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매콤 주먹맛 좀 볼래 ?
* * *
온 몸에 자신감이 넘쳤다.
역시 나는 주인공이었다.
지금까지의 삶은 흔한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거름들 이었을 뿐.
'내가 괜한 짓을 했나?'
검이 중얼거렸다.
물론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일부러 돌아다니면서 내 기억에 있는 놈들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나에게 욕을 했던 놈들, 띠껍게 쳐다봤던 놈들, 그리고 나보다 약하게 생긴 놈들.
그들은 당연하게도 아니 오히려 기쁘게 내 대련 신청을 받았다.
덕분에 나는 합법적으로 그들을 쥐어팰 수 있었다.
아아 이런 맛이었나. 힘이란 것은.
유급생이라고 나를 얕봤던 놈들이 맞고 쓰러졌을 때, 그 표정이 주는 쾌락에 중독돼버렸다.
대련이라는 명목이 있었기 때문에 따로 제재도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평소에 눈을 잘 깔고 다녔어야지.
권선징악이야.
이 맛이지 !
이제야 인생이 제대로 흘러가는구만 !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
'생각보다 더 쓰레기였네'
검의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거슬렸던 마지막 놈을 쥐어팼을 때 1교시가 끝났다.
"두고 보자."
나한테 맞고 누운 엑스트라 A 가 내게 눈을 부라리면서 말했다.
전혀 무섭지 않았다.
"네. 다음 좆밥"
나는 눈을 부라리는 패배자에게 중지를 펼쳐서 보여줬다.
녀석이 아드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너무 감미로운 소리야.
다음 수업은 '용사학개론'이었다.
주인공인 나에게 정말 필요한 수업이지.
검이 헛기침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강의실로 들어가니 아직 한산했다.
나는 익숙하게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역시 뒷자리가 편하지.
"크큭.. 운명인가 보군.."
내 옆자리에 철수가 앉았다.
뭔 운명이야.
그냥 같은 수업인 거잖아.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크큭... 그 검을 이번에는 벌써 얻었나 ? 크큭.. 침묵의 여제가 불안했나 보군... 일이 재밌어지겠어.. 크큭.."
철수가 내 옆에 있는 루나 검을 보고 말했다.
'기분 나쁜 사내군. 크큭..'
너는 왜 따라 해.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는 철수를 그냥 무시했다.
"침묵의 여제가 나름 머리를 굴렸군.. 크큭.. 그래도 소용없지만.. 큭큭큭.. 혼자 열심히 움직이는 모양이야.. 크큭.."
철수가 해골 문양이 그려진 안대를 붙잡고 웃었다.
" 크큭..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 될텐데 말이야... 큭큭큭.. "
이대로 놔두면 끊임없이 중얼거릴 것 같은데.
못 참겠다.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에게는 참지 않는다.
" 야이 시발 왜 자꾸 아는 척이야. 매콤 주먹맛 좀 볼래 ? "
케일도 쓰러뜨린 내 매콤 주먹을 철수에게 보여줬다.
내가 봐도 내 주먹은 무섭게 생겼다.
철수의 얼굴 앞에 매콤 주먹을 흔들었다.
" 까불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너 '마물의 이해' 조사했냐 ? "
물론 나도 아직 조사 안 했다.
" 크큭... 그런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크큭.. 내 할 일은 파괴.. 혼돈.. "
철수가 다시 중얼거렸다.
" 너 시발. 이 시간 끝나고 나랑 같이 도서관 가. "
이대로 내버려 두면 조사를 전혀 안해올 것 같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겠다.
나는 조별 과제에서 주로 무임승차하는 쪽이지 운전사가 아니다.
" 크큭.. 도서관이라면.. 침묵의 여제가 있는 곳 말하는 건가? 아직 만날 시기가 아니다.. 크큭.. "
그냥 말이 안 통하는 새끼였다.
" 자자 다들 집중. "
때마침 베르하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운 좋은 줄 알아, 내 매콤 주먹이 화날 뻔했다고.
" 오늘은 전설의 용사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자, 각자 알고 있는 전설의 용사가 있나요 ? "
베르하임 선생님이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들 몇 명이 손을 들었다.
" 거기 학생 말해보세요. "
" 꺾이지 않는 기사 리차드가 있습니다 ! "
몇몇 학생들이 신나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용사 이름들을 말했다.
용사 아카데미 답게 각 학생들은 존경하는 용사가 한 명 이상은 있는 듯 했다.
