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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52화 (52/233)

〈 52화 〉 금발 태닝 유니콘

* * *

삐­익.

뭐야 이 소리는.

작지만 거슬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하지만 일어나기 귀찮아서 그냥 무시했다.

삐­익.

어디서 들어본 소리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딸꾹'

그래 루나겠지.

이 시간에 내 방에 들어올 애가 또 누가 있겠어.

삐­익.

루나는 내가 말리지 않으면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켜서 앉았다.

옆을 보니 어두운 방 안에서 뭔가가 꾸물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참을 보자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면서 꾸물거리는 형체가 보였다.

동그랗고 노란 것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야 저게 시발.

"루나?"

"삐­익?"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에일 버드처럼 생긴 옷을 입은 루나가 나를 쳐다봤다.

심지어 얼굴에도 에일 버드처럼 수염을 그린 상태였다.

진짜 환장하겠네 시발.

"삐­익!"

맙소사 시발.

루나가 꾸물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에 내가 취해야 할 반응이 생각나지 않았다.

침대 옆까지 도착한 루나가 침대 위로 올라오기 위해 쭈그린 자세에서 뛰었다.

물론 쭈그린 자세에서 뛰었기 때문에 루나는 침대에 올라오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루나가 바닥에 엎어지면서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삐­익"

루나가 엎어진 자세에서 고개만 들어 나를 보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루나는 아무리 봐도 스스로 일어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렇다고 저렇게 놔두고 자기에는 내가 불편했다.

그래 루나잖아.

놀란 내 가슴을 진정시켰다.

루나가 이상한 거는 당연한 거야.

나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일어나 루나한테 다가갔다.

"삐­익!"

루나의 음성이 약간 높아졌다. 뭔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루나가 나를 쳐다봤다.

그런 루나를 들어서 침대 위로 올려줬다.

루나는 작은 덩치에 맞게 엄청나게 가벼웠다.

침대 위로 올라온 루나가 밝게 웃었다.

루나를 침대 위로 올린 내 판단이 맞는지는 의심스러웠지만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내가 눕자마자 루나가 내 위로 올라와서 앉았다.

그런 루나의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래 루나잖아.

"삐­익"

루나가 열심히 자신의 몸을 내게 비비며 한참이나 삐­익 거렸다.

루나가 혼자서 열심히 몸을 비비다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내 위에 엎어졌다.

나는 그런 루나의 노란 털옷을 쓰다듬었다.

그래 루나니까 이상한 게 당연한 거지.

당연한거야.

점점 루나에게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발.

***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루나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순간 어젯밤이 꿈인가 했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노란색 털들 덕분에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쾅쾅쾅

문에서 나는 소리에 머리를 흔들어 잠을 깨면서 문으로 갔다.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명확했다.

"안녕 변태?"

문 앞에는 만족한 표정의 비키가 웃고 있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비키를 따라나섰다.

비키와의 강압적인 아침 훈련이 익숙해진다는 게 기분 나빴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오늘은 좀 늦게 오셨네요?"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약간 늦은 시간이었다.

"응. 오늘은 아침 훈련 없거든."

비키가 시원하게 웃었다.

"... 근데 왜?"

아침 훈련이 없는데 시발 왜 깨웠어. 나 존나 꿀 잠자고 있었는데.

"우리 변태 아침 먹여야지."

와 이런 미인이 아침 일찍 나를 깨워서 내 아침 식사를 챙겨준다니. 마치 사춘기의 소년이 상상할 법한 일이었지만, 당사자인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좋았다.

물론 그것을 비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하. 이런 미인이 제 아침까지 챙겨주신다니...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오는걸요?"

내 모든 기쁨을 얼굴에 담았다. 괜찮은 표정이 나왔으려나?

물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내 꺼 밥은 내가 챙겨야지."

비키가 붉은 눈으로 윙크를 했다.

그 모습이 우습게도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살짝 두근거렸다.

미쳤지. 미친개가 매력적으로 보인다니.

머리를 흔들어 애써 정신을 다시 차렸다.

기숙사 밖으로 나가자 시원한 새벽 공기가 맡아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싫지만 새벽 공기는 기분 좋았다. 새벽 공기를 봉지에 담아서 팔면 꽤 잘 팔리지 않을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면서 비키의 별채에 도착했다.

나도 저런 별채 가지고 싶다. 나도 좆밥애들 쥐어 박고 다닐까?

그럼 아카데미에서 비키처럼 내게도 별채를 주지 않을까.

