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67화 (467/473)

엔딩메이커 466화

SS #39 빌트바인 영웅전 비긴즈(2)

종이 한 장을 꽉 채운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직접 만나 뵙고 싶습니다.

카마엘은 미간을 좁혔다.

직접 만나자.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

어린 시절부터 서출이란 이유로 눈칫밥을 먹고 자란 카마엘은 행간의 맥락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계약을 하자는 건가.’

정식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설마하니 정말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이런 장문의 편지를 보냈겠는가.

카마엘은 조금 더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해서 이런 상황 자체를 아예 상상도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레나나 프란이 없는 지 살핀 뒤라든가, 홀로 잠들기 전이라든가, 아무튼 비슷한 종류의 상상을 해본 적이 있기는 했다.

당장 계약을 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책이 나오면 어떡하지?

너무 잘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어떡하지?

인세가 들어오면 그걸 어디다 쓰지?

등등.

카마엘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도 모르게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차분하게 한 뒤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기감을 널리 퍼뜨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였지만 혹시라는 게 있었으니까.

‘레나는 없군.’

프란도 없고.

요주의 인물 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카마엘은 출판사의 서신을 다시 한번 정독한 뒤 숨을 깊게 골랐고, 이내 결단을 내렸다.

‘그래, 가자.’

이왕 쓴 원고였고 이왕 생긴 기회였다.

앞으로 마누엘라를 비롯한 악마 추종자들을 뒤쫓기 위해 성십자 수호단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니, 길고 치열한 전쟁에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숨 고르기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터였다.

“후우.”

서신을 곱게 접어 품에 감춘 카마엘은 긴 숨을 토했고, 이내 란디우스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작고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 * *

핏빛여명 출판사는 딱히 자랑할 만한 역사와 전통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베스트셀러도 보유하지 못한 그냥 그런 평범한 출판사였다.

주력 출간 분야는 영웅 이야기나 사랑 이야기 같은 오락 소설- 즉, 통속소설이라 불리는 부류들이었다.

핏빛여명 출판사의 편집자이자 기획자인 동시에 부사장인 켈리는 일찌감치 자리 잡은 카페에 앉아 가방에 챙겨 온 원고를 뒤적거렸다.

오늘 만나기로 한 신인 작가의 원고였다.

솔직히 아주 잘 쓴 원고는 아니었다.

군데군데 어색한 문장이나 비문도 적지 않았고, 묘사가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글이기도 했다.

특히 현장감이라고 해야 할까?

읽고 있다 보면 상상으로 자아낸 소설이라기보다는 직접 경험한 바를 담담히 풀어놓는 수필 같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수필일 리는 없겠지만.’

수필이라 하기에는 주인공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사기 캐릭터였다.

멋지고 잘생기고 성격 좋고 호방한데 재능까지 출중하고 가문도 좋다.

그런데 여자 문제는 깨끗.

원래부터 알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사랑받았고, 새로 만난 사람들도 오래지 않아 주인공을 사랑하거나 좋아하게 된다.

물론 이런 주인공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락소설 주인공들은 대체로 이런 경향이 강했다.

남성향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은 예쁘면 전부 히로인이거나 히로인 후보였고, 여성향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은 죄다 멋지고 잘생기고 능력에 가문까지 좋은데 유독 ‘평범한’ 주인공 앞에만 서면 쩔쩔매고 약해지다 사랑을 구걸했다.

‘그래, 어디까지나 소설 주인공이라는 거지.’

현실에 이런 사람이 있을 리가.

어찌 되었든 세상에 둘도 없을 명작은 아니었지만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니 오늘 계약하고 바로 출간하자.’

가방 안에는 원고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든 내밀 수 있도록 준비해 둔 다량의 계약서들이 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찻잔을 내려놓은 켈리가 품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쳐다볼 때였다.

짤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약간의 수군거림이 동반되었다.

어째서일까.

회중시계 뚜껑을 덮으며 고개를 든 켈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웬 미친놈이 카페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진짜 미친놈인가.’

말끔한 정장 차림은 핏이 제대로 살아 멋졌는데, 어깨 위가 문제였다.

눈구멍만 뚫려 있는 새카만 민무늬 가면.

그랬다.

남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가면이 아니라 머리칼도 감추려는 의도인지 길고 커다란 검은 천이 달린 가면이었다.

