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59화 (459/473)

엔딩메이커 458화

SS #37 강유진(11)

검귀 카마엘.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가운데 하나.

검술에 있어서만은 천무지체와 비견되는 재능인 절대검감의 소유자.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네 명의 검사들을 의미하는 대륙사대검 가운데 하나이자 이제는 코델리아 교단의 수호기사단으로 거듭난 성십자 수호단의 전(前) 필두단장.

파라곤 왕국의 근위기사단장인 그는 극한지기의 사용자답게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과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는 외모가 돋보이는 치장 같은 것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칠흑의 의복과 망토.

항상 몰고 다니는 갈까마귀들과 같이 전신을 칠흑으로 뒤덮은 그의 허리춤에는 두 자루 명검이 매달려 있었다.

마도왕국 엔델리온의 유산인 달의 마검 아샨타와 극한의 힘을 담고 있는 동방의 마검인 극한청룡검.

하나하나가 대륙사대검의 위명에 어울리는 국보급 보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검귀 카마엘.

그가 창가에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제나처럼 갈까마귀들과 함께 난입하듯 나타나 이쪽을 주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칼렛은 마른침을 삼켰고, 카이사 역시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봐버렸군.”

카마엘이 말하였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갑고, 나직하며, 감미로운 미성이었지만 스칼렛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와 달라?’

당대의 로그마스터인 그녀는 사람의 심리를 읽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사전 답사는 좋은 도둑의 미덕이었고, 사전 답사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지형지물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았다.

물건을 가진 주인을 읽는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카마엘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감미로운 미성일지언정 이렇다 할 감정을 담고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스칼렛은 단언할 수 있었다.

카마엘은 동요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아니- 주의 깊게 들어도 놓치기 쉬울 정도의 작은 차이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갖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탄식…… 아니, 해방감? 약간의 기대? 들뜸? 흥분?’

반사적인 분석을 이어가면서도 스칼렛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지난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카마엘을 마주하며 몇 번 느껴본 적 없는 희소한 감정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방금 한 말.’

봐버렸군.

무엇을 보았는지는 명백했다.

루카스가 손에 든 노트.

정갈한 글씨체로 빌트바인전의 팬픽이 쓰여 있는.

‘아니, 잠깐.’

정말로 팬픽인 걸까?

카마엘이 난입하기 직전 루카스가 꺼내려던 말.

세일룬 왕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빌트바인전을 가장 좋아하는 남자가 간파한 어떤 사실.

‘이런 미친?’

설마가 아닌 미친이었다.

스칼렛의 영민한 두뇌는 한 가지 사실을 도출해 냈고, 스칼렛은 확신했다.

저 짐승 같은 코델리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제법 날카로운- 아니, 세일룬 왕국 제일을 자부할 수 있는 로그마스터의- 여자의 감이었다.

검귀 카마엘은-

“카마엘 님.”

루카스의 목소리가 생각을 앞섰다.

스칼렛이 어떤 사실을 문장으로 확정하기 직전에 꺼내진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집중하였다.

상황과 분위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루카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마치 난적을 마주했을 때처럼 긴장의 빛을 띠고 있었다.

“이, 노트는…….”

루카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카이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스칼렛은 식은땀이 날 것 같은 상황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마른침을 삼킨 뒤 카마엘 쪽을 돌아보았다.

루카스에게 있어 중요한 일은 스칼렛 자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더욱이 십 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루카스 때문에 보기 시작한 빌트바인 영웅전이었지만 지금은 스칼렛 자신도 나름 빌트바인 영웅전의 애독자가 된 상태였다.

그랬기에 스칼렛은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상황증거와 감으로 한 가지 사실을 도출한 상황이었지만, 온전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카마엘의 입술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카마엘이 입을 열었다.

“유리아가 잘못 가져간 것 같다.”

이 노트가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이유.

타당했다.

카마엘은 유리아의 검술 스승이었으니까.

스승을 존경하고 동경하는 유리아가 스승과 같은 노트를 구입해 사용하다가 실수로 노트가 섞였다.

순식간에 한 가지 가설을 세운 스칼렛은 다시 카마엘에게 집중하였고, 그의 입에서 다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수하러 왔지만…… 너무 늦은 것 같군.”

일부러 가지러 왔다.

유리아에게 가져오라고 하면 되는 것을 직접 움직여서 가지러 왔다.

그것도 급하게.

정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창가를 통해서.

마치 노트가 뒤섞였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고 싶은 것처럼.

자신이 노트의 주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감추고 싶은 것처럼.

