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62화
SS #38 2년 후, 각자의 하루(3)
#5 바람 같은 백작과 황금 같은 백작의
유진과 유리아가 페어리 퀸들을 알현하고 천사와 검귀가 식사를 이어나갈 때.
세일룬 왕국 북부의 대도시 바일룬에서는 수십 년 세월 동안이나 우정을 나눈 두 백작이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좋군.”
해질녘이 다가오는 오후.
창가에 선 바이엘 백작의 말에 체이스 백작은 언제나처럼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딱히 바이엘 백작의 말에 반발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습관적인 코웃음이었고,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바이엘 백작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벌써 저렇게 자라다니, 시간은 정말 바람과 같군.”
바이엘 백작의 푸른 눈에 비친 것은 정원에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엠버 바이엘과 에이든 바이엘.
올해로 열일곱 살이 되는 남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늠름하게 성장해 있었다.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천사의 피를 이은 것 때문에 성장이 더딜 것이라 걱정했거늘, 어느 시점부터는 오히려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이 빨라진 덕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레지나나 유리아도 그렇고…… 다들 성장이 좀 빠른 느낌이긴 하군.’
엠버와 에이든과는 경우가 조금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둘 모두 야생신과 대천사라는 신적인 존재들과의 혼혈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다시 엠버와 에이든.
장성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이엘 백작의 얼굴에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조금 팔불출- 아니, 체이스 백작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둘 다 정말 잘 자랐어.’
엠버는 미녀였고, 에이든은 미남이었다.
그것도 앞에 ‘빼어난’이란 수식어가 붙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엠버 바이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화려한 금발과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부드러운 눈매와 분위기가 더해진 결과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름답고 도도하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인상이 강한 아델리아가 한 자루 칼- 혹은 가시 돋친 장미와 같다면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운 엠버는 이야기 속의 성녀를 연상케 했다.
물론 옆에 있던 에이든이 이런 바이엘 백작의 생각을 알았다면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터였고, 레지나조차도 ‘엠버가 미인인 건 인정이지만 성녀는 좀…….’ 하며 어설픈 웃음을 흘렸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와 분위기는 별개로 아델리아의 피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체이스 백작의 피를 분명히, 그리고 강하게 이어받은 엠버였기 때문이다.
항상 웃고 있는 엠버의 얼굴을 보며 할아버지인 바이엘 백작은 게일이나 유나 같다며 흐뭇해했지만 에이든과 레지나의 생각은 달랐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항상 웃고 있지만, 그래서 역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화가 잔뜩 났을 때도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 엠버였으니 말이다.
물론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은 체이스 백작가의 유전적 특성(?)과는 정반대되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얼굴만 봐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빤히 드러나는 것이 바로 체이스 백작가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엠버가 물려받은 체이스 백작가의 특징은 바로 격정적이라 해도 좋을 그 성격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과 별개로 쉽게 화내고, 쉽게 불타오르는 것은 엠버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엠버가 무서운 거예요. 속으로는 화가 엄청 났는데도 겉만 보면 티가 하나도 안 나니까요. 화난 것도 모르고 계속 엠버 화를 키우다가 엠버가 화를 ‘확!’ 하고 내면! 으으으…….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언젠가 레지나가 했던 말을 기억하긴 해도, 여전히 긴가민가한 바이엘 백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도 엠버가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서운 거라니까요?!’
레지나가 있었다면 바로 팔짝 뛰며 소리쳤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지금 바일룬이 아닌 왕도에서 페어리들에게 잔뜩 휘둘려지고 있는 터라 바이엘 백작의 눈에 쓰인 콩깍지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바이엘 백작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오빠에게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엠버의 모습에 그저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에이든.
엠버와는 반대로 아버지의 큰 키와 늠름하고 잘생긴 얼굴에 어머니의 날카로운 눈매와 고고하면서도 도도한 분위기를 이어받은 청년.
바이엘 백작은 에이든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정말로 체이스 백작가 그 자체란 말이지.’
속으로 생각하는 게 겉으로 다 드러나고, 늘 흥흥거리며 날카로운 척하지만 사실 속은 둥글둥글하다 못해 다정함 그 자체인 귀여운 생명체.
체이스 백작이 그랬고, 아델리아가 그랬으며, 코델리아 역시 그러했으니 이 정도면 체이스 백작가의 혈통 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그것.
아버지처럼 검의 길을 걷는 대신 어머니를 따라 마법의 길을 걸은 손자와 손녀를 바라보던 바이엘 백작은 어느 순간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저맘때였지?”
유더와 코델리아가 본격적으로 좋아 죽기 시작한 시점이.
척하면 착이라고 바이엘 백작의 말을 찰떡처럼 알아들은 체이스 백작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직 너무 이르다.”
두 사람 모두 약혼이나 결혼을 하기에는 너무 빠르다.
백번 양보해서 에이든은 몰라도 엠버는 절대 안 된다.
신성국에 사는 유리아와 달리 바일룬에서, 그것도 체이스 백작가에서 사실상 데리고 키운 엠버이기 때문인지 손녀 사랑이 특히 강한 체이스 백작이었다.
혹시라도 엠버가 어디서 갑자기 자기 남자 친구라며 시커먼 사내놈을 끌고 온다면…….
