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2화 (2/233)

〈 2화 〉 재수없는 하루. (수정)

* * *

충만하던 마나가 사라지며 루나는 자신의 마법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계산했던 대가도 지불됐고 천천히 시야가 돌아왔다.

전보다 낮아진 눈높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마나양.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대를 계산했다.

이때쯤이면­

용사 아카데미 시절인가?

"에...에이든."

어지럼증이 가라앉으며 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세글자가 떠올랐다.

"에이든­"

달콤한 세 글자를 마치 사탕 굴리듯 입안에서 돌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면 에이든의 옆에는 아무도 없겠지?"

거울 속에는 눈처럼 아름다운 검은 머리 소녀가 충혈된 눈으로 웃고 있었다.

에이든­

숨 쉬는 것처럼 세 글자를 다시 뱉어내며.

***

"힘차고 좋은 아침!"

몸을 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짜증을 가득 담아 눈을 뜨니, 곰처럼 생긴 케일이 끔벅끔벅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녀석은 슬프지만, 아카데미 내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멍청하지만 힘만 센 녀석.

유급생이라 다들 피하는 내게 단 하나뿐인 친구였다.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자 케일의 멍청할 정도로 동그란 눈이 반달로 휘었다.

"좋은 아침!"

쾌활한 목소리로 케일이 인사했다.

눈 뜨자마자 보는 게 케일이라니 오늘 하루도 쓰레기 같겠네.

울컥 화가 올라왔다.

"너! 시발!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오지 말랬지!"

주먹으로 케일의 어깨를 힘껏 때렸지만, 아픈 건 오히려 내 주먹이었다.

"아이 시발! 돼지 새끼!"

얼얼한 손을 털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5분 남았어!"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케일이 손가락을 튕겼다.

"뭐가."

내 입에서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어깨를 두드린 주먹이 아직도 얼얼했다.

무식하게 단단하기만 한 새끼.

"1교시. 그리고 오늘 1교시는 검술 이론 수업이지!"

케일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익살스럽게 말하고 방에서 뛰어나갔다.

시발 늦잠이네.

씻을 시간도 없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교복을 대충 챙겨입었다.

검술 이론 수업의 담당 교관은 라인하르트라는 꼬장꼬장한 아저씨였는데, 지각하면 아카데미 운동장을 오리걸음으로 100바퀴 돌게 했다.

그래서 검술 수업의 올해 지각률은 0프로 였다.

내가 그 기록마저 갈아 치울 수는 없었다.

나는 떡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어차피 아싸인 날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없으니 상관없었다.

빠르게 달려 신발 끈이 풀렸지만 묶을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정신없이 복도를 뛰었다.

다행히도 수업 시간 바로 전이라 그런지, 복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야! 복도에서 뛰지 말랬지!"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죄송해요! 지각이라!"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며 열심히 뛰었다.

뒤에서 뭐라 꿍시렁거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2­a , 2­b, 2­c!

마침내 검술 이론 수업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손목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정시 1분 전.

휴... 겨우 늦지 않았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풀어진 셔츠를 잠갔다.

달리는 바람에 머리가 꽤 자연스럽게 넘겨져서 꽤 멋스러웠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갈색 사자 같은 라인하르트 선생님이 서 있었다.

"늦었습니다 에이든. 운동장 100바퀴. 오리발로"

나를 본 라인하르트 선생님이 무미건조하게 말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왜요! 1분 전인데!"

나는 억울함을 잔뜩 담아서 항변했다.

그러자 라인하르트 선생님이 두꺼운 손가락으로 칠판 위에 걸려있는 시계를 가리켰다.

시계는 정시를 1분 넘겨 있었다.

아 시발.

불량 시계 또 고장 났네.

나는 괜스레 손목에 있는 시계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물론 그렇다고 시간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와하하하하!"

교실에 있는 애들이 큰 소리로 비웃었다.

"하하.. 그래도 1분이면.. 어떻게 좀..."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끝이 살짝 올라간 내 눈매 때문에 소용없을 테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첫 교시부터 오리발로 운동장을 돌면 하루가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진심을 듬뿍 담아 라인하르트 선생님을 간절하게 쳐다봤다.

라인하르트 선생님이 표정을 살짝 찌푸리면서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일벌백계. 운동장 100바퀴 돌도록 합니다."

라인하르트 선생님의 서슬 퍼런 눈빛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도로 나왔다.

1분 늦은 게 뭔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일벌백계야.

좆같은 아카데미.

망해버려라.