가면무도회장도 아니고 거리에서 저러고 돌아다닌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미친놈이었다.

‘모른 척하자.’

미친놈이랑 눈 마주쳐서 좋을 게 없으니.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미친놈이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니, 왜 나한테 오는 건데? 잠깐, 설마?’

바로 그 설마였다.

자신 앞에 멈춰 선 미친놈이 쓸데없이 멋진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핏빛여명의 켈리인가.”

주변의 수군거림이 순간 커졌다.

‘아이, 씨팔.’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핏빛여명 ‘출판사’의 켈리라고 명확히 말해줬으면 싶었다.

핏빛여명의 켈리라니.

평소에도 좀 부끄러운 회사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회사 이름을 지은 사장이자 남편이자 소꿉친구인 이안의 목을 진짜 조르고 싶어졌다.

“핏빛여명의 켈리가 아닌 건가?”

다시 머리 위에서 울린 쓸데없이 멋진 목소리에 움찔한 켈리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다급히 말했다.

“마, 맞아요. 핏빛여명 출.판.사.의 켈리입니다.”

일부러 힘주어 말한 보람이 있는지 주변에서 ‘아아’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듯한(?)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동시에 들려온 작은 웃음소리들이 켈리의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브랜드 가치고 나발이고 돌아가면 회사 이름 바꾼다. 내가 꼭 바꾼다.’

그렇게 켈리가 굳은 결심을 새길 때였다.

“예의가 부족하군.”

“네? 아. 죄송합니다. 앉으시죠.”

여전히 낮고 멋진 남자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사람을 불러놓고 멀뚱히 세워놓은 켈리 자신이 잘못을 하긴 한 상황이었다.

“……알겠다.”

남자는 켈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켈리는 생각했다.

‘미친 컨셉충인가?’

가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분명 멋지긴 하지만 어째 일부러 내리깐 것 같은 목소리까지 포함해서.

‘미친놈이군.’

하지만 이해했다.

애당초 이 바닥 작가들 중에 정상인 놈이 더 드물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좀 심한 것 같긴 하지만.’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라면 계약을 재고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은 속단할 단계가 아닌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켈리는 숙달된 편집자 겸 기획자 겸 부사장답게 단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핏빛여명 출판사의 부사장인 켈리입니다.”

“……사누딜이다.”

나직이 말한 남자는 다가온 점원에게 블랙커피를 주문했고, 켈리는 가면 쓴 놈이 커피를 어떻게 마시려고 그러느냐 묻는 대신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4월 19일.

외출에서 돌아온 카마엘은 품에 안고 온 종이봉투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빌트바인 영웅전 제1권 - 모험의 시작.’

붉은색 표지에 새겨진 금빛 글씨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진 카마엘은 새삼 주위를 한 번 살핀 뒤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평생 검만 보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검귀라는 별호부터가 지금까지의 인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그런 인생에서 처음으로 검 이외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경애하는 란디우스의 이야기를 담아.

카마엘은 새삼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보여준 뒤 감상을 듣고 싶었다.

‘특히 란디우스.’

그 친구는 이 이야기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언제나처럼 호탕하게 웃을까?

재미있다고 말해줄까?

궁금했다.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란디우스와 카마엘 자신의 이야기였으니, 다른 누구도 아닌 란디우스가 보면 진실을 꿰뚫어 볼지도 몰랐다.

‘참자.’

란디우스가 알게 되면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될 두 사람- 레나와 프란 역시도 진실을 알게 될 테니까.

아니, 그 전에 카마엘 자신이 민망함과 수치심으로 죽어버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빌트바인 영웅전? 카마엘, 이런 것도 봐요?”

어느새 바로 옆에 다가온 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언제 다가온 것일까.

블링크라도 사용한 것일까?

아니었다.

카마엘 자신의 불찰이었다.

책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레나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카마엘?”

“……가끔. 소일거리로.”

“헤에.”

쥐어짜 낸 것 같은 답변에 레나가 의외라는 듯 작은 소리를 내었고, 카마엘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민망하다.

창피하다.

그리고 동시에 화도 조금 났다.

이런 거라니.

이게 뭐 어때서.

나름 훌륭한 이야기인데.

어? 뭐.

