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59화
SS #37 강유진(12)
건국기념회가 한창인 왕도는 간밤에 있었던 무도회 이야기로 가득하였다.
건국기념회의 주체인 왕실의 입장에서는 몹시 바람직한 상태였지만, 왕국의 재상이자 현 국왕의 제일가는 추종자인 디온 대공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기념회의 주인공은 누님이셔야 하거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이미 1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받은 것은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왕도의 주민들 대부분이 떠들고 있는 것은 다프네 왕의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현명함, 기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른 이야기들.
이를테면 어젯밤 무도회에 등장해 역사를 재현한 여신의 화신과 화신의 반려의 춤 이야기라든지, 전설의 야반도주를 재현한 화신의 딸이라든지.
“너무 화내지 마렴, 좋은 게 좋은 거잖니.”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아니, 오히려 농익은 매력을 물씬 풍기는 다프네 왕의 말에 디온 대공은 그래도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삐쭉였다.
“이렇게나 아름답고 자비로운 누님이신데…….”
“그래, 그래. 네 말대로 난 아름답고 자비로우니까. 그리고 디온 네가 그걸 알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이야.”
어린애 달래듯 다정하게 말한 다프네 왕은 서른이 넘은 지금도 어린 시절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동생의 모습에 새삼 다시 미소 짓고는 왕좌에 몸을 늘어뜨렸다.
“아무튼 화신의 저택 쪽은 어때? 어제의 소동 때문에 시끌시끌하겠지?”
“누님도 알다시피 교황은 집착이 강한 자니까. 끔찍한 딸바보기도 하고.”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디온의 모습에 다시 미소를 지은 다프네는 잠시 눈을 감고 어제 본 광경을 떠올려 보았다.
유진 공자는 신사이니 괜찮을 거라며 자기보다 큰 사내아이를 품에 안고 발코니 밖으로 몸을 날리던 흑발의 소녀.
‘유리아.’
유리아 어거스트 바이엘.
태양의 여신과 플레이아데스의 수호신 사이에서 태어난,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소녀.
유리아에 대해서라면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다프네의 관심은 유리아보다는 유리아의 품에 안겨 있던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유진 공자.
갑자기 나타난 소년.
그 아이는 누구일까.
어떤 아이길래 유리아와 그런 관계를 갖게 된 것일까.
길고 풍성한 금발을 장난감처럼 만지며 고민하던 다프네는 다시 미소를 흘렸다.
내일부터 이어질 건국기념회 행사들에 새로운 즐거움이 추가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다프네 왕과 디온 대공이 소소한 담소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
화신의 저택은 유리아와 그 약혼자의 야간도주가 아닌 다른 사건으로 인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화신의 저택.
정확히는 화신의 저택 바로 옆에 자리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저택.
비비안은 눈물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하나.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흐레스벨그 백작이 선 채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이유.
“패, 팬이에요!”
두 손을 모아 쥔 비비안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그녀의 뒤에 도열해 있던 동생들 역시도 거의 비슷한 얼굴로 거의 흡사한 대사를 입에 담고 있었다.
그랬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
태어나기 전부터- 그러니까 태교로 빌트바인 영웅전을 사용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 아이들은 가정교육 자체를 빌트바인 영웅전으로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진이 영웅전기로 가정교육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렇기에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은 모두 빌트바인 영웅전을 좋아- 아니, 사랑했다.
신간이 나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점 앞에 쪼르르 달려가 줄을 섰고, 손에 넣은 신간을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목욕재계를 하였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모두 빌트바인 영웅전을 좋아하는 흐레스벨그 백작가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빌트바인 영웅전을 좋아하는 것은 역시 장녀인 비비안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빌트바인 영웅전과 함께한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옹알이를 하던 시절부터 흐레스벨그 백작이 읽어주는 빌트바인 영웅전을 듣고 자란 그녀는 동생들의 잠자리에서 동화책 대신 빌트바인 영웅전을 읽어주었고, 레지나나 유리아 같은 친구들을 만날 때 외에는 동생들과 ‘빌트바인 랜드’에서 빌트바인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레지나가 하도 질색을 해서 티는 잘 안 내지만 비비안이 제일 좋아하는 취미는 사랑하는 동생인 월터를 빌트바인처럼 꾸미는 일이었다.
그런 비비안에게 있어 빌트바인 영웅전의 작가인 사누딜은 신 그 자체였다.
빌트바인 영웅전을 만드신 분.
빌트바인을 비롯한 모두를 창조하신 분.
