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수도에 온 집행관
* * *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기 전에 키아나의 눈물을 닦아야 했다.
예전부터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손수건이 생각났다.
아카데미의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날 옷에 음료를 쏟은 아름다운 여학생에게 남학생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건네줘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이야기.
다들 믿지는 않았지만, 많은 남학생들이 남몰래 손수건을 들고 다녔다.
나도 그냥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몰라서 생활비를 짜내서 손수건을 사두었다.
메론빵 10개 정도를 포기하고 샀던 손수건이였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값어치를 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주머니에 넣어뒀다.
뭐 어떻게 보면 절세 미인에게 주는 것이니, 값어치를 다 한 건가.
손수건도 나름 만족할 거야.
주머니에 오래 넣고 다녀서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손수건을 키아나에게 건넸다.
키아나가 머뭇거리면서 내 손수건을 받았다.
"사저. 너무 많이 우는 거 아니에요?"
그만 좀 울고 닦아.
주변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게. 사제 앞에서만 지금 몇 번째인지... 하하 또 못난 모습을 보여 버렸네. 미안해 사제."
키아나가 내게 받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키아나의 눈물을 닦은 손수건이라...
이거 꽤 비싸게 팔 수 있겠는데?
용사 아카데미에는 정신 나간 놈들이 많으니 인증만 할 수 있으면 꽤 값이 나갈 거야.
근데 어떻게 인증을 하지.
"미안할 건 없죠. 뭐 그만큼 사저가 저를 편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니. 저는 좋습니다."
다 닦은 손수건을 받기 위해 키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보같이 따듯하기만 해서
중얼거린 키아나가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나중에 세탁해서 줄게."
키아나가 손수건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아니 세탁하면 가치가 떨어지잖아.
키아나의 눈물이 묻어 있어야 한다니까.
"아니에요! 그냥 제가 세탁하면 되는데!"
"안 돼. 이미 못난 모습은 충분히 보였으니까 내가 세탁해서 줄게."
키아나에게 항변했지만 키아나의 눈은 단호했다.
키아나의 눈물이 묻어 있으면 꽤 값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뭐야?!!"
화장실에서 돌아온 케이트가 대뜸 소리쳤다.
"뭐가?"
쟤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아니! 지금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잖아! 뭐 했어 둘이?!"
케이트가 또 땍땍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케이트의 말에 키아나가 헛기침을 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키아나의 행동에 케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아나가 시선을 돌리며 품 안에 안은 레이피어를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하긴 뭘 해. 볼 일은 시원하게 보고 왔냐?"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귀찮아질 것 같은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화장실 갔다 온 거 아니라고!! 나는 황녀라 화장실 안 간다니까?!!!"
케이트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황녀라 화장실을 안 간다니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저건.
"황녀님... 그런 말은 괜히 백성들에게 위화감을..."
조슈아가 케이트에게 붙어서 귓속말을 했지만, 그 소리가 제법 커서 다 들렸다.
"아니!!! 조슈아! 무슨 소리야! 나 황녀라 화장실 안가잖아!!"
"하지만 황녀님 그런 말은..."
조슈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슈아!!! 왜 그래 정말?! 대가리 박아!"
케이트의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박으라고!"
케이트의 말에 조슈아가 머뭇거렸다.
이렇게 사람 많은 거리에서 자기 호위 기사한테 대가리 박으라니.
황녀라고 갑질하는 거 보소.
"사람의 생리현상은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키아나가 차분한 말투로 케이트를 말렸다.
"넌 또 뭐야! 나 황녀라 화장실 같은 거! 안!간!다!고!"
케이트가 키아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
표적에서 벗어난 조슈아가 안도하며 살짝 뒤로 빠졌다.
"사람이라면 생리 현상은 당연한 겁니다. 저도 화장실을 갑니다!"
차분한 말투로 말하던 키아나가 나를 슬쩍 봤다.
나를 왜 보는 거야.
"너는 딱 봐도 똥쟁이 같이 생겼잖아!! 나는 황녀라 화장실 안 간다니까!"
와 저 새끼 말하는 것 보소.
"똥쟁이라뇨?!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디를 봐서 똥쟁이같이 생겼습니까!"
키아나가 억울한 듯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키아나도 화나게 만들다니 케이트 대단하다 대단해.
"흥! 딱 봐도 똥을 아주 푸짐하게 뿌직뿌직...!"
케이트가 비웃음을 잔뜩 머금었다.
"사람한테 똥 쟁이라니! 무례합니다! 그리고 저는 적당량의 용변을...! 아니 이게 아니라! 아닛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방금 내 말... 못 들은 걸로 해줘 사제."
