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마조히스트. (수정)
* * *
주변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아니 차갑다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아니에요. 저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억울한 눈빛으로 주변을 쳐다봤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눈빛이었다.
"에이든에이든에이든."
루나가 내 몸 여기저기를 필사적으로 주물렀다.
얘는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나는 어떻게든 루나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루나가 악착같이 들러붙었다.
아니 무슨 마법사라며 힘이 왜 이렇게 세.
나는 달라붙은 루나를 도저히 떼어낼 수 없었다.
"이제 절대 안 놓을 거야. 에이든. 어디도 못 가 나의 에이든."
떼어내려고 할수록 루나는 더욱더 악착같이 나를 끌어안았다.
불길하게 중얼거리는 루나의 말이 내 귀에 들렸다.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케일을 쳐다봤지만, 케일은 오히려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이 새끼야.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욕지기가 입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랑해. 에이든 이제 절대 떨어지지 말자"
루나가 내 품 안에서 조용하게 속삭였다.
루나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온몸에 닭살이 올라왔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이.
"떠... 떨어져! 이 미친년아!"
루나의 섬뜩한 말에 다급해져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시발 실수했다.
이래서 시발 평소의 말 습관이 중요한 건가.
내 욕지기에 주변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딸꾹!"
케일이 다시 한 번 딸꾹질을 시작했다.
넌 좀 뭐라도 좀 해봐 이 돼지 새끼야.
괜히 지켜만 보는 케일이 얄미워 눈짓했지만, 녀석은 잔뜩 굳은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나를 안고 있는 루나의 힘이 약해졌다.
강하게 나를 안던 힘이 약해지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내 욕지기를 들은 루나가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뭐야 얘는 또 왜 이래.
"에이든?에이든!에이든? 역시 에이든이야! 에이든이였어!"
반가운 눈빛을 한 미친년이 또 중얼거렸다.
"떨어지라고 시발!"
나는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욕지기를 뱉었다.
그제야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루나가 떨어졌다.
욕을 먹은 루나는 오히려 밝게 웃고 있었다.
이전의 우울한 모습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뭐야 시발.
무서워 죽겠어 진짜.
정말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뭡니까? 시발."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강한 척 최대한 힘줘서 말했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은 들키지 않기 위해 등 뒤로 숨겼다.
저 마법 천재 소녀는 손쉽게 나를 없앨 수 있었다.
그래도 아카데미니까 그러지 않을 거야. 그렇지?
자꾸만 초점이 엇나가는 루나의 눈이 불안했다.
제발 그렇다고 해줘.
"아! 맞다! 아직 에이든은 나를 모르는구나. 그래... 그런 거야. 슬퍼하면 안 돼! 천천히 알아가면 되는 거니까."
밝게 웃던 루나가 갑자기 얼굴을 구기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쟤는 또 왜 저래.
내 바로 앞에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하니 절로 긴장돼 손에 땀이 찼다.
케일은 어느새 슬금슬금 뒷걸음질로 멀어지고 있었다.
저런 새끼가 내 유일한 친구라니 인생 헛살았네 진짜.
"그래... 알아가면 되는 거야. 다시 쓰는 거야 처음부터. 더 이쁘게. 더 행복하게. 방해되는 것들은 다 없애고."
중얼거리던 루나가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안녕! 반가워! 나는 루나라고 해! 잘 지내보자! 너는 에이든이지?! 소문은 익히 들었어!"
루나가 눈물 자국이 있는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인사했다.
물론 웃고 있는 와중에도 눈물은 계속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얘는 확실히 미친년이다.
내 생존 본능이 얘한테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내 소문을 익히 들었다니.
내 유일한 소문은 유급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나를 엿먹이는 건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일단 그녀는 내게 욕을 먹을 때마다 표정이 밝아졌다.
그 모습은 내가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마조히스트의 특징과 비슷했다.
저런 미인이 마조히스트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초식 동물인 나는 그녀의 니즈를 맞춰야 했다.
"반갑다. 미... 미친년아."
억지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여서 욕지기를 뱉어냈다.
숨 쉬듯이 하던 욕이 이렇게 어렵다니.
"흐읏."
내 욕을 들은 루나가 이상한 신음을 내고는 전보다 더 밝게 웃었다.
욕을 먹고 좋아하는 것을 보니 일단 그녀는 내 짐작대로 마조히스트가 맞는 듯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루나가 놔주지 않았다.
루나는 쓸데없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을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나보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마법 재능이래! 그리고 또.. 이 용사 아카데미에서는 지원금을 받고 다니고 있어! 그래서 난 돈이 엄청 많아! 에이든이 좋아하는 돈! 그러니까 에이든은 나만 있으면 돼 다른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루나는 자신의 장점들을 나한테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나는 필사적으로 내 마음에 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초식 동물인 내 앞에서 사자가 배를 까보이며 애교를 부리니 난처했다.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닌가?"
내가 반응을 안 하자 다시 고개를 내린 루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나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는 듯한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아 대단하네!"
그에 나는 황급히 입을 움직여 그녀를 칭찬했다.
내 반응이 루나가 원하던 반응이 아닌지, 루나의 표정이 오히려 더 일그러졌다.
저 표정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내 대답은 오답이었다.
살기 위해서 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럼 시발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돈 많으면 같이 좀 쓰자 시발"
나는 눈 딱 감고 내 앞에 있는 육식 동물의 니즈를 꽉꽉 채워서 말했다.
그러자 루나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내게 건넸다.
돈주머니를 건넨 루나가 아까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이게 정답이 맞는 듯했다.
주머니가 묵직한 게 상당한 양의 돈이 든 것 같은데.
