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58화 (458/473)

엔딩메이커 457화

SS #37 강유진(10)

연못 옆에 자리한 정자에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진을 보며 활짝 웃고 있는 유리아.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면서도 옆에 자리한 청년 때문인지 때때로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흘리는 검푸른 머리칼의 소녀.

그런 소녀 옆에 자리한, 그냥 바라만 봐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호방한 외모의 청년.

나란히 서 있는 쌍둥이 남매.

소녀 쪽은 지금 상황 자체가 즐겁다는 듯 우아한 와중에도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소년 쪽은 검푸른 머리칼의 소녀와 청년 쪽을 힐끔거리며 입술을 삐쭉이고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홀로 선 붉은 머리의 소녀가 하나.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선 그녀는 무척이나 도도한 표정을 지은 채 마치 상품을 재는 것 같은 눈으로 유진을 째려보고 있었다.

‘유리아의 친구들.’

모르는 얼굴도 있었지만 대체로 아는 얼굴들이었다.

영웅전기2의 퍼펙트 해피엔딩 루트를 깨면 구매할 수 있는 DLC에 짤막하게나마 등장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검푸른 머리칼의 소녀는 레지나 바이엘.’

유리아의 고모.

유더- 아니, 장인어른의 여동생.

검푸른 머리칼에 잘 어울리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유진은 생각했다.

‘역시 유리아가 제일 예쁘네.’

레지나 옆에 있는 청년은 처음 보는 인물이라 패스.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금발 남매.

‘엠버랑 에이든이겠지?’

장인어른의 형님이신 게일 바이엘의 아이들.

우아한 소녀가 엠버, 어쩐지 불만이 넘치는 소년이 에이든.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는 아닌 것 같고…… 레지나 옆에 붙어 있는 청년 때문인가?’

어찌 되었든 유진 자신을 적대하지 않는다면 일단은 괜찮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정자에 모인 이들 가운데서 유리아 다음으로 유진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 붉은 머리의 소녀.

영웅전기2의 DLC에서 본 적이 없는 소녀였지만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루카스랑 스칼렛의 딸이구나.’

그도 그럴 것이 생긴 게 미니 스칼렛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예쁘고 도도하고 새침한데 막상 친해져 보면 어마어마하게 다정한 맏언니 스타일.

더욱이 설정상의 정보대로라면 그녀는-

‘유리아의 절친……!’

그것도 그냥 절친이 아닌 사실상의 베스트 프렌드.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쪽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도 마냥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우리 유리아한테 어울리는 상대인지 알아보겠어!’-에 가까운 것 같았다.

‘좋아, 힘내자. 힘내자 강유진.’

모처럼 장인어른께서 실전 예시까지 보여주시지 않았던가.

새삼 마음을 굳게 먹은 유진은 정자 위에 올랐고, 오늘은 분홍색 드레스 대신 깨끗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유리아가 환영하듯 단번에 거리를 좁혀 왔다.

“내가 이미 말했지? 내 약혼자인 유진 오빠야.”

유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레지나는 ‘약혼자’라는 단어 자체에 반응한 것인지 수줍게 웃었고, 우아한 엠버와 뚱한 에이든 역시도 유진을 돌아보았다.

‘역시, 에이든이 저러는 건 레지나 때문이군.’

유진 자신을 보는 눈에 이렇다 할 감정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유리아 약혼자라고?’ 정도의 호기심이 다였다.

그리고 여전히 찌릿 하고 노려보는 시선이 하나.

비비안은 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엄격한 심사관의 얼굴을 하였고, 유진은 숨을 크게 한 번 삼킨 뒤 나타샤 고모와 몇 번이나 연습한 예를 표하며 말했다.

“유리아의 약혼자인 강유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리아의 약혼자’라고 말할 때 살짝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소개 같았다.

“흐흥, 우리 오빠야.”

유리아는 그리 말하며 유진의 팔을 안았고, 유진은 크게 반응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들.

“엠버 바이엘이야. 만나게 돼서 반가워. 유리아의 사촌 언니야.”

