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65화 (465/473)

엔딩메이커 464화

SS #38 2년 후, 각자의 하루(5)

#8 소녀와 스승과 태양의 전사의

이제는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지금도 그날의 일들을 선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스승님께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3년 만에 회색탑의 모든 수업을 마치고 귀로에 올랐던 날.

역시 우리 레나가 최고라는 스승님의 칭찬을 기대하며 미소 짓고, 3년 동안 더욱 멋있어졌을 게 분명한 란디우스 님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레나는 갑자기 멈춘 마차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일까.

어째서 마차가 멈춘 것일까.

바퀴가 어디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혹시나 마부 아저씨가 도와달라고 하면 마법으로 도와줘야지.

사례는 괜찮다고 거절하고.

대신 스승님의 이름은 꼭 말할 거야.

이미 훌륭한 분으로 소문이 자자한 스승님이지만 좋은 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한 레나는 회색탑으로 떠날 때 스승님이 선물해 주셨던 지팡이를 꼭 쥔 채 마부 아저씨가 마차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마차 문이 열렸을 때.

레나가 듣게 된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 * *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마부 아저씨가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부 아저씨뿐만 아니라 국경 지대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파라곤으로 향했다가 돌아온 행상인들까지도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파라곤 왕국이 멸망했다.

괴물들 천지가 되었다.

국경 근처 마을엔 좀비와 스켈레톤 같은 언데드들이 넘쳐 나고, 왕궁에선 매일같이 악마의 주문과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국경 인근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좀비 떼를 불꽃의 벽으로 불태운 레나는 바닥에 엎드려 구토를 했다.

실전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시체 타는 냄새를 처음 맡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언데드가 되어 일어난 것도, 그 사람을 불태운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회색탑을 가던 길에 머물렀던 마을과, 지나가듯 인사를 했던 사람들.

하루 묵어갔던 여관의 주인과 유독 친절했던 급사 소녀.

“하아…… 하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함께 왔던 세일룬 왕국의 국경 경비대는 함께 돌아갈 것을 권했다.

일단 국경을 봉쇄하고 왕도의 지시를 기다릴 계획이라는 모양이었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경 경비대와 함께 돌아가는 대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꽉 움켜쥔 채 파라곤 왕국의 왕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승님이 계실 테니까.

스승님이.

스승님이.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지만 레나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수 없었다.

눈앞의 펼쳐진 광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검은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언덕 위에 세워져 멀리서도 볼 수 있었던 파라곤 왕국의 왕도에서는 새카만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레나, 너는 천재가 분명하단다.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냥 스승님께 칭찬받는 게 좋아서, 그래서 조금 열심히 한 것뿐이에요.

-회색탑에 가렴. 그곳에 가면 나한테 배우는 것보다 더 전문적인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가고 싶지 않아요.

스승님 곁을 떠나서, 모르는 곳에 가서 몇 년이나 있고 싶지 않아요.

파라곤 왕국이 좋아요.

스승님과 란디우스 님이 계신 왕도에 있고 싶어요.

-나는 대마법사지만 대선생님인 건 아니니 말이다.

아니에요.

스승님은 최고의 스승님이세요.

스승님보다 나은 스승님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 레나, 다녀오렴.

싫어요.

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온화하게 웃으며 말씀하시는 스승님께 가기 싫다고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 힘껏 미소를 지으며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사실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스승님 곁에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괜찮았다.

그래, 괜찮았다.

스승님이 진심으로 흐뭇해하셨으니까.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말씀하셨으니까.

-그래, 우리 레나. 나의 자랑스러운 수제자. 나의……-

레나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3년 전, 회색탑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밤의 기억.

스승님의 미소는 온화했고, 벽난로의 온기는 따뜻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차가운 밤이었다.

땀과 재,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물론이고 몸 곳곳도 흘러내린 땀으로 인해 끈적끈적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 같은 것은 제대로 느낄 수조차 없었다.

파라곤 왕국에 들어선 지 사흘째.

생존자는 만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며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마물들과 죽음에서 일어난 시체들뿐이었다.

레나 자신은 어째서 왕도로 가고 있는 것일까.

스승님을 만나기 위해.

