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70화 (470/473)

엔딩메이커 469화

SS #40 Time to back(3)

유더와 코델리아는 정반대라 해도 좋을 재능을 타고났다.

이성과 직감.

논리와 느낌.

유더가 미래에서 온 것이냐 물었을 때 코델리아는 직감했다.

유더는 이렇다 할 근거 없이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유더의 머릿속에는 타당한 논리 구조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합리.

유더의 사고의 기반이 되는 것.

‘늘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건 아니지만.’

유더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었고, 이성의 노예 역시 아니었으니까.

때로는 열정과 격정에 몸을 맡길 때도 있었다.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싸움에 달려드는 일도 있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8강에서 9강 갈 확률이 2%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템의 강화 버튼을 눌렀던 때라-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이상할 정도로 산만해진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한 코델리아는 눈앞의 유더에게 집중했다.

어린 유더였다.

훤칠하게 키가 크기 전의, 손가락 마디 하나도 되지 않을 정도의 차이긴 하지만 코델리아 자신보다도 작았던 시절의 병약한 유더.

단정한 이목구비가 자리한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희고 깨끗했다.

하지만 너무 흰 감이 있었다.

보기 좋게 하얀 것이 아니라 창백함에 가까운 얼굴과 병약함을 드러내듯 눈 밑에 진 음영.

하지만 눈빛만은 그렇지 않았다.

코델리아 자신이 잘 아는, 그리고 너무나 좋아하는 유더의 눈이었다.

유더는 그 눈으로 물었고,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질문에 답하였다.

그래야 한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오랜 습관을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유더가 진지한 눈빛을 했을 때는 장난을 치면 안 된다.

가능한 협조해야 한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동시에 묘한 기분을 함께 느꼈다.

아릿한 가슴의 통증.

불현듯 밀려온 섭섭함과 서러움.

유더의 눈이었지만 유더의 눈이 아니었다.

어리고 병약해 눈빛 역시 약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코델리아 자신의 얼굴이 비친 저 초록색 눈동자에는 이렇다 할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냉정히 눈앞의 상대를 관조할 뿐인 눈빛에 새삼, 울컥하고 감정이 치밀었다.

언제나 사랑이 넘치던 유더의 눈빛.

코델리아 자신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애정이 넘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초록색 눈동자.

“노란…… 폭풍?”

유더의 부름에 코델리아는 다시 한번 흠칫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애칭이 아니었다.

유더가 장난스럽게 사랑을 담아 부르던 별명이 아닌, 그저 코델리아보다는 노란폭풍 쪽이 익숙해 입에 담았을 뿐인 호칭.

코델리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부름에 답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해했다.

아니, 직감했다.

지금의 상황을.

눈앞의 유더를.

그렇기에 코델리아는 왈칵 치밀어 올랐던 서러움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대신 다소 차분해진 얼굴로 지금의 유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스칼렛이 봤으면 유난이라고 했겠지?’

겉으로는 까칠한데 속으로는 누구보다 다정한 카이사는 섭섭해하겠지만, 코델리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친구.

언니 같은 스칼렛은 이번에도 도움이 되었다.

흥흥거리는 스칼렛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작은 미소까지 머금을 수 있었다.

“어떻게…… 안 거야?”

목소리에 떨림이 없었다.

붙잡힌 손목을 부드럽게 빼내며 건넨 물음에는 순수한 의구심만이 담겨 있었다.

그랬기에 유더는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몸을 조금 늘어뜨린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가짜일 가능성을 생각했어.”

“내가 코델리아…… 아니, 노란폭풍이 아니라고?”

“그래, 하지만 그 가설은 금방 폐기했어. 논리가 너무 부족했으니까.”

코델리아가 가짜라면, 그러니까 가짜 노란폭풍이라면 어째서 가짜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유더 자신을 속여서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물론 극단적인 가정을 하면 나름의 이유를 만들 수 있었다.

애당초 유더 자신이 플레이아데스에서 환생한 뒤 돌연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게 된 이유 자체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유더 자신을 환생시킨 자가 강진호에게 익숙한 노란폭풍을 앞세워 경계심과 긴장감을 해제시킨 뒤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는 가설 정도가 그나마 세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내 폐기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너무 극단적인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생각했다.

일단 눈앞의 소녀가 코델리아는 맞는지.

정말로 노란폭풍인 것인지.

강진호이던 시절의 유더는 몇 가지 강박을 가지고 있었고, 개중에는 프로파일링도 있었다.