"항상 생각하는 건데. 비키 누나의 별채는 정말 부럽네요."

나는 구르면 세 바퀴 안에 벽이랑 부딪히는 우리 같은 데서 사는데 말이야.

누구는 이런 깔끔한 집에서 혼자 살고.

"부러워? 그럼 여기서 같이 살아도 좋아."

비키가 별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내게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뭐해 안 들어오고?"

비키의 질문에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따라 들어갔다.

"앉아있어."

비키가 마치 강아지한테 명령하는 것처럼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비키의 말에 강아지처럼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비키가 분주하게 요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비키의 뒷모습을 구경하면서 식사를 기다렸다.

돕기 귀찮았으니까 굳이 도울 게 없냐는 가식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앉아있으니 괜히 다시 비키의 제안이 생각났다.

들어와서 살라니.

장난이려나? 장난이겠지.

괜스레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만약 비키의 말이 진심이라면 나는 들어와서 비키와 같이 살 것인가?

마침 뒤를 돈 비키의 파멸적인 가슴이 보였다.

저 정도면 같이 살만할지도...

비키가 내 시선에 살짝 웃고는 다시 돌아섰다.

그 모습이 마치 현모양처와 함께하는 신혼 생활의 한 장면 같았다.

같이 살까...?

무엇을 고민하는가!! 매일 매 순간이 교미일 텐데! 저런 젖통을 가진 암컷과 교미! 교미!

나는 반대일세! 나는 그 수녀가 더!!

닥쳐봐 시발 머리 아프니까.

탁탁탁­

비키가 칼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키와 같이 사는 건 자살행위였다.

지금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키가 어울리지 않게 온순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지만, 같이 살다가 수틀리면 나를 쥐어팰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무조건 순종적이고 적당히 이쁘고 적당히 가슴 큰 여자랑 살 거야.

비키의 외모도 적당히 이쁜 수준을 넘어섰다.

그래. 좁더라도 마음 편하게 혼자 사는 게 낫지.

마음을 정하니 한결 편해졌다.

편한 마음으로 비키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언제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이었다.

요리를 마친 비키가 음식을 옮겼다.

비키는 본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비키를 거슬리게 하지 않기 위해 소리를 내지 않고 먹었다.

진짜 음식이 비키와 너무 어울리지 않게 맛있었다.

같이 살면 이 음식을 매일...

머리를 다시 흔들었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쳤다.

비키는 음식 그릇들을 치우고 주황색 음료를 내게 건넸다.

새콤한 맛이 나는 음료였다.

내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비키는 뭐라 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을지도...

그러다가 문득 키아나가 내게 했던 질문이 생각났다.

비키의 꿈은 무엇일까?

"비키 누나는 꿈이 뭐예요?"

"꿈?"

비키가 내 질문에 미간을 좁히면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아마 키아나에게 질문을 들었을 때 내 표정도 저렇지 않았을까. 비키도 꿈에 대해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진지하게 자신의 꿈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잠깐의 정적이 지나가고 비키가 입을 열었다.

"용사야."

비키의 눈이 마치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흐려졌다.

그 모습이 아련해 보이기도 하고 그냥 졸려 보이기도 했다.

"용사요?"

물론 용사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의 입에서 충분히 나올만한 대답이었지만 그 대답의 주체가 비키라 믿음이 가지 않았다. 대충 둘러대는 거 아니야?

"응. 용사. 왜 이상해?"

비키가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뇨. 뭐 비키 누나라면 더 거창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어요."

말하고 나서 슬쩍 비키의 눈치를 봤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용사가 꿈 중에서는 제일 거창한 거 아닌가?"

비키의 붉은 입술이 호선으로 휘었다.

"예전에는 그랬었지만, 지금은 좀 의미가 바뀌었잖아요? 용사 자체가."

분명 예전에는 용사라면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는 느낌이었었다. 동화나 전설을 읽고 자란 아이들도 용사를 꿈꿨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 마왕 공략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마왕 공략은 포기하고 그냥 넘쳐나는 마물들이나 처리하는 마물 처리 전용 용병 같은 느낌으로 바뀌었다.

지금 아이들한테 꿈을 조사하면 아마 용사보다 안정적인 기사나 사무직들이 더 인기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용사 아카데미를 다니고는 있지만 정작 사명감을 가지고 용사를 하려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용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용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기사나 용병쪽으로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나도 뭐 용사 아카데미에서 고아인 나를 먹여주고 재워준다니까 온 거고.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뭐 나는 용사 할거야. 딱히 따로 할 게 없기도 하고."

