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64화 (464/473)

엔딩메이커 463화

SS #38 2년 후, 각자의 하루(4)

#6 속이 까만 메이드와 뻔뻔해진 기사의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과 함께 맑고 푸르렀던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간.

옅은 갈색 머리칼을 길게 기른 기사가 정원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기사의 이름은 달리아 에일.

유델리아 신성국을 지키는 수호의 천사.

근위기사단의 수장답게 근엄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지나가던 메이드들과 견습 기사들은 저마다 뺨을 붉히며 작은 감탄들을 토했다.

‘달리아 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모르긴 몰라도 무척이나 진지하면서도 중요한 일이 아닐까?’

‘그러게, 저 엄숙하면서도 고고한 표정을 봐.’

‘달리아 님 너무 멋져.’

‘기사의 귀감이셔.’

멋지고 상냥하고 다정한데 필요할 때는 진지하고 엄숙해지는 우리의 단장님.

단장님은 평소에 어떤 고민을 하시는 걸까.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시기에 저렇게 우수에 찬 표정을 짓고 계신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진지한 사안이겠지.

달리아를 동경하는 견습 기사들과 메이드들은 계속 바라보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른 채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쩐지 모르게 방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달리아는 무척이나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플파이 먹고 싶다.’

마이아가 만든 수제 애플파이.

겉은 바삭한데 안은 촉촉하고 앙 깨물면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 가득 번지는 애플파이.

군인에게 있어서는 식사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더욱이 달리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애플파이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플파이가 먹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에는 진정성이 어려 있었다.

애플파이 먹고 싶다.

엄청 먹고 싶다.

오늘따라 왜인지 애플파이가 먹고 싶다.

아침부터 먹고 싶은 걸 참았더니 이제는 하늘의 구름만 봐도 애플파이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애플파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달리아는 자기 목소리에 놀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달리아 자신에게도 나름 지켜야 할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다른 생각 하자, 다른 생각.’

그래, 이를테면 세계 최강 흑막의 유모가 되었습니다 신간은 언제 나오는 걸까라든-

‘아니지, 아니지! 정신 차려 달리아!’

다음 권이 몹시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이 생각도 아니었다.

살짝 붉어진 얼굴을 달래듯 헛기침을 토한 달리아는 신성국의 근위기사이자 왕가를 수호하는 수호천사다운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아가씨는 잘하고 계실까…….’

유리아 어거스트 바이엘.

지금은 왕도의 왕족 전용 온수탕에서 페어리들과 놀고 계실 유델리아 신성국의 하나뿐인 왕녀님.

고르는 데만 3박 4일이 걸린 비장의 수영복은 정말로 효과가 굉장했을까.

어른스럽고 고고한 아가씨에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덧씌워서 충격의 시너지 효과를 만든다는 마이아의 이론은 틀리지 않은 걸까.

예쁘긴 진짜 예뻤는데 우리 아가씨.

아가씨의 미모면 온수탕에 발가락만 담가도 페어리들이 몰려들겠지?

그러고 보니 페어리들 눈이 높아도 너무 높아.

취향도 엄청 까다롭고.

저도 모르게 작년에 시도했던 페어리 챌린지를 떠올린 마이아는 새삼 밀려드는 민망함과 부끄러움과 실망감에 실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큰맘 먹고 머리까지 예쁘게 꾸민 뒤에 열창을 했는데.

아가씨 말대로 군가를 부른 게 문제였을까?

그치만 마이아 때는 노래도 안 불렀는데 튀어나왔는걸.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렇다 할 꾸밈도 없이 수건 한 장 걸친 마이아가 온수풀에 들어선 순간의 광경이.

군살 하나 없이 늘씬하면서도 호리호리한 몸매와 수증기 사이에 있어서 더욱 하얗게 보이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피부.

물에 젖어 반짝이는 은발과 마찬가지로 촉촉이 젖은 눈빛.

달리아는 삐쭉 내밀었던 입술을 살짝 깨물며 인정했다.

그날의 마이아는 코델리아 아가씨보다도 더 예뻤으니까.

페어리들이 우당탕탕 모여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 아무튼 아가씨는 잘하고 계시겠지.’

코델리아 아가씨의 딸인 동시에 교황 성하의 딸이었으니까.