“읽어보겠나?”

살짝 발끈한 카마엘은 저도 모르게 말했고, 이내 바로 후회했다.

그런데 레나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어, 그래도 돼요? 새로 사 온 거 아니었어요?”

“……수련 뒤에 읽을 예정이라.”

“어…… 그럼 읽어볼게요. 마침 머리도 좀 쉬고 싶었으니.”

“……그래.”

레나에게 빌트바인 영웅전을 넘겨준 카마엘은 서둘러 발걸음을 떼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레나에게 들킬까 겁이 난 터였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안뜰에서 검을 휘두르다 온 카마엘은 잠시 발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응접실 소파에 앉은 레나가 빌트바인 영웅전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문득 호기심이 솟구친 카마엘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고, 이내 무척이나 진지한 레나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 거지?’

그렇게 카마엘이 시선을 책 쪽으로 내린 순간이었다.

“어, 카마엘 왔어요?”

레나가 고개를 들었고, 카마엘은 일단 침묵했다.

그러자 레나는 반쯤 읽은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마저 다 보고 줘도 돼요?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그래라.”

카마엘이 허락하자 레나는 고맙다고 말한 뒤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레나는 볼 수 없었다.

카마엘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항상 무뚝뚝한 그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는 것을.

* * *

“나, 빌트바인 영웅전의 애독자가 되기로 했어. 시리즈도 벌써 전부 다 구매했고.”

이십여 년 뒤.

레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하며 사랑스러운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고, 카마엘은 쥐어짜 낸 목소리로 답했다.

“……날 죽일 셈이냐.”

“왜애, 애독자라니까. 정말 팬이에요, 작가님. 팬레터 보내면 받아주실 거죠? 사인도 해주세요. 네?”

카마엘의 팔을 끌어안은 레나가 장난 섞인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저 고고한 성천사 레나가 이런 식의 애교도 부릴 줄 안다는 것을 아는 자가 대륙에 얼마나 될까.

아니, 애당초 레나가 애교를 부리는 대상이 몇이나 될까.

란디우스와 카마엘.

이렇게 둘뿐이었다.

하지만 카마엘은 기분 좋게 웃거나 영광이라 느끼는 대신 예쁜 얼굴에 사악한 미소를 가득 지은 악마 같은 여동생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고, 이내 검귀답게 치명적인 대응책을 생각해 냈다.

“다음 이야기는 제이나가 메인이다.”

“어?”

제이나.

빌트바인 영웅전의 진히로인.

레나 아인스버그를 모델로 한 캐릭터.

“기대하도록.”

짧게 말한 카마엘은 그대로 신묘한 보법을 밟아 순식간에 레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들켰다면 숨기지 말고 오히려 역공의 수로 사용한다.

제이나의 이야기.

이제는 레나 본인부터가 자신이 모델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캐릭터의 이야기.

그런데 기대하라니.

그것도 한창 놀려먹던 상황에 기대하라니.

“카마…… 엘?”

레나는 약간의 불안과 조심스러움을 담아 불렀지만 카마엘은 대답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발걸음을 더욱 서두를 뿐이었다.

“카마엘!”

블링크로 따라잡으려는 레나를 피하듯 카마엘은 신법을 발휘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굴 가득까지는 아니지만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검귀 카마엘.

작가 사누딜.

카마엘은 다시 미소 지었다.

아니, 작게나마 웃음을 터뜨렸다.

레나의 추적을 피하며, 머릿속 원고지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fin

“저기, 이거 혹시 나?”

카마엘 인생에 있어 참으로 오랜만에 새로 사귄, 그리고 레나에 이어 두 번째 여자 사람 친구인 나타샤의 물음에 카마엘은 바로 답하는 대신 커피 잔을 들어 올렸고, 한 모금 마신 뒤 그 옛날 켈리가 평가했던 것처럼 쓸데없이 멋진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아니, 글쎄는 무슨 글쎄야. 이거 나 맞는 거 같은데?”

빌트바인 영웅전에 새로이 등장한 금발 머리 캐릭터.

일단 캐릭터 이름이 ‘타냐’인 것부터가 확신범 수준이었다.

하지만 카마엘은 여전히 뻔뻔한 얼굴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커피를 마셨고, 나타샤는 결국 피식 웃더니 다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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