스승님이 계실 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러할까?

이 정도 난리가 났으니 스승님께서도 몸을 피하시지 않았을까?

스승님은 대마법사셨다.

그것도 무척이나 훌륭하신.

그러니 어떤 환란이 닥쳤다 할지라도 무사하실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왕족들을 데리고 일찌감치 왕도를 탈출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래, 세일룬 왕국에 가신 다음에, 철없는 제자가 사지로 들어갔다며 걱정하고 계실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을 찾기 위해 다시 위험을 감수하실지도.

그러니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옳다.

그게 논리적으로 올바른 일이다.

머릿속에 만들어진 합리에 레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합리가 아니었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만들어낸 비겁한 변명이었다.

스승님이 결코 혼자 도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지금 이 순간에도 왕도에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계실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분이셨다.

그러니 왕도에 가야 했다.

스승님을 도와드려야 했다.

엉성한 논리였다.

가능성을 따지자면 처음 했던 생각이 차라리 높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배가 고팠고,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로 마법을 연사한 터라 머리도 어지러웠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강대한 마력의 향이 느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피해야 마땅했지만 레나는 오히려 그 향기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어째서일까.

강력한 악마를 토벌해 조금이나마 이 상황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함인 것일까?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이 조금이라도 안전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복수.

스승님의 복수.

파라곤 왕국의 복수.

레나는 생각을 끊었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감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대신 옆으로 물러나 길을 여는 좀비들의 모습에.

점점 더 강렬해지는 익숙한 마력의 향에.

알고 있었다.

스승님은 결코 도망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사람들을 구할 분이라는 것을.

굳이 이쪽을 향해 발걸음을 뗀 이유.

속절없이 눈물이 쏟아진 이유.

“레, 나.”

스승님이 웃고 계셨다.

반쯤 썩어 내린 얼굴로.

사이한 마력에 휘감긴 채.

* * *

“레나, 참으로 맛있게 자랐구나.”

예전부터 널 범하고 싶었단다.

회색탑에 보낸 것은 더 이상 욕구를 억누르기 어려워서였어.

하지만 보내지 말 걸 그랬구나.

이렇게나 맛있게 자랄 걸 알았다면.

헛소리였다.

스승님은 저런 생각 따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사실 너를 증오했다. 그래서 회색탑으로 내쫓은 거다.”

네 재능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 재능에 질투가 나 견딜 수가 없어서.

거짓말이었다.

스승님은 훌륭한 대마법사셨다.

애당초 재능을 질시했다면 마법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회색탑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라며 보내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내가 너를 아꼈다면 어째서 품에서 놓아 보냈을까. 네가 사실 가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 왜 그러했을까. 사실 네가 싫었단다, 레나. 너와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사실이 역겨울 정도로.”

거짓말이었다.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스승님의 얼굴이었다.

스승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리고 이 상황 자체가.

좀비들이 몰려왔다.

리치가 된 스승님의 명령에 따라 사자들이 계속해서 레나 자신에게 몰려들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다.

언데드가 되셨다.

악마의 주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계셨다.

마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손발이 어지러웠고, 주문이 입안에서 맴돌 뿐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어느 순간 무릎이 꺾였다.

불꽃의 벽을 뛰어넘은 구울이 레나의 상체를 밀어 넘어뜨렸다.

순식간에 좀비들이 모여들었다.

마법을 만들 수도 없어 마력만으로 좀비들을 밀어냈지만 잠시뿐이었다.

레나는 다시 쓰러졌고,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스승님.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었다.

스승님을 뵈어야 했으니까.

스승님을.

정말로 아버지 같은 스승님을.

“그래, 그러니 이제 그만 죽으렴. 나의 증오하는 제자야.”

레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문득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고블린들의 소굴에 붙잡혀 갔을 때.

그곳에서 절망을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구울에게 어깨를 물어뜯기고, 좀비에게 팔을 뜯어먹히는 고통 속에서도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오직 절망으로 가득 찬 어두운 시야에.

태양이, 떠올랐다.

* * *

그것은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레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빛이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선명히 빛나는 한 줄기 섬광.

란디우스가 돌진했다.