나는 딱히 좋아하는 용사가 없었다.
" 전설적인 냉기 마법사 유리 클레나가 있습니다 ! "
베르하임 선생님의 지목을 받은 어떤 학생이 말했다.
학생은 좋아하는 용사인 듯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 아 유리 클레나 ! 유명하신 분이죠. 유리 클레나 님이 있었던 용사 파티는 용사 파티 중에 역대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았던 파티죠. 수백 년 전 파티임에도 불구하고요. 마왕 토벌에 가장 근접했던 용사 파티이기도 합니다. 그 용사 파티의 구성원을 아는 사람 ? "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간질 간질한 기분.
베르하임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부분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유명한 파티인가 보네.
" 벨 크리다흐, 유리,가트,린나,케냑 이 있습니다. "
용사 파티의 이름을 듣는데 가슴에서 뭔가 찌릿했다.
벨 크리다흐 ?
어디서 들어봤는데
'유명한 애들이지 크큭'
검이 거슬리게 철수 흉내를 내었다.
" 잘 말해줬어요. 자 다들 박수 벨 크리다흐 파티는 용사 중에 유일하게 마왕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줬다고 알려져 있어요. 특히 벨 크리다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검술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
그 뒤로 베르하임이 여러 말을 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들리지 않았다.
" 크큭.. 이번에도 그 방법을 사용한 모양이군.. 큭큭.. "
옆에서 철수가 내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거슬리네. 진짜로.
저 새끼 매콤 주먹을 맛보게 해줄까 ?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벨 크리다흐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인데 계속 머릿속에 떠돌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흠.. 이런 부작용도 있군'
검이 중얼거렸지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벨 크리다흐. 벨 크리다흐.
누가 내 머릿속에서 탭댄스를 추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을 때, 눈을 뜨니 수업이 끝나 있었다.
이미 철수도 사라져있었다.
이 새끼 조사 안 해오면 진짜 매콤 주먹이다.
점심을 식당에서 혼자 간단하게 먹고 자료 조사를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른 애들이 조사 안 해올 것이 뻔해서 하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비키에게 귀를 물어뜯기기는 싫었다.
도서관은 아카데미 본관과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도서관의 외관에 초록 덩굴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니 관리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마법사가 아닌 이상 도서관에 갈 필요가 없기는 했다.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게 도움 되니까.
그리고 검사에 비해서 재능으로만 결정되는 마법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도서관의 대문을 열자 책냄새가 확 풍겼다.
입학하고 처음 와보네.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큰 책장들이 있었고 그 안에 빼곡하게 책이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 있을까 ?
책을 안 읽는 내게는 그 많은 책들이 종이 낭비 같아 보였다.
'책에 미쳐있던 유리도 반 정도밖에 못 읽었다고 했었지'
유리가 누군데 씹덕아.
" 안녕 ! "
도서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내 앞에 뭔가 퀭 해보이는 루나가 뿅 하고 나타났다.
밝게 인사를 한 루나가 대뜸 내게 뛰어들어서 안겼다.
" 뭐야 시발 ?! "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랑 똑같았다.
가슴팍에서 루나의 온기가 느껴졌다.
내 모습을 보며 루나가 웃었다.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들고 있었다.
'딸꾹'
검이 루나를 보고 놀랐는지 딸꾹질했다.
근데 검이 딸꾹질을 해?
루나가 숨쉬기 힘들 만큼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 보러온거야 ? 보러온 거야 ?"
루나가 얼굴이 상기된 채 말했다.
루나가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까치발을 했다.
그래도 나와 눈을 맞추기에는 높이가 부족한지 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바짝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우스웠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보고 자그맣게 웃었다.
루나에게서는 맑은 책 냄새가 났다.
"아니. 과제 때문에"
'보통 이때는 맞다고 해주지 않나'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과제 ? 에이든. '마물의 이해' 조별 과제 ~?"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맞기는 한데, 쟤가 어떻게 알고 있지 ?
등 쪽에 약간의 서늘함이 스쳤다.
"어 그거 맞아. 마물에 대해서 조사하려고 도서관에 왔어."
"그래 ? 잠깐만 !"
루나가 내 품에서 사라졌다.
말 그대로 그냥 사라졌다.
뭐야 원래 마법사면 저렇게 원하는 대로 이동하나?
편해 보이는데?
'저 소녀가 이상할 정도로 뛰어난 거야.나도 저 정도의 마법사는 본 적 없네.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이군'
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잠시 뒤 루나가 다시 나타났다.