그런데 그 신이 눈앞에 있다?
비비안에게 중요한 것은 카마엘이 사누딜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빌트바인 영웅전의 작가가 눈앞에 강림했다는 사건 그 자체였다.
비비안은 동생들과 함께 열심히 신앙을 간증했고, 어느새 깨어난 루카스가 그 행렬에 동참하였다.
스칼렛은 빌트바인 영웅전 19금 버전의 출시를 희망한다는 글귀를 쓰고 있던 카이사의 뒤통수를 후려쳐 중단시킨 뒤 쓴웃음을 머금었다.
‘난리네, 난리.’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
하지만 스칼렛은 알고 있었다.
지금의 소란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카마엘 님이 사누딜이었다고?!”
레지나가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그 옆에 있던 엘윈은 어젯밤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나이대에 어울리는- 그러니까 열한 살 소년 같은 모습을 보였다.
“사, 사인을 받아야.”
흥분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던 엘윈은 사인받을 책을 구입하기 위해 서둘러 서점으로 달려갔고, 레지나는 얼결에 그런 엘윈을 따라갔다.
그리고 소녀.
어찌 보면 이 모든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인 그녀는 미안함이 섞인 쓴웃음을 머금었다.
‘스승님, 결국 들키셨구나.’
카마엘이 사누딜이란 사실은 이미 진즉부터 알고 있던 유리아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유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걸렸구만.’
현재 빌트바인 영웅전이 출시되고 있는 출판사는 코델리아 상단 소속이었으니, 코델리아 상단의 지배자인 유더는 이미 진즉부터 사누딜이 카마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빠도 알고 계셨어요?’
‘그럼 몰랐겠니?’
유리아와 유진이 눈빛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홀로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코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고 있었다.
“와, 와, 와. 카마엘이? 카마엘사가?”
정말로 의외라는 듯 연신 감탄사를 토하는 코델리아를 올려다보던 유리아는 다시 유더에게 눈빛을 보냈다.
‘근데, 아빠. 엄마한테는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그거야 지금처럼 놀라는 모습을 언젠가 보기 위해서였지. 깜짝 놀라는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우니까.’
유더는 빙긋 웃으며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유리아는 약간의 딜레이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얼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부녀가 똑같이 속이 까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카마엘! 카마엘! 카마엘!”
천사 같은 여인 하나가 즐거움이 넘치는 얼굴로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강림하였고, 비비안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쉴 틈 없이 사인을 해주던 카마엘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나타난 것은 레나와 란디우스.
카마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 가장 피하고 싶은 이들이었다.
* * *
“제이나는 울면서 외쳤다. 불합리하다고. 어째서 빌트바인만이 지금처럼 희생해야 하는 것이냐고.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저 배은망덕한 것들을 위해 왜 빌트바인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냐고. 서럽게 울부짖는 소녀- 제이나의 물음에 빌트바인은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란다’.”
레나가 낭랑한 목소리로 빌트바인 영웅전을 읽어나가자 비비안을 비롯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은 수십 번도 넘게 읽은 부분이지만 새삼 감동했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렸고, 란디우스는 미소 지었으며, 카마엘은 새빨개진 얼굴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레나의 빌트바인 영웅전 낭독회.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나타나자마자 레나가 저지른 만행에 카마엘은 몸서리쳤다.
이건 암살이었다.
아니, 대놓고 저지르는 살인 행각이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우리 카마엘이 은근히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였을 줄이야.”
카마엘의 팔을 끌어안은 레나가 애교를 부리듯 우후훗 웃으며 말했다.
그야말로 천사의 미소였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카마엘은 마치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인상을 마구 구기며 레나를 외면할 따름이었다.
“있지, 있지. 빌트바인 얘 우리 란디 아니야? 옛날부터 의심했던 건데 우리 카마엘이 작가라면…… 진짜지? 응? 응응?”
레나의 계속된 공격에 카마엘은 생각했다.
‘실수했다.’
카마엘 자신이 사누딜이라는 사실을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상대가 진실을 알아버리다니.
“그럼 케이건은 설마 우리 카마엘? 이번에는 그럼 케이건과 빌트바인이 만나는 부분을 낭독해 볼까?”
천사가 아닌 악마.
성천사가 아닌 대악마.
즐거움이 가득한 얼굴로 연신 미소를 흘리던 레나는 돌연 움찔하고 몸을 경직시켰다.
수치심으로 머리가 돌아버린 카마엘이 반격을 가해서가 아니었다.
