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그 여자의 사정. (2)
* * *
큰 집에서의 생활은 마치 꿈처럼 즐겁고 풍족했다.
먹고 싶은게 있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었다.
큰 집이라 막연하게 엄청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검은 여자와 로사가 전부였다.
이해는 안됐지만, 별 상관 없었다.
무거운 짐들을 나르지 않아도 둘은 루나를 좋아했다.
로사는 자주 루나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그 품은 너무나도 따뜻해 루나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도 말수는 적지만 자주 루나의 머리를 빗겨줬다.
로사는 루나에게 마법에 대한 것들을 알려줬다.
로사는 꽤 고위 마법사 같았다.
마법에 대한 이야기들은 재밌었다.
로사의 설명을 듣고 루나가 마법을 해낼 때마다 웃는 로사의 얼굴이 좋아서 루나는 더 노력했다.
루나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한 번이라도 로사의 얼굴이 굳으면 그날 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다.
"대단해! 이미 성인 마법사의 수준을 뛰어 넘었어 루나! 넌 진짜 천재야!"
마침내 루나가 매개체 없이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로사는 전에 없이 밝게 웃었다.
루나는 밤을 세우기 위해 물어뜯었던 손톱을 뒤로 숨기고 로사와 같이 웃었다.
그렇게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루나는 로사의 팔에 생긴 작은 멍 자국을 발견했다.
로사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으나 루나에게는 큰일이었다.
로사는 루나의 전부였다.
루나는 몰래 로사에게 감시 마법을 걸었다.
이미 루나의 마법은 로사를 뛰어넘어 저택에서 루나의 마법을 알아볼 사람은 없었다.
새벽에 로사에게 걸어둔 마법에서 알람이 왔다.
루나는 마법을 영창해서 몸 곳곳에 걸었다.
루나는 마나에게 조용해지기를 명령했고 더이상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알람은 로사의 방에서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루나는 몸에 걸린 마법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호기롭게 문을 열었지만 로사 침실 안의 모습은 어린 루나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로사는 눈마저 가려진 채, 나체로 침대에 묶여 있었다.
그런 로사의 몸에는 곳곳에 흉터와 멍이 가득했다.
로사 위에는 검은 옷의 여자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검은 옷의 여자는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로사를 몽둥이로 때렸다.
루나의 존재를 눈치챈 검은 여자가 행동을 멈췄다.
"뭐야?"
로사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나는 로사의 평온한 목소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루나는 막연히 자신이 뭔가 잘못했음을 느꼈다.
"루나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난처하다는 듯 대답했다.
루나는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몰라 순간 말을 잃었다.
"흐음 일단 이것 좀 풀어줘 봐."
로사의 말에 검은 옷의 여자가 로사를 묶은 것들을 풀었다.
"죄..죄송합니다."
그 이상한 모습에 루나는 필사적으로 사과했다.
"아니야. 이리로 와. 루나."
로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짓했다.
루나는 황급히 로사의 품으로 달려갔다.
로사의 몸은 부드럽고 또 거칠었다.
당황해서 나오는 루나의 눈물을 로사가 부드러운 손으로 닦았다.
"이건 칼리샤가 나에게 사랑을 증명하고 있는거야."
로사가 루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랑?"
루나가 살면서 말했던 단어 중 제일 어색한 단어였다.
"사람은 사랑을 할 때 제일 행복하거든."
로사가 루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속삭였다.
그런 로사의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이 루나가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라 로사가 부러웠다.
"루나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는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칼리샤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주고 있는 거야."
로사의 말을 이해하기에 아직 루나는 너무 어렸다.
"그..그럼 로사가 좋아서하는거야?"
루나는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루나의 질문에 로사가 아름답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샤가 날 사랑해서이기도 하고."
로사가 고귀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익살맞은 표정으로 칼리샤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칼리샤가 조금은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도 로사를 사랑하는데!"
그 모습이 부러워 루나가 언성을 높였다.
그에 로사와 칼리샤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루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안 돼."
로사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표정이 단호해서 루나는 더이상 우길 수 없었다.
루나도 어서 빨리 커서 로사에게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또 행복한 시간이 흘러갔다.
***
눈이 왔던 어느 날이었다.
그렇지만 노란 꽃이 이쁘게 피었던.
루나는 마나로 눈을 뭉쳐서 그 위에 노란 꽃을 올리고 있었다.
"로사 님이 죽었다."
