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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9화 (9/233)

〈 9화 〉 조별 과제 드림팀

* * *

비키는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패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의 나처럼 자동으로 눈을 깔게 만드는 기세라고 해야하나.

"이 쪽으로 앉으시죠!"

나는 벌떡 일어나서 옆 자리 의자를 빼주었다.

"흐응."

비키가 콧소리를 내면서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비키에게는 이런 일이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비키가 짧은 치마를 입어서 드러난 맨 다리를 거리낌없이 책상에 올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본능을 억눌러서 그 쪽을 안 보기 위해 노렸했다.

자꾸만 흰자로 살색이 보였지만 참아야한다.

비키의 심기를 거슬러서 짝귀가 되어 도박판으로 갈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집중! 자! 다들 조대로 앉았으면 첫 과제에 대해서 알려줄게요."

벤자민 선생님이 칠판을 탁탁 치고 말했다.

벤자민 선생님이 손을 휘두르자 종이들이 날라와서 학생들 앞에 한 개씩 놓였다.

언제봐도 마법은 편리했다.

나도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검사 결과 0이었다.

말 그대로 0.

사실 그 외에 많은 것 들에서도 나는 재능이 없었지만 다행히 쫓겨나지는 않았다.

"첫 과제에 대한 내용은 지금 받은 종이에 다 적혀있어요. 읽어보고 이해 안되는 부분 있으면 손들고 질문해주세요."

내 앞에도 글이 잔뜩 써있는 종이가 놓였다.

나는 종이에 적혀진 글을 천천히 읽었다.

과제의 첫 단계는 종이에 쓰여진 마물들에 대해서 조사해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그것에 대해서 각 조가 발표하는 것.

마지막은 실습을 위해 해당 마물들이 있는 던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물의 이해'라는 강의명에 정확히 어울리는 과제 내용이었다.

다 읽고 나서 옆을 보니 드숀과 미친놈이 종이를 읽지도 않고 둘이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둘 다 아싸라 서로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둘이 과제에 관심이 없어 보여서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너네 안 읽고 뭐하냐"

한대씩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으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행여나 목소리가 크면 비키님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으니까.

"크큭.. 마물들을 섬멸하는데 조사는 필요없다.. 큭큭.. 필요한 건 종말의 오.른.팔 뿐.. 크큭.."

철수가 안대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그런건 미천한 평민인 니가 알아서 해! 나는 그런거 할 신분이 아니니까!"

둘이 나란히 미친 소리를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얘네 정도면 내가 진짜 이길거 같은데 그냥 엎을까.

"흐응"

갑자기 내 귀 바로 옆에서 듣기 좋은 콧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안하겠다는거야?"

내 어깨 위로 비키의 얼굴이 올라왔다.

비키에게서는 한 입 깨문 딸기 향기가 났다.

순식간에 드숀과 철수가 차렷 자세를 했다.

"아뇨! 열심히 할 겁니다!"

드숀이 정자세로 시선은 앞을 보면서 대답했다.

"크큭.. 본 좌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정자세를 취한 철수가 중얼거렸다.

"흐응 아쉽네.."

비키가 내 귀를 혀로 살짝 핥고 다시 돌아갔다.

귀에서 느껴지는 촉촉한 감촉에 온 몸에 소름 돋았다.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과제 점수 낮으면 죽을수도 있어.

나도 어느새 옆의 애들처럼 정자세를 취했다.

"각자 조에서 조장을 한 명 뽑으세요"

벤자민 선생님이 말했다.

철수와 드숀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험난한 조별 과제가 될 것 같다.

"조장이 뭐야?"

옆에서 비키가 상식밖의 질문을 했다.

"각 조의 대장을 뽑으라는 겁니다."

나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기사가 서약할 때의 자세를 취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한 쪽 무릎을 꿇고 팔뚝을 무릎에 올린 자세.

그냥 몸이 자연적으로 그렇게 됐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생존 본능인가?