카마엘을 놀리기 위해 열심히 낭독할 부분을 찾던 중에 새삼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저기, 카마엘. 제이나는 혹시 나야?”
빌트바인은 가는 곳마다 애인을 만든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빌트바인은 결코 바람둥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제이나.
첫 번째 모험을 함께 했던 소녀.
처음 만났을 때는 작고 어린 소녀였지만, 빌트바인의 모험이 십 년 이상 계속된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으로 자라난 세기의 대마법사.
“제이나의 아름다움은 지상에 강림한 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빌트바인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은 여신과도 같은 외면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말…… 이다.”
신나게 낭독하던 레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카마엘의 얼굴 역시 그러하였다.
“이, 이쯤 할까?”
“이쯤 하지.”
이제 슬슬 일방적 공격이 아니라 상호 찌르기가 될 것 같으니.
레나는 어색하게 안고 있던 카마엘의 팔을 풀었고, 카마엘은 민망함을 달래기 위해 헛기침을 토했으며,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란디우스는 언제나처럼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건국기념회는 계속되었다.
무려 일주일 동안 이어진 축제의 나날.
유진은 어딜 가든 유리아와 함께였다.
둘이서 같이 무투회에 참가한 레지나와 비비안을 응원하였고, 팔씨름 대회에서 우승한 엘윈을 위해 박수를 쳤다.
등불이 잔뜩 걸려 대낮 같은 밤거리를 둘이 같이 거닐고, 언덕 위에 앉아 불꽃놀이를 바라보고.
신이 나서 붙어 다닌 것은 유진과 유리아만이 아니었다.
레지나는 엘윈과 함께 왕도 곳곳을 누볐고, 엠버는 그런 레지나를 스토킹하려는 에이든을 저지하기 위해 에이든과 동행하였다.
비비안은 월터를 필두로 한 동생들과 같이 웃고 떠들었고, 누나와 언니를 너무 좋아하는 동생들과 매일 밤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렇게 꿈같은 일주일이 지나 건국기념회가 마무리된 날.
유진 오빠랑 둘만의 여행을 떠납니다.
조만간 돌아올 테니 찾지 마세요.
지금 무척 행복하답니다.
유리아의 침대 위에 올라가 있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편지에 유더는 검은 늑대로 변신하려 했고,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를 말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이아와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업보’라는 말을 떠올렸고 말이다.
그리고 같은 시각, 전혀 다른 장소.
숨을 크게 삼킨 유리아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유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지구야?”
“응, 지구야.”
“공기가 나빠. 목이 따끔따끔한 기분?”
“어?”
유리아의 말에 유진은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고, 유리아는 다시 미소 지었다.
“그래도 괜찮아. 유진 오빠가 옆에 있으니까.”
공기쯤이야 뭐, 참으면 되는 거고.
유리아의 새침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에 유진은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수줍게 말했다.
“나도. 나도 유리아만 있으면 어디든 괜찮아.”
“흐흥, 그럼 오빠. 안내 부탁할게.”
“응, 맡겨만 줘.”
장조어른께서 주신 금화가 잔뜩이었으니까.
환전하는 게 좀 문제긴 했지만 예산은 충분했다.
“가자, 유리아.”
“응, 오빠.”
새삼 손을 고쳐 잡은 두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내디뎠고, 유진과 유리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돌아보았다.
해맑게 미소 지었다.
fin
건국기념회가 끝나고 다음 날.
이제 곧 언니 아니면 누나가 될 거라고 잔뜩 흥분해서 방방 뛰던 레지나와 일별한 비비안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방금 뭐라고요?”
“동생들이 태어날 거라고 했어.”
며칠 전 스칼렛이 비비안 자신을 찾았던 이유.
카마엘이 사누딜이라는 사실에 묻혀 전하지 못했던 용건.
“동생들이요?”
“응, 동생들.”
스칼렛뿐만 아니라 카이사 역시도 아이를 가졌으니까.
“늘 그랬지만, 잘 부탁할게, 우리 맏이.”
새로운 동생들.
두 명이 더해지면 열한 명이 되는 흐레스벨그 군단.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이 되었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내 다시 맏이의 얼굴이 된 그녀는 맡겨달라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린 뒤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 나올 신간으로 태교하는 건 어때요?”
“음…… 그건 좀 고민해 볼게.”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다운 제안에 스칼렛은 쓰게 웃었고, 비비안은 까르르 웃으며 새로 태어날 동생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