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66화 (466/473)

엔딩메이커 465화

SS #39 빌트바인 영웅전 비긴즈

사건의 발달은 비교적 소소했다.

전투 중에 발견한 빈 노트가 계기였으니 말이다.

첫 장에만 낙서가 조금 되어 있는 빈 노트.

사방천지가 죽음으로 가득 찬 저택에서 굳이 노트를 집어 든 이유는 노트의 표지가 무척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초록색 배경에 금박으로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표지는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안타깝군.’

노트가 발견된 곳은 책이 가득 찬 서재였다.

거의 작은 도서관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장서량이었는데, 과연 애독가로 유명한 바랑가 자작의 서재다웠다.

카마엘은 바랑가 자작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지나가는 풍문으로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직접 집필도 몇 권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었다.

“카마엘.”

지친 기색이 묻어 있는 부름에 카마엘은 노트를 손에 쥔 채로 돌아섰다.

란디우스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존자는…… 역시 없는 것 같아.”

국경을 통과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의 생존자조차 발견하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카마엘은 미간을 좁혔다.

바랑가 자작의 영지는 왕도보다는 국경에 가까운, 소국인 파라곤 왕국에서도 변경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런 변경에서조차 생존자가 발견되지 않는 수준이라면 왕도는 대체 어떤 상황이란 말인가.

잠시 침묵하던 카마엘은 석양이 지고 있는 창밖을 돌아본 뒤 말했다.

“일단 오늘은 이 근처에서 쉴 준비를 하자.”

전장의 밤은 언제나 위험했다.

특히 좀비나 구울 같은 언데드들이 횡행하는 곳에서는 말이다.

더욱이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언제 뱀파이어 같은 고위 언데드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단은 몸을 숨기고 안전하게 쉴 곳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봐둔 곳이 있어. 이동하자.”

“그래.”

평소라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란디우스의 뒤를 따랐겠지만,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카마엘은 노트를 그대로 손에 쥔 채 란디우스의 뒤를 따랐다.

어색함을 느꼈을 때는 노트를 바닥에 두기 뭐해 품 안에 챙겨 넣었고 말이다.

그리고 몇 시간.

마을 바깥쪽에 자리한 폐가에서 불침번을 서던 카마엘은 품 안에서 노트를 꺼내 들었다.

어두운 곳에서 봐도 훌륭한 노트였다.

그리고 그래서였을까, 카마엘은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조금은 기묘한 충동을 느꼈다.

마침 하룻밤 거처로 삼은 폐가에는 낡긴 했어도 쓸 수 있는 깃털 펜과 잉크도 있었다.

집주인이 장부를 적는 데 사용하던 물건 같았다.

잉크를 묻힌 펜을 손에 든 카마엘은 잠시 고민했고, 이내 문장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11월 3일.

란디우스와 함께 바랑가 자작령에 진입했다.

국경지대와 마찬가지로 언데드들이 가득했다.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낮 동안 조사를 마친 뒤 밤을 대비해 숨을 곳을 찾았다.

왕국에는- 아니, 왕도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기사단의 보고서처럼 담담히 사실만을 나열하던 카마엘은 충동적으로 적은 마지막 문장에 순간 움찔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문장 위에 가로로 선을 긋는 대신 다음 문장을 이어나갔다.

정황상 왕국 안쪽은 이곳보다 더 상황이 심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란디우스는 계속해서 왕도를 향해 나아갈 생각인 것 같다.

나 역시 그럴 생각이다.

란디우스가 그러하듯이 나 또한 파라곤의 기사이니 말이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던 카마엘은 다시 순간 멈칫했다.

너무 멋을 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멋을 부린 것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이었다.

더욱이 누군가에게 보여줄 글귀도 아니지 않은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 카마엘은 묵묵히 펜을 들었다.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들을 꺼내놓았기 때문인지, 글쓰기가 즐거웠다.

* * *

11월 5일.

레나 아인스버그와 조우했다.

궁전마법사였던 바르도 아인스버그의 제자.

짤막한 문장을 쓴 카마엘은 손을 멈췄다.

불과 두어 시간 전에 보았던 광경이 떠올라 새삼 가슴이 먹먹해진 탓이었다.

바르도 아인스버그는 단순한 궁전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고, 기사단의 스승인 동시에……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카마엘은 잠시 눈을 감고 옛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바르도와 그의 곁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작은 소녀- 레나의 모습을.

이를 악문 카마엘은 다시 펜을 들었지만 쉬이 문장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 * *

11월 11일.

벨키안 님과 조우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파라곤 왕국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왕도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벨키안 님은 말씀하셨다.

왕도에 악마가 강림했다.

작위를 가진 악마들 중에서도 강력한 대악마 클래스 이상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데몬 프린스가 강림했을지도 모른다.

왕도는 이미 죽음의 땅이 되었을 거다.