나는 용사 아카데미가 망할 수 있는 가짓수를 생각하며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복도의 건너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건너편에서 나온 인물을 확인하자 입에서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우리 용사 아카데미의 자랑 키아나 였다.

키아나는 금발 생머리에 차가운 느낌을 주지만, 완벽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외모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아카데미 창시 이래 검에 대한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고도 들었다.

심지어 출신까지 고귀한 공작가 출신.

이 세상은 밸런스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게 분명했다.

안녕!

내 안의 추악한 열등감이 고개 들고 인사했다.

귀엽게 인사하는 녀석을 억지로 밀어서 도로 밑에 처넣었다.

용사 아카데미에서 유급생인 내 생존법은 관심끌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다.

마치 지나가는 길에 있는 풀처럼.

키아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눈을 낮게 깔았다.

복도의 문양이 이런 문양이었군. 저거는 약간 검 모양인데?

"잠깐만요."

내 옆을 지나간 키아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불러세웠다.

그 부름에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상상이 들었다.

설마 로맨스물의 클리셰처럼 첫눈에 반했다?

약간의 기대감에 나는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크게 떴는지 눈꺼풀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억지로 버텼다.

예전에는 그래도 귀엽게 생겼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칭찬도 들었었다.

물론 내가 아주머니의 무거운 물건을 대신 옮겨주고 난 뒤였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키아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왼쪽 신발에서 흙이 떨어지네요. 다음부터 아카데미 건물에 들어올 때는 신발을 털고 들어오세요."

할 말을 끝낸 키아나가 다시 돌아갔다.

진짜 재수 없네.

키아나가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양손의 중지를 펼쳐 그쪽으로 내세웠다.

남들에겐 유치한 행동이지만, 우습게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운동장으로 갔다.

운동장에는 검술 실습수업이 한창인 듯 애들이 검을 들고 대련하고 있었다.

하­ 쪽팔려 시발.

나는 고개를 양다리에 파묻고 오리걸음으로 걸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저들을 못 보니까 저들도 나를 못 보지 않을까?

"저거 그 에이든 아냐?"

"조기 졸업보다 힘든 역사적인 유급을 했다던 그 에이든?"

"지각했나 봐! 푸하하하!"

검술 실습수업을 받는 애들의 옆을 지나갈 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욕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싸워도 내가 지니까 억지로 안 들리는 척 걸음을 옮겼다.

나는 나보다 강한 놈들에게는 정말 잘 참았다.

"저렇게 게으르니까 유급을 하지 쯧!"

"수업에 집중해라!"

고학년 검술 실습 담당인 드리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호통쳤다.

여자임에도 건강미 넘치는 몸에 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인 드리아 선생님은 늘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드리아 선생님의 호통에 학생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고생이 많다. 에이든"

드리아 선생님이 내게 살짝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드리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줬어!

마냥 재수 없는 하루는 아닌가 봐.

덕분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기운이 차올랐다.

물론 그 기운은 열 바퀴 만에 바로 소진됐지만.

하아 싸구려 시계 시발.

최근에 충전소에서 마나도 충전시켜뒀는데, 왜 하필 오늘 지랄이야.

유급생이지만 나름 용사 아카데미의 학생이라 겨우 100바퀴를 채울 수 있었다.

"허억­ 시발. 존나 힘드네 .."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운동장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체력을 1교시에 다 써버렸다. 이제 오늘 수업은 공쳤다.

벤치에서 숨을 가다듬는데 볼에서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앗! 차가! 시발!"

"고생했으! 1교시는 이미 끝났어."

옆을 보니 케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을 건네고 있었다.

내가 100바퀴를 돌 동안 1교시 시간이 끝난 듯했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 상태로 수업을 들어갔어도 엎어져서 잠만 잤을 테니까.

나는 케일이 건넨 물을 받아 한 번에 다 마셨다.

케일이 좆같은 놈이긴 해도 좋은 놈이긴 해.

내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고.

"크­ 시원하다! 딸꾹!"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딸꾹질이 올라왔다.

"천천히 마시지."

케일이 사람 좋은 미소로 내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너! 시발 딸꾹! 기왕 깨워줄 거면 딸꾹! 좀 일찍 깨워주지 그랬냐! 딸꾹! 아이 시발! 좆같은 딸국질! 딸꾹!"

케일의 사람 좋은 미소에 열이 다시금 뻗쳤다.

"에이든은 다 좋은데 입이 너무 험해... 나도 설마 에이든이 라인하르트님 수업에 첫날부터 지각할 줄은..."

케일이 성질내는 내게서 살짝 떨어지며 중얼거렸다.

"너! 시발! 형이라고 딸꾹! 부르라고 딸꾹! 했지! 아이­ 좆같은 딸꾹질!"

