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53화
SS #37 강유진(6)
유진을 품에 안은 채 지면에 안착한 유리아는 나직이 말했고, 유리아가 발코니를 박찬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유진은 급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
야외.
무척이나 큰 나무.
아마도 고지대.
둘레가 몇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정말로 큰 나무였다.
높이는 수십 미터쯤 되려나?
나무가 큰 만큼 나뭇잎도 컸고, 나무가 만드는 그늘 역시 어마어마했다.
“와아…….”
하지만 유진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감탄을 내뱉게 한 것은 나무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달빛도 별빛도 닿지 않는 그늘 아래 자리한 작고 은은한 반딧불이들.
별의 바다에서 흘러넘친 별들이 밤하늘을 따라 지면에 펼쳐진 것 같았다.
“예쁘다.”
유진의 진심 어린 감탄에 유리아는 후훗 하고 웃었고, 그 소리에 퍼뜩 놀란 유진은 또 하나의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아, 안겨 있잖아!’
안고 있는 게 아니라 안겨 있다.
유리아의 품에, 유리아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순간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발버둥이 치고 싶어진 유진이었지만 기아나 고지에서 갈고닦은 인내심을 발휘해 견뎌냈다.
여기서 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는 건 너무 추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유진은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이제…… 내려…… 줄래?”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고른 결과 말이 길게 늘어지고 말았고, 그 내용도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유진은 얼굴을 더욱 붉혔고, 유진의 마음속 길드 하우스에서는 대장 강유진이 억울하다 외치는 책벌레 강유진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유리아.
“음…… 싫은데?”
“어?”
유리아의 짓궂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러니까 유리아의 얼굴을 돌아본 유진은 다시 급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너무 가깝잖아!’
애당초 목을 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얼굴을 마주하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것이 당연했다.
“장난이야, 장난.”
도도한 얼굴에 어울리는, 무척이나 요망한 미소를 지은 유리아는 그대로 타박타박 걸어 좀 더 안쪽으로 이동한 뒤 유진을 내려주었다.
“여기 어때? 내가 좋아하는 장소인데.”
“좋은 것 같아.”
반딧불이의 흐릿한 빛이 유리아의 미모에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 유리아의 얼굴을 마주하면 바로 홀려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서 이야기하자. 방해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으응. 자, 잠시만.”
유진에게도 눈치라는 것이 있었다.
이대로 서서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닐 테니, 앉긴 앉을 텐데 여기서 앉을 만한 장소는 지면 밖으로 드러나 있는 나무뿌리뿐이었다.
나무가 워낙 크다 보니 뿌리도 굵고 커대래서 의자로 쓰긴 충분했지만 그와 별개로 표면이 은근 촉촉해 보였다. 흙도 묻어 있었고 말이다.
그랬기에 일단 유진은 나타샤가 챙겨준 손수건을 꺼내 뿌리 위에 펼치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손수건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리아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설프게 깔면 결국 흙이 묻을 수밖에 없었으니 좀 더 제대로 된 조치가 필요했다.
-항상 승리 조건을 생각해라.
알렉세이의 가르침을 반사적으로 떠올린 유진은 주저 없이 겉옷을 벗어 나무뿌리 위에 펼쳤다.
안감이 위로 가게 펼쳤는데, 두 사람이 앉기에 충분한 넓이였다.
유진이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던 유리아는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순간 ‘네 엉덩이가 더 소중하니까’ 같은 말을 떠올린 유진이었지만 다행히 입 밖으로 내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대장 강유진이 문학도 강유진의 입을 틀어막은 뒤 내쫓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유진이 입을 꾹 다물자 유리아는 다시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가 싶더니 여전히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알았어, 고마워. 잘 앉을게.”
“……응.”
유리아는 치마를 한데 모은 뒤 다소곳이 앉았고,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겉옷이 제법 크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십 대 초반의 소년을 위한 것이었기에 엉덩이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의 어깨가 닿을 거리였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여기서 어떤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걸까.
분명 준비는 해두었다.
게임 속의 유리아를 마주한 채 천 개도 넘는 대화 패턴을 만들어두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유리아와 나란히 앉고 나니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뭔가 말을 해야 해.’
가만히 입만 꾹 닫고 있을 수 없었다.
뭐라도 대화를 시작해야만 했다.
“저, 저기.”
“응, 저기.”
유리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유진을 돌아보며 답했고, 유진은 장난기와 도도함이 뒤섞인 유리아의 눈빛에 꿀꺽 마른침을 삼킨 뒤 패닉 상태로 입을 열었다.
“우, 우유 좋아해?”
“어? 우유?”
“어어, 우유.”
망했다.
우유 좋아해가 뭐야, 우유 좋아해가.
차라리 오렌지 주스 좋아해가 낫지.
마음속 길드 하우스에서는 참모 강유진이 대장 강유진에게 ‘대장, 그것도 좀…….’ 하며 소소한 항의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실책은 실책이었다.
유리아의 저 당황한 표정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끝났어. 이제 다 끝났어.’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라고 생각할 거야.
저 도도한 얼굴로 ‘하, 역시 어린애였구나.’ 같은 말을 하겠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갖가지 매도의 말을 떠올린 유진은 최후를 각오한 병사처럼 마음의 준비를 하였지만,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유리아는 분명 유진의 말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매도의 말을 입에 담는 대신 빙긋 웃더니 그대로 유진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나도 우유 좋아해. 우유 맛있어. 매일 마실 정도니까. 너는 어때?”