"흐응 대장이라. 그럼 내가 한다. 밥 버러지들아."

내 어깨에 자연스럽게 다리를 올린 비키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넵!"

뒤를 보니 어느새 나와 같은 자세를 취한 철수와 드숀이 보였다.

이 관경을 주변 학생들이 웃음을 참으면서 보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우리는 비키의 부하가 되었다.

"첫 명령이다 잡놈들아. 과제 알아서 해와라. 못하면 귀 한 쪽씩 뜯길 준비하고."

비키가 혀를 내밀어 붉은 입술을 핥았다.

"예! 주군!"

우리는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동시에 외쳤다.

그렇게 비키와 밥버러지들 조가 탄생했다.

주변에서 웃었지만, 우리는 진지했다.

이건 생사가 달린 문제다.

"아. 그리고 넌 다음에 딸기 우유 하나 사와"

비키가 강의실을 나가기 전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네! 주군!"

난 또 서약을 하는 기사 자세를 취하고 대답했다.

아씨­ 이 자세는 왜 자꾸 나오는거야.

내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비키가 웃고 나갔다.

"야! 너는 그런 그지같은 자세는 왜 취하는거야!"

비키가 나가고 시간이 약간 지난 뒤 드숀이 일어나서 나한테 따졌다.

"뭐! 븅시나 니도 했으면서"

나는 왼손 중지를 친절하게 드숀에게 보여줬다.

무릎을 꿇을 때 너무 세게 꿇었는지 무릎이 아팠다.

"니가 그런 그지같은 걸 하니까 나도 모르게 따라했잖아!"

드숀이 투덜대면서 무릎을 털었다.

"크큭.. 이 치욕 잊지 않겠다.. 홍염의 여제여... 크큭..."

한숨밖에 안 나왔다.

어떻게 이런 드림팀이 구성된거야.

"일단 자료 조사 3개로 나눠서 각자 파트 가져가서 조사하자."

나는 정확히 파트를 3개로 나눠서 표시했다.

"흥. 그런건 니같은 평민이 알아서 해야지"

"크큭.. 본좌에게 그런걸 시키다니... 오만하군... 크큭.."

예상대로 버러지들에게서 반발이 나왔다.

"아! 물론 각자 분량은 비키님에게 보고할거다."

나도 모르게 비키의 이름 뒤에 님자를 붙였다.

불평을 하던 두 명의 입이 거짓말처럼 닫혔다.

그러고는 급하게 내 종이를 가져가 자신들의 종이에도 표시했다.

이게 호랑이의 등에 탄 기분인가.

"이­ 밥 버러지들"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비키의 말을 따라했다.

밥 버러지들.

입에 착착 붙네 이거.

***

1교시와 2교시 사이 쉬는 시간에 운동장 구석에 있는 벤치로 나왔다.

햇빛을 주기적으로 쐬야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내 건강은 끔찍이 생각한다.

날씨가 좋아 운동장에 나와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 구석 벤치는 나처럼 친구가 없는 애들이 자주 애용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운동장은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있었고 봄 답게 상쾌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기분 좋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ㅡ이 에이든!"

이 장소에 있으면 늘 그렇듯 케일이 나타난다.

"왔냐"

하품을 하며 케일에게 인사했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군!"

케일이 특유의 익살맞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나는 케일에게 1교시에 있었던 조편성에 대해 알려줬다.

"비키쨩이랑 한 조가 됐다고?! 부럽다!!"

케일이 온 몸을 비비 꼬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긴 뭐가 좋아. 시발 아까 무릎 꿇고 발 거치대가 됐구만"

비키가 다리를 올렸던 왼쪽 어깨가 약간 내려간 기분이었다.

힘을 줘서 왼쪽 어깨를 약간 올렸다.

"호오오오에! 그런 포상까지!! 어디?!"

케일이 흥분해서 내 양 어깨를 주물거렸다.

"아니 시발! 어디 어깨인지가 왜 중요한데! 시발!"

