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55화
SS #37 강유진(8)
“아, 아빠!”
“어떻게 된 일인지는 대충 알겠다. 그러니 일단 수습부터 하자.”
유더는 차분하지만 여전히 냉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고, 유리아는 움찔하고 어깨를 움츠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나무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있는 키메라와 모닥불 앞에 널어져 있는 옷들.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젖어 있는 바닥.
이 정도면 충분했다.
유리아에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쉬이 알 수 있는 유더였다.
그랬기에 유더는 다시 유리아를 돌아보았고, 입술을 움츠리고 있는 딸의 모습에 머리를 흔들었다.
‘날 닮기는 했네.’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강유진.’
강진호와 홍유희의 딸.
유리아와 운명으로 이어진 운명의 아이.
눈가리개를 한 채 바짝 긴장한 상태로 앉아 있는, 그 와중에 본능인지 아니면 얄팍한 계산인지 유리아를 보호하듯 살짝 몸을 튼 채로 오른팔을 약간 들고 있는 소년.
“하아.”
본능이겠지.
강진호와 홍유희의 아이였으니까.
특히 홍유희를 많이 닮은.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은 유더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발동시켰다.
유리아는 순식간에 목까지 덮는 무척이나 얌전한 느낌의 녹색 드레스를 입었고, 유진은 베이지색 훈련복을 입었다.
“어? 어어어?”
눈가리개를 하고 있느라 앞을 보진 못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옷이 갈아입혀졌다는 사실 정도는 감지한 유진이었다.
유진이 당황해서 어버버거리자 유더는 다시 손가락을 놀려 눈가리개를 벗긴 뒤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유리아가 괜찮다며 유진의 손을 잡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우린 진짜 오래 걸렸었는데.’
손잡는 거.
정확히는 손은 빨리 잡았지만 깍지 끼는 게 오래 걸린 거지만.
‘이게 젊은이란 건가.’
젊음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린 거에 가까울 것 같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덕분에 머리가 혼란한 유더는 오늘만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한 번 더 토한 뒤 팬텀 스티드들이 끄는 마차를 소환했다.
“타라.”
유더가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키자 유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간도약으로 바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차라니.
어째서 시간도 오래 걸리는 마차를-
“앗!”
유리아가 깨달았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자 유더는 표정을 구겼고, 유리아는 속이 까만- 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순수한 미소를 짓더니 소리 없이 말했다.
‘아빠 최고.’
공식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줄 테니 도망치지 마라. 알겠니?
마이아와 달리아가 들었다면 ‘우리한테는 왜 그러셨어요?’라는 말을 할 것 같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유더의 눈빛에 유리아는 예쁘게 웃는 것으로 답했고, 유더는 그 대답이 긍정도 부정도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무어라 더 말을 늘어놓는 대신 마차 위- 정확히는 마부석에 올라탔다.
“오빠, 빨리 타요.”
“으응.”
유리아의 인도하에 마차 위에 오르는 유진은 여전히 혼란한 표정이었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지구인인 유진에게 있어 갑자기 나타나는 마차라든지, 하늘을 나는 마차 같은 건 신기함 그 자체일 테니까.
아무리 게임에서 봤고, 이런 게 실존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막상 자기 눈으로 봤을 때의 느낌은 다른 법이었다.
“가자.”
유진과 유리아가 마차 위에 올라 나란히 앉은 것을 확인한 유더는 다시 한번 미간을 좁혔지만 무어라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유리아한테 꼰대라 불리기 싫은 건가.’
새삼 얼마 전 루카스가 비비안에게 꼰대 소리 들었다며 좌절한 이유를 알 것 같은 유더였다.
‘아무튼, 가자.’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수줍게 웃고 있는 유진과 유리아.
십여 년 전의 누구누구를 꼭 닮은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
‘마이아랑 달리아한테 더 잘해줘야지.’
새삼스러운 결심을 마친 유더는 팬텀스티드들을 출발시켰다.
