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주인공이 조금 강해졌다랄까.
* * *
결국 나는 새벽까지 루나의 가슴 마사지를 해주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루나는 사라져있었다.
왜 내 상의가 올라가 있는 거지.
급하게 벗긴듯 구겨져 올라가 있는 상의를 정리해서 내렸다.
하루를 누워 있었더니 몸을 움직이고 싶어서 근질거렸다.
원래 이런 몸이 아니었는데.
원래의 나라면 개꿀이라면서 누워있었을 텐데.
'나쁜 건가?'
좋은 거지. 아마?
'그럼 됐군.'
그렇지.
오늘은 몸을 좀 움직여야겠어.
나는 가볍게 몸을 풀고 일어났다.
안드레아의 실력이 뛰어난지 몸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몸도 가벼웠다.
검을 옆에 챙겨 문을 열고 나갔다.
방을 나가보니 성당 안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약간의 뿌듯함이 느껴졌다.
'음 저 여자는 빨간색, 저 여자는 흠... 흥미롭군.'
검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괜히 궁금했다.
왜 뭔데.
괜히 궁금하네.
'비밀이라네 찡긋.'
진짜 오물통에 한 번 넣어야 정신 차리지.
"어? 에이든님?"
성당을 막 나서려는데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안드레아가 내게 뛰어오고 있었다.
"아직 돌아가시면 안 되는데요?! 안정을 조금 더 취하셔야 합니다!."
달려와서인지 볼이 붉어진 안드레아가 말 끝을 살짝씩 강조하며 말했다.
아침에 봐도 단아하게 생겼네 안드레아는.
'큼큼...'
"아 가만히 있으니 몸이 쑤셔서요. 나가서 잠깐 움직이고 오려고요."
"아!... 그럼 혹시 모르니까 저도 같이 갈까요?"
안드레아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미인과의 동행을 거절하면 너는 더이상 내 영혼의 단짝이 아니다. 소년.'
거절하려고 하자 검이 진지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까지 반응을 해.
검이 내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검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네. 안드레아 같은 미인이 동행해주시면 좋죠."
나는 안드레아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내 살짝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쓸모 없을 테지만.
칭찬은 아무리해도 돈이 들지 않고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마법이다.
"앗! 그럼 잠시만요!"
안드레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고 뛰어갔다.
'의외로 소년은 외모와 다르게 여복이 있군.'
뭐라는 거야.
잠시 뒤 안드레아가 가방을 들고 뛰어왔다.
그렇게 급하게 올 건 없는데 역시 사명감의 아이콘 안드레아.
"하아 가시죠!"
뛰어서 내 옆에 온 안드레아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활기차게 소리쳤다.
나는 안드레아와 같이 연습장으로 걸어갔다.
"가방은 왜 가져오신거죠?."
"아! 여기에는 시원한 성수가 있어요!"
내 물음에 안드레아가 활짝 웃으며 가방의 내용물을 보여줬다.
가방은 냉각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듯 안쪽 부분에 특수처리가 되어 있었다.
안에는 성수가 네 병 들어있었다.
아니 성수를 왜 들고 와.
그리고 굳이 성수를 시원하게 마시는 이유가.
"몸을 움직이시면 덥잖아요 ?! 그래서 제가 에이든님을 위해 시원한 성수를 준비해봤어요."
안드레아가 뿌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맞네요. 시원하면 더 좋죠 !"
물론 왜 굳이 성수를 마셔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굳이 공짜로 주겠다는데 성의를 무시할 필요는 없었다.
"안드레아 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헤 감사합니다."
안드레아가 단아하게 웃으며 머리를 귀뒤로 넘겼다.
아마 사람들에게 아카데미 1등 신붓감을 뽑으라고 한다면 안드레아가 뽑히는 것을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안드레아는 단아했다.
"그럼 저는 달리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몸을 풀며 안드레아에게 말했다.
"네. 저는 이쪽에서 보고 있겠습니다."
안드레아는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나는 간단히 몸을 풀고 운동장을 달렸다.
뛸수록 신기하게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기분이 묘해져 평소보다 더 오래 달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몸은 땀 범벅이었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달리기를 멈췄다.
존나 시원해.
'적당한 운동은 삶을 증진 시켜준다고 하지.'
검에게서 운동에 대한 말을 듣다니 아이러니 하군.
'인생은 원래 아이러니하지. 물론 나는 검생이지만! 하하'
뒷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와 에이든 님은 달리기를 정말 잘하시는군요!"
달리기를 멈추자 안드레아가 수건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는데.
안드레아는 내게 붙어서 땀을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줬다.
"그.. 제가 해도 되는데요..."
마치 내 몸에 땀방울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안드레아의 손길이 당황스러웠다.
"아니요! 제가 이것 때문에 에이든 님을 따라온걸요!"
