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주인공이 강해지는 중 2
* * *
이거 진짜 일 저지르겠는데.
나는 내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작은 고추는 이 몸의 역린인 듯했다.
엌 시발 작은 고추.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아까 그 대형 그대로 서 있었다.
"깔깔깔 역시 이번 용사들도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 너무 재밌다니까 이 시간은 !"
우리를 보며 마왕이 손뼉까지 치면서 웃고 있었다.
서둘러 동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들 뭔가 안 좋은 것들을 하나씩 보고 왔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린나는 활을 들고 있는 손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린나는 원래도 정신이 불안정했다.
이거는 위험하다.
"다들 무엇을 보고 왔는지 몰라도 일단은 마왕이 우선이다."
나는 동료들을 일깨웠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나도 자꾸 귀에 '작은 고추'가 맴돌고 있었지만, 일단은 마왕이 우선이다.
다들 굳은 얼굴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가트는 진짜 성직자가 맞았는지 환한 빛이 쏟아져나왔다.
빛이 이내 동료들을 삼켰다.
나는 내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넘쳐나는 느낌을 받았다.
버프인가 ?
"나중에 이야기하지"
케냑이 나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뻔뻔한 케냑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치솟았지만 참았다.
나에게는 린나가 있다.
우리는 전투 대형을 갖추고 천천히 전진했다.
"무거워져라"
유리가 마왕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마왕이 빠르게 땅으로 떨어졌다.
"어머!"
마왕이 가볍게 착지했다.
기운을 온몸에 순환시켰다.
이런 느낌이군. 기운을 순환시킨다는 건.
점점 기운에 대해 알아가는 것 같았다.
"준비"
마왕에게만 집중한다.
자꾸 '작은 고추'가 떠올랐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기운을 터뜨리면서 마왕에게 뛰었다.
이게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인가 ?
순식간에 마왕 앞에 도착했다.
마왕의 눈이 커졌다.
내 검은 모든 것을 벨 수 있다.
그 마음을 검에 담아 베었다.
마왕이 간단히 베어졌다.
"여자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실격이네요 ?"
내 뒤에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이동인가 귀찮게 됐군.
"아직 재밌는 부분이 남았으니까 좀 기다려봐요."
마왕이 내게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는 너의 간악한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마왕이 사라졌다.
"꺄악 !"
뒤를 돌아보니 케냑의 어깨에 화살이 박혀있었다.
무슨 일이지 ?
린나가 활시위를 케냑에게 겨누고 있었다.
"너가 없어져야 해. 그래야 벨이 나만 볼 거야. 더러운 짐승년"
린나의 눈에는 질투만이 가득 차 있었다.
린나는 전부터 내 전 여자친구인 케냑에 대한 질투가 심했다.
아마 내가 케냑과 사귀던 시절을 본 거겠지.
"이 미친 엘프 년이 !"
케냑이 린나에게 달려들었다.
엌 개판이네 개판이야.
일단 저 둘을 말려야 한다.
"흐응 저를 두고 가시게요 ?"
마왕이 그런 내 앞에 나타나 손톱을 휘둘렀다.
마왕에게 시간이 끌려서 나는 동료들에게 가지 못했다.
케냑과 린나가 서로를 죽일듯이 싸웠다.
이미 마왕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뭐 누린내 ?! 감히 나한테 누린내가 난다고 말해 ?!"
케냑의 눈은 돌아가있었다.
누린내는 수인 종족에게 금기시되는 단어였다.
내가 질투심에 가득 찬 린나를 진정시키려고 말했던 장면을 본 건가.
최악이다.
"흥 ! 짐승한테 누린내가 나는 건 당연한 거지"
린나가 비웃었다.
"일단 진정들 하시죠 ! 저희는 지금 마왕 앞 아닙니까 ! 내분 멈춰 !"
가트가 그녀들을 뜯어말렸다.
가트의 말에 그녀들이 싸움을 잠시 멈췄다.