* * *
“오빠, 내일 또 봐요. 알았죠?”
“응, 내일 꼭.”
두 손을 꼭 잡고 하는 유리아의 말에 유진은 반사적으로 답하는 것과 동시에 마음을 정말 굳게 먹었다.
옆에서 자신을 째려보는 유더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유더를 째려보며 작작 하라는 눈빛을 보내는 코델리아의 시선과 어쩐지 모르게 후훗 하고 웃고 있는 강진호의 시선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유진이었다.
“후우…… 정말 너무 아쉬워요. 오빠도 그렇죠?”
“응, 나도. 정말.”
비비안이 들었다면 ‘야, 너네 같은 저택에 묵잖아! 방만 다른 거잖아!’라고 소리쳤겠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 없는 것뿐만 아니라 동생들 재우느라 정신이 없는 그녀였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침대 위에서 아홉 남매가 함께 잠을 자곤 하는 흐레스벨그 백작가였는데, 서로 비비안 옆에서 자겠다고 다투는 통에 매번 혼란한 잠자리였다.
어찌 되었든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사정과는 별개로 자꾸만 질질질 이어지는 유진과 유리아의 작별 인사에 어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유진의 뒷목을 유더가 잡아끌려 하는 것을 강진호가 제지하는 것과 동시에 코델리아가 유리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홍유희 역시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가서 자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자세히 알려주고.
코델리아와 홍유희의 눈빛에 유진과 유리아는 둘 다 얼굴을 붉혔고, 그 모습에 유더는 다시 한번 한숨을 토했다.
강진호는 이번에도 후후훗 기꺼운 미소를 지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유리아와 레지나가 서로의 운명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그때, 유진 역시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유리아와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기도 했지만, 헤어지기 직전에 유더가 머릿속에 직접 던진 말 때문이기도 하였다.
-내일 아침, 나와 같이 아버님을 뵈러 갈 거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유리아의 아버님인 유더의 아버님.
즉, 대 체이스 백작.
처가댁(?)의 진정한 최종보스.
‘괜찮아, 두렵지 않아.’
유리아를 위해서라면.
유진은 두 주먹을 꼭 쥔 채 결의를 다졌고, 다시 한번 토끼 머리띠를 쓴 유리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다음 날 아침.
간밤에 잠을 거의 못 잔 유진이었지만 오늘은 늦잠을 자네 마네 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벼락처럼 일어난 유진은 깨끗이 씻은 뒤 아침을 먹자마자 나타샤의 도움을 받아 그야말로 꽃단장을 했다.
“고모, 늘 고마워요.”
“그래, 수틀리면 고모랑 결혼하면 되니까 너무 떨지 말고. 알았지?”
“응!”
언제 또 갖고 왔는지 모를 계약서를 흔드는 나타샤에게 환히 웃으며 답한 유진은 강진호, 홍유희와 함께 유더의 방문을 기다렸다.
“준비됐나?”
마이아와 함께 불쑥 나타난 유더의 물음에 유진은 관등성명을 요구받은 병사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준비됐습니다!”
“쯧, 그래. 그럼 가자.”
어차피 한 저택에서 묵고 있는 일행이었다.
체이스 백작 역시 같은 저택에 묵고 있었으니 몇 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유더가 앞장서고 마이아가 그 뒤를 따랐다.
강진호와 홍유희는 함께 가진 않았지만 유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으로 응원을 하였고, 유진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대로 뚜벅뚜벅.
말없이 걷기 시작한 뒤 얼마나 지났을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체이스 백작님은 좋은 분이시랍니다. 우리 도련님만큼이나요.”
마이아가 유진을 돌아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유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아가 예뻐도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제일 예쁜 건 유리아지만.’
그런 유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이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빙글빙글 웃었고, 유더는 다시 한번 미간을 구겼다.
‘마이아, 지금 즐기고 있는 거 맞지?’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요.’
유진에게 나타샤가 있다면 유리아에게는 마이아가 있었다.