안드레아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이것 때문에 따라왔다는 무슨 소리지.
단호한 안드레아의 태도에 나는 몸을 안드레아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드레아는 내 몸에 땀방울 하나까지 다 닦아냈다.
왠지는 모르지만 달리기를 한 나보다 더 붉은 얼굴로 안드레아가 수건을 뒤로 숨겼다.
나는 염치가 없는 편이지만 내 땀이 잔뜩 묻은 수건을 미인에게 빨게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건 제가 빨아서 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니요! 제가 하겠습니다!"
안드레아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뭐 자신이 하겠다는데 그냥 놔뒀다.
검술을 수련하기 위해 연습장으로 향했다.
"킁킁."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안드레아가 뒤로 황급하게 뭔가를 숨겼다.
"괜찮으신가요?"
왜 갑자기 눈이 풀린 거지.
"네? 네! 멀쩡합니다! 멀쩡해요!"
안드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안드레아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연습장에 도착해 아카데미 검을 뽑았다.
안드레아는 붉어진 얼굴로 약간 떨어져 앉아있었다.
'몸 내부에 집중해보게나. 소년.'
몸의 내부라.
그 근육 소고기를 벨 때 느꼈던 기분 말하는 거야?
'그렇지. 그걸 기운이라고 한다네. 기운에 집중해보게나.'
눈을 감고 몸의 내부에 집중했다.
전과는 다르게 심장에서 미세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야 이런 게 내 몸 안에 있었다고?
'하하 모든 인간이라면 다 있네. 기운을 느끼는 게 힘든 것뿐이지.'
그 힘든 걸 내가 해내다니 역시 나는 재능이 있군.
'푸흡.'
기분 나쁜 검의 웃음을 무시하고 다시 집중했다.
'이제 그 기운을 움직여.'
니가 그렇게 말 안해도 그러려고 했거든.
움직여라 움직여.
집중하자 심장에 있는 기운이 조금씩 움직였다.
옳지. 착하지.
역시 내 기운은 주인을 닮아서 착하구나.
'큽.'
수줍게 움직이던 기운은 이내 내 몸을 통해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온몸에 활력이 돌았다.
역시 내 재능은 지린다니까.
'역시 한 번 간 길이라 쉬운가 보군. 암컷의 교미처럼 처음만 뚫리면 그다음은 쉽다고 하던데.'
검의 묘사가 좀 이상했지만 대충 넘겼다.
이 느낌은 정말 시원했다.
나는 넘쳐나는 기운에 자신감을 담아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마치 기운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 동작은 전보다 더 날카롭고 힘이 넘쳤다.
와 시발 나 존나 쎈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자마자 하늘에서 눈보라를 만들던 루나가 생각나서 금방 쭈그렸다.
그래도 지금이라면 좀 쓸만할 거 같은데.
이럴 때는 적당한 먹잇감이 필요했다.
나보다 약하고 내 자존심을 채워줄 만한 좆밥.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학생들이 검을 연마하고 있었다.
근육질의 몸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자.
쟤는 좀 강해 보여서 통과.
쥐새끼의 얼굴로 덩치가 나보다 작으면서 대충 검을 휘두르고 있는 새끼.
음 저 정도면 괜찮겠는데.
싸움에는 항상 기선제압이 제일 중요하다.
"어이 거기 너 쥐새끼."
나는 검을 한 쪽 어깨에 걸치고 딱봐도 좆밥 같아 보이는 애를 불렀다.
지목당한 쥐새끼처럼 생긴 애가 설마 자신을 부른 거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 너 말이야 쥐새끼 이리 콤."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쥐새끼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하 유급생 새끼가."
쥐새끼가 침을 찍 뱉으며 내게 다가왔다.
쥐새끼도 기선제압이 필수라는 꿀팁을 아는 듯 인상을 잔뜩 쓰면서 왔다.
그나저나 내가 유급생이란 걸 모르는 애가 없네 진짜.
우리는 굳이 말하지 않고 눈싸움을 하면서 각자 목검을 하나씩 가져왔다.
"퉤 유급생이 감히 이 몸 XXX 한테 덤비다니."
쥐새끼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지만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 대충 필터링했다.
"닥쳐. 쥐새끼처럼 생긴 새끼야."
선빵필승.
나는 바로 기운을 순환시키며 쥐새끼한테 달려들었다.
내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에 쥐새끼가 황급히 검을 들어서 막았지만, 기운을 깨달은 나에 비하면 너무 느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내 목검이 정확하게 쥐새끼의 어깨를 가격했다.
"끄윽!"
단 한 수만에 쥐새끼가 어깨를 잡으면서 쓰러졌다.
나 존나 강하네.
목검으로 쓰러진 쥐새끼를 겨눴다.