생존자는 아마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런 벨키안 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란디우스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벨키안 님, 왕도로 향하시던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벨키안 님은 왕도에서 탈출하시던 중이 아니었다.

오히려 왕도로 향하던 중에 우리와 조우한 것이었다.

그러니 란디우스의 물음은 타당했다.

란디우스는 이번 사태의 원흉이 벨키안 님은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벨키안 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란디우스가 의문을 표한 이유는 하나.

파라곤 왕국은 이미 끝장이 났다.

왕도에는 악마가 강림했고, 생존자 역시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벨키안 님은 왜 왕도로 향하고 계셨던 것일까.

우리처럼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해 혹시나 하는 희망을 안고 나아가던 것이 아니라면.

“한 가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벨키안 님은 새의 머리를 닮은 역병의사의 모자를 벗으신 뒤 지친 얼굴로 말씀을 이으셨다.

“왕도에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열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지옥의 문이 열렸다면…… 파라곤 왕국만이 아니다. 세일룬 왕국이, 나아가 아르곤 제국을 비롯한 이 대륙 전부가…… 파라곤 왕국과 같아질 수 있다.”

그러니 확인해야 한다.

정말로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인지.

왕도에 강림한 악마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벨키안 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란디우스는 나와 레나를 돌아보았고, 우리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하겠습니다.”

란디우스는 우리 둘을 대신하여 말했고, 벨키안 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 * *

11월 19일.

마침내 왕도에 도착한 우리는 명확히 알게 되었다.

왕도에 지옥의 대군주들 바로 아래의 힘을 가진 대악마 중의 대악마- 데몬프린스가 강림했다.

그리고 놈은 지금 벨키안 님이 우려하셨던 대로 지옥의 문을 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벨키안 님은 지옥의 문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이제 열흘이 채 남지 않았을 거라 판단하셨다.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다.

세일룬 왕국에 돌아가서 위급을 전하고, 세일룬 왕국의 병력들을 이끌고 다시 왕도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한 달- 아니, 보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활짝 열린 지옥의 문에서 악마들이 쏟아져 나온 이후일 터였다.

그러니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가 지옥의 문을 닫는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을 저지한다.

무모한 일이었다.

목숨을 내다 버리는 것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저만 두고 갈 생각 절대로 하지 마요.”

레나가 선수 치듯 말했고, 란디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프란은 웃었고, 벨키안 님은 조용히 침묵을 고수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란디우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의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영웅이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에 가자. 아니, 왕도에 갑시다.”

벨키안 님도 계시다는 것을 마지막에 신경 쓴 것일까.

급히 존댓말로 바꾸는 란디우스의 모습에 레나는 소리 죽여, 프란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벨키안 님도 역병의사의 모자 속에서 작은 웃음을 흘리셨다.

그리고 나 또한 웃었다.

얼굴을 붉힌 채 열심히 헛기침을 토하고 있는 란디우스와 함께할 것을, 그 뒤를 따를 것을 결심하였다.

* * *

11월 21일.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11월 23일.

심층에 진입했다.

결전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

11월 28일.

온전한 힘을 회복한 데몬프린스는 심층을 나와 왕도의 왕좌 위에 오롯이 자리했다.

놈의 등 뒤에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직전인 지옥의 문이 있었고, 심층을 탈출해 왕도 인근에 몸을 숨긴 우리는 직감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내일이 결전의 날이 될 것이다.

제대로 된 휴식조차 없이 이어진 격렬한 싸움으로 모두 지친 상태였지만, 만전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함께하는 이들 가운데 두려워하는 이는 있을지언정 물러설 마음을 가진 이는 없다는 것을.

새카만 밤하늘엔 작은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알테아.

아무리 어둠이 짙고 밤이 깊다 할지라도 결코 그 빛을 잃지 않는 희망의 별.

내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고, 적은 너무나 강대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절망을 입에 담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을, 승리한 이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네.”

“여행을 다닐 거야. 세계 여행을.”

벨키안 님이 말씀하셨고, 프란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레나가 말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평범하게 나이를 먹고,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고, 그 사람과 평생을 살아가는 그런 삶.

레나의 이야기에 프란이 빙글빙글 웃었다.

벨키안 님도 작은 미소를 흘리셨고 말이다.

레나의 소박한 꿈을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레나가 저 이야기를 하면서, 정확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부분에서 슬쩍슬쩍 란디우스를 쳐다보았으니까.

하얗고 예쁜 뺨이 모닥불에 비친 것 이상으로 붉게 달아올랐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란디우스가 어떤 녀석인지를 말이다.

“레나는 예쁘고 착하니까. 분명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래, 이런 녀석이지.

레나는 대놓고 우울한 얼굴이 되었고, 프란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란디우스를 비난했다.

벨키안 님조차 고개를 가로저으셨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를 탓하지 않았다.