나는 케일을 뿌리치려 했지만, 힘만 센 케일의 완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쪽 어깨를 핥으면 비키 쨩의 발을 핥은거 잖아!!"

케일은 잔뜩 흥분해서 뜨거운 콧김까지 뿜어대면서 개소리를 했다.

"니한테 말한 내가 븅신이지 시발"

이런 말을 할 애가 케일밖에 없다는 내 인간 관계가 너무 슬펐다.

이 와중에도 케일은 내 양쪽 어깨를 왔다갔다하면 킁카킁카 이러고 있었다.

주먹에 힘을 줘서 세게 케일의 머리를 때렸지만 역시 내 손만 아팠다.

진짜 이 새끼 몸은 뭘로 되어있는거야.

녀석은 내게 맞아도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돼지 새끼!"

한참을 킁카거리던 케일이 떨어졌다.

"에이든 특유의 쿱쿱한 냄새밖에 안 나는 걸.."

의기소침한 케일이 중얼거렸다.

"그럼 시발 냄새가 뭍어있겠냐! 그리고 뭐 쿱쿱한 냄새 시발?"

괜히 오기가 생겨 한 대 더 때렸지만 내 손만 아플 뿐이었다.

케일이 말한 쿱쿱한 냄새가 거슬려 옷을 코에 대서 맡았다.

별 냄새 안 나는구만.

근데 내가 이 옷을 언제 빨았더라.

"비키쨩의 발이라니 포상­.."

케일이 작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 2교시 가야겠다. 검술 실습이네."

검술 실습은 가기전에 사물함에 들려서 검이랑 갑옷을 챙겨야 했다.

"나도 검술 실습인데."

케일이 나를 따라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검과 갑옷을 챙기기위해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어제 있었던 일이 꿈인것처럼 다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무난하게 하루가 끝났으면.

초록색과 회색 중간 정도의 색인 사물함을 열었다.

아마 이 사물함도 처음에는 짙은 초록색이 아니었을까?

사물함 특유의 쇠냄새를 맡으며 사물함을 열자 안에 수많은 편지가 쌓여있었다.

사물함을 열면서 안에 있던 편지들이 밖으로 쏟아졌다.

아니 시발 이게 뭐야.

사물함 사이 공간으로 몰래 집어넣은 듯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편지 폭탄에 가슴이 설렜다.

혹시 나도 모르게 인기인이 된...?

봉투도 없이 종이만 넣어둔 것들이 한가득 있었다.

그리고 그런 종이에는 언뜻 봐도 붉은색으로 쓴 글씨들이 보였다.

나는 그 중 하나를 들어서 읽었다.

'죽일거야.죽일거야.죽길거야'

빽빽히 빨간 글자가 채워져있었다.

그럼 그렇지 시발.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쓰다가 흥분을 했는지 아니면 손이 아팠는지 마지막에는 거의 휘갈겨놨다.

아마 손이 아프지 않았을까.

나름대로의 정성이 담겨있기는 했다.

물론 내가 기대한 정성은 아니지만.

나는 다른 걸 꺼내서 읽었다.

'우리 루나님에게 더러운 때 묻히지 말아라. 더러운 평민아'

나름 귀족이 썼는지 전 것보다는 교양있었다.

그래도 이 중 하나는 연애편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하나씩 꺼내서 읽었다.

'루나 언니는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어.'

그건 루나한테 가서 말하라고.

아니면 혹시 나와 같이하면­

'이 편지는 1000년 전 엘리바움 왕국에서 시작된..'

이건 또 뭐야 시발.

'크큭.. 어둠의 데스 동아리에 초대한다.. 크큭..'

방금 읽은건 바로 찢었다.

"루나쨩의 어둠의 친위대가! 움직인다!"

케일이 누구에게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소리쳤다.

어둠의 친위대가 뭔데.. 듣기만 해도 낯부끄러운 단어를 케일은 잘도 입밖으로 꺼냈다.

케일은 잔뜩 흥분 한 듯 몸까지 부르르 떨고 있었다.

