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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57화 (457/473)

엔딩메이커 456화

SS #37 강유진(9)

“체격이 너무 왜소하군. 키도 너무 작아.”

“이 가느다란 팔은 뭐냐. 이런 팔이라면 작은 고양이 하나 들기도 어려울 거다.”

“마나양도 너무 적군.”

“머리 모양이 촌스러워.”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것이냐?”

“부족해, 너무나 부족해. 수련 부족이 눈에 보일 지경이다.”

“손톱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체이스 백작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고, 처음에는 제법 그럴싸하던 내용도 가면 갈수록 단순한 트집 잡기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 모든 멸시(?)를 받는 와중에도 유진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고 또 밝았다.

유진이 속없는 멍청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리아의 외할아버지 앞이니 무슨 소리를 들어도 웃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러운 미소.

오히려 너무 좋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기분 좋은 상태.

유진이 괴롭힘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인 것은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서 유리아의 속이 뻔히 보이는 가짜 매도라면 모를까, 체이스 백작처럼 덩치도 크고 무섭게 생긴 중년 남성의 매도에 기뻐할 정도로 뒤틀린 취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유진이었다.

그렇다면 유진은 왜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체, 체이스 백작님 최고!’

심증이 아닌 물증이 있었다.

유진의 눈앞에 수북이 쌓인 각종 상자들.

그리고 그 안에 예쁘게 자리하고 있는 각종 아이템들.

‘아이템 구성 완전 미쳤어.’

소폭이지만 영구적으로 힘을 증가시켜 주는 힘의 열매가 최하위 티어에 속할 정도로 미친 아이템 구성이었다.

정말 이런 것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영웅전기2 후반에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레어한 아이템들도 섞여 있는데?

영웅전기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유진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템들을 전부 모으면 성을 하나도 아니고 한 다스 정도는 우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버님…….’

유더는 유진 앞에 쌓이고 있는 상자들을 보며 참으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유더 자신이 한창 받을 때보다 엄청나게 업그레이드된 선물 구성.

사실 구성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다.

십여 년 전의 체이스 백작과 지금의 체이스 백작은 힘과 위상, 재산 등등 모든 것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유더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하나.

‘너무 빨리 인정하시는 거 아닌가요?’

눈앞의 꼬맹이와 유리아가 만난 게 겨우 하루인데!

유더 자신과는 경우가 달랐다.

유더 자신은 체이스 백작이 직접 태중 혼약의 상대로 지목한 인물이었고, 코델리아와의 약혼 관계도 십여 년 이상 유지한 진짜배기 약혼자였다.

그러니 바로 쿨하게 관계를 인정하고 오히려 뒤에서 밀어주는 것 역시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어떠한가.

경우가 전혀 다르지 않던가!

스칼렛이 들었다면 ‘그게 그거 같은데?’라는 말을 했을 터였지만 유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태중 혼약이라 해서 전부 똑같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더, 뭔가 불만이라도 있나?]

체이스 백작에게서 날아온 날카로운 메시지 마법에 유더는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전음을 보냈다.

[아버님, 일단 이 녀석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어리석은 녀석. 이미 중요한 것들은 전부 알아보지 않았더냐.]

[네?]

[조사는 이 녀석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충분히 했다. 그리고…… 쯧, 어리석은 녀석.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구나.]

체이스 백작의 못마땅하다는 표정에 유더는 미간을 좁히며 당황했다.

플레이아데스의 수호자이자 코델리아 교단의 교황으로 사는 유더인 만큼 이런 식의 면박을 들어본 것이 꽤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무엇일까.

체이스 백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유더는 궁리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체이스 백작이 바로 정답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유리아가 좋다고 하지 않느냐.]

유리아가 좋다고 했다.

당사자인 유리아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이 세상 누구보다 예쁘고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우리 유리아가 좋다고 했다.

체이스 백작의 당당한 주장에 유더는 순간 흠칫하더니 눈빛을 달리했다.

한 가지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설마 유리아가 다녀간 건가?!’

숙소에 데려온 뒤 침대에 들어가는 것까지 봤는데, 설마 그다음에 방에서 빠져나와 아버님을 찾아간 것이었나.

‘후훗, 아빠. 할아버지가 유진 오빠 부를 게 뻔한데 내가 구경만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머릿속 어딘가에서 재생되기 시작한 유리아의 목소리에 유더는 다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내 딸이지’라는 생각과 ‘역시 내 딸인가……’라는 생각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다시 강유진.

아직 어린 터라 표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강진호보다는 홍유희를 닮은 것인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짓고 있던 녀석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고, 체이스 백작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코웃음을 치며 흥흥거렸다.

“흥, 이쯤이면 당장은 되겠지. 그만 물러가거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흥, 예법도 좀 더 익혀야겠군.”

“넵!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례까지 붙이는 유진의 모습에 체이스 백작은 다시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돌아섰다.

체이스 백작의 특유의 이제 그만 가보라는 마무리 인사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흥.”

체이스 백작은 일없다는 듯 뒤돌아선 채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이번에 받은 선물들로 업그레이드될 유진에게 필요한 새로운 물품들 리스트가 작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유더.

체이스 백작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모두 아는 유더는 어른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유진에게 말했다.

“그만 나가보자.”

“넵!”