언행을 관찰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한다.

강박이라 표현할 정도의 습관이었다.

영웅전기에 등장하는 NPC들의 프로파일링을 작성한 것은 1등을 하기 위한 집념 때문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러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불편함을 느끼는 강박을 가진 탓이 컸다.

하지만 유더는 그런 강박까지 견뎌내며 노란폭풍의 프로파일링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아이인지 어른인지.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노란폭풍은 그저 노란폭풍으로 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환생과 전생 기억의 각성, 유더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모습과 꽤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노란폭풍.

프로파일링을 진행했다.

일부러 분석하지 않았을 뿐 이미 자료는 유더의 머릿속에 차고 넘칠 정도로 쌓여 있었으니 말이다.

‘노폭이 맞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눈앞의 소녀는 가짜가 아닌 진짜 노란폭풍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논리를 진행하면 이상한 점이 몇 가지나 발견되었다.

“어떤 거?”

사실 바로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스스로 답을 내놓는 대신 유더에게 물었고, 유더는 미간을 살짝 좁힌 뒤 말했다.

“너무.”

“너무?”

“너무 논리적이야.”

밤의 정원에서 유더 자신을 마주했을 때.

구음절맥 치료를 먼저 이야기했다.

치료를 위한 방법 역시 먼저 이야기하였다.

꽃밭에 도착한 뒤의 흐름 역시 그러했다.

“노란폭풍은 그렇지 않으니까.”

“살짝 화가 나지만 일단 들을게. 그게 다야?”

삐딱해진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논리 외에도 이상한 점들은 여럿 있었어.”

“예를 들면?”

“데이트…… 그러니까 퀘스트 신청을 내가 먼저 하게 한 거.”

노란폭풍다우면서도 노란폭풍답지 않았다.

유더 자신을 조금이라도 놀리고 싶어 하는 면모는 노폭 그 자체였지만 그 내용이, 그리고 그 내용 밑에 깔린 감정이 노폭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행동들도. 전부 하나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어.”

애정.

사랑.

넘치는 친애의 마음.

유더- 아웃복서009 자신과 노란폭풍은 악우였다.

5년이란 시간 동안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서로를 싫어하지는 않는 오히려 사이가 좋다고 해도 좋을 랜선 친구.

“그래서 새로운 가능성을 하나 더 생각했어. 코델리아가 정말 노폭이라면 어째서 내가 아는 노폭과 달라진 것일까.”

어차피 영웅전기2와 똑같은 판타지 세계에서 환생한 상황이었다.

온갖 해괴망측한 가능성들을 모조리 떠올렸고, 유더는 이내 가장 가능성 높은, 합리로 무장한 답안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하지만 나와 함께한 것이 분명한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상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대부분의 의문이 해소되었다.

응접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놀란 척 연기를 했던 이유도, 밤의 정원에서 마치 답안지를 미리 보고 온 것처럼 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은 것도, 그리고- 정말이지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유더 자신에게 넘쳐흐를 것 같은 애정을 보이는 것도.

물 흐르듯 이어진 유더의 설명을 모두 들은 코델리아는 입술을 삐쭉 내미는가 싶더니 예상 밖의 질문을 했다.

“어색…… 했어? 그러니까 첫날의 연기.”

솔직히 자신 있었는데.

다소 엉뚱한, 그렇기에 너무나 코델리아다운 질문이었고, 유더는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상당했어. 몇 번이나 당시의 상황을 검토하지 않았다면 아마 모르고 지나갔을 거야.”

거의 나타샤에 필적한 연기였어-라는 말을 꺼내려다 만 유더는 다시 표정을 정돈한 뒤 말했다.

“아무튼…… 사정을 좀 이야기해 줬으면 해. 네가 어떻게 미래에서 온 것인지, 지금의 상황 자체는 어떻게 된 것인지, 미래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더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숨을 길게 한 번 토하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일단, 나도 내가 왜 갑자기 과거로 온 건지는 잘 몰라. 그러니까 그건 빼고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게.”

“그래.”

“너랑 나랑 결혼해.”

“어?”

유더는 눈을 깜박였고, 코델리아는 길고 긴 이야기를 최대한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 * *

유더는 혼란에 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더 자신이 노란폭풍- 그러니까 코델리아와 결혼한다.

굉장히 의외의 일이긴 했지만 이성의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코델리아가 유더 자신에게 보인 넘치는 애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진 이야기들은 달랐다.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들 때문이다.