그래. 가트에게 실망했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다.
그때 가트의 등에 얼음창이 박혔다.
"니가 나를 두고 바람을 피워 ? 개새끼가 !"
유리가 손가락으로 가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음창 몇 개가 가트에게 날아가 더 박혔다.
"신의 이름으로 멈춰 ! 으억"
가트가 유리에게 소리쳤지만 소용 없었다.
가트가 무너졌다.
"니가 시발 ! 나를 두고 ! 저딴 짐승년이랑 바람을 펴 !? 뒤져 !"
유리는 그런 가트 위에 올라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찌르기 시작했다.
하얗던 유리의 로브가 어느새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잠시 소강상태였던 케냑과 린나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뒤져 ! 이 짐승년 !"
나는 나중에 파티를 만들면 절대 혼성으로 안 만들 거야.
'내 경험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의견이군'
"닥쳐 ! 작은 고추 니가 갖던가 ! 말던가 ! 관심 없거든 ! 그 좆도 느낌 없는 거 !"
케냑이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엌 너무하네 저 여자.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 동료들은 다 죽어 있었다.
내 검에서는 따뜻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묘한 후련함이 느껴졌다.
"역시 너무 재밌어 ! 깔깔깔"
마왕이 바닥을 뒹굴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 나 혼자라도 마왕을 처리하면 된다.
내가 베지 못하는 것은 없다.
나는 몸 안에 남은 모든 기운을 끌어올렸다.
살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기운까지도.
"흐응 아직 포기하지 않았네요 ?"
그동안 검을 들고 베어왔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나는 검을 몇 번이나 휘둘렀을까.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검을 휘둘렀다.
징글 징글하네.
이것이 내 마지막 베기겠지.
"신의 가위질"
내 앞의 모든 공간을 베어냈다.
검술 실력은 진짜 말도 안 되네.
'나쁘지 않았지 이 아이 정도면'
공간이 베어지고 균열이 생겼다.
잠시 뒤 균열이 곧 다시 복구되었다.
그곳에는 한쪽 팔이 잘린 마왕이 있었다.
역부족이었군.
짙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내가 쓸데없이 동료들한테 기운을 쓰지 않았다면...
저걸 맞고도 안 죽다니.난 절대 마왕한테 안 덤빌거야.
"이거 진짜로 위험했잖아 ! 재생도 안되네 . 흐응~ 여자 몸에 이런 상처는 흉한데."
마왕이 팔이 잘린 부분을 손으로 만졌다.
모든 기운을 소진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흉하게 엎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죽음이었어요. 상처에 대한 값으로 당신의 영혼은 제가 잘 쓸게요."
마왕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불만은 없죠 ?"
마왕이 하나 남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끝이군.
"응 ? 이건 뭐야 ?"
검을 본 마왕이 말했다.
"보고 있었구나 ?"
마왕이 검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쉿"
마왕이 검지를 손에 대고 익살맞게 웃었다.
쉿
나도 모르게 마왕을 따라 말했다.
***
다시 흰색 공간으로 돌아왔다.
" 뭐야. 끝이야 ? "
약간은 허무한 용사의 최후에 어이가 없었다.
교훈을 얻었다.
절대 마왕한테 덤비지 말 것.
"뭔가 기운에 대해 느낀 게 있지 않나 ?"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흰 남자가 말했다.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기는 해 기운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미묘하지만 기운이 느껴졌다.
" 그럼 다시 "
흰 남자가 내 뒤에서 다시 내 눈에 손을 넣었다.
시발.
***
다시 흰색 공간.
"시발 두 번 보니까 질리네. 이걸 왜 또 하는 거야. 시발"
"움직임에 집중해. 어떻게 베는지 . 어떻게 막는지. 어떻게 흘리는지. 그럼 다시"
***
다시 흰색 공간.
깨달았다.
검 새끼는 그냥 내 무의식에 전설의 용사를 덧씌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순수 노가다로.