적당히 생각을 정리한 달리아는 다시 애플파이 생각을 잇는 대신 다시 한번 헛기침을 토한 뒤 정원 한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태연한 척하지만 숨길 수 없는 민망함이 뒤섞인 물음에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은발의 메이드는 눈을 한 번 깜박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글쎄? 언제부터일까?”

너무나 아름답지만, 속이 까만 그 미소에 기사는 생각했다.

마이아는 역시 작은 악마 같다고.

교황 성하를 키운 건 역시 마이아가 분명하다고.

“미소가 사악해. 모두가 속고 있어.”

달리아가 마침 들고 있던 이번 달 성경- 정확히는 성경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마이아의 얼굴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표지 속의 마이아는 고고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물씬 나는 무표정 상태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이렇게 무표정으로 일관하거나 웃어도 정말 작게 웃어서 얼음 여왕님이라 불리는 마이아였지만 달리아는 그녀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이아는 생각보다 잘 웃는다.

그것도 사악하게 웃는다.

지금처럼 속이 까만 동시에 요염하면서도 장난기가 넘치게.

더욱이 마이아의 의외성은 그저 잘 웃는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치만…… 내 미소는 도련님이랑 달리아 한정인걸?”

어느새 다가온 마이아가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자 달리아는 읏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애교 부리는 마이아의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우면서도 얄미웠기 때문이다.

‘자기가 예쁜 걸 알아.’

그랬다.

마이아는 자기가 미인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얄밉게도 말이다.

“알았어, 이쯤 할게. 그리고 애플파이도 구워놨으니까 용서해 줘. 응?”

말하는 것과 달리 마지막에 가서 다시 애교를 부린 마이아였지만 달리아는 결국 입술을 삐쭉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정말 애플파이가 먹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달리아, 오늘은 도련님이랑 아가씨 두 분 다 늦으시는 거지?”

어느새 왕궁의 시녀장으로 돌아간 것인지 진지해진 마이아의 물음에 달리아는 덩달아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영원의 숲에 계실 테니까. 아마…… 오늘은 안 돌아오시지 않을까 싶어. 유리아 아가씨도 왕도에서 돌아오시려면 며칠은 걸리실 테고. 물론, 이번에도 사랑의 도주를 하신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지난 2년 사이 서른두 번이나 사랑의 도주를 한 유리아였으니 이번에도 사랑의 도주를 할 가능성이 7할에 육박했지만, 아무튼 일정상으로는 일주일 뒤에나 돌아올 유리아였다.

“영원의 숲…….”

세일룬 왕국의 중앙과 남부 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수림지대.

엘프들이 거하는 금지의 땅.

유더와 코델리아가 어째서 영원의 숲에 찾아갔는지를 잘 아는 마이아는 숨을 한 번 길게 토한 뒤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잘되면 좋겠다.”

“그러게, 잘되면 좋겠네.”

고개를 끄덕인 달리아는 영원의 숲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7 여신과 교황과 인공정령의

영원의 숲에 방문할 때마다 유더는 생각했다.

‘정기적으로 영원의 숲에 방문하는 것은 어떨까.’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방문하고 싶었지만 그건 일정상 무리이니 한 달에 한 번 정도면 어떨까.

유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영원의 숲에만 방문하면 코델리아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귀여워.’

코델리아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유라면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늘어놓을 수 있는 유더였고, 실제로 코델리아의 발가락조차 귀엽다고 생각하는 유더였지만 오늘의 귀여움에는 분명 평소와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유더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사주경계를 하듯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코델리아.

꾹 다문 입술과 경계 섞인 눈빛은 세상 진지했지만 유더는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코델리아가 묘하게 햄스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해바라기 씨앗을 지키기 위해 주변을 경계하는 햄스터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사실 유더의 이런 생각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코델리아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유더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역시, 사방에서 쳐다들 보고 있어.’

엘프들.

아니, 유더에 환장한 에로프들.

영원의 숲에 들어설 때부터 코델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호시탐탐 유더를 노리는 에로프들의 시선들.

그녀들의 뜨겁고 강렬한 눈빛들을.

‘유더는 이제 애 아빠라고!’

물론, 약혼녀가 있을 때조차 약혼녀 앞에서 ‘너네 약혼자 쩔 것 같아.’ 같은 말을 하던 에로프들이니 애 아빠고 나발이고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아무튼 유더는 애 아빠였다.

