지만 알맹이는 결국 열세 살 소녀였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다른 것 같았다.
외모도 외모였지만, 맑고 푸른 눈에서 어른의 성숙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레지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삼 비비안이 재잘재잘 떠들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육체와 정신의 성장이 더 빨라. 많이는 아니고 한 2에서 3년 정도? 아무튼 그래서 우리 나이 때는 여자랑 남자 사이의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어.
-격차면 그, 정신적 격차?
-응, 쉽게 말하면 또래 남자애들이 유치해 보인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 나이 때는 또래보다는 연상의 어른을 동경하기 쉽다고 해. 물론 우리 월터는 예외지만. 월터는 착하고 멋지고 잘생긴데다가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서 전혀 안 유치해. 막 가끔은 동생이 아니라 오빠가 있는 것 같다니까? 그리고 그리고 얼마 전에 월터가…….
끝없이 이어지는 월터 이야기에 고통받았던 기억까지 같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억누른 레지나는 필요한 부분만을 잘라내 보았다.
‘어른을 동경하기 쉽다.’
그래, 그래서야.
지금 이렇게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건 그래서일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소년- 엘윈은 정말 어른스러웠으니까.
저도 모르게 기대고 싶은 듬직한 가슴과 어른스러운 눈빛, 에이든은 절대 지을 수 없는 잔잔한 미소까지…….
레지나는 더 이상 생각을 잇기 어려웠다.
엘윈과 함께하는 지금 순간이 너무나 꿈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도한 시간의 흐름에 예외는 존재치 않는 법이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 또한 있는 법이었으니, 어느새 춤을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한 걸음 옆으로 이동했다가 마지막으로 밀착하며 정지.
조금 정도 이상으로 붙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엘윈의 단단한 팔이 너무나 기분 좋았기에, 그리고 엘윈의 가슴에 꼭 한번 머리를 기대보고 싶었기에 레지나는 만족했다.
더욱이 생각지 못한 귀여운 광경도 볼 수 있었고 말이다.
‘얼굴 붉히는 거 귀여워.’
지나치게 밀착한 탓에 가슴이라도 닿았던 것인지 엘윈이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완전 어른 같은데 저런 소년 같은 풋풋함이라니.
에이든을 비롯해 다른 사람이 저랬다면 당장 밀쳐냈을 레지나였지만 엘윈이 저러니 그저 귀엽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아니, 에이든도 좀 예외일려나?’
어찌 되었든 지금 중요한 것은 에이든이 아니었다.
눈앞의 소년.
엘윈 S 파라곤.
음악이 끝나고 정말로 춤을 마칠 때가 되자 엘윈은 처음 다가왔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멋지게 물러나며 예를 표했다.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저, 저도요. 저, 정말 좋았어요.”
반사적으로 빠르게 말한 레지나는 순간 확 하고 얼굴을 붉히며 흠칫하고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어린애 같은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너무 대놓고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우, 진짜!’
하지만 속으로 울상 짓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레지나의 반응에 순간 당황한 엘윈이 잠시 눈을 깜박이긴 했지만 이내 다시 멋진 미소를 지으며 응답했기 때문이다.
“저도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오늘 밤의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른스러워!’
실수를 놀리거나 비웃기는커녕 오히려 더 센 이야기를 해서 감싸주는 저 태도라니!
역시 어른.
진짜 어른.
“저, 저도 못 잊을 것 같아요.”
레지나가 수줍게 답하자 엘윈은 훈훈한 미소를 짓더니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재차 예를 표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파라곤 왕국의 제1왕자 엘윈 S 파라곤입니다.”
사랑 이야기 속의 기사- 아니, 왕자님 같은 엘윈의 인사에 레지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멋있어! 역시 어른! 역시 왕자님!’
애당초 처음 엘윈을 발견했을 때부터 대충 파라곤 왕국의 왕자가 아닐까 하긴 했지만 짐작과 사실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는 법이었다.
“바이엘 백작가의 레지나 바이엘입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레지나는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킨 뒤 왕족에 대한 예를 표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 때문인지 우아하다기보다는 사랑스러운 인사였고, 엘윈은 그런 레지나의 모습에 다시 미소 짓더니 똑같이 뺨을 붉히며 조심스레 말했다.
“오렌지 주스가 무척 신선하던데 한 잔 권해 드려도 될까요?”
엘윈의 물음에 레지나는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춤을 췄더니 오렌지 주스가 땡겨서가 아니었다.
엘윈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데이트 신청?’
춤 끝났으니 이제 안녕이 아니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자는?
‘어른스러워!’
에이든이었다면 저쪽 가서 이야기나 하자는 식으로 투박하게 말했을 텐데.
오렌지 주스를 권하며 넌지시 자신의 뜻을 감추다니.
비비안이 옆에서 보았다면 ‘아닌데, 전혀 안 어른스러운데. 오히려 애 같고 조잡한데. 오렌지 주스가 신선하다니 완전 구리잖아. 우리 월터라면 다른 식으로 말했을 거야. 예를 들어 우리 월터면-’으로 시작한 월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겠지만 일단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녀였다.
때문에 혼자서 엘윈은 어른스럽다고 결론을 내린 레지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도 이야기를 아, 아니!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어요.”
흑흑 망했다.