레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누른 뒤 조금은 놀리듯이- 하지만 란디우스만 겨우 알아차릴 정도의 감정만 담아 이야기했다.

“그래, 레나는 착하고 예쁘니까. 분명 좋은 사람을 만나겠지.”

순간 레나가 이쪽을 원망스럽게 째려본 것 같았지만- 아니, 째려본 게 맞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평정을 유지했다.

레나가 몹시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레나가 여동생 같았지만.

몇 번인가 문장을 고쳐보려던 카마엘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은 뒤 그냥 다음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란디우스는 대사교 마누엘라를 추적하겠다고 했다.

마누엘라.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왕비를 꾀어 데몬프린스를 소환하게 한 악마의 주구.

파라곤 왕국 전체를 지옥으로 만든 놈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그랬기에 란디우스는- 아니,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설사 지옥의 문을 막고 데몬 프린스를 쓰러뜨린다 할지라도 마누엘라가 살아 있는 한 이번 사태는 끝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성십자수호단에 들어갈 생각이다.

마누엘라를 추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조직의 힘을 빌린다.

성십자수호단에 들어가 단장의 자리를 손에 넣고, 물심양면으로 란디우스를 도와 마누엘라를 찾아낸다.

비유하자면 란디우스는 빛의 세계에서, 나는 어둠의 세계에서 각자 일인자가-

밤이 깊었다.

우리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 * *

같은 해 12월 7일.

세일룬 왕국 국경지대에 위치한 수도원.

병실에 누워 어느 순간부터 일기장이 되어버린 노트를 조용히 넘기던 카마엘은 란디우스나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미소를 머금은 뒤 생각했다.

‘조금…… 아깝군.’

제법 잘 쓴 것 같은데.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인데.

이걸 아무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

“흠흠.”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란디우스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민망해한 카마엘은 다시 노트를 팔랑팔랑 넘겼다.

‘이왕 쓴 거…… 묘사를 조금 더 해볼까?’

일기가 쓰여진 장소는 파라곤 왕국이었다.

즉, 언제 어디서 적이 닥쳐올지 모를 전장이었다는 소리다.

그랬기에 문장을 고심할 시간도 없었고, 상세한 기록이나 묘사를 할 여유 역시 없었다.

한동안은 병실 신세를 져야 할 상황이니 이 기회에 문장을 좀 다듬으면 어떨까.

묘사도 더 늘리고.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지 않은가.

카마엘은 슬쩍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대자로 뻗은 채 쿨쿨 자고 있는 란디우스를 돌아본 뒤 마음을 정했다.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킨 뒤 펜을 거머쥐었다.

* * *

12월 29일.

수도원을 나선 카마엘은 녹색 표지의 일기장과 적색 표지의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처음에는 그냥 문장이나 더 다듬어볼까 했던 건데.

쓰다 보니 어느새인가 영웅소설이 되어 있었고, 영웅소설에 아는 이름들이- 특히 자신의 이름이 계속 나오는 게 민망해서 반쯤은 장난으로 이름을 바꿔본 것뿐인데.

어쩌다 이게 한 권이나 된 것일까.

아니, 그보다 왜 파라곤 왕도에서의 사태를 쓰던 것이 란디우스와 기사 수행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바뀐 것일까.

“음…….”

아무튼 소일거리가 되었으니 된 거겠지.

카마엘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 * *

다음 해 2월 5일.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은 아직 세일룬 왕국에 모여 있었다.

부상의 치료는 물론이고 파라곤 왕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전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마엘은 충동적으로 제출할 뻔했던 녹색 노트- 일기장을 짐 꾸러미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뒤 보라색 표지의 책을 들고 세일룬 왕가가 운영하는 우체국을 향했다.

처음에는 그냥 일기를 쓸 생각이었는데.

그러다 그냥 묘사만 좀 추가해 본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부끄러워서 이름을 바꾼 것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영웅소설이 완성되었고, 읽다 보니 역시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마엘은 우체국으로 향했다.

봉투에 보라색 표지의 책을 넣은 뒤 잘 봉인하였고, 란디우스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민망함을 온몸으로 드러낸 채 조심스럽게 수신인의 주소를 적어 내렸다.

세일룬 왕국의 출판사.

기사 수행을 하던 당시에 소일거리로 읽었던 영웅소설들을 출간한 곳.

프란이 이 사실을 알면 무슨 말을 할까.

아니, 다른 사람보다 레나가 알게 되면.

카마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냥 보내보는 거니까.

가명도 썼고, 이 원고의 주인이 카마엘 자신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을 테니까.

당장 우체국에 올 때도 변장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러니 되었다.

보내고, 깔끔하게 탈락하고, 그냥 미련도 같이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번뇌에서의 해방.

스스로를 다독인 카마엘은 그렇게 보라색 책을 출판사에 보냈다.

그리고 한 달 뒤 오전.

출판사로부터 서신 한 장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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