“내, 내가 그런 짓까지…… 한다고?”

“어, 응, 정말로 진짜.”

코델리아가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자신도 부끄러운 이야기들이었지만, 아무튼 전부 사실이었고, 눈앞의 유더가 민망함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너무나 즐거웠으니까.

“왜? 내가 거짓말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더는 자기 객관화가 제법 잘 되는 편이었다.

매월 랭킹 정산 때마다 자신이 노폭을 어떻게 놀렸는지 역시 매우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온라인을 넘어 오프에서도 개초딩짓을 했다면 충격이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이해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이야기의 중심이 된 것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더가 코델리아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한 행동들.

코델리아의 사랑을 얻은 이후부터- 아니, 얻기 전부터 보인 수많은 팔불출 같은 행동들.

“우리…… 공주님?”

“응응, 맨날맨날 그렇게 불렀어.”

온라인에서 채팅으로 쳐도 부끄러운 말을 오프에서 했다고?

“야영할 때도 아침에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세숫물을 가져다줬고, 항상 맛있는 밥도 해줬어. 많이 걸으면 다리 아플 거라고 늘 업어줬고. 왕도에서는 어딜 가든 늘 내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해줬어.”

“혹시 내가 내기 같은 거에 져서 노예 노릇을 했다든가?”

“아닌데, 그런 적 없는데. 그냥 알아서 해준 건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야생의 땅에서 있었던 온갖 일들.

이제는 코델리아 자신도 아주 잘 아는 유더의 기정사실 만들기 대작전.

왕도에서 보여주었던 온갖 닭살 돋는 행동들과 코델리아 자신이 자연스럽게 유더의 색으로 물들게 만든 공들인 언행들.

유더는 식은땀을 흐르는 것을 느꼈다.

들으면 들을수록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강해졌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어.

그럴싸해.

유더 자신이 미래에 저렇게까지 망가진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으로 유더 자신다운 행동들이란 생각 역시 강해졌다.

유더 자신이 정말로 눈앞의 코델리아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랑을 얻기 위해 할 법한 행동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그래도 그렇지.’

역시 믿기 어려웠다.

유더에게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지만, 논리보다는 감정적인 이유였다.

유더 자신이 5년 동안 인터넷에서 놀려먹던, 남자인지도 여자인지도 모를 악우에게 완전히 홀딱 반해서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니.

‘아니, 그것만이 아니야.’

장황하게 이어진 코델리아의 이야기에는 ‘전생들’에 대한 언급 역시 있었다.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의 길고 긴 인연.

몇 번이나 반복된 멸망 속에서 언제나 마주했고, 언제나 서로를 깊이 사랑했던 두 사람.

단순히 반했네 마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신화나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이어진 연인의 이야기였다.

정말일까.

정말로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그렇게나 깊은 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혼란으로 가득 찬 녹색 눈동자에 의문이 깃들자 코델리아는 돌연 새카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험해 볼래?”

“시험…… 이라니?”

“실험이라 해도 좋고.”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려는 것인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유더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야, 야해.’

술 먹은 나타샤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훨씬 더 농도가 짙었다.

코델리아는 몸을 조금 더 내밀었고, 반사적으로 도망치듯 몸을 뒤로 빼던 유더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등 뒤의 벽.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눈앞의 코델리아는 더욱 더 다가온다.

등 뒤의 벽을 확인하고 정면을 봤을 때는 이미 서로의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코델리아가 두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대로 코앞의 유더를 마주한 채 말했다.

“우리가 정말로 환상의 커플인지 아닌지.”

유더 네가 전생부터 지금까지 계속 코델리아 자신을 사랑해 온 지고지순한 애정의 소유자인지 아닌지.

“어, 어떻게?”

유더는 완전히 빨개진 얼굴로 엉망진창인 목소리를 내었고, 코델리아는 음흉하면서도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은 뒤 벽을 짚었던 오른손으로 유더의 뺨을 어루만졌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가냘픈 신음을 흘리는 유더의 모습에 묘한 가학 욕구와 즐거움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마구 뛰기 시작한 가슴의 고동을 느끼며 눈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마주하지도 못하는 유더에게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삭였다.

“이렇게.”

나는 미래에서 온 코델리아니까.

누구누구 때문에 하얗던 속이 새카맣게 변해 버린 블랙 코델리아니까.

유더는 질끈 눈을 감았고, 코델리아는 다시 미소 지었다.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