이미 승패는 결정 났지만 내 검에는 자비가 없다.
나는 웅크린 쥐새끼를 검으로 몇 대 더 쥐어박았다.
"으악! 그만해! 내가 졌다! 졌다고!"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 이거야."
후... 세상이 다 저 쥐새끼처럼 나보다 약자들로만 가득 차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이게 전설의 검 소유자라니.'
좌절하는 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고생하셨어요! 에이든님!"
어느새 다가온 안드레아가 내게 붙어서 새 수건으로 내 땀을 열심히 닦아줬다.
쥐새끼의 얼굴에 더한 패배감이 드리워졌다.
"이.. 이거 마셔주세요!"
안드레아가 내게 시원한 성수를 건넸다.
안드레아의 말투가 왜 부탁하는 말투인지 의문이었지만, 마침 목이 말랐기 때문에 곱게 받아 마셨다.
성수는 늘 그렇듯 성수 특유의 비린내가 느껴졌지만, 시원해서 마실만 했다.
"아아..."
안드레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수건을 꽉 쥐었다.
쥐새끼가 나를 한 번 더 노려보고 도망쳤다.
역시 나보다 약한 사람과의 싸움은 언제나 짜릿해.
안드레아가 땀을 닦은 수건을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 소중히 넣었다.
"이제 돌아갈까요?"
이 정도면 충분히 자존감을 채우고 몸도 풀었다.
"...네!"
자신의 가방을 만족스럽게 보고 있던 안드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당으로 돌아와 성당에 구비되어 있는 샤워실에서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오자 안드레아가 스프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또 스프야 시발?
공짜로 있는 내가 반찬 투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연속 스프는 심한 거 아닌가.
나는 머리를 말리면서 침대에 앉았다.
안드레아에게 스프를 받으려고 했지만, 안드레아가 거부했다.
"...제가 먹여드릴게요!."
붉어진 얼굴로 안드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 방금까지 검으로 쥐새끼 하나 패고 왔는데.
분명히 안드레아도 보지 않았나?
물론 미인이 먹여준다는데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뒹구는 구만.'
안드레아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바짝 붙어서 스프를 먹여주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에게서는 옅은 꽃 내음이 났다.
그 거리가 어제보다 더 가까워서 내 가슴에 안드레아의 가슴이 뭉개졌다.
나는 그 부드러운 감각에 최대한 집중했다.
붉어진 얼굴로 열심히 스푼을 움직이는 안드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드레아가 단아하게 미소 지으며 스푼을 내 입에 넣었다.
묘하게 기분이 뭉글뭉글해졌다.
뭔가 신혼 생활 같네.
'진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호강이군.'
그러게나 말이야.
"...점심때 올게요!"
밥을 다 먹고 내 몸을 닦은 수건을 안드레아가 챙겨서 나갔다.
나가는 안드레아의 표정은 뭔가 들뜬 표정이었다.
정말 열심히 사는 수녀님이야.
나는 누워서 다시금 기운을 움직였다.
***
"우리 변태!"
문이 쾅하고 열리면서 붉은 머리의 비키가 들어왔다.
아이 시발 깜짝아.
문을 부술 생각이었나.
비키가 발로 찬 문의 중앙 부분이 깊게 파여 있었다.
아마 부술 생각인 듯했다.
"그... 손으로 열어도 될 텐데요."
비키는 내 말을 무시하고 성큼 성큼 걸어와 내 바로 옆에 섰다.
비키가 내 머리채를 잡고 여기저기 확인했다.
"아 살살! 살살!"
그 손길이 너무 거침없어 내 목이 뽑히는 기분이 들었다.
"흐응 멀쩡하네 우리 변태. 일부러 누나 올 때까지 누워있었던 거야?"
비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수녀님이 오늘까지는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고개 돌려 비키의 시선을 피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비키가 거칠게 나를 끌어당겨서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 어떤 고급 베게 보다도 부드러운 비키의 가슴에 푹 안겼다.
내 얼굴이 비키의 큰 가슴 사이로 깊숙히 들어갔다.
아마 밖에서 보면 내 얼굴이 안 보이지 않을까?
녹아버릴 것만 같은걸.
"우리 변태. 그때 그 꼬마 아가씨는 누굴까~?"
비키가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들썩거리면서 비키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비키의 질문에 문득 고민이 되었다.
루나는 뭐지?
사실 그동안 바빠서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루나가 나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친구라 하기에는 애가 너무 살벌했다.
특히 하늘에서 불 덩어리 소환하는 거.
이번에는 루나때문에 성당에 입원도 했고.
역시 여자친구라기보다는...
담당 일찐 느낌이야.
그렇다고 비키에게 내 담당 일찐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뭔가 없어 보이잖아.