유리아보다는 네 살, 유진보다는 두 살이 많은 엠버였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일단은 존대가 기본일 터였지만 친숙함의 표시인지, 아니면 비공식적인 자리라 그런지 대뜸 말을 놓는 엠버였다.

하지만 엠버가 미녀이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우아한 미소에 친근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기분이 좋으면 좋았지 절대 나쁘지 않은 엠버의 인사였다.

“에이든 바이엘이다. 만나게 돼서 반갑다. 유리아의 사촌 오빠다.”

어쩐지 엠버에 비해서는 건성인 것 같은- 정확히는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은 에이든의 소개였지만 무난하니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레지나 바이엘이야. 유리아의 고모고. 그, 그리고 이쪽은 내 남자 친구…… 아, 아니. 그, 성별이 남자인 친구! 그, 그러니까 남자 사람 친구?인 엘윈 님이셔.”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얼굴이 빨개졌다가 당황했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레지나가 겨우겨우 말을 마치자 옆에 있던 청년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엘윈 S 파라곤입니다. 레지나 양의 남자 사람 친구입니다.”

호방한 얼굴로 시원하게 말하니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청년이었다.

굳이 남자 사람 친구라는 말을 쓴 것도 레지나를 놀리기보다는 그녀를 응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말이다.

‘조금 이상한 응원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레지나 역시 응원으로 여긴 것 같기는 했다.

뺨을 발갛게 물들인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약간이지만 자랑하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엘윈 님은 파라곤 왕국의 왕자님이셔. 진짜 왕자님.”

왕자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로 정말 왕자님.

레지나의 자랑 아닌 자랑에 엠버는 다시 웃었고, 에이든은 입술을 삐쭉였으며, 유진은 생각했다.

‘유리아도 진짜 트루 레알 프린세스인데……!’

엄마랑 아빠도 그러시지 않았던가.

유리아는 플레이아데스에서 가장 고귀한 아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유리아는 반인반신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신.

양친 모두가 신인 진정한 신의 아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문득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유진이었다.

유리아는 진짜 신의 아이인 반면 유진 자신은 천사와 사도의 아이이긴 해도 아무튼 격에서 좀 밀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장인어른의 사도였고, 어머니는 장모님의 천사였다.

즉, 현대에 비유하자면 유리아와 자신은 대기업 회장님의 따님과 회장님을 모시는 비서의 아들과 비슷한 관계였다.

코델리아가 들었다면 애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오히려 혼을 냈을 이야기였지만, 유진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거기다 눈앞의 청년.

엘윈 S 파라곤.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지고 또 멋진 진짜 상남자.

‘근육 쩔어.’

드넓은 어깨와 레지나의 허리 두께와 비슷해 보이는 팔의 근육.

-비리비리한 녀석. 작구나. 얇구나. 허약하구나.

문득 체이스 백작이 입에 담았던 말들이 마구 떠오르는 유진이었다.

유진 자신도 저렇게 키가 크고 근육질이었다면 유리아에게 안기는 것이 아니라 유리아를 안았을 텐데.

키메라에게서도 유리아를 지켜줬을 텐데.

‘돌아가면 바로 수련해야지.’

갈 길이 멀다.

체이스 백작님이 주신 영약들 전부 먹고 하루빨리 강해져야 한다.

유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을 굳게 먹었고, 그런 유진을 계속 살피던 비비안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비비안 흐레스벨그야. 유리아의 제일 친한 친구고. 그래서 묻는 건데, 유리아 어디가 좋은 거야?”

인사에서 이어진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공격이다.

이미 한 번 당해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알렉세이의 가르침.

위기는 곧 기회이니 언제 어느 때고 이성과 합리를 유지해라.

알렉세이의 말대로였다.

유리아의 베프인 비비안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만 있다면 단번에 유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다 직전에 정답까지 보았으니까!’

장인어른께서 몸소 보여주신 정답지.

유진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 안 돼! 무리야!’

유리아의 좋은 점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을 가득 채울 만큼 다양한 것들이 떠오르는 유진이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부끄럽다.

민망하다.

유리아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남들이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장인어른……!’

유진은 새삼 장인어른의 대단함을 실감했다.

그리고 장인어른께서 얼마나 장모님을 사랑하시는지 역시 깨달았고 말이다.