‘역시.’

스칼렛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의 가설이 진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역시 팬픽 쓴 게 쪽팔린 거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해. 평소 이미지라는 게 있으니까?]

카이사가 보내온 전음에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아니, 내 말이 맞잖아. 팬픽이라니. 음…… 부끄럽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일기장 들킨 것처럼?]

더욱이 그 팬픽을 다른 누구도 아닌 빌트바인 영웅전의 대륙제일팬인 루카스에게 들켰으니 얼마나 민망할까.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그래서일 테고. 음음.]

카이사의 주장에 스칼렛은 어이가 없었다.

애가 짐승인 건 정말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니, 명색이 짐승이라는 애가 감이 이렇게 떨어져도 되는 것일까?

[야, 카이사.]

[응?]

카이사가 고개를 갸웃한 그때였다.

“카마엘 님.”

루카스가 다시 입을 열었고, 스칼렛과 카이사는 서로를 보는 대신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루카스는 자신의 사랑하는 부인들 대신 카마엘만을 똑바로 마주한 채 주먹을 꽉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 어쩐지 모를 배신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똑똑히 말하였다.

“빌트바인 영웅전의 작가님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그래, 내가…… 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사실을 인정하려던 카마엘은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반응에 루카스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는지 더욱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단언했다.

“역시, 그랬군요. 이 노트는 빌트바인 영웅전의 작가님이신 사누딜 님의 것……. 그리고 카마엘 님은 그런 사누딜 님의 노트를 미리 받아서 검토해 볼 정도의 친분을 가진…… 헉! 설마 편집자?!”

“그…… 어…… 음…….”

루카스의 주장에 다시 당황한 얼굴로 삐걱거린 카마엘은 결국 말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고개만 가로저었다.

도리도리.

편집자는 아니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럼 혹시 자문 역할을? 아, 과연. 이해가 됩니다. 사누딜 님의 전투 묘사는 실로 생생하니까요. 마치 본인이 절정의 검사인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는 듯 희열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루카스의 모습에 카마엘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고, 생전 처음 보는 검귀 카마엘의 당황한 모습에 카이사는 어쩐지 모르게 신이 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그랬구나. 나도 이제 알겠어. 역시 루카스는 감이 좋다니까?]

[아니…… 아니, 됐다. 말을 말자.]

[왜?]

[아냐, 음…… 인정할게. 나랑 루카스만큼이나 천생연분이야 너는.]

[???]

이마에 손을 짚으며 어지럽다는 표정을 짓는 스칼렛의 모습에 카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흥분해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던 루카스가 돌연 눈을 번쩍하고 떴다.

“헉! 설마! 루스카! 루스카의 캐릭터 조형은…… 카마엘 님이 말씀해 주신 겁니까?!

루스카 폰그레이브.

재앙전쟁 이후 출간된 빌트바인 영웅전에 새로이 등장한 남성 캐릭터.

그렇게까지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었지만, 잊을 만하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해 비중을 챙겨 간 터라 빌트바인 영웅전의 팬들에게 꽤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루스카 폰그레이브의 캐릭터 조형.

루카스는 이전부터 생각해 왔다.

루스카의 모델은 루카스 자신이지 않을까.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지만, 사누딜 님께서 자신을 보고 만드신 캐릭터가 아닐까.

근거라면 여러 가지가 있었다.

루스카의 외형, 성격, 사용하는 검술.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인이 두 명이라는 사실까지도!

더욱이 그 부인들의 모델은 각각 스칼렛과 카이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을 닮아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우연이 아닐까 생각해 왔다.

우연이 아니라면 나름대로 유명한 자신을 사누딜 님께서 모델로 사용하신 것이 아닐까- 하며 기분 좋은 망상에 빠져들고는 하였다.

그런데 카마엘 님이 사누딜 님의 지인이라면.

카마엘 님께서 사누딜 님께 루카스 자신의 이야기를 하신 거라면.

기대로 가득 찬 루카스의 맑고 푸른 눈을 마주한 카마엘은 식은땀에 이어 신음까지 흘리더니 평소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단 네가 모델이긴 하다.”

“역시! 역시!”

루카스의 두 눈에서 기쁨이 폭발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그 모습에 카마엘은 다시 참으로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는 기뻐하는 루카스의 모습에 미간을 좁히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스칼렛, 사누딜이란 작가가 혹시 여자면 어떡하지?]

지금까지는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는 상관이 있었다.

루카스가 카마엘을 통해 사누딜과의 만남을 가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스를 모델로 한 캐릭터까지 만들다니.