유더에게도 크게 답한 유진은 체이스 백작이 어느새 건네준 가방에 아이템들을 쓸어 담은 뒤 유더를 따라 방을 나섰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는지요.”

달리아가 웃음기 없는, 하지만 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고, 유더는 입술을 삐쭉임으로써 마이아의 얼굴에 달콤한 미소가 깃들게 하였다.

“아무튼 가자.”

“넵!”

군인처럼 답한 유진이 유더를 따라 걷기 몇 걸음.

뒤따라 걷는 마이아가 유더와 달리아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속이 까만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유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유진.”

“넵, 아버님.”

“……교황 성하라고 불러라. 아버님 말고.”

“넵! 교황 성하!”

유진이 바로 고쳐 부르자 마이아는 소리 없이 쿡쿡 웃었고, 유더는 마이아를 돌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똑똑히 답해라.”

“넵, 교황 성하.”

“유리아의 어디가 좋은 것이냐. 대답을 잘해야 할 것이다.”

우리 집 딸 어디가 좋은 거니.

구체적으로 답해보렴.

유더의 물음에 유진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직접 만난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지만, 이미 유리아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가득 찬 유진이었기 때문이다.

“유리아는.”

운을 뗀 유진은 바로 말을 잇는 대신 숨을 한 번 골랐고, 마이아는 유더와 달리아만 알아볼 수 있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표정으로 보이지만 사실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유진를 바라보았다.

유더는 어쩐지 모르게 사냥감을 노리는 매와 같은 눈을 하였고 말이다.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본래는 이런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한 나타샤 고모와 어젯밤에 연습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여니 나온 것은 단순한 말들의 나열이었다.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부 사실인 것을!

유리아는 플레이아데스에서 제일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토끼 머리띠까지 쓰면 이미 세계 제일인데 거기서 더더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지고 말이다.

유진이 나열한 이유들은 참으로 단순했지만 그만큼 순수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랬기에 마이아는 기대되는 눈으로 유더의 뒤통수를 보았고, 유더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쯧, 겨우 그 정도인가. 참으로 얄팍하구나.”

유더의 서늘한 목소리에 유진은 흠칫하였고, 마이아는 미간을 좁혔다.

유더의 이런 모습이 새롭고 귀여워서 내버려 뒀는데 역시 전속 메이드이자 사실상의 누나로서 개입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는 넌 내가 왜 좋은데?”

여신이 나타났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적 적시로.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

그냥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나타난 그녀는 유더의 팔을 끌어안더니 자연스럽게 가슴을 밀어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정황상 계속 상황을 지켜보다가 마이아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난입한 모양이었다.

‘간만에 공격도 좀 하고!’

유더 덕분에 속이 까매진 코델리아가 빙글빙글 웃으며 묻자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야 우리 공주님의 머리칼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분홍빛이고 두 눈은 하늘처럼 맑으면서도 푸른 바다처럼 청량한데다 하얀 피부는 비단처럼 부드러우면서 기분 좋게 말캉말캉하고 입술은 꿀처럼 달콤한데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럽기까지 하고 작고 예쁜 턱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가늘고 긴 목은 사슴처럼 희고 예쁜데 거기서 이어지는 쇄골은 또 너무나 매력적이라 입술을 맞출 때마다 숨이 멎을 것 같고 동그랗고 예쁜 어깨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가슴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캉말캉하고…….”

“그, 그만! 그만 좀 해!”

“아직 반의반도 안 했는걸? 여신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비견되는 내면 묘사는 시작도 못 했고.”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이쯤에서 멈춰주세요.”

단둘이 있을 때도 부끄러울 이야기인데 마이아와 유진 앞에서라니.

얼굴만이 아니라 그냥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코델리아가 애원하자 유더는 그 모습이 더욱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듯 조금 더 속삭이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코델리아는-”

“제발! 제발! 좀 그만! 애가 보고 있잖아!”

코델리아가 그리 말하며 유진을 가리키자 유더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고, 유진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누가 봐도 ‘역시!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구나! 그냥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어!’ -라는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이상한 거 보고 배우지 마!”

필사적으로 외친 코델리아는 으으으 신음을 흘리더니 그대로 유더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무튼 유더 너 나랑 이야기 좀 해.”

“아니, 코델리아. 지금은-”

“텔레포트!”

그리고 여신이 사라졌다.

자신의 반려이자 교황이자 말썽꾸러기 남편과 함께.

“유진 님.”

“네? 네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유리아 아가씨께서 일이 이렇게 되면 유진 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신 곳이 있습니다.”

“유리아가요?”

“네, 유리아 아가씨가요.”

유더와 코델리아 중에서 유더를 훨씬 더 많이 닮은 유리아였으니까.

이 정도 사태쯤은 이미 예측하고 있던 그녀였다.

“……알겠습니다. 안내를 부탁드려요.”

“네, 유진 님.”

유진이 다부진 얼굴로 답하자 작지만 부드럽게 미소 지은 마이아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유진과 마이아가 도착한 곳은 크고 아름다운 정원 구석에 자리한 정자 앞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유리아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검푸른 머리칼의 소녀와.

그 옆에 자리한 덩치가 무척 큰 근육질의 청년과.

“흥, 쟤가 걔야?”

어쩐지 모르게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도한 소녀.

“모시겠습니다.”

마이아는 말했고, 어쩐지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유진은 활짝 웃는 유리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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