"과연 에이든은! 어둠의 친위대를 이겨내고 루나쨩을 쟁취할 수 있을까!"

잔뜩 흥분한 케일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진짜 지랄한다 지랄해.

"아 좀 시발! 어둠의 친위대는 무슨! 뭔 개 좆같은 소리야! 떨어져 이 돼지 새끼야!"

흔들리는 머리 때문에 골이 아팠다.

주먹으로 케일의 가슴팍을 쳤지만 내 손만 아팠다.

"오오오옷!!!"

잔뜩 흥분한 케일의 외침에 지나가는 학생들이 쳐다봤다.

진짜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새끼였다.

나는 대충 종이들 사이에 손을 넣어서 검과 갑옷을 꺼냈다.

사물함 문을 다시 닫는데 가득찬 편지들 때문에 잘 안 닫혔다.

어깨로 문을 밀어 넣어 겨우 닫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갑옷과 검을 아카데미 밖에서 가져온다.

하지만 나처럼 가난한 학생들은 그냥 학교에서 지급해주는 것들을 쓴다.

물론 내 옆의 케일도 마찬가지였다.

덩치에 맞게 케일의 검과 갑옷도 거대했다.

케일은 어디서 구한지 알 수 없는 페인트로 자신의 갑옷을 알록달록하게 칠했다.

또한 가슴팍에는 이상한 캐릭터를 그려뒀다.

입고 다니는 케일보다 옆에 있는 내가 더 창피했다.

검술 실습실은 별관에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갑옷을 입고 돌아다녔다.

용사 아카데미 마크가 그려진 내 낡은 갑옷이 약간 초라하게 느껴졌다.

"역시 아이린 쨩 특제 갑옷이 최고다!"

케일은 자신의 갑옷이 자랑스러운지 당당하게 걸었다.

물론 창피는 내 몫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검술 실습실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검술 실습 담당 선생님인 피오라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몸에 딱붙는 옷과 그 위에 얇은 회색 가디건을 걸친 모습이었다.

갈색에 묶음 머리를 했는데, 묶음 머리에서 단 한올도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피오라 선생님의 칼같은 성격을 대변했다.

"오늘 실습은 간단합니다. 베기 1000번 찌르기 1000번 그럼 시작하세요."

피오라 선생님이 시원한 말투로 말했다.

피오라 선생님의 수업은 늘 저런식이었다.

기본기에 충실한 수업.

저학년에 어울리는 수업이었다.

나는 곧바로 자세를 잡고 베기부터 시작했다.

"여기 힘 빼세요."

피오라 선생님이 목도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의 자세를 봐줬다.

"저번에도 말했는데요. 에이든. 이 쪽 힘을 더 주라고."

지나가던 피오라 선생님이 내 팔뚝을 검으로 치면서 말했다.

나는 지적해준대로 자세를 고쳤다.

"하나 하나를 집중해서 하세요."

피오라 선생님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사실 검술이라는 것은 이런 식의 훈련으로는 실력이 증진되는 속도가 느렸다.

검술 실력이 빠르게 증진될려면 압도적인 재능이 있거나 상위 검술서가 필요했다.

상위 검술서는 값어치도 비쌀뿐더러 돈이 있어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귀족들에게 가문의 비전으로 내려오거나 특정 용사 단체에서 공유되거나 하는 형식이었다.

그런 이들이 자기 밥벌이 수단을 남에게 알려줄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 나는 상위 검술을 배우지 못했다.

그나마 용사 아카데미에서 알려주는 검술서도 존재했는데 4학년 때부터 배우기 때문에 유급한 나는 아직 못 배웠다.

처음 용사 아카데미를 들어오고 나서는 나도 하루 종일 검을 휘둘렀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다고 믿으며.

결국, 재능 없음을 남들보다 더 빨리 깨달았다.

혼자 허공에 대고 휘두르는 것은 검술 실력에 그다지 도움 되지 않았다.

