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60화
SS #38 2년 후, 각자의 하루
#1 고양이와 바람과 기사와
아르곤 제국과 야생의 땅의 경계에 위치한 산장.
하얀 눈이 펑펑 내려 주변 일대가 모두 하얗게 물든 설원 한가운데 놓인 산장은 마치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작은 배처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작은 몸집.
발걸음을 뗄 때마다 하얗게 새어 나오는 입김.
얼굴은커녕 성별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치 두껍게 껴입은 가죽옷과 망토.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 위를 느리지만 꾸준히 나아간 인영은 마침내 도착한 산장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하아! 씨발! 드디어 도착한 거예요!”
경애하는 주인님께 배운 감탄사를 토하며 문을 연 인영은 우수수 떨어지는 눈덩이들과 함께 산장 안에 들어오자마자 선언했고,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달라붙듯이 앉아 있던 여인은 와락 노성을 터뜨렸다.
“문 닫아라! 찬바람 들어온다!”
잠깐 사이에 들어온 바람만으로도 춥다는 듯 스스로를 끌어안으며 지른 노성에 인영은 똑같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추우면 껴입든가! 발가벗어 놓고 춥대!”
“발가벗은 거 아니다. 우리 부족 전통 복장이다. 가릴 곳은 제대로 가리고 있다. 문이나 닫는 거다!”
하늘색 머리칼을 길게 기른 늘씬한 미녀- 붉은바람에게서 재차 터진 노성에 인영- 키라라는 툴툴거리면서도 일단 문을 닫았다.
붉은바람은 둘째 치고 잠깐 사이에 들어온 눈의 양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고생했어, 이쪽에 와서 뜨거운 것 좀 마셔.”
“역시 사라밖에 없네요. 누구랑 달리 교양이 있어요.”
문을 닫고 망토를 벗은 키라라는 빙긋 웃으며 벽난로에 다가섰고, 붉은바람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라는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내어주며 나무 컵에 코코아를 따랐다.
“고양이, 왜 이렇게 늦은 건지?”
“눈보라 안 보여요? 다음부터는 진짜 회합 장소를 바꾸든가 해야지.”
정말로 힘들었다는 듯 짜증보다는 힘겨움에 가까운 한숨을 토한 키라라는 사라가 내민 코코아를 후후 불어 마셨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요. 고마워요, 사라.”
키라라의 꼬리가 절로 살랑거리자 빙긋 웃은 사라는 키라라가 벗어놓은 망토와 겉옷을 챙긴 뒤 자리에 착석했다.
“그럼 이번 회합을 시작할까?”
“좋은 거다.”
“좋아요.”
붉은바람과 키라라가 동의하자 사라는 다시 빙긋 웃더니 손바닥을 짝 하고 소리 나게 부딪혔다.
“일단 그럼 나부터. 제국은 평온해. 황제 폐하는 다음 달에 다섯 번째 황비를 들이실 예정이고, 황손분들도 모두 건강하셔.”
사라의 이야기에 키라라는 새삼 경애하는 주인님을 보며 ‘천사님! 천사님!’ 하고 쫓아다니던 소년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키라라 자신보다도 작은 꼬맹이였는데 이제는 왕창 자라 부인을 다섯이나 두다니.
‘이런 게 격세지감인 건가요.’
키라라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흘리는 사이 사라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레온도 잘 지내. 요즘엔 트리스탄이랑 그웬 데리고 낚시도 다니는데 썩 즐거운 것 같아. 트리스탄은 검보다는 활이 더 좋은 것 같은데 확실히 재능이 있어. 그웬은 수놓기를 정말 좋아하고. 트리스탄이야 본인이 기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웬은 아니니까…… 무리해서 기사로 키우지 말자는 게 일단 나랑 레온 생각이야.”
제국의 근위기사단장인 레온의 근황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자식들의 대소사로까지 이어졌다.
“그럼 다음은 내가 한다. 야생의 땅도 평온하다. 부족 간의 작은 분란이야 좀 있긴 하지만 그런 건 일상다반사다. 없는 쪽이 이상하다. 태양노래는 여전히 건강하다. 아이들도 건강한데 바람노래가 제도에 구경을 가고 싶어 한다. 사라가 도와줄 수 있나?”
“응, 얼마든지. 바람노래만이 아니라 하늘노래랑 밤노래도 데리고 와.”
“고맙다. 이번에 돌아가면 여행 준비하겠다.”
제국 근위기사단장의 부인과 야생의 땅 대족장 부인의 대화는 언제나 제국과 야생의 땅의 근황으로 시작했지만, 언제나 알맹이가 되는 것은 각자의 가정사였다.
애당초 이 모임은 거창한 정보 교류 모임이라기보다는 친목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있었던 재앙전쟁 말미의 여정으로 친해진 키라라와 사라의 모임에 어쩌다 보니 붉은노래가 합류하여 만들어진 친목회.