사누딜은 루카스에게 관심이 많은 게 아닐까?

그런데 그런 사누딜이 혹시 여자라면, 그리고 미인이라면-

[아니, 아니. 절대 아냐. 가능성 없어.]

[필체랑 글의 분위기 때문에? 하지만 여자인데 남자처럼 쓰는 사람도 많잖아. 당장 내가 가진 컬렉션 중에도…….]

[아냐, 아냐. 절대 아냐. 그리고 야설 모음 내가 없애라고 안 했어? 비비안이랑 애들이 혹시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아니, 그래도 나랑 청춘을 함께한 보물들이자 교과서들인데…….]

카이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스칼렛은 순간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지만 잠깐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카이사도, 카이사의 야설 콜렉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마엘을 사누딜의 지인이라 확신한 루카스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카마엘.

‘지인이 맞긴 맞지.’

카마엘은 사누딜의 지인이다.

지인일 수밖에 없다.

‘이거 나라도 좀 나서야 하나?’

스칼렛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카마엘 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평생의 소원입니다. 혹시…….”

루카스가 꺼내려는 말.

알 수 있었다.

사누딜을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스칼렛은 반사적으로 카마엘을 돌아보았고, 카마엘은 현기증이 심해진 듯 잠깐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자세를 바르게 하였다.

그리고 한 차례 눈을 꽉 감더니 짧은 순간이지만 수많은 감정들을 동시에 표출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요.

평온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서 만들어진 것 같은, 어째 기진맥진한 얼굴이 된 카마엘은 영혼이 가출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다.”

“네?”

“내가…… 빌트바인 영웅전의 작가 사누딜이다.”

스칼렛이 쓰게 웃고, 카이사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때.

루카스의 숨이 멈추었다.

* * *

유리아는 기다란 의자에 반쯤 눕듯이 앉아 가쁜 숨을 토했다.

열이라도 올랐는지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붉은 상태였는데, 아파 보이는 것과 별개로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유, 유진 오빠 바보.’

유진이 머릿속으로 쏟아낸 온갖 이야기들.

표현이 거칠었고, 어휘도 부족하였다.

결국 같은 말의 반복인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만큼 미숙하고 거칠었기에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난 지 고작 이틀째였지만 유진이 유리아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신에게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말이다.

‘물론 난 이틀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유리아가 녹아내리고 있을 때, 다른 아이들은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 한 판! 한 판만 더!”

“알겠습니다.”

엘윈에게 팔씨름 18연패를 당한 에이든의 모습을 보며 엠버는 짧게 말했다.

“……추해.”

나이가 네 살이나 어린 애한테, 그것도 레지나를 채가려는 놈에게 질 수 없다며 열심히 덤비고 있는 에이든이었지만 승패는 그냥 둘의 팔뚝 굵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역효과잖아.’

스트랭스 마법조차 가뿐히 짓밟는 엘윈의 모습에 레지나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니까.

“잡으시죠.”

“크윽! 이번에는 반드시!”

엘윈과 에이든이 손을 잡자 엠버와 레지나, 그리고 옆에서 구경하던 유진은 다시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한 명.

의자에 앉아 행복감에 젖어 있는 유리아 외에도 두 사람의 팔씨름에 별반 관심이 없는 이가 하나 있었다.

‘슬슬 돌아갈 때 안 됐나? 월터 보고 싶은데.’

배도 좀 고프고.

동생들 잘 있는지도 걱정되고.

비비안이 그리 생각하며 동생들과의 단체 그림이 들어 있는 손거울의 뚜껑을 찰칵하고 열었을 때였다.

“누나! 누나!”

“월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동생의 목소리에 비비안은 활짝 웃으며 돌아섰지만 잠깐뿐이었다.

땀에 젖은 월터의 얼굴에 ‘역시 언제 봐도 잘생겼어! 우리 월터 최고!’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월터의 표정에서 읽어냈기 때문이다.

다급함.

위급함.

“무슨 일이야?!”

설마 동생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두 어머니들보다도 더 아이들의 엄마 같은 비비안이 기세를 날카로이 하며 묻자 월터는 거친 숨을 토하며 답했다.

“동생들 일 아니야. 아버지 일이야!”

“아버지?”

동생들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일단 안도한 스칼렛이었지만 바로 머리를 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세일룬 왕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이자 비비안 자신의 빌트바인인 아버지께 대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일까.

비비안뿐만 아니라 정자에 모여 있던 아이들은 모두 월터에게 시선을 집중하였고, 월터는 다시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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