비키가 남은 음료를 한 번에 다 마셨다.

"세상을 구하는 용사."

비키가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문득 미노타우르스와 싸우던 비키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무식하게 피 튀기면서 싸우던 비키가 용사라니.

전혀 안 어울렸다.

"우리 변태는 꿈이 뭔데?"

잠깐 정적이 지나가고 비키가 내게 물었다.

"그 변태라고 안 하면 안 됩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변태 아니야? 그때 내 가슴 만지고 싶다고 소리쳤잖아."

비키가 짓궂게 웃었다.

"변태 아니에요. 그리고 비키 누나 정도의 가슴을 만지고 싶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어요. 저 금욕으로 유명한 수도승들한테 가도 읽던 법전을 집어 던지고 바로 비키의 가슴을 만진다고 달려들 걸요?"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비키의 가슴은 매력적이었다.

"푸하하­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해."

내 말을 들은 비키가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진짜라니까요."

이해하지 못하는 비키가 답답했다.

"뭐 우리 변태가 그렇게까지 좋게 생각해주니까 다행이네."

"예. 뭐. 그래서 제 말은 제가 변태가 아니라 정상적이라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정상보다 더 금욕적이죠. 이 정도면."

내 말에 비키가 다시 한번 소리내 웃었다.

"그래도 싫어. 변태라고 부를 거야. 불만 있어?"

한참 웃던 비키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 아뇨 마음대로 하세요."

불만이 있을 리가요 시발.

아직도 비키가 미노타우르스의 귀를 뽑아 버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우리 변태는 꿈이 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나는 비키에게 어젯밤에 고민해서 내린 결론을 말해줬다.

"저야 뭐. 적당하게 강해져서 적당히 돈을 번 다음에 적당히 해도 잘 들고 바람도 시원한 좋은 곳에서 적당하게 이쁘고 적당히 가슴 큰 여자랑 오순도순 소박하게 사는 겁니다."

당당하게 내 멋진 꿈을 비키에게 알려줬다.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완벽하다고 느껴졌다.

"풋­ 뭐야 그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비키가 피식하고 웃었다.

"왜요. 완전 멋진 꿈인데."

비키의 태도에 살짝 기분이 나빴다.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만든 꿈인데.

"이미 변태의 소원은 틀린 것 같은데?"

비키가 식탁에 기대며 말했다. 그 자세 때문에 비키의 큰 가슴이 식탁에 뭉개지는 멋진 모습이 보였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비키의 큰 가슴이 뭉개진 엄청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답했다. 내 꿈은 완벽하게 순항 중인데 말이야.

"이미 내가 있잖아. 미안하지만 내가 적당히 이쁘고 적당히 가슴 큰 여자는 아니라서 말이야. 내가 좀 많이 이쁘고 많이 크거든."

비키가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좀 더 내게 몸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비키의 가슴은 터질 것처럼 더 뭉개졌다.

꿀꺽­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나는 변태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변태 너는 내 것이니까."

비키의 눈이 마치 어둠 속의 맹수처럼 위험하게 빛났다.

"예?"

"내 꺼라고."

비키가 내게 각인시키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비키의 뭉개진 가슴에 팔려있던 정신이 위험을 감지하고 다급히 돌아왔다.

내가 왜 니꺼야. 시발.

물론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바보처럼 헤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비키가 강아지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마 나한테 꼬리가 있었으면 지금 신나게 흔들고 있지 않았을까.

시발.

***

스칼은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됐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오랜 고민 끝에 스칼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스칼이 처음 사귀었던 여자가 혼전순결주의자여서 스칼은 그녀를 존중하고 욕구를 참았다.

주변에서 동료들이 그런 스컬을 비웃었지만, 스칼은 그들의 사랑을 믿었다.

기다리면 그 과실이 더 달아지는 법이었다.

물론 내 눈에 달콤해 보이는 과실은 항상 다른 누군가에게도 달콤해 보인다는 것을 스칼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결국 그 여자는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웠고 심지어 잠자리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정신을 놓고 술에 빠져서 살았다.

마탑의 기대주였던 내가 술독에 빠져 살자 동료들이 찾아와서 위로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증오만이 가득했다.

세상은 나를 배신했다.

그렇게 술독에 빠져 살던 어느 날 그가 내게 접근했다.