생각만으로도 불쾌한지 체이스 백작의 얼굴이 딱딱해지자 바이엘 백작은 바이엘 백작가의 남자들이 체이스 백작가의 여자들을 연속해서 홀려놓았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늘 한결같군.”
겉으로는 계속 흥흥거리지만 막상 정말로 데려온다면, 그리고 엠버가 좋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유진을 데려온 유리아 때와 같지 않을까?
바이엘 백작이 쿡쿡 웃자 체이스 백작은 미간을 좁혔다.
오랜 지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흥, 레지나는 요즘 어떤가.”
일단 공식적으로는 딱히 만나는 사람이 없는 엠버와 달리- 엠버에게 구애하는 청년들은 일개 군단을 이룰 정도였지만- 레지나에게는 2년 전부터 약혼자까지는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남자 친구’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체이스 백작의 물음에 바이엘 백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잘 지내는 것 같더군. 엘윈 군은 누가 봐도 훌륭한 청- 아니, 소년이고.”
겉만 보면 이미 장성한 20대 청년이었지만 엘윈의 실제 나이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이었으니까.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가?”
체이스 백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바이엘 백작은 조금이지만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그…… 자네니까 하는 말인데, 너무…… 크긴 하지.”
유나를 닮았기 때문인지 체구가 작아 이제 겨우 160 남짓인 레지나와 달리 엘윈은 정말 거대했다.
180 후반대인 바이엘 백작 자신은 물론이고 190을 훌쩍 넘는 체이스 백작보다도 컸으니 말이다.
아마도 엘윈의 키는 2미터 남짓.
그런데 그냥 큰 것도 아니고 근육도 엄청났다.
가끔 보면 엘윈의 삼두근이 레지나의 허리랑 엇비슷해 보였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인간 전차.
움직이는 거성.
그런데 문제는 엘윈이 이제 겨우 열세 살이라는 사실이었다.
‘분명 더 크겠지…….’
어쩌면 정말 저 태양의 전사 란디우스와 대등한 수준까지 자랄지도.
“음…… 레지나가 알아서 잘할 걸세.”
“음…… 그렇겠지.”
이러나저러나 레지나가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엘윈 자체도 너무 커서 그렇지 그 외에는 정말 훌륭한 소년이고.
엘윈이랑 왕도의 온수탕에 갈 거라며 하루 온종일 수영복을 고르던 레지나의 모습을 떠올린 바이엘 백작은 흐뭇하면서도 씁쓸한- 실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리스는 잘 지내나?”
체이스 백작의 물음에 바이엘 백작은 답하기에 앞서 일단 미소부터 지었다.
그것도 금방이라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은 미소를 말이다.
아리스 바이엘.
불과 일 년 전에 태어난 바이엘 백작가의 막내딸.
장남인 게일과는 무려 40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슈퍼 그레이트 막둥이.
“우리 아리스는…… 참 귀엽지.”
어제는 유나 품에 안겨 빠빠거렸는데, 그 모습이 정말 참으로 사랑스러웠으니까.
유더에게 이야기해서 귀여움의 천사로 성경에 싣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흥, 주책 떨기는. 자네 나이가 몇인지는 알지?”
“흠흠, 바람은 늘…… 자유로운…… 알았네,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말게.”
“흥, 그놈의 바람.”
나이 먹고 이제 좀 안 하나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다시 입에 달고 다니는 바이엘 백작의 입버릇.
하지만 그렇기 때문일까.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 체이스 백작이었다.
이제는 정말 먼 옛날이 된, 바이엘 백작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고, 체이스 백작 자신이 그 뒷수습을 하러 다니던 근 40년도 더 된 과거의 일.
왕도에서의 첫 만남 이후 시작된 불타는 사랑과 요즘 유행하는 사랑의 도주와는 달리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로 나섰던 여정.
그리고-
-우리 아기예요.
엠버와 에이든이 서 있는 바로 저 정원에서, 에드워드를 품에 안은 채 투명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 모습.
항상 작은 선물들로 가득 차 있던 가죽 주머니.
바로 저 정원에서 커다란 책을 안고 있는 에드워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법의 불꽃을 피워내고 의기양양해하는 아델리아를 품에 안았고, 코델리아의 작은 이마에 키스하며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 옛날의 일이었다.
벌써 수십 년도 넘게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미소를, 그 온기를, 처음 마주했던 날 나누었던 어색한 인사를.
“에어리스.”
무심코 소리 내어 말했다.
결코 잊지 못할 그 이름을.
남은 생애가 얼마가 되었든 항상 함께할 그 이름을.
그랬기에 바이엘 백작은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고, 이제는 잊는 것이 어떠냐며 주제넘은 말을 하지도 않았다.
바이엘 백작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영원토록 변치 않는 황금처럼 체이스 백작의 마음 또한 변치 않으리라는 것을.
천 년 후에도, 만 년 후에도 그의 마음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자리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바람과 같은 백작은 그랬기에 침묵하였다.
황금과 같은 백작과 함께 석양을 맞이하며 결코 바래지 않을 추억을 되새겼다.
#6 속이 까만 메이드와 뻔뻔해진 기사의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과 함께 맑고 푸르렀던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간.
옅은 갈색 머리칼을 길게 기른 기사가 정원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