갑자기 나타난 칼리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는 칼리샤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루나의 마나가 들끓었고 칼리샤가 땅에 처박혔다.
칼리샤가 저항했지만, 이미 루나의 수준은 칼리샤를 넘어선 지 오래됐다.
"죄...죄송해요..."
땅에 처박힌 칼리샤의 모습에 루나는 서둘러 마나를 진정시켰다.
"괜찮아."
칼리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털고 일어났다.
"로... 로사님은 어디있어요?"
루나는 칼리샤의 말을 믿지 못했다.
아니 루나는 믿을 수 없었다.
"침실에 계신다."
로사의 침실 좌표는 알고 있다.
루나는 서둘러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벌써 공간 이동 마법까지.."
중얼거리는 칼리샤의 소리가 멀어졌다.
앞에 있던 칼리샤의 모습이 사라지고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로사의 침실.
온갖 사용 용도를 모르게 생긴 도구들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도구들에는 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로사는 그때 봤던 것처럼 나체로 온몸이 침대에 묶여있었다.
아름다운 로사의 몸에는 그때보다 더 많은 상처들이 있었다.
로사가 항상 말했던 사랑의 증거들이.
로사의 눈은 가려져 있었다.
루나는 로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벗겨내었다.
로사의 눈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로사는 사랑으로 죽은 것일까.
로사의 얼굴은 행복 아니, 그 이상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루나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내 사랑을 로사에게 표현 못 했는데.
로사도 내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는데.
로사는 나를 안 사랑한 거야?
나도 사랑을 받고 싶어.
루나는 로사의 눈을 부드럽게 감겨줬다.
로사를 죽인 것은 칼리샤지만, 칼리샤에 대한 분노가 생기지는 않았다.
로사가 원하는 것을 칼리샤가 이뤄준 것이기 때문에.
로사는 죽는 순간 칼리샤에게 고마워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랑으로 죽었으니.
침실로 칼리샤가 들어왔다.
"나는 이제 여길 떠날 것이다."
칼리샤가 담담히 말했다.
칼리샤도 로사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귀족 시해 죄는 제국에서 중죄니까. 나는 아직 더 살고 싶어서."
말을 마친 칼리샤가 사라졌다.
그렇게 루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며칠 후 제국에서 조사관 몇 명이 왔다.
그들은 간단한 조사를 했다.
루나는 그들의 유일한 조사 대상이었다.
"너는 평민이 이 저택에 왜 있었지?"
루나는 그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조사관에게 말했다.
"마조히스트라니.. 로사 엘리언트.. 외모와 다르게 악질이었군"
조사관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루나의 마나가 조사관을 짓이겼다.
방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됐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요.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무장한 기사들이 조사실로 들어왔다.
루나를 쳐다보는 기사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빛을 잃은 삶에 미련이 없어서 루나는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모두 멈추도록."
고상한 옷을 입고 큰 키의 할아버지가 조사실로 들어왔다.
"꼬마야 마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루나에게 물었다.
루나는 대답할 가치를 못 느꼈다.
"하하! 아무렴 어떻겠느냐. 나와 같이 가자. 세상에는 너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마법이 존재한다. 너가 모르는 마법도 많을 것이야."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나는 더 많은 마법이 있다는 말에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이 마녀가 조사관 헐튼을!"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내가 자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기사를 보며 할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죄..죄송합니다! 크립트님!"
할아버지가 기사의 사과를 무시하고 루나의 손을 잡았다.
"너는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될 것이야. 하하하하!"
할아버지가 방이 울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렇게 루나는 용사 아카데미로 왔다.
또 의미 없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모든 사람이 루나를 칭송했다.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찬양했다.
모든 사람들이 루나를 존경하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니야.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루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가식 덩어리들.
루나는 그들의 가식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혹은 미쳐 가고 있는건가. 둘을 구분하는 건 참 어려웠다.
루나는 자꾸 로사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도 기다리면 언젠가 누군가는 루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그도 점점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그날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실수를 범한 날이었다.
"곧 그들이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막사 안에 있는 사람들 얼굴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오랜 시간 전쟁에 피로가 쌓였기 때문일까 루나는 마법 대상 좌표를 잘못 설정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 때문에 적들이 우리가 있는 진영까지 다가올 수 있었다.
분명히 루나의 잘못이었지만, 이들 중 누구도 루나를 탓하지 않았다.
이들은 벌어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작전을 짰다.