"흐응. 뭐 상관은 없어. 역시 경쟁하는 게 재밌으니까."
비키의 목소리에는 짙은 흥미가 담겨 있었다.
"뭐를 경쟁?"
"푸하하 간지러워!"
내가 말을 하자마자 비키가 가슴 사이에 있던 나를 밀쳤다.
비키의 무식한 힘에 밀려 나는 그대로 날아가 내 뒤에 있던 벽에 박혔고
"어?! 변태!?"
비키의 놀란 음성이 들리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시발.
얘도 내 담당 일찐이잖아.
***
루나 님이 우리를 한 곳에 호출하시다니.
루나 님을 사랑하는 모임이 결성된 지 자그마치 4년 만의 쾌거였다.
비록 그 장소가 아카데미에서 거리가 꽤 멀고 마물의 출현으로 약간 위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산이지만, 루나 님의 폐쇄적인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는 이해했다.
오히려 그런 위험성이 우리의 충성심을 복돋웠다.
용사 지망생인 우리가 마물을 두려워하면 안 되지.
우리는 루나 님이 마왕성으로 불렀어도 달려갔을 것이다.
최근에 이상한 모습을 보이셨다고 했지만 그건 그 쓰레기 유급생의 영향이 틀림 없었다.
한 번 실패하기는 했지만, 루사모는 반드시 그 쓰레기를 루나님의 옆에서 치울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게 우리 루사모의 의무니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루나님이 소집한 곳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내 옆의 녀석이 뛰기 시작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루나님을 보려고 하는게 틀림 없었다.
그 녀석이 뛰는게 신호라도 된 듯 다 같이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앞다투어 루나님이 말한 산에 도착했다.
"약간 을씨년스러운데."
"풋! 무서우면 꺼지라고."
"닥쳐! 내 루나님을 향한 충성심은 이깟 두려움이 막을수 없다."
옆에서 들려오는 말처럼 루사모에서 고작 이 정도로 루나님과의 만남을 포기할 녀석은 없었다.
루사모의 입단 테스트는 그처럼 허술하지 않다.
우리는 두려움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산으로 들어갔다.
각자의 손에 라이트 마법을 키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더 깊숙히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숲 속에 달빛을 받으며 고고하게 앉아있는 루나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빛마저 흡수해버리는 칠흑 같은 머릿결.
눈처럼 새하얀 피부.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배치된 완벽한 이목구비.
아 정녕 루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게 틀림없다.
루나 님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계셨다.
우리는 루나 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루나님 앞에 모여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루나 님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그에 루나 님의 큰 눈이 달빛을 머금은 듯 빛났다.
아아 저게 어찌 인간의 모습인가.
저건 여신님이 틀림없었다.
곳곳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루나 님의 손가락이 제일 앞에 있는 녀석을 가리켰다.
주근깨 얼굴에 재수 없는 표정을 한 녀석.
달리기가 유독 다른 애들보다 빨라서 1등으로 도착한 녀석.
내 안에서 질투심이 고개를 처들었다.
내 달리기가 좀 더 빨랐다면.
주근깨 얼굴을 한 녀석이 기쁜 표정으로 루나님을 향해 나아갔다.
녀석이 가까이 오자 루나 님이 손가락을 튕겼고 그 녀석의 온몸이 잘게 썰려서 쓰러졌다.
마치 칼로 수십번 난도질한 것처럼.
꿈인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순간적으로 뇌가 정지했다.
녀석이 사라지자 루나님의 손가락이 다른 애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녀석도 마찬가지로 잘게 잘려서 쓰러졌다.
갑자기 느껴지는 현실감에 극한의 공포가 몰려왔다.
"에이든에이든에이든미안해청소를늦게해서금방치울게에이든에이든에이든."
루나 님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아악!!!!!"
마침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이 내 정신을 일깨웠다.
"시발!"
나는 머릿속을 꽉 채우는 공포를 욕지기로 억누르고 뒤로 뛰었다.
시발시발시발.
"으아악!!!"
내 바로 뒤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저게 무슨 여신이야 시발.
그냥 미친년이지.
"저도 루나님의 은혜를!"
미친놈 하나가 오히려 미친년에게 뛰어들었다.
"크하하하하!!"
녀석의 만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꾸만 다리가 풀리는 것을 억지로 움직여서 도망쳤다.
제발 움직여 다리야 시발.
한참을 뛰어 마침내 산의 끝부분에 도착했다.
뒤에서는 더이상 비명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만 통과하면 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어.
살았다. 살았어.
산의 끝부분에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다.
"살려주세요!! 시발 저기 안에 미친년이..."
그 형체의 머리는 칠흑 같아서 달빛마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에이든에이든에이든쓰레기는빨리치워야돼아마지막쓰레기."
그 형체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보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에이든에이든에이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