‘소설에서 짜투리 조연들을 한 번에 모아서 근황을 알린다! 같은…… 뭔가…… 그런 미묘한 기분이 이상하게 들지만 아무튼.’
머릿속에 순간 떠오는 기묘한 생각을 지워 버린 키라라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돌아보는 두 사람 앞에서 어깨를 으쓱인 뒤 말했다.
“신성국도 무탈해요. 주인님을 모시는 우리 코델리아 교단도 쑥쑥 성장 중이고요.”
“좋은 일이네. 그럼 키라라 너는?”
“저요?”
“응, 키라라. 아직도 만나는 사람 없어?”
사라의 은근한 물음에 키라라가 입술을 움츠리자 붉은바람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있을 리가 없다. 노처녀 고양이인 거다. 나처럼 아이를 많이 낳아서 부족의 힘을 키우는 기특한 일, 고양이는 못 한다.”
태양노래와의 사이에 아이를 여섯이나 둔 붉은바람은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야생의 땅에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미덕이었고,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어머니는 위대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붉은바람은 키라라를 마음껏 깔볼 수 있었다.
아이를 낳기는커녕 아직 만나는 사람 하나 없는 고양이였으니 말이다.
“칫, 잘난 척하기는. 카이사 언니가 너보다 훨씬 더 많이 낳았거든?”
카이사 흐레스벨그.
일부 세력에게는 다산의 여신의 화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왕국의 여걸.
“크윽…… 나도, 나도 더 낳는다. 태양노래랑 같이 힘낸다.”
“……대화가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리고 애당초 키라라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카이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쓴웃음을 지은 사라는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선교사 일은 어때? 요즘 맡고 있는 임무라든가?”
키라라는 코델리아 교단의 주교였지만 동시에 코델리아의 훌륭함을 널리 알리는 필두선교사이기도 하였다.
애당초 성왕국에 머무는 그녀가 이 먼 제국까지 와서 회합을 가지는 이유도 애당초 선교 일 때문에 제국에 올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제국도 이미 교단의 사람들이 많아져서 슬슬 동방 진출을 해야 하나 고민이긴 한데…… 전체적으로 보면 처음 말한 것처럼 순조로워요. 그리고 임무라면…… 얼마 전에 중요한 임무 하나를 수행했어요.”
“중요한?”
“네, 아주 중요한. 주인님한테 칭찬도 아주 많이 받은.”
자랑이라도 하듯 가슴을 활짝 펴며 말한 키라라는 ‘코델리아의 칭찬’에 반응한 붉은바람을 보며 씩 하고 웃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도왕국에 관한 거예요. 드디어…… 생존자를 찾았거든요.”
마도왕국 마젤란.
먼 옛날 번성했지만 지금은 왕도의 유적조차 사라진 하이엘프들의 나라.
코델리아 교단이 마젤란의 생존자들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던 사라와 붉은바람이었다.
코델리아 교단은 어째서 마젤란의 생존자를 찾고 있던 것일까.
생존자를 찾아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사라와 붉은바람은 귀를 쫑긋거리며 이야기에 집중했고, 키라라는 푸근한 얼굴이 되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2 Re: 페어리 챌린지
키라라와 붉은바람과 사라가 회합을 이어나가는 밤.
시차 때문에 아직은 오후인 왕도에서는 또 하나의 회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설욕의 때가 온 거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야외 욕탕.
아름다운 왕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을 뒤로한 채 빨간색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붉은 머리의 소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십여 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소녀의 두 어머니- 스칼렛 흐레스벨그와 카이사 흐레스벨그가 모진 굴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지켜봐 주세요, 어머니들.”
새삼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기도하는 비비안을 본 레지나는 생각했다.
‘두 분 다 살아 계시지 않아?’
재밌게 놀다 오라며 용돈도 주시고 도시락도 주시고 그랬는데.
어찌 되었든 오늘의 비비안은 같은 여자인 레지나가 봐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예쁘긴 했다.
또래보다 성숙한 몸을 감싼 비키니 수영복은 비비안의 백옥 같은 피부에 너무나 어울렸고, 붉은 머리 아래 자리한 도도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얼굴은 오늘따라 유달리 예뻐 보였다.
그리고 찰랑찰랑한, 정말로 비단같이 부드러운 붉은 머리칼은 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비비안 흐레스벨그.
14세.
두 주먹을 불끈 쥔 소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긴장 섞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입수.
따뜻한 물로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노래.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아름다운 목소리였고, 훌륭한 노래였다.
물에 젖은 비비안의 모습은 지금 당장 코델리아 교단에서 매달 출간하는 천사 화보집에 실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말이다.
하지만.
‘안 나오네.’
그랬다.