다 망했어.
나는 왜 이렇게 어린 애 같을까.
비비안이 옆에서 보았다면 ‘너 어린 애 맞잖아. 물론 우리 월터는-’으로 시작한 월터 이야기를 했겠지만 전술했듯이 이 자리에는 없는 그녀였다.
그랬기에 레지나는 이번에도 혼자서 한탄하는 한편 ‘너무 어린 애같이 생각하면 어쩌지?’하는 걱정을 담아 엘윈을 올려다보았고, 엘윈은 순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레지나에게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지나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표정 관리가 힘겨웠기 때문이다.
“그럼……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네? 네네!”
이번에도 급하게 답한 자신을 속으로 원망하며 레지나는 엘윈의 커다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고, 엘윈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런 레지나를 인도했다.
그리고 레지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런데 파라곤 1왕자면…… 잠깐, 잠깐잠깐잠깐.’
파라곤 왕국의 제1왕자.
파라곤의 영웅들 가운데 필두인 구세의 대영웅- 태양의 용사 란디우스와 마찬가지로 파라곤의 영웅들 가운데 하나인 성천사 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
즉, 야생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반인반신인 레지나 자신과 비슷한 존재.
‘출생부터 천생연분?! 아, 아니지. 지금 생각하려던 건 이게 아니지.’
레지나는 옆으로 튀려는 생각을 다시 바로잡고는 지나가다 듣고 흘렸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파라곤의 왕자, 파라곤의 왕자! 아! 생각났다!’
파라곤의 왕자가 태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유리아가 태어나고 한 달 후에 태어났으니까-
‘잠깐! 그럼 열한 살이라고?!’
한국식으로 따지면 열두 살- 아니, 열세 살도 될 수 있는 나이였지만 플레이아데스 기준으로는 짤 없이 열한 살인 엘윈이었다.
‘여, 열한 살?’
레지나는 자신을 에스코트 중인 멋진 남자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키는 일단 무조건 180이 넘을 것 같았다.
레지나 자신이 150을 살짝 넘는 정도였으니 현재 덩치 차이와 키 차이를 고려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짜 열한 살?’
완전 근육질인데?
에이든보다 훨씬 더 연상인 거 같은데?
‘아, 아니. 이제 보니 좀 어려 보이기도 하고.’
분위기 있는 얼굴은 여전히 잘생기고 어른스러웠지만 열한 살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확실히 앳된 구석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여, 열한 살.’
어른이 아니었다니.
오히려 동생이었다니.
오빠가 아니라 연하였다니.
‘그, 그래도 어른스러우니까 된 거 아닐까?’
비비안이 월터의 어른스러움을 설파할 때는 그래봐야 아무튼 열두 살이잖아!라고 주장한 레지나였지만 이번만은 비비안의 이론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괜찮아! 유진이는 아마도 신사일 테니까!”
“에?”
갑자기 들려온 유리아의 외침에 레지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발코니.
벽에 붙은 발코니를 박차고 밤하늘을 향해 몸을 던지는 유리아와 그 품에 안겨 있는 소년.
‘잠깐, 안겨?!’
유리아가 안기는 게 아니라 유리아가 안고 있다고?
‘아, 아니지.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발코니를 박차고 하늘 높이 솟구친 유리아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공간 도약을 한 것이 분명했다.
“시, 신사? 신사니까 괜찮아? 하, 하지만 아마도인데?”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의 유더가 고장 난 인형처럼 말하는 모습은 레지나에게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언제나 완벽한 오빠였으니 말이다.
‘아, 아무튼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한 것은 레지나만이 아니었다.
홀 전체가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웅성웅성거렸고, 사람들이 유더 곁으로 모여들었다.
마이아와 달리아.
코델리아와 동방에서 온 것 같은 손님들.
그리고-
‘사, 삼촌 화났다!’
대 체이스 백작.
도끼 눈을 뜬 그의 등장에 레지나는 흠칫했고, 그건 저만치 멀리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던 비비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찾아내라.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체이스 백작이 말했고, 유더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이 뭉치다니.
저 둘이 같은 마음을 먹다니.
레지나는 저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들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랑의…… 도주?”
엘윈이 말했다.
아니, 엘윈만이 아니었다.
홀 안에 있던 다수의 인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사랑의 도주.
세일룬 왕국의 명물.
역사와 전통을 가진 커플들의 필수 코스.
“사랑의 도주겠죠?”
“역시 신성국의 왕녀답네요. 정말 화끈한 도주에요.”
“‘정략결혼이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싶어’에서 저런 장면을 본 것 같아요.”
곳곳에서 여인들이 속삭이기 시작했고, 그건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와 누구 덕분에 세일룬 왕국에서는 ‘사랑의 도주’가 무척이나 흔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업자득이네, 자업자득. 니들이 만든 거잖아, 니들이.”
스칼렛이 쯔쯔쯔 혀를 차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고, 유더는 무서운 눈으로 마력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윈과 레지나는-
“무척 대범하군요. 조금…… 부럽기도 하고요.”
“네? 그, 그럼 저희도…… 아, 아니. 오렌지 주스 마시러 가요.”
“예, 마시러 가죠.”
사이좋게 웃으며 오렌지 주스를 마시러 갔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란디우스와 레나는 훈훈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도착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