루나는 종이 몇 장을 가지고 왔다.
" 이거 에이든 주려고 정리해둔거야 ! 이거 쓰면 돼 ! "
루나가 해맑게 웃으면서 종이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뭐야 미리 조사해둔게 있던거야 ? 어떻게 알고 ?
찜찜했지만 종이 뭉치의 내용을 보는 순간 찜찜함이 사라졌다.
내가 조사해야되는 마물에 대한 정보들이 정말 깔끔하고 보기 좋게 정리 되어있었다.
그냥 이걸 그대로 제출해도 될 것 같았다.
굳이 따로 조사를 안 해도 되겠는데.
그래. 뭐 우연히 조사해 둔 자료가 있었나 보지.
그럴 수 있어.
우연히 마물을 조사했는데 그게 딱 내 과제 내용이었던 거지.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뭐.
" 와 진짜 대단한데 ? 딱 필요한 부분만 정리되어 있어. 진짜 대단해 ! "
종이의 내용물에 정말 순수하게 감탄했다.
역시 천재는 사소한 것부터 다르구나.
내 칭찬을 들은 루나가 다시 한번 나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내 손에 들려있던 종이들이 흩날렸다.
약간 놀랐지만 받은 게 있어서 저항하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떨어진 종이는 루나가 다시 줍겠지 뭐.
'너는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쓰레기다.'
검의 중얼거림은 가볍게 무시했다.
루나가 내 품 안에서 코를 킁킁댔다.
마치 숨을 못 쉬다 숨을 쉬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내 품안에서 숨을 쉬었다.
냄새가 나나 ?
문득 케일이 말했던 쿱쿱한 냄새가 걸렸다.
"혹시 냄새나 ?"
"응응. 에이든 냄새"
그게 무슨 냄새야. 쿱쿱한 냄새야 ?
굳이 구차하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루나가 더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근데 있잖아, 에이든 ?"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루나가 물었다.
"응 ? "
"에이든은 케이트를 사랑해 ?"
루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 눈빛에는 초점이 없었다.
아니 얘는 툭하면 초점이 사라지네.
"케이트 ? 무슨 소리야 ?"
그리고 얘가 케이트를 어떻게 알지?
그 정도로 유명한 애가 아닌데.
"에이든은 케이트를 사랑해 ? 응 ? 사랑해 ? 응 ?"
루나가 나를 조금 더 힘줘서 끌어안았다.
그 모습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위험해보였다.
"아니 전혀. 그냥 건방진 애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 그렇지 ? 건방지지 ? 완전 건방져 거슬려. 그럼 내가 없애버릴까 ? 그럴까 ?"
루나가 쉬지 않고 말했다.
루나의 눈빛이 약간 초조해보였다.
뭐라는 거야.
"아니 괜찮아. 없애긴 뭘 없애"
서늘한 느낌에 다급하게 대답했다.
"에이든은 내가 주위 사람들 건드는걸 싫어했으니까. 응. 참을게. 또 미움 받기는 싫으니까. 거슬리지만. 아직은 참을 수 있어."
루나가 다시 고개를 내 가슴에 파묻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내버려두면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억지로 떨어뜨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이제 떨어져 시발"
"응!"
내 말에 루나가 바로 떨어졌다.
루나의 눈은 다시 초점이 돌아와있었다.
루나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 에이든 덕분에 나 다시 힘낼수 있어 ! 힘 !"
루나가 주먹을 꽉 쥐어 내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한 것은 없지만 루나가 저렇게 고마워하니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떨어졌던 종이들이 내 손으로 모였다.
봐봐 루나가 주울거라 했지 ?
언제봐도 편해 보인단 말이야. 마법이란거.
'마법은 무조건 재능이라 소년은 가망이 없다네.'
나도 알아 검 새끼야.
이미 아카데미 입학할 때 마법에 대한 재능은 하나도 없다고 인증 받았다.
" 그럼 가볼게. 이거 고마워. "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맙다는 말을 할 때는 항상 간질거렸다.
" 응 ! "
루나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서관을 나왔다.
손에 든 종이 뭉치가 든든했다.
약간 찝찝한 부분도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루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으니까.
철수,드숀 이 새끼들 조사 안해오기만 해봐.
매콤 주먹 맛을 보여줄거야.
물론 나도 내가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가 중요한 거니까.
도서관을 돌아봤는데 문 앞에서 루나가 아직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쟤도 참 한가한가 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