"시발 그만해"
"꿈에서 깨면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너의 무의식에 새기는 것일 뿐. 그럼 다시"
***
몇 번을 반복한 것일까.
나는 누구지 ?
내가 헷갈릴 때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이 개 같은 검새끼 !"
"방벽이 제대로 작동하는군. 그럼 다시"
그런 내게 흰 남자가 손을 쑤셔 넣었다.
***
다시 흰색 공간.
"손을 넣는 거 말고 더 고상한 방법은 없나 ?"
"그럼 다시"
***
"야 이 개새끼야 그만해 시발"
"그럼 다시 "
***
"엉엉 루나야 이 좆같은 검이 나 괴롭혀"
"그럼 다시"
***
이제는 흰색 공간에서도 기운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쉽고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이야 ! 검새끼야"
"어차피 자네는 일어나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네. 그럼 쉽고 빠른 거 아닌가 ?"
"지금 내가 몇백 번을 경험하고 있는데 ! 이게 어떻게 쉽고 빠른 거냐고 시발 !"
"기억하지 못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거지 그렇다면 쉬운 것이고.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니 당연히 빠른 것이고. 자네의 정신만 무너지지 않으면 완벽한 계획이야."
욕을 퍼부어도 소용없었다.
" 그럼 다시 "
***
더이상 수를 세는 게 의미 없어질 때쯤, 흰색 공간에서도 나는 벨로 존재했다.
"확실히 최악의 재능이군. 꿈에서도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다니."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도록 . 시발 내 말투 왜 이래"
어느새 내 오른손에는 검이 들려있었다.
나는 검으로 흰 남자와 공간을 베어냈다.
당연하게도 공간은 베어졌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됐다. 천 번 정도 반복한 건가 ? 생각보다 오래걸렸지만 나쁘지 않은 실험 결과였어."
어디선가 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시발 나가면 똥간에 던져버릴 거야."
"하하 자네는 기억하지 못할 거라네"
"' 그럼 다시 ' 라고 외쳐야지 빌어먹을 새끼야"
"아쉽지만 일어날 시간이라서."
흰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멀어졌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이 개같이 굴려진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나가서 꼭 복수를 해야 된다.
저 개 같은 검에게.
***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으 잠을 잤는데도, 왜 이렇게 피곤하지.
나는 일어나서 간단히 몸을 풀었다.
잠자리가 뒤숭숭했나.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단 말이지.
좋은 꿈은 아니었던 것 같아.
'좋은 아침이군'
옆에서 검이 말했다.
순간 깜짝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아 맞다 검이 있었지.
나는 익숙하게 검을 챙겼다.
왠지는 모르지만 검을 들고 있는 게 편했다.
원래는 들고 다니기 불편했는데 ?
'잠은 잘 잤나?'
"아니. 뻐근하네 몸이. 뭐지 ? 잠을 잘못 잤나 ?"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시간이 좀 남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근질거렸다.
갑자기 뛰고 싶네.
원래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성격이 아닌데.
몸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볍게 챙겨 입었다.
뛰기 위해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에는 뛰고 있는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저렇게 부지런한 애들이 존재했다니.
가볍게 몸을 풀고 뛰기 시작했다.
평소와 똑같이 뛰었지만 뭔가 자세가 어색했다.
자세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뛰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완벽한 자세로 뛰고 있었다.
맞아 ! 이 자세야 !
달리기가 재미있는 줄 처음알았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갈증이 조금 해소됐다.
몸을 움직이는 게 자기 전보다 더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정말 전설의 검을 옆에 두고 자서 그런 건가 ?
옆에 두고 자는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라니.
개꿀이네.
정말 쉽고 빠른 방법을 찾아낸 건가 ?
'그렇지.쉽고 빠른 방법이라니까'
그래. 내가 너를 전설의 검으로 인정해줄게.
'흥미로운 결과군'
검이 중얼거렸다.
뭔가를 잊은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뭐 상관없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