‘아직 수행이 부족해!’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빠?]

머릿속에 들려온 유리아의 목소리에 유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저예요, 유리아. 메시지 마법으로 말 걸고 있어요. 오빠랑 저를 연결해놨으니 오빠도 제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이, 이렇게?]

[네, 그렇게요. 비비안의 질문이 난처한 거면 굳이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유리아는 부담 갖지 말라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지만 홍유희의 피를 이은 유진은 그 순간 직감했다.

‘서운해하고 있어!’

괜찮다고 말하지만 섭섭하다.

그러니 이대로 ‘알았어’라고 맥없이 답하면 절대로 아니 된다.

[유, 유리아!]

[네, 오빠.]

[유리아는-!]

그리고 유진은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생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유리아에게 전달하였다.

아직 표현적인 면에서 유더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 열정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유진이었다.

[그, 그만…….]

유더에게 뻔뻔함을 물려받은 유리아였지만 그래도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완전히 빨개진 얼굴로 유리아는 몸을 비비 꼬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고, 유진은 그런 유리아에게 막타를 가하듯이 더욱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던 비비안은 더욱 인상을 구기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야 저것들은?’

메시지 마법을 나누는 게 분명해 보이긴 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비비안의 의문이 깊어지고 유리아의 얼굴을 넘어 목과 가슴까지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

저택에서는 예상치 못한 뜻밖의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비비안! 비비안!”

다소 높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스칼렛 흐레스벨그.

흐레스벨그 백작의 제2부인이자 십검호의 일원인 ‘선혈의 여왕’.

하지만 그녀의 신분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대의 로그 마스터인 동시에 비비안을 필두로 한 아홉 남매의(친자식은 둘뿐이었지만) 어머니였다.

“스칼렛, 사용인들한테 물어보니까 정자 쪽으로 이동한 모양이야.”

카이사 흐레스벨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1부인인 동시에 남부의 해왕이라 불리는 당대의 여걸.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실상 자매나 다름없는 그녀의 말에 스칼렛은 미간을 좁혔다.

“후, 어쩔 수 없겠네 그럼. 이제 와서 찾아가긴 뭐하니 다녀오면 이야기해야지.”

아이들끼리 노는데 어른이 난입해서 좋을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머리를 흔들며 돌아선 스칼렛은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홉 남매의 아버지인 루카스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카스? 거기 뭐라도 있어?”

물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스칼렛의 말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저이가 저렇게 집중하다니.

하지만 아주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빌트바인 영웅전 신간을 집어 들 때마다 저런 상태에 빠지곤 한 루카스였으니 말이다.

‘카이사, 가보자.’

스칼렛의 눈짓에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테이블 앞에 석상처럼 서 있는 루카스에게 다가섰다.

“책? 아니, 노트인가?”

테이블 위에는 노트 한 권이 펼쳐져 있었는데, 루카스가 일부러 열어본 것 같지는 않았다.

바람에 밀려 펼쳐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무슨 내용인데 그러지?’

루카스의 정신도 차리게 할 겸, 스칼렛은 루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노트에 쓰인 글귀를 따라 읽어보았다.

처음 보는 내용이었지만 익숙한 단어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빌트바인 영웅전…… 의 팬픽?’

루카스 덕분에 빌트바인 영웅전을 벌써 몇 번이나 완독한 스칼렛이었다.

눈앞의 내용은 완전히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독자가 쓴 팬픽일 가능성이 높았다.

스칼렛이 동의를 구하듯 카이사를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루카스 덕에 빌트바인 영웅전의 애독자가 된 카이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니, 단순히 팬픽이 아냐.”

낮은 목소리로 무척이나 진지하게 말한 루카스는 그대로 손을 내려 노트의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이 문체, 이 대사…… 이건 설마……?!”

바로 그 순간.

세일룬 왕국 최강의 검호인 동시에 하늘의 검성이자 빌트바인 영웅전의 대륙제일팬인 루카스가 어떤 사실을 명백히 하려 한 그때.

“봐버렸군.”

어느새 창가에 모인 갈까마귀들 사이로 검귀 카마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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