‘유리아 진짜 천사!’
‘우유 좋아해?’라는 최악의 질문을 받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되물어주기까지 하다니.
마음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린 유진은 얼른 답하였다.
“응, 좋아해. 나도…… 매일 마셔.”
“나는 체셔 아저씨네 목장에 있는 우유를 제일 좋아해. 거기 우유가 제일 고소하거든. 너는?”
“어…… 나는 서울 우유 좋아해.”
“서울 우유? 목장 이름이 서울이야?”
“어…… 목장은…… 아닌데, 그, 비슷한 거야.”
“흐음?”
어딘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얼렁뚱땅 대화가 이어지기는 했다.
이야기가 오고 감에 따라 조금씩 대화가 더 자연스러워졌고 말이다.
“비비안은 나중에 월터랑 결혼하겠다고 선언할 것 같아. 정말로 진짜.”
“레지나는 운명의 사람을 만났을까?”
“나타샤 고모는 정말 멋있어.”
“성경에 나온 장소들도 한번 가보고 싶어.”
영웅전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플레이아데스에 대해 알고 있는 유진이었다.
그랬기에 처음에는 유진도 알고 있는 유리아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자연스럽게 유진의 주변 인물들 이야기를 거쳐 다시 공통된 소재인 성경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성경.
코델리아 교의 교황인 유더가 직접 집필한 그 책에는 유리아도 등장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아이의 탄생.
혼자 일어선 유리아.
걸음마를 시작한 유리아.
처음으로 빠빠라는 말을 한 유리아.
거의 육아 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세한 내용들이 생동감 있는 삽화들과 함께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걸 다 본 거야?”
“어어.”
유진의 대답에 유리아의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올랐다.
도도함이 사라진 얼굴에는 난처함과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가득했고, 유진은 갑작스러운 유리아의 변모에서 발생한 반전 매력에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1초, 2초.
겨우 표정을 수습한 유리아는 입술을 한 번 살짝 깨물더니 고개를 더욱 기울였다.
“그런데…… 이야기대로면 유진은 이제 열세 살인 거지?”
“으응, 한국식이라 그렇지 여기 식으로 하면 열두 살이지만.”
“나는 열한 살인데. 아직 생일이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열한 살.”
유리아의 말에 유진은 새삼 놀랐다.
겉모습만 보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유리아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유진 자신보다 누나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기울인 채 유진을 올려다보던 유리아가 돌연 여우 같은 미소를 짓더니 굉장한 파괴력의 말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그럼 유진이가 나한테는 오빠네. 오빠, 유진 오빠.”
유리아는 정말로 여우처럼 도도함 대신 귀여움을 장착한 채 그리 말했고, 유진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정말로 심장이 요동을 쳤기 때문이다.
‘귀, 귀여워!’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오빠.
유진 오빠.
유진은 새빨개진 얼굴로 호흡 곤란까지 일으키며 괴로워했고, 그런 유진을 바라보던 유리아는 흥분한 얼굴로 자기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티를 최대한 안 내고 있었지만, 사실 유리아의 머릿속에서도 한창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유진 오빠 귀여워!”
“봤어? 지금 반응?”
“왜 이렇게 귀엽지?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남자다운데 귀여워. 귀여운데 남자다워. 앉으라고 겉옷 펼치는데 심쿵했어. 그게 또 엄청 귀여웠고.”
유리아는 유더의 딸인 동시에 코델리아의 딸이었다.
살롱에 모인 유리아들이 저마다 재잘재잘 떠들며 꺅꺅거리자 상석에 앉아 있던 마담 유리아는 후후훗 도도한 미소를 짓더니 가볍게 박수를 쳐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빠는 역시 효과적이었어. 그럼 이제 결전병기를 투입해 볼까?”
“스프링쿨러를?”
“아니, 최종병기 말고, 결전병기.”
마담 유리아가 여우처럼 웃자 유리아들은 서로를 돌아보았고, 이내 똑같이 여우 같은 미소들을 머금었다.
“아, 그리고 오빠. 보여줄 게 있어요.”
“어어어.”
유진이 여전히 넋이 나간 목소리로 답한 때였다.
유리아는 드레스 치마 안쪽에 슥 하고 손을 넣더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마음을 굳힌 유리아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르더니 치마 안에서 꺼낸 물건을 ‘장착’하였고, 그대로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요, 유진 오빠?”
유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익숙해지려면 아직 먼 오빠의 파괴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그야말로 전술 핵폭탄 같은 일격에 마음속 강유진들 모두가 가슴을 붙잡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바, 바니 걸!’
그랬다.
유리아가 치마에서 꺼내 장착한 것은 토끼 귀 머리띠였고, 아버지의 취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유진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부끄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뺨을 붉힌 채 토끼 머리띠를 쓰고 있는 유리아라니.
“격침을 허가한다.”
대장 강유진이 꺼낸 최후의 말을 지키듯 유진의 잘생긴 코에서 코피가 주륵 흘러내렸고, 유진은 그대로 행복사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살기가 유진과 유리아를 동시에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