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사람은 입 조심 ! 1
* * *
"빨대는?"
비키가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맙소사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아차!"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입밖으로 내버렸다.
"풉"
"크큭"
옆에서 버러지 두 명이 웃었다.
"흐응 나는 빨대 없으면 못 마시는데 말이야."
비키의 빨간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봤다.
비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내 귀를 뜯을 준비 동작인가 ?
"제가! 다음에는 꼭 챙기겠습니다!"
나는 어느새 비키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비키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살기 위해 대가리를 땅에 박았다.
그런 내 등 위로 비키의 발이 올라왔다.
"너는 맛있게 생겼으니까 봐주는 거야. 다음은 없어"
비키가 발이 내 등을 툭툭 쳤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빨대를 안 가져온 큰 죄를 용서받았다.
"네!"
비키님의 큰 아량 덕분에 살았다.
"자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벤자민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비키가 발을 치웠다.
새 삶에 감사함을 느끼며 냉큼 일어나서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밥 버러지 두 명이 킥킥댔지만 애써 무시했다.
"각 조에서 발표할 인원은 준비해주세요."
아 맞다. 발표.
발표가 있었지.
자료 조사만 생각하고 발표를 잊고 있었다.
나는 루나한테 받은 종이를 한 번도 안 읽었다.
아마 우리 중 누구도 발표를 준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발표는 오렌지 니가 하는거야."
비키가 드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와 비키님 멋져요.
"넵!알겠습니다!"
킥킥대던 드숀이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 대답했다.
드숀은 황급히 우리들의 종이를 모아서 열심히 읽었다.
다행인점은 우리가 마지막 조라는 것이다.
드숀은 발표를 망칠 수가 없을 것이다.
망쳤다가는 짝귀가 될 것이 뻔하니.
원래 인간은 생사가 달린 일이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고 하던데,드숀의 발표가 기대됐다.
나는 느긋하게 다른 조 발표하는 걸 구경했다.
다른 조들은 다들 열심히 준비했는지 매끄럽게 잘했다.
그럴수록 드숀의 표정을 썩어 들어갔다.
옆에서 초조하게 종이를 읽고 있는 드숀.
나는 여유롭게 그런 드숀을 구경했다.
깝죽거리더니 꼬시다. 이 새끼.
"와 저 조 발표 정말 잘하는걸 !"
나는 일부러 드숀이 들으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드숀은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철수는 아무 관심 없는듯 초점없는 눈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비키는 눈을 감고 있는게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 조 발표 차례가 왔다.
"뻐킹 어글리 오렌지 화이팅!"
드숀이 굳은 얼굴로 내 말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갔다.
비키도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드숀을 쳐다보고 있었다.
드숀의 발걸음이 많이 무거워보였다.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발표를 맡은 드숀이라고 합니다."
드숀은 약간은 경직된 자세로 시작했다.
"저희 조가 맡은 첫 마물은 '오크 전사'입니다. 오크 전사는..."
드숀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발표했다.
"쿠륽 쿠륽하고 우는데 쿠륵이 아니라 쿠륽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중간 중간에 오크의 성대모사까지 넣어서 많은 웃음을 이끌어냈다.
역시 사람은 생명이 걸리면 더 잘하는구나.
드숀은 발표를 매우 잘 마쳤다.
발표를 마친 드숀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오 뻐킹 어글리 오렌지 제법인데."
자리로 돌아온 붉어진 얼굴의 드숀에게 박수를 쳤다.
드숀은 내게 중지를 펼쳐 보이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다음 수업까지 각자 조사한 마물이 나오는 던전을 들어가고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해주세요. 최하급 던전을 들어가면 되니까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다음 수업은 다음 주니까 기간은 충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용사 아카데미 안에 학생들의 실전 경험을 위해서 던전에 쉽게 갈 수 있도록 만든 포탈 시스템이 있었다.
예전의 어떤 천재 마법사가 만든 시스템이었는데, 용사 아카데미 특성 상 실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요긴하게 사용됐다.
포탈을 이용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등급의 던전으로 보내주는 시스템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던전 끝에 있는 포탈을 이용하면 됐다.
포탈을 유지하는데 꽤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아카데미에 꼭 필요한 시스템이라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다.
던전은 급 수가 나누어져 있었다.
그 급수마다 난이도가 천차만별이었는데.
상급 이상의 던전은 안전상의 이유로 재학생에게는 열리지 않았다.
상급 이상의 던전들은 현역 용사들이 몬스터들의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주기적으로 입장한다고 들었다.
재학생이 갈 수 있는 최고 등급은 중급이었다.