몰려드는 좀비들과 스켈레톤들을 황금빛 태양의 검으로 가르며 스승님에게- 리치가 된 대마법사에게 맹진하였다.

“레나.”

익숙한 목소리에 레나는 눈을 깜박였다.

백발의 미인이 보였다.

포션을 쏟아부어 레나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

카마엘.

란디우스 님의 가장 친한 친구분.

파라곤 왕가의 피를 이은 근위기사단의 검귀.

“괜찮다. 괜찮을 거다.”

차갑고 냉소적인 말이 아니었다.

어색한 다정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카마엘은 힘없이 늘어진 레나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주었다.

조금이지만 온기를 나눠주었다.

레나는 그런 카마엘의 품에 안겨 정면을 보았다.

란디우스 님이 스승님과 싸우고 있었다.

“레나, 괜찮을 거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어라.”

카마엘은 그리 말한 뒤 조심스럽게 레나를 품에서 풀어주었다.

다시 힘없이 무너지는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몸을 돌려 바르도를 향해 돌진했다.

레나는 울면서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아니, 지켜볼 수 없었다.

두 눈을 꽉 감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렸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색하지만 다정한 손길에 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카마엘이 보였다.

저만치 서 있는 란디우스와 그 발치에 쓰러져 있는 스승님이 보였다.

레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아니, 스스로 일어선 것인지, 아니면 카마엘이 일으켜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승님의 곁에 다가섰다.

빛이 사라진 스승님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스승님이 다시 입을 열었고, 레나는 저도 모르게 다시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다시 괴로운 말을 듣는 것이.

스승님의 목소리로 가당치도 않은 거짓말을 듣는 것이.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카마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귀를 막고 있던 레나의 손을 걷어냈다.

그리고 레나는 들을 수 있었다.

힘없이 이어진, 하지만 다정한 스승님의 목소리를.

“레…… 나…….”

“우리 레나가…… 돌아올 텐데…….”

“마중을…… 나가야, 해.”

“우리…… 레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을까.”

“늦게까지 안 자고 공부만, 하는 건…… 아닐……까.”

“레나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

“레나에게 줄 새…… 지팡이. 예쁜…… 옷…….”

바르도 아인스버그에게 깃들어 있던 거짓된 생명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회색빛인 그의 눈은 더 이상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고,

그의 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애당초 그는 지금 제대로 된 이성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우리 레…… 나…… 사랑하는…… 제자……… 하나뿐인…… 우리…… 딸…….”

바르도 아인스버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온화하고 따뜻한, 다정한 미소였다.

레나는 제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차갑게 식은 스승님의 품에 안겨 서글픈 울음을 터뜨렸다.

* * *

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불현듯 떠오른 옛 기억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눈물을 삼켰다.

란디우스와 카마엘.

언제나 자신을 구원해 준 태양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

가장 힘들 때 온기를 나누어주고, 스승님의 유언을 듣게 해준 정말로 고마운 사람.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릴 거야.’

우리 카마엘이었으니까.

이상한 여자가 들러붙으면 안 되니까.

물론, 정말 좋은 여자라면 괜찮겠지만.

카마엘도 행복해졌으면 하니까.

프란이 옆에서 들었다면 집착에 과보호라며 고개를 내저었을 터였지만 그는 이곳에 없었고, 레나는 나름 진지했다.

란디우스와 카마엘 모두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니까.

“후우, 가자.”

크게 숨을 고른 레나는 돌아섰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란디우스와 프란, 벨키안의 모습에 새삼 미소를 머금었다.

#9 인내심이 강한 정령과 그 주인의

마도왕국 마젤란의 생존자는 무척이나 적었다.

애당초 생존자가 남기 힘든 환란이었던 것은 둘째 치고, 마젤란이 건재했던 것이 근 천 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생하는 엘프들조차도 오백 년을 버티기 어려웠다.

하이엘프 왕족들조차도 그 수명은 천 년이 한계였다.

그렇기에 마젤란의 생존자는 극히 드물었다.

마젤란 왕국이 실질적으로 멸망한 이후에 태어난, 망국의 아이들조차도 말이다.