금발 머리에 짙은 갈색의 피부 그리고 꿈틀거리는 근육질을 가진 그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상황 자체가 어느 정도 그가 계획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

"처녀가 아닌 것은 죄악이다. 처녀는 어떻게 보면 신념과도 같다. 처녀를 잃은 여자에게서는 더이상 가치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처녀가 아닌 여자때문에 네가 이렇게 생활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 자가 내게 말했다.

그 자의 목소리에는 힘과 신념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소리였지만 그 당시에 나는 여자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심에 불타오를 때라 그 자의 말에 탄복했다.

나는 그 즉시 마탑을 때려치우고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나 말고도 여자에게 상처입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를 받으며 점점 뭉쳤다.

"처녀가 아닌 여자는 살 가치가 없다."

그는 인간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강했고 또 잔인했다.

어떻게 알아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처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처녀를 찾아내어 여자의 처녀를 취했다.

그리고 나면 주저 없이 방금까지 관계를 나누었던 여자의 목을 뽑았다.

자신이 처녀를 취하고 죽이는 것은 미친 행위였지만 이미 머릿속에 가득 찬 증오로 나는 제대로 된 사리분별이 되지 않았다.

처녀를 취할수록 그는 더욱 강해져 갔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여자에게 징벌을 내리는 신처럼 느껴졌다.

그의 압도적인 무력과 공감을 자아내는 그의 신념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마탑의 기대주였을 만큼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던 나는 그의 곁에서 계획을 보완해주고 사람들을 관리하면서 그를 보좌했다.

그렇게 조직은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커져갔다.

내 옆에서 같이 일하던 녀석이 처녀가 아닌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머리가 터져 그의 눈알이 내 윗옷의 주머니에 쏙하고 들어왔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미 '처녀!처녀!처녀!'를 외치는 미친놈들한테 둘러 쌓여있었다.

방금까지 자신도 저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미 여자에 대한 분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나를 배신한건데 왜 나는 여자 전체를 증오하고 있었던 거지?

허리가 절로 움츠러들고 손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시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자 이제 우리의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었다."

그가 오연하게 왕좌에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봤다.

셀 수도 없는 검은색 인영들이 보였다.

시발시발시발.

이 미친 조직이 언제 이렇게 커진 거지.

물론 저들중 대부분은 스칼이 받았다.

"처녀를 취하는 그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허나 지금 세상은 어떠한가. 타락하는 세상에 처녀의 수는 점점 줄고 있다. 살 가치가 없는 것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어제도 처녀를 취했다.

처녀­!

멍청이들의 그의 말을 따라서 외쳤다.

시발 여기서 탈출해야 돼.

"처녀가 점점 줄어드는 이 세상은 썩을 대로 썩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매일같이 처녀를 취하는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처녀를 잃은 자들을 다 죽여야 합니다­

누군가가 절절하게 외쳤다.

아마 저 놈도 나와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을까.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본 좌는 생각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처녀가 또 무엇이 있지? 오랜 고민 끝에 본 좌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그의 기운이 퍼져서 공간을 억눌렀다.

인간이 이런 기운을 뿜어내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이미 많은 처녀를 취한 그는 겉잡을 수도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이제 여자의 처녀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갈증이 난다. 단순히 여자의 처녀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 그럼 다른 처녀가 무엇이 있을까. 본좌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 고민끝에 본좌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 이 세상은 멸망한 적이 없다는 것을. 본좌는 이 세상을 멸망시켜서 이 세상의 처녀를 취할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는 힘을 줘서 씹어뱉듯이 말했다.

좌중은 순식간에 미칠듯한 열기에 휩싸였다.

진짜 개 미친 새끼.

뭔 이 세상을 멸망시켜서 처녀를 취한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그가 말하니까 뭔가 진리 같이 느껴졌다.

그에게는 그렇게 만들 힘이 있었다.

"본좌가 이 세상의 처녀를 취할 것이다."

그가 다시 한번 힘주어서 말했다.

와아­!

세상의 처녀를 취하자!

멍청이들이 신나서 따라 외쳤다.

나는 한 번 더 다짐했다.

이 미친 조직에서 탈퇴해서 누구든 저 미친놈을 막아줄 사람을 찾아야 해.

열심히 시선을 돌리다가 은발에 흰색 가면을 쓰고 있는 여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그 여우라면. 저 멍청이들과는 다를 수도 있다.

나는 조용히 여우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내 손짓을 본 여우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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