중급도 졸업반이 되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최하급 던전은 전에도 과제때문에 한번 들어가 본 적 있었다.
그 때는 선생님이랑 학생들이 같이 들어갔었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최하급 던전은 고블린 따위가 나오기 때문에 실수하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
보고서를 작성해서 내는 게 좀 귀찮지만 최하급 던전이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간다."
벤자민 선생님이 나가자 비키가 기지개를 키면서 말했다.
"예?"
내가 잘 못 들었나?
"마침 몸이 찌뿌둥했는데 말이야."
비키가 동네 산책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던전으로 가자구요?"
"두 번 말하게 할래?"
비키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오늘은 오후 수업이 없는 날이기는 했지만, 던전을 이렇게 그냥 들어가는게 어디 있어.
물론 아카데미 안의 최하급 던전이라 안전장치가 되어있겠지만.
아무리 최하급 던전이라도 던전인 이상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니, 던전을 들어갈 때는 최소한의 준비를 해야 되는 게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그런데 비키의 이마가 찌푸려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넵!"
우리 밥 버러지 삼인방은 따라갈 수 밖에.
"20 분 줄게 준비해."
친절한 비키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말을 마친 비키가 눈을 감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십 분 밖에 없었다.
"야 시발 뻐킹 오렌지 너는 기본적인 생필품 챙겨. 나는 매점가서 음식 사올게."
철수는 어차피 무언가를 시켜도 제대로 하지 못할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따로 시키지 않았다.
"명령하지마 평민 새끼야! 급하니까 봐준다!"
드숀이 앙칼지게 소리치고 뛰어갔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서 매점으로 뛰었다.
던전 준비에 20분이라 미친 소리지만 어쩔수 없었다.
비키가 미친 년인걸.
미친개가 미친 소리를 한 것일뿐.
매점에서 이것 저것 먹을 것들을 잔뜩 사서 배낭에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급 던전이니까.
"아 빨대 꼭 넣어주세요 !"
깜빡할 뻔했다.
하급 던전 클리어는 대략 5시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대장 마물은 없고 모양도 일직선 형태여서 기본적인 무력만 있으면 쉽게 클리어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에겐 비키가 있으니까 별 문제는 없을거야.
문제 없겠지?
왜 불안하지.
우리는 준비한 물건들을 챙겨서 비키 앞에 모였다.
아슬 아슬하게 20분 세이프.
정확하게 20분이 지나자 비키가 눈을 떴다.
"가자 밥 버러지들아"
비키가 당당하게 걸어갔다.
우리는 그 뒤를 졸졸 쫓아갔다.
"크큭.. 던전은 오랜만이군.."
철수가 앞에 가는 비키에게 안 들리도록 조용하게 말했다.
"난 던전을 하도 많이 가서 구조를 다 외웠는데, 마지막에 갔던 던전은 중급이었지 아마?"
드숀이 주황색 머리를 쓸어넘겼다.
중급 던전은 졸업생들이 들어가는 곳이야.
왠지 둘 다 던전 가는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불안감이 증폭됐다.
던전을 관리하는 건물은 신전같이 생겼다.
흰색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제일 전통 있어 보이는 건물이네.
안으로 들어가자 꽤 사람들이 있었다.
아카데미 던전은 학생들이 실습용으로 많이 이용한다.
그리고 안에서 들고 나온 마물의 부산물들은 꽤 짭짤한 용돈 벌이가 된다.
'던전은 오랜만이군 하하하'
널 뽑을 일은 없을 거야.
뻐킹 오렌지가 루나 검의 모습을 보면 뭐라 놀릴지 상상도 안 됐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니까. 물론 나는 검이지만 하하'
우리는 던전 입장하는 곳으로 갔다.
남자 직원이 피곤한지 졸고 있었는데, 비키가 거침없이 직원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냥 곱게 깨운다는 건 비키의 머릿속에 없는 듯했다.
책상은 꽤나 단단해 보이는 나무 재질이었는데, 비키의 주먹 자국이 깊게 남았다.
큰 소리에 직원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으악!"
직원이 비키를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비키의 특징은 너무 뚜렷해서 바로 알아봤을 것이다.
미친개 비키.
남자가 황급히 자신의 귀를 손으로 가렸다.
"과제 때문에 최하급 던전을 입장하려고 하는데요."
나는 비키가 저 남자 직원의 귀를 뜯어먹기 전에 서둘러 직원에게 말했다.
직원이 내 얼굴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가 바로 폈다.
뭔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거 같은데.
"아 ! 최하급 던전이요 ! 잠시만요 !"