"일이 잘못되면.. 루나 님은 공간 마법으로 탈출해주세요. 루나 님은 인류의 희망이니."
막사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결심한 눈빛으로 루나를 쳐다봤다.
루나는 부질 없음을 느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또 부질없는 회의를 시작했다.
***
결국 모든 계획은 실패했다.
적들의 군세는 우리 진영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는 모든 인간들의 눈에는 절망감이 깃들었다.
물론 내 모든 마나를 사용한다면 이길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다음날 너무 피곤했다.
루나는 굳이 저들을 위해 자신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래서 루나는 그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가망 없겠네.
루나는 공간 마법을 준비했다.
그런 루나를 보고 모두 결심한 표정으로 방패를 들어 적들의 군세를 막기 위해 나섰다.
"부디 인류를 지켜주세요. 인류의 희망이시여."
"저희 가족을 잘 부탁합니다."
루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루나의 반응에 그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멍청해..
따분함을 느끼며 공간 마법 주문을 영창했다.
그때 짐을 옮기기 위해 같이 온 하급 용사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말이 들렸다.
"개 같은 년. 지혼자만 튀네. 애미 터진 년."
조용하게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루나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루나는 흥분해서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다급하게 공간 이동했다.
검은 머리의 평범한 외모 평범한 키의 사내.
찢어진 눈의 끝부분이 위로 치솟아 있어서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뭐..뭐야 시발!"
루나가 바로 앞에서 나타나자 사내가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루나는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기대감과 환희를 느꼈다.
"뭐라구요?"
그에게 다시 한 번 듣기를 원했다.
제발 내게 말해주세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이내 화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마치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표정 같았다.
"어차피 뒤질 거 시발. 니만 튀냐고 이 개같은년아! 라고 했다! 꼽냐 시발?"
남자의 입에서 사랑스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말로도 화가 안 풀리는지 루나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 움직임이 하급 용사답게 형편없었지만 루나는 피하지 않았다.
애타게 기다려 온 상황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루나의 머리를 잡은 그도 사랑에 복받치는지 온몸을 떨었다.
내 삶은 가치가 없는 게 아니었어.
당신도 느끼고 있나요?
아아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나의 사랑.
나의 전부.
루나의 눈이 환희로 가득 차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류의 희망이라더니 시발. 이거 그냥 미친년이었네."
사내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내 기쁨에 못 이겨 그의 품에 안겼다.
지금 내 표정은 로사와 조금은 닮았을까.
***
하필 앉았던 게 저 미친놈 옆자리였다니.
역시 오늘은 재수가 없었다.
이런 날에는 사리는 게 상책이다.
그래도 4교시만 들으면 수업은 끝이니까.
그럼 기숙사 방에 박혀서 안 움직여야지.
다행히도 4교시는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나는 웅크린 몸을 피고 짐을 챙겨서 강의실을 나왔다.
이제 안전히 기숙사까지만 가면 된다.
들뜬 마음으로 기숙사로 달려갔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내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잠깐 다른 세계로 끌려갔다가 복귀한 것 같았다.
평소에는 생각 없이 걷던 길이 이렇게 긴장감 넘칠 줄이야.
조금 쉬다가 저녁 먹고 오면 길고 긴 하루의 끝이다.
뜬금없이 학교 생활의 장르가 바뀌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보냈다.
그렇게 안심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무거운 피곤함이 느껴지며 나른함이 내 눈을 감겼다.
"쿵 쿵 쿵"
푹 자던 나는 누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시계를 보니 오래 자지 못했다.
잘 자고 있었는데 누구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깊은 잠에서 깬 짜증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뭐야 시발! 예?!"
잠결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상대방을 본 나는 숨이 턱하고 막혔다.
문 앞에는 점잖은 채를 하고 있는 루나가 있었다.
"아.. 안녕! 나는 루나라고 해! 아까 마주쳤지? 또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네! 헤헤!"
루나가 쑥스러운 듯 볼을 붉히면서 중얼거렸다.
불안한지 양손을 앞에 모으고 꼼찌락거렸다.
여긴 남자 기숙사야 미친년아.
그 기괴한 모습에 순간 정신이 확 깼다.
남자 기숙사에 들어와 내 방문을 두드린 게 어떻게 봐야 우연인 거지?
나는 이 여자가 단단히 미쳤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랑 저녁 먹으러 가자!"
루나가 솜사탕처럼 맑게 웃으며 말했다.
저녁은 좀 편하게 먹고 싶다고.
오늘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상기되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