그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주머니를 슬쩍 열어보니까 안에는 금색 동전들이 가득했다.
평민인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만져볼 정도로 큰돈이었다.
이 정도면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겠는데?
공포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중에 다시 달라고 하지는 않겠지?
슬쩍 루나를 보니 아직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제 문제는 주변에서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악질 팬덤이었다.
나를 마주친 루나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돈주머니까지 건넸으니 충분히 오해할만 했다.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오해의 수준을 넘어선 듯했다.
아니 근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난 그냥 초식 동물이라고.
그냥 여기서 풀 뜯어 먹고 있었다니까.
"너네 거기서 뭐 해!"
그때 적절하게 드리아 선생님이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드리아 선생님!
드리아 선생님의 호통에 주변의 살기가 약간 옅어졌다.
"다들 이제 수업 시작한다! 다 올라가!"
드리아 선생님이 주변에 모인 애들을 흩어지게 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나를 한 번씩 노려보고 흩어졌다.
물론 내 앞에 있는 루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저도 수업 들어 가볼게요."
나는 여전히 내게 큰 눈을 고정하고 있는 루나에게 말했다.
내 말에 표정이 어두워진 루나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그 작은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뿌리치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루나의 손을 풀기 위해 나는 다시 한번 포식자의 니즈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꺼지라고 시발!"
내가 거칠게 욕지기를 뱉어내고 나서야 루나가 밝게 웃으면서 손을 놨다.
이거 진짜 단단히 미친년이네.
루나에게 잡혔던 손이 저릿했다.
"응응 또 봐! 헤헤"
루나가 흰 구름처럼 밝고 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내가 너를 또 왜 봐.
그럴 일 없을 거야.
없겠지...?
루나의 마지막 말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
다음 시간은 격투기 실습이었다.
늦었다!
다음 시간마저 지각할 수는 없었다.
나는 실습실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뛰어서 겨우 수업 시작 직전에 격투기 실습장에 도착했다.
소란스러운 격투기 실습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벼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격투기 실습장 안의 몇몇 학생들이 인상을 쓰고 나를 쳐다봤다.
그런 놈들의 얼굴이 아까 운동장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놈들이 나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이 맞는듯 했다.
왜 그러는 거야 오늘.
나 힘들어 진짜로.
나는 최대한 시선을 덜 받도록 쭈그리고 구석으로 갔다.
지나가는데 몇몇이 내 옆에서 차마 글로 쓰기 힘든 욕을 퍼부었다.
아니 근데 내가 왜 개새끼야 시발.
그냥 유급생이라고.
내가 자리에 앉자 격투기 실습장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에이든! 좋은 시간 보냈냐구!"
내 옆에 케일이 앉으면서 말했다.
이 비겁한 새끼 나만 버리고 튀어?
하지만 케일에게 욕할 기운도 없었다.
"언제 루나 쨩이랑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케일이 옆구리에 내 머리를 끼고 말했다.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케일의 힘 때문에 더 아팠다.
"아이! 시발! 이거 하지 말라니까! 내가 형이라고! 이 호로 새끼야!"
최대한 저항했지만, 케일의 압도적인 힘 앞에 나는 벗어날 수 없었다.
"빨리빨리 루나 쨩이랑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됐는지 말해!"
케일이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뭘 그렇고 그런 사이야 시발.
머리에서 느껴지는 케일의 체온에 토할 것 같았다.
"아니 처음 봤다니까 시발!"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지막지한 케일의 힘에 머리가 뽑힐 것만 같았다.
"아니! 진짜라고!"
온 힘을 다해 케일에게 주먹을 꽂았지만 역시나 내 주먹만 아팠다.
"자! 다들 집주우우웅!"
그때 격투기 실습 담당 선생님인 하트 선생님이 들어왔다.
"어! 하트쨩이다!"
하트 선생님의 등장에 케일이 팔을 풀었다.
통하지 않던 피가 다시 통했다.
머리에서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하트 선생님은 격투기 명문가 출신에 전국 대회까지 우승한 경력이 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런 능력과는 별개로 친절한 성격으로 학생들과도 친구처럼 잘 지냈다.
격투가 치고 작은 키에 귀여운 외모였지만, 주먹의 위력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하트쨩!!"
옆에서 신난 케일이 소리쳤다.
"케일! 선생님을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너!"
어느새 우리 옆으로 이동한 하트 선생님이 케일의 배에 앙증맞은 주먹을 박아넣었다.
하트 선생님의 주먹에 케일이 줄 끊긴 연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보는 내가 속이 다 시원하네.
저 돼지 덩어리를 날리다니 역시 하트 선생님은 최고였다.
"케일은 때리는 맛이 있다니까!"
케일을 날려버린 하트 선생님이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털고는 다시 실습장 앞쪽으로 갔다.
"자자! 집중! 오늘은 가볍게 대련으로 시작할 거야! 대련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손들어보자!"
하트 선생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후죽순으로 남자애들이 손을 들었다.
"어라?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 반이었나? 와아!"
하트 선생님은 손을 든 애들이 많다는 사실에 마냥 기쁜 듯했다.
격투기 대련은 위험 부담도 있고 귀찮기도 해서 애들이 피하는 것 중 하나였다.
평소에는 사이 안 좋은 애들 몇 명과 점수 따고 싶은 모범생 몇 명이 손드는 게 전부였었다.
그래서 항상 하트 선생님이 지명했었는데, 왜 오늘은 손을 든 학생들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을 든 학생 중 몇 명이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아까 운동장에서 봤던 애들 같은데.
나와 눈이 마주친 학생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흉측한 근육을 자랑했다.
왜 저래 시발.
오늘은 정말 긴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