그것도 코델리아 자신의 아이인 유리아의 아빠 말이다.

그랬기에 코델리아는 유더의 팔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털을 빳빳이 세운 성난 고양이처럼 기세를 날카로이 했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보며 새삼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마주하고 있던 영원의 숲의 여왕- 라이카 프라임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너희 둘은 정말로 여전하구나.”

여러 가지 의미가 섞인 그 말에 이미 짐승 모드가 된 코델리아는 굳이 반응하지 않았고, 유더는 그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몇 분 뒤.

유더 혼자 행복한 와중에 엘프 기사 하나가 라이카 여왕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드디어 온 것 같구나.”

기사의 속삭임에 화색이 된 라이카 여왕은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라이카 여왕을 마주한 채 기다리고 있던 이유는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엘룬과 함께 대기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하겠나? 이쪽으로 부를까…… 아니면 우리 쪽에서 가는 게 좋을까?”

아르곤 제국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엘룬까지 나선 것은 이번 일이 유델리아 신성국의 화신과 교황이 직접 요청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라이카 여왕의 물음에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는 유더의 팔을 끌어안은 채로 왼팔에 끼고 있던 팔찌를 들어 올렸다.

성곤 문라이트의 코어가 이식된 마법의 팔찌.

“그래, 알겠어.”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작게 반짝인 팔찌를 향해 작게 속삭인 코델리아는 유더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라라가 찾아내고, 엘룬이 보호하여 이 땅에 찾아온 손님.

마도왕국 마젤란의 생존자가 멜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8 소녀와 스승과 태양의 전사의

어느새 하늘을 뒤덮은 석양이 보랏빛 황혼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

나타샤와 카마엘의 소개팅은 생각 이상으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아, 알 것 같아. ‘글 그거 그냥 미리 써두면 되는 거 아냐?’ 같은 소리 하면 막 화가 나지.”

“……부정하진 않겠다.”

나타샤의 말에 카마엘은 코웃음을 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신 딱딱하게나마 대답을 했고, 나타샤는 그 맘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라는 게 주변에서 이해받기 쉬운 직업이 아니니까.”

“음…… 이번에도 부정은 하지 않겠다.”

여전히 딱딱한 대답이었지만 평소의 카마엘을 잘 아는 사람들은 애당초 카마엘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 그것도 빌트바인 영웅전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여자와 지금처럼 순탄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랄 것이 분명했다.

카마엘이 딱히 숙맥이라서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특히 여자들에게는 냉정 그 자체인 카마엘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대화가 이어지는 이유는 단순했다.

[영감, 저 여자 말 들어주기의 프로인 거 같은데?]

[상담사 같은 일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랬다.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을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조련(?)해 온 나타샤에게 있어 카마엘은 딱히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빗장만 좀 열면 그 뒤로는 너무나 손쉬운 상대라고 해야 할까?

‘진호랑 비슷한 계열이네.’

처음에만 어렵지 그다음에는 무척이나 쉬운.

그리고 그렇게 나타샤가 카마엘을 조련(?)하고 있을 때.

잠시 바람을 쐬러 발코니에 나온 레나는 입술을 삐쭉였다.

‘유리아 걔는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승님한테 여자를 소개시켜 줄 생각을 하지?’

스승은 부모와 같으니, 레나의 상식선에서 작금의 상황은 자식이 아버지 중매에 나선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프란이 들었다면 ‘그게 뭐?’ 했을 터였지만 생각 이상으로 고지식한, 그리고 란디우스와 카마엘과 관련된 일에서는 더더욱 고지식해지는 레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레나는 레나.

결국 착해 빠진 성천사는 애꿎은 유리아를 비난하는 대신 입술만 삐쭉이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새삼 툴툴거리는 스스로가 우스워지기도 했고 말이다.

‘그치만…… 카마엘인걸.’

굳이 따지자면 란디우스와 엘윈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

‘그리고…….’

혼란한 마음만큼이나 생각 역시 혼란했던 것일까.

레나는 저도 모르게 스승님을 떠올렸다.

악마의 소굴이 된 파라곤 왕국에서 마주했던- 리치가 된 스승님의 마지막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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