유리아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몇 번이나 들은 마이아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 다시 미소를 흘렸고, 유더는 업보라는 게 무엇인지를 새삼 다시 깨달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몇 분.
체이스 백작이 묵고 있는 본관의 큰 방문 앞에 도착한 일행을 맞이한 것은 달리아였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다운 엄격한 표정으로 문 앞을 지키던 달리아의 말에 마이아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 멈춰 섰고, 유더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유진에게 말했다.
“들어가자.”
“넵!”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답한 유진은 오늘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마른침을 삼켰다.
마이아와 달리아는 눈빛을 교환한 뒤 소리 없이 까르르 웃었고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입장.
“아버님, 데려왔습니다.”
유더의 나직한 목소리에 창가에 서 있던 거대한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아더 체이스.
대 체이스 백작.
코델리아 교단의 천사들 가운데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붉은 폭풍의 천사.
그는 분명 마법사였지만 여간한 전사들 이상으로 크고 강건한 육신을 갖고 있었다.
2미터에 달하는 큰 기와 다부진 어깨, 실전에서 단련된 것 같은 단단한 근육들까지.
“흥, 늦었구나.”
엄격함에 약간의 싸늘함이 어린 것 같은 목소리였다.
유더는 그에 대해 별다른 대답을 하는 대신 조용히 유진의 등을 밀었고, 유진은 거칠어지려는 숨결을 애써 가다듬은 뒤 체이스 백작에게 다가섰다.
“강유진입니다.”
플레이아데스에 오기 전에 열심히 연습했던 예법대로 예를 표하며 이름을 밝혔다.
하지만 체이스 백작은 바로 무어라 답하는 대신 그런 유진을 그저 가만히 내려볼 뿐이었다.
마치 채점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체이스 백작이다.”
유진이 예를 표하고 1분 남짓.
무겁게 말한 체이스 백작은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고, 유진은 딱딱한 얼굴로 뻣뻣한 발걸음을 내디뎌 의자에 착석했다.
그리고 다시 체이스 백작과 유더.
체이스 백작은 유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유더는 자리에 앉는 대신 유진의 등 뒤에 섰다.
그리하여 완성된 체이스 백작과 유더의 포위진.
앞뒤로 쏟아지는 프레셔에 질식할 것만 같은 유진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몇 초.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났을 때.
“어제 이야기를 들었다. 유리아가 널 안고 뛰어내렸다고?”
“그…… 넵. 그랬습니다.”
“쯧, 못난 녀석.”
체이스 백작의 눈빛과 목소리에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유리아를 안는 게 아니라 안겼다는 사실이 새삼 창피한 것도 있었지만, 체이스 백작의 반응이 너무나 싸늘했기 때문이다.
끝났다.
시작부터 조지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근력을 강화시켜 주는 열매다. 내 주변에 있는 건 이미 힘이 넘치다 못해 흐르는 놈들뿐이니 쓸모가 없다. 가져가거라.”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유진은 눈을 껌벅이며 체이스 백작이 내민 작은 상자를 반사적으로 받았고, 지금 바로 열어보라는 체이스 백작의 눈빛에 꿀꺽 침을 삼킨 뒤 상자를 열었다.
‘히, 힘의 열매!’
실물을 본 건 처음이었지만 게임에서 이미 수십 번도 넘게 본 아이템이었다.
이름 그대로 먹은 사람의 힘을 영구적으로 소폭 증가시켜 주는 열매!
“그리고, 키메라가 나타났을 때도 오히려 유리아가 널 지켜줬다고?”
체이스 백작은 다시 차갑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유진은 아까처럼 바짝 쫄지 않았다.
유리아를 지키기는커녕 지켜졌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과 별개로 묘한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비리비리한 녀석. 옛날의 누구를 보는 것 같구나.”
쯧 하고 혀를 찬 체이스 백작은 다시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고, 유진은 기대 섞인 눈으로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유더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모두 다 알고 있는 원조 사위는.
‘아버님…….’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