그런 마젤란의 생존자들 가운데서 인공 정령왕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는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중에서도 눈의 여왕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생존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몇이나 될까.

희박한 확률이었다.

거의 불가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기적은 일어나기 때문에 기적이었다.

‘애당초 평범한 생존자라면 이렇게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거야.’

서로 만나봐야 어색하기만 할 터였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그런 평범한 생존자와의 만남이 아니었기에.

유델리아 신성국의 화신과 교황이 직접 발걸음을 나섰다.

제국의 그랜드 소드마스터를 동원하였고, 영원의 숲의 여왕에게 자리를 만들게 하였다.

“자, 멜리사. 내가 약속했었지?”

코델리아가 뻐기듯 말했지만 멜리사는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그런 멜리사를 이해했다.

미소 지으며 엘룬 곁에 앉아 있는 초로의 엘프에게 팔찌를 내밀었다.

“멜리사예요.”

코델리아의 말에 엘프는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미안함과 반가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하였다.

“……멜리사. 나란다. 기억나니?”

팔찌를 손에서 놓았기에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멜리사가 어떤 목소리를 내었을지, 무어라 말했을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코델리아는 조용히 물러섰다.

유더의 곁에 섰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멜리사의 단짝이자, 언제나 함께하는 여인의 기쁨을 코델리아와도 나누기 위함이었다.

[정말 잘됐어요. 정말.]

벨렌시아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고,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델리아는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잠깐 자리를 비워줄까요?]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벨렌시아의 제안에 코델리아는 라이카 여왕에게 눈짓을 보냈고, 유더는 멀뚱히 앉아 있던 엘룬의 손을 잡아끌어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였다.

그리고 여왕의 방에 달린 커다란 발코니로 나온 유더와 코델리아는 새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똑같이 하늘을 우러르는 자들이 있었다.

“달이 예쁘다.”

“그러게.”

“아름다운 밤이네요.”

붉은바람과 키라라와 사라가 창밖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오빠, 달 좀 봐요.”

“예쁘다. 유리아 닮았어.”

“쟤네 지금 뭐라는 거니?”

꼭 달라붙어서 속삭이는 유리아와 유진의 모습에 비비안이 얼굴을 구겼지만 레지나는 무어라 답할 수 없었다.

똑같이 엘윈과 꼭 붙어 앉아 밤하늘을 우러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비안이라고 해서 서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괜찮아, 누나. 누나가 훨씬 더 예뻐.”

“흠흠, 얘는 부끄럽게 뭘 또.”

사춘기가 올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착하고 바른 누나바라기 월터의 말에 비비안은 아닌 척, 하지만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레지나.

“예쁘다.”

밤하늘에 순수하게 감탄한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고, 그건 한자리에 모인 페어리 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델리아 신성국에서 나온 페어리용 고급 초콜릿을 입에 문 그녀들은 저마다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밤하늘을 우러렀다.

“와, 방금 별똥별 봤어?”

“봤다.”

“소원은 빌었고?”

“……빌었다.”

“오, 빨라. 무슨 소원 빌었는데?”

“……비밀이다.”

“빼기는.”

킥킥 웃은 나타샤는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카마엘 역시 그러했다.

멀리서 둘을 지켜보던 파라곤의 영웅들 역시도 그러했고 말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이 식탁에 앉았고, 에드워드와 실비아, 게일과 아델리아, 엠버와 에이든이 저마다 자리에 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바일룬의 마스코트인 거친눈사태 역시 아장아장 걸어 식탁에 앉았고 말이다.

“비비안은 오늘도 늦나?”

“늦을걸?”

“흐음, 늦는단 말이지?”

돌연 은근한 목소리를 흘린 카이사가 루카스의 왼팔을 끌어안자 스칼렛은 킥킥 웃더니 루카스의 오른팔을 끌어안았다.

결혼한 지 이미 십 년이 훌쩍 넘었건만, 아이도 열한 명이나 낳았지만, 루카스는 여전히 얼굴을 붉혔고 말이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해가 지고, 밤이 오고, 다시 해가 떠오르면 새로운 아침이 시작될 터였으니까.