미인이 입수해서 노래하면 나온다는 페어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 어째서.”
반짝반짝 작은 별을 완창한 비비안은 정말로 분하다는 듯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붉게 물든 눈시울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고 말이다.
하지만 비비안은 비비안이었다.
정말로 엉엉 울어서 분위기를 파탄 내는 대신 그녀는 세수를 크게 한 번 하더니 성난 목소리를 토했다.
“우씨! 눈이 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십여 년 전 붉은 머리의 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뱉은 비비안은 툴툴거리며 욕탕을 빠져나왔다.
“다음은 레지나 차례야.”
“응? 나? 어…… 그냥 안 하면 안 될까?”
“안 하는 게 어딨어. 다 같이 한 번씩 하기로 했잖아. 나만 쪽팔리라고?”
‘아니, 내가 들어가서 나올 수도 있잖아. 그럼 더 쪽팔리지 않아?’
평소였다면 생각만 하지 않고 그대로 말했을 레지나였지만, 울기 직전까지 갔던 비비안의 얼굴을 본 터라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하였다.
‘그, 그리고 진짜 안 나올 수도 있고.’
하얀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레지나는 새삼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저만치 세워져 있는 휘장을-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자리하고 있을 커다란 소년을 돌아보았다.
“레지나?”
“아, 알았어. 해볼게.”
엉거주춤 일어난 레지나는 숨을 크게 삼킨 뒤 짝짝 소리 나게 뺨을 때려 정신을 집중했다.
레지나 바이엘.
15세.
“갑니다!”
또렷하게 외친 그녀는 그대로 입수했고, 비비안이 그랬던 것처럼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불렀다.
그리고.
“내가 그래서 안 한다고 했잖아!”
울상이 된 레지나의 외침에 비비안은 후- 하고 안도함과 동시에 분노했다.
‘페어리들 왜 이렇게 눈이 높아! 우리 레지나가 얼마나 귀엽고 예쁜데!’
언니 기질이 튀어나온 비비안은 애꿎은 욕탕을 매섭게 노려본 뒤 여전히 울상을 짓고 있는 레지나를 욕탕 밖으로 인도했다.
“후, 그럼 다음은…….”
이 자리에 있는 마지막 한 사람.
비비안과 레지나가 돌아본 자리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칼의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리아 어거스트 바이엘.
13세.
분홍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그녀는 비비안이나 레지나가 그랬던 것처럼 긴장하는 대신 도도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의 그녀의 발가락이 욕탕에 닿은 그 순간.
“와! 얘 진짜 예쁘다!”
“우리랑 같이 놀지 않을래?”
“우리랑 놀자. 응?”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페어리 수십 명이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노래는 아직 안 들어봤지만 알 수 있어. 엄청나게 잘할 거야.”
“쟤들은 뭐지?”
“쟤들도 예쁘긴 하네. 같이 놀아줄까?”
이쪽을 보며 하는 페어리들의 말에 비비안은 다시 한번 우씨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고, 레지나는 입술을 삐쭉였다.
사실 미모만 따지고 보면 페어리들을 불러내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오늘이 아닌 다른 날이었다면 두 사람만으로도 페어리들을 불러낼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었고, 그랬기에 페어리들의 안 그래도 높은 눈이 하늘 끝까지 높아진 상황이었다.
“여왕님들 뵈러 가자.”
“응응, 여왕님들!”
때로는 1년에 한 번, 어떨 때는 2년에 한 번.
그리고 정말로 어떨 때는 10년에 한 번.
결국 페어리들답게 아무 때나 열리는 페어리 퀸들의 대회합 날.
성왕국에서는 목욕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페어리들인 터라 이미 대회합의 날임을 알고 있던 유리아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듯 비비안과 레지나를 돌아보았고, 두 소녀는 바로 답하는 대신 휘장 너머에서 대기 중인 소년들 쪽을 돌아보았다.
놀러 갈 거면 같이 가야 했으니까.
“내가 데려올게.”
비비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는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한 페어리들에게 적당히 응답해 주며 욕탕 아래-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왕도의 시가지 쪽을 바라보았다.
놀러 간다 생각하니 새삼 떠오르는- 아니, 애당초 욕탕에 오는 내내 계속 신경 쓰이던 두 사람이 떠오른 탓이었다.
‘뭐, 잘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애당초 두 사람의 만남에 딱히 기대를 한 건 아니니까.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생각을 털어낸 유리아는 휘장 너머에서 쭈뼛쭈뼛 걸어 나오는 유진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3 은퇴용병인 천사와 작가 겸 칼잡이의
유리아가 수줍어하는 유진의 손을 이끌어 욕탕 안에 입수한 그때.
왕도의 시가지에 자리한 근사한 카페에서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정확히는 금발의 미녀와 백발의 미인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