상기된 얼굴로 대답하던 키아나가 나를 보더니, 말을 멈췄다. 자신이 길거리에서 용변 이야기를 큰 소리로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게 아니라..."
붉어진 얼굴의 키아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키아나는 이미 전투 의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흥! 아무튼 나는 황녀라 화장실을 안 간다고! 알았어!?"
그런 키아나의 모습을 보며 케이트가 만족한 듯 웃으며 주먹을 공중에 휘둘렀다.
키아나를 저렇게 만들다니 어떻게 보면 대단했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비키가 뭔가를 가득 담은 보따리를 메고 나왔다.
"쟤는 또 왜 저러고 있어."
비키가 잔뜩 고개를 숙이고 혼자 중얼거리는 키아나를 가리켰다.
"뭐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 볼 일은 다 끝난 겁니까?"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쉬고 싶다.
"응. 돌아가자 이제."
비키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는 아직 우리 평민이랑 갈 데가 남았는데! 너나 가!"
케이트가 냉큼 나한테 팔짱을 끼면서 소리쳤다.
"나는 돌아갈 건데. 그리고 갈 데가 있어?"
피곤해 돌아가서 쉴 거야.
내 좆같지만 정감가는 침대 위에서 낮잠 잘 거야.
"으응?!! 있지 갈 데!"
케이트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어디인데 거기가."
나는 진짜 갈 곳이 없는데 이제?
"으음... 에일 버드 튀김!!!"
케이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네.
아카데미를 나왔으면 그건 꼭 먹어줘야지.
내가 그걸 깜박하다니.
"아! 에일 버드 튀김! 맞아 그게 있었지. 근데 너 그때는 분명..."
그 귀여운 에일 버드를 왜 먹냐고 나한테 뭐라 하지 않았나?
"그냥! 입맛이 변했어! 그니까 그거 먹으러 가자!! 너는 가! 간다며!"
케이트가 비키에게 손을 휘저었다.
"흐응 우리 변태가 좋아한다니까 나도 궁금하네. 같이 가지 뭐 그럼."
비키가 내 반대쪽 팔에 팔짱을 꼈다.
"간다며! 그냥 꺼지라고!!!"
발작하듯이 케이트가 소리쳤지만 비키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럼 빨리 에일 버드 튀김을 사서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되겠다.
에일 버드 튀김을 잔뜩 산 다음 방에 가서 누워 먹으면 그게 천국이지.
아직 그 자리에 있으려나.
나는 전에 에일 버드 튀김을 팔던 곳으로 향했다.
케이트가 약간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곱게 따라왔다.
뒤를 보니 상태 안 좋아 보이는 키아나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나 똥쟁이 아니야 사제
계속 중얼거리는 말을 들어보니 키아나는 아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이라면 화장실을 가는 것이 당연한데 그게 뭔 대수라고.
근데 키아나의 외모라면 화장실을 안 간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과 관심을 애써 무시하면서 시장 바닥을 지나갔다.
간혹 대놓고 다가와 추파를 던지는 사내들도 있었지만, 조슈아가 살벌한 눈으로 검 손잡이를 잡자 물러섰다.
역시 때로는 무기가 말보다 편하다.
그때 그 청년은 같은 자리에서 열심히 에일 버드 튀김을 팔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향긋한 튀김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안녕하세요."
두 번째 만남이라 괜히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오 그때 그분이시군요! 오늘도!...음."
다행히 나 혼자만의 친근함은 아니었는지 청년도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다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청년이 말을 멈췄다.
"하하. 보기보다 인기가 많으시군요. 부럽습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청년이 살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인기라고 해야 하나.
"인기는 무슨! 그리고 당신! 어떻게 인간이 돼서 이렇게 귀여운 생물을 튀겨 먹을 수가 있어요?!"
"하하하..."
케이트의 따지는 듯한 말에 청년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지가 오자고 해놓고 왜 저러는 거야.
"먹기 싫으면 너는 가던가."
떽떽거리는 케이트를 살짝 밀었다.
"흐음 냄새 괜찮은데? 꼬맹이 너는 가."
그런 케이트를 비키가 이죽거렸다.
"나도 먹는다고! 이 파렴치한 인간들!"
케이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에일 버드 튀김 10개만 주세요."
옆에서 투닥거리는 둘을 무시하고 청년에게 돈을 건넸다.
"넵! 잠시만 기다리세요!"
돈을 받은 청년이 열심히 튀김을 만들었다.
빗소리와 비슷한 에일 버드 튀김을 만드는 소리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누군가 내게 수도의 명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확실하게 에일 버드 튀김이라고 답할 수 있다.
"이 야만인들!!! 미안해! 에일 버드들아 흐어엉."
옆에서 케이트가 혼자 열심히 난리 치고 있었다.