새로운 아침의 시작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완벽한 해피엔딩 이후에도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해맑게 미소 지었다.

fin

후기

안녕하세요, 취룡입니다.

엔딩메이커 외전이 완결되었습니다.

본편 완결이 360편이니까… 외전만 104편을 쓴 셈이네요.

본래도 외전을 꽤 많이 쓰는 편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외전을 많이 쓴 건 엔딩메이커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후기 역시 조금 장황해질 것 같은데… 독자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엔메 외전을 처음 기획하게 된 건 본편이 한창 연재 중이던 때입니다.

벌써 근 2년 전인데, 엔메 웹툰 기획이 저 때쯤 시작되었거든요(지금은 이미 출시되어 절찬리 연재 중인! 정말로 진짜 잘 나왔습니다 :D).

웹툰 나오면 그때 외전 연재하자!

라는 마음이었던 터라 본편 끝날 때 사실 떡밥을 조금 남겨뒀었습니다.

평범한 일상 외전이 아니라 2부 격 외전을 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웹툰이 나오고 외전을 쓰게 되자 예상치 못한 각종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처음 기획했던 2부 격 외전을 쓰는 게 좀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지구에 다녀온 편에서 그냥 외전을 종결시키는 것까지 생각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본래 기획을 빠르게 진행시켰고, 그렇게 나온 것이 외신 전쟁 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신 전쟁 편을 끝내고 나니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쓰면 다시 쓸 수 없는 외전인데, 본래 준비했던 이야기들이 정말로 한가득이었는데,

외적인 요인들 때문에 엔메라는 이야기의 마무리를 망치고 싶지 않다.

이미 좀 어그러졌지만,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냥 하자’라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조금 무책임한 말이긴 하지만, 사실 외신 전쟁 이후의 외전들은 ‘내가 보고 싶어서, 내가 보려고 쓴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많기는 했습니다.

음, 민망하지만 사실이긴 하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하나하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풀다 보니 자꾸만 외전 편수가 늘어갔습니다.

처음 생각대로면 거의 한 달 전에 완결이 났어야 하는 외전인데, 어째 계속 써지더라고요.

이래저래 쓰고 싶은 이야기들도 많았고… 제가 엔메라는 이야기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쓰고 싶은 외전이 더 있기는 합니다.

카마엘이 빌트바인 영웅전을 쓰게 된 이유, 외전에서 모습을 별로 보이지 못했던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중에서도 은근히 비중이 낮았던 프란과 벨키안의 이야기, 비비안을 주인공으로 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이야기, 지구로 간 유진과 유리아, 유진과 유리아를 몰래 쫓아다니며 구경하는 유더와 코델리아, 마이아와 달리아의 일상 등등…….

하지만 여기서 계속 이어버리면 정말로 외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일단 마무리를 짓기로 했습니다.

엔메 웹툰이 계속 연재 중이니, 남은 이야기들은 웹툰 새 시즌이 나올 때라든가… 이래저래 기회가 생길 때마다 조금씩 올리지 않을까 합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게 바로 외전의 강점이니까요 :D

지금까지 써온 글들 모두가 하나하나 소중하고 각자의 의미를 품고 있지만,

엔딩메이커는 그중에서도 제게 있어 무척이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글입니다.

제 글을 여러 개 보신 분들이시라면 이미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작가로 살면서 늘 가슴에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읽어주는 이가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엔딩메이커라는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독자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엔딩메이커라는 이야기를 즐겁게 써나갈 수 있었습니다.

유더와 코델리아, 멜리사와 벨렌시아, 강진호와 홍유희와 나타샤, 란디우스와 레나, 카마엘과 벨키안과 프란, 루카스와 스칼렛과 카이사,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 마이아와 달리아, 유진과 유리아, 레지나와 엘윈과 비비안 등등…… 엔딩메이커의 모두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행복할 테고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꼼꼼한 편집을 해주신 담당 편집자님, 언제나 좋은 의논 상대가 되어준 건우 형과 현섭이, 친한 작가들.

멋진 삽화를 그려주신 개그림 님과 짤수행자 님, 푸슈 님,

그리고 웹툰을 맡아주신 DOES 님.

모두 감사합니다.

차기작에서 뵙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