참으려고 노력해도 딸꾹질이 계속 올라왔다.

실제로 나는 유급생이라 케일보다 한 살 많았다.

내가 번번이 케일에게 말했지만, 케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다른 애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흐흐­ 동급생끼리 무슨 형이야!"

케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억센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그 무식한 힘에 내 몸이 찌푸려졌다.

치사한 새끼 형한테 힘을 쓰냐.

이러다가는 내 몸이 반으로 접힐 것 같아서 다급하게 케일의 팔뚝을 두드렸다.

"니 좆대로 딸꾹! 해! 시발! 좆같은 딸꾹!질."

내 말에 케일이 팔을 풀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케일이 소리쳤다.

"어! 루나 쨩이다!"

케일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검은색 단발머리와 작은 키의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미인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루나는 미인이었다.

하얀 피부에 검은 단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까지.

아마 신이 저 여자를 만들 때 모든 정성을 들여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남는 시간에 대충 발로 나를 만들었고.

루나는 평민 출신임에도 마법에 대한 압도적인 재능을 지녔다.

축복받은 재능 때문에 교장 선생님이 직접 아카데미로 데리고 왔다고 들었다.

그 덕분에 출신은 나와 같은 평민이지만 이미 받는 대우는 평민이 아니었다.

루나는 우리 용사 아카데미가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다.

루나는 다른 사람과 말을 일절 하지 않고 주로 도서관에만 있었다.

루나의 조용한 성격이 루나의 이미지를 신비롭게 만들었다.

원래 나같이 생긴 애들이 말이 없으면 아싸가 되지만, 루나 정도의 미인이 말이 없으면 신비한 사람이 되지 않는가.

루나는 그 악질 팬덤도 유명했다.

그들은 고립된 상태의 루나가 좋은지, 루나에게 누군가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누구든 루나에게 접근하면 아카데미를 때려치울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힌다고 들었다.

참으로 멍청한 녀석들인 게 분명했다.

물론 나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쁘긴 진짜 이쁘네.

나는 괜히 뭐라도 있는 것처럼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내게는 키만 멀대같이 크고 재수 없는 키아나보다 루나가 더 매력적이었다.

근데 애 상태가 좀 이상한데..?

두 눈이 무언가를 찾는 듯 빠르게 움직였고 두꺼운 책을 든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느낌이 좀... 많이 좋지 않아.

내 틀린 적 없는 생존 본능이 경고를 보냈다.

이럴 때면 항상 뭔가 큰 문제가 생겼다.

저번에 큰일을 보고 휴지가 없을 때도 그랬고.

미친것처럼 빠르게 두리번거리던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루나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루나가 갑자기 우리 쪽으로 뛰었다.

"어? 루나쨩이 이쪽으로 온다?! 온다?! 온다!!"

말을 하던 케일이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반복했다.

루나가 우리 쪽으로 오는 게 나만의 착각이 아닌 듯했다.

옆에 있는 케일이 자세를 고쳐 앉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셔 이미 큰 덩치를 더 부풀렸다.

네가 무슨 야생 동물이냐.

여자가 온다고 왜 몸집을 부풀려.

어느새 루나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루나의 숨이 거칠었다.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했다.

"저거 누구야?"

"그 인간쓰레기 유급생 아니야?"

악질 팬덤이 웅성거렸다.

그 유급생은 맞는데, 인간쓰레기는 아니에요.

내 앞에 선 루나가 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한참을 쳐다보던 루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이든?"

루나가 마치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내 얼굴의 여기저기를 뜯어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물론 나도 용사 아카데미의 유일한 유급생으로 유명하기는 했지만.

루나의 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모습에 주변 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졌다.

옆에 있던 케일마저 나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나는 루나와 마주친 게 지금이 처음이었다.

근데 왜 저렇게 애절한 눈빛으로 보는 거야.

"에이든..."

내 대답이 없자 루나가 다시금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그... 사람 잘못 보셨어요."

나 같은 소시민이 저런 악질 팬덤 보유자와 엮이면 위험하다.

나는 최대한 루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루나의 아름다운 외모에서 눈을 떼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억지로 목에 힘을 줘서 고개를 돌렸다.

"에이든!!!"

갑자기 루나가 온 힘을 다해서 내게 안겼다.

키가 작은 루나가 내 가슴으로 쏙 들어왔고.

루나가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이 땅에 부딪히면서 큰 소리가 났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루나의 따듯한 체온에 확실히 깨달았다.

난 좆됐다.

"딸꾹!"

옆에서 케일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