남자는 바로 앞에 있는 비키를 애써 못본 척하고 움직였다.
근데 뭔가 남자의 얼굴이 낯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남자가 옆에 있는 판을 흥얼거리면서 부지런히 만졌다.
남자는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인듯 했다.
곧 준비가 끝났는지 남자가 우리를 불렀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안전 수칙 명심하시고.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처음 시작한 부분으로 가시면 귀환 포탈이 있을 겁니다."
남자가 비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비키는 남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포탈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 뒤를 철수와 드숀이 들어갔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너 같은 쓰레기는 루나 님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옥에 가서 자기의 주제를 알고 반성하도록 ! 하하하"
남자 직원이 내게 중지를 보여주며 헤벌쭉 웃고 있었다.
아. 쟤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다.
내가 '니네 루나 쩔드라'라고 말한 새끼.
입 조심할 걸 시발.
아 시발 좆됐네.
포탈 특유의 부유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눈을 뜨자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대지가 보였다.
광활한 대지에 폐허가 된 건물들이 무너져 있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여긴 최하급 던전이 아니다.
"시발 여기가 어디야!?!!"
드숀이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소리 질렀다.
"크큭.. 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곳이군.. 크큭..."
철수가 안대를 잡고 중얼거렸다.
"흐응 따뜻하네."
비키가 겉 옷을 벗어서 내게 던졌다.
그러자 비키의 터질것만 같은 몸매가 드러났다.
비키는 가슴 부분만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비키의 터질것 같은 가슴에 자꾸 시선이 갔지만, 저항하는 내 눈을 겨우 돌려서 주변을 확인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비키의 겉 옷을 받아 곱게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때 멀리서 큰 소음이 들렸다.
소음이 들리는 곳을 보니 저멀리서 집채만 한 크기의 마물이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하반신은 말의 모습이었고 상반신은 근육질의 남자였다.
하반신에서 흉물스런 물건이 덜렁거리면서 우리에게 뛰어오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저거 시발 켄타우로스잖아!!!"
그 모습을 본 드숀이 게거품을 물면서 발작했다.
켄타우로스는 상급 던전에 나오는 마물 중 하나다.
그 미친 새끼 우리를 상급 던전으로 보낸거야?
만약 여기가 상급 던전이라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었다.
켄타우로스는 우리 수준에서 상대할 수 있는 마물이 아니었다.
최소 중급 용사는 와야 상대할 수 있을텐데,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한 우리는 아직 하급 용사보다도 약했다.
"크큭.. 딸꾹! 크큭... 재밌겠군.. 크큭.. 딸꾹! "
철수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 준 검으로는 생채기도 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루나 검을 뽑았다.
아직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람 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으하하하'
루나 검이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기분이 좋은 듯 했다.
"마음에 드는 크기네! 캬하하하하"
비키가 미친듯이 웃으면서 켄타우로스에게 마주 뛰어갔다.
미친개가 틀림없다 저 여자는.
켄타우로스가 바로 앞에 온 비키를 향해 손에 들린 큰 도끼를 붕 소리가 나도록 세게 휘둘렀지만, 비키는 그 도끼를 매끄럽게 피하며 오히려 파고 들었다.
켄타우로스의 몸을 타고 올라간 비키가 켄타우로스의 상체 뒤에 바짝 붙었다.
"캬하하하!"
비키는 거칠게 켄타우로스의 귀를 입으로 뜯었다.
켄타우로스의 초록색 피에 비키가 흠뻑 젖었다.
"크허어어엉"
켄타우로스가 고통이 잔뜩 섞인 비명을 지르며 비키의 발목을 잡아 땅에 패대기쳤다.
그 강력한 힘에 비키는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땅에 쳐박혔다.
얼마가 세게 박혔는지 비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비키가 죽으면 우리도 죽을 것이다.
"비키가 죽으면 우리도 뒤지는 거야 시발!"
억지로 소리치며 무거운 걸음으로 켄타우로스에게 뛰었다.
"이익!! 시발!! 켄타우로스라니!! 켄타우로스라니!"
드숀도 자신의 검을 뽑고 달렸다.
켄타우로스가 육중한 앞발로 비키를 짓누르려고 하는 순간 구덩이 속에서 비키가 벌떡 일어났다.
"퉤! 방해하지마"
비키가 입에서 켄타우로스의 귀를 뱉어내고 미친 웃음 소리를 내며 다시금 켄타우로스에게 뛰어들었다.
"예?"
나와 드숀의 입에서 동시에 바보같은 말이 나왔다.
괜히 검을 든 손이 민망해서 슬쩍 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