재능을 증진시켜주는 아티팩트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검과 갑옷 살 돈도 없던 내가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4학년이 되어 검술서를 배우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했지만...

아뿔사! 유급해버렸다.

그래도 한 번 더 휘두른 내가 안 휘두른 나보다는 강하겠지.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휘둘렀다.

"더 세게 때려주세요!"

"이상한 부탁하지 마세요."

"하으응!"

"이상한 소리 내지 마세요."

차분한 피오라 선생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애써 무시하고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

얼마의 세월이 지났을까.

마지막 주인이 내게 말했다.

네게 깃든 마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천 년이 필요하다고.

천 년뒤에 너를 다시 거두러 오겠다고.

마성이라니 우스웠다.

지들끼리 이 몸을 갖고 싶어 전쟁을 연건데 왜 책임을 나한테 전가하는지.

물론 살짝 주인들에게 바람을 불어넣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살짝이다 살짝.

하여간 도마뱀 애들은 깐깐한게 문제였다.

우습게도 천 년이라는 세월은 검인 나와 도마뱀 녀석에게는 긴 세월이 아니었다.

검 주제에 자아를 갖게 되어 잠조차 자지 못했다.

사실 처음에는 나는 내가 신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죽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았으며 늙지도 않았다.

수 많은 주인을 거쳐간 뒤에 깨달았다.

나는 그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검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인의 목이 날라가면 나는 다시 다른 누군가의 손에 넘겨졌다.

슬펐을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 과정이 재밌었다.

인간들의 탐욕. 그 순수한 감정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주인이 마음에 안 들면 슬쩍 검의 경로를 바꾼적도 있었다.

인간이던 도마뱀이던 생물이라면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죽도록 심심하다.

물론 나는 죽도가 아니다.

으하하하. 어떤가 검 유머집 작가의 유머가?

오죽하면 마지막 주인이었던 그 꼬질꼬질한 노란 도마뱀이 그리울까.

내 농담 하나 하나에 천박하다며 욕하던 모습도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귀여웠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 도마뱀을 죽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었지만.

"치지지직"

나를 감싸고 있는 결계에 균열이 생겼다.

내 계산이 맞다면 아직 백 년은 넘게 남았을텐데?

혹시 노란 도마뱀이 마음이 바뀌어 내가 그리워졌나?

적당히 튕기다가 넘어가줘야겠다.

흥 안 기다렸다고.

결계가 완전히 벗겨졌다.

결계가 거둬지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검은색 단발 머리의 미인이었다.

이번 주인은 여자 인간인가?

노란 도마뱀의 결계를 찢은 것으로 보아 실력도 꽤 쓸만한 것 같았다.

시작이 좋군.

나는 검이라 성별이 없었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좋았다.

이유는 여자 손이 남자 손보다 더 부드러웠다.

나는 첫마디를 준비했다.

세상을 다 준다고 할까.

아냐.아냐 나중에 계약 위반으로 고소당할수도 있어.

너의 적들을 모두 베어준다고 할까.

이건 너무 클리셰적이야.

아니면 천 년동안 생각해둔 유머를 꺼낼까.

목소리를 다듬었다.

이게 얼마만에 말해보는거야.

빨리 나를 그 부드러운 손으로 쥐어주오. 소녀여.

천 가지가 넘는 유머가 준비되어 있다네.

소녀가 내게 손을 뻗었다.

소녀의 부드러운 손의 느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소녀의 손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응? 뭔가 이상한데?

그리고 지독한 고통이 나를 덮쳤다.

마치 처음 탄생할 때 난쟁이들의 신한테 당했던 망치질 만큼 지독한 고통.

으아아아아아악 !

"히힛­ 선물을 주면 좋아하겠지 ? 히히히"

소름끼치게 웃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소름끼치게 단단하고 차가운 마나가 내 몸을 파고 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

살려줘 노란 도마뱀 !!

물론 나는 검이라 살려줘라는 말은 좀 안 어울리지만 하하

으아아아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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