"어이 거기. 몇 개월 정도 된 에일 버드로 튀겨야지 맛있나?"
시정잡배 같은 말투로 비키가 청년에게 물었다.
"하하... 보통 35개월 이내가 가장 쫄깃하고 부드럽습니다."
청년이 열심히 에일 버드 튀김을 만들면서 답했다.
"흐어엉 애기 에일 버드들아 미안해!"
옆에서 케이트가 계속 소리쳐서 귀가 따가웠다.
"아니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럼 가라고!"
조슈아만 없었으면 이미 매콤 주먹을 몇 대 먹여줬을 텐데 아쉽네.
"먹어! 먹는다고!"
어느새 케이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우 시끄러 시발.
마침내 청년이 10개의 에일 버드 튀김을 건네줬다.
나는 받은 에일 버드 튀김을 한 개씩 나누어줬다.
나머지는 다 내 꺼야.
"그러니까 이 소스가..."
비키는 청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내 입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긴장했을 에일 버드 튀김을 먼저 검은색 소스에 부드럽게 찍어서 긴장을 풀어줬다.
에일 버드 튀김을 한 입 베어 문 순간 느껴지는 튀김의 바삭함과 에일 버드 고기의 촉촉함이 어우러진 그 환상적인 맛에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이 맛이야.
이게 음식이지 시발.
"으음..."
미심쩍은 눈빛으로 에일 버드를 보던 키아나가 나를 보더니 결심한 표정으로 한 입 크게 깨물었다.
"오...!"
에일 버드 튀김을 영접한 키아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키아나의 표정이 밝아지자 세상이 좀 더 밝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이 대답이나 해."
"네네?!"
그런 키아나의 얼굴을 넋 놓고 보던 청년이 비키의 부름에 놀라서 대답했다.
나는 남이 먹을까 봐 서둘러 튀김 한 개를 더 입에 집어넣었다.
음 개 맛있어.
"황녀님! 안 드셔도 됩니다!"
"놔! 황녀가 말을 했으면 지켜야지!"
케이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에일 버드 튀김을 집어서 소스에 찍었다.
"...황녀님!"
그런 케이트를 조슈아가 서글픈 눈빛으로 쳐다봤다.
무슨 시발 튀김 하나 먹는데 저 난리를 피는 거야.
그럴 거면 먹지 말던가.
내가 하나 더 먹게.
"으흑!"
케이트가 마침내 힘차게 에일 버드 튀김을 베어 물었다.
"으허어엉! 너무 맛있어! 미안해 에일 버드들아! 나도 야만인인가 봐! 으흑!! 맛있어! 으허엉 에일 버드 개 맛있어!"
잠깐의 정적이 지난 후 케이트가 시끄럽게 오열했다.
"황녀님!! 혼자 그런 큰 짐을 지게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먹겠습니다!"
조슈아가 그런 케이트를 따라서 에일 버드 튀김 하나를 들어서 입에 넣었다.
"에일 버드 튀김..."
키아나가 조용하게 읊조리면서 튀김을 하나 더 집었다.
"그러면 이 양념은 뭐가 들어가는..."
비키는 아직도 열심히 청년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사업 비밀임에도 불구하고 비키의 큰 가슴에 정신이 팔려 술술 발설하고 있었다.
그래 비키 정도의 가슴이면 어떤 남자라도 비밀을 실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변의 소음들을 애써 무시하고 에일 버드 튀김 하나를 더 집었다.
이번에는 약간 매콤한 양념으로...
에일 버드 튀김을 한 입 베어 물려고 하는 순간.
어느새 우리의 바로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만 뭐 좀 묻겠습니다."
말을 묻는 사람은 검은 로브에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가면인데...
그 시발 미친 납치범 새끼들이잖아!
이 미친 빡대가리 케이트 새끼 저번에 그 난리를 치고도 또 기어 나오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거 아니야.
내가 시발 저 빡대가리랑 왜 또 같이 다니고 있었지. 나도 빡대가리인가?
그래도 지금은 저번과는 다르게 비키와 키아나까지 있었다.
비키와 키아나 정도면 쉽게 당하지 않을 거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일단 검 손잡이를 잡았다.
"뭡니까."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조슈아가 냉큼 케이트 앞을 막고 검을 뽑았다.
키아나도 굳은 얼굴로 검 손잡이를 잡았다.
"뭔가 이상한 반응이군요?"
흰 가면의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쓰고 계신 가면이 제가 알던 가면과 비슷하게 생겨서 말입니다."
조슈아에게서 날카로운 기세가 일어났다.
나는 조슈아가 마냥 호구인 줄 알았는데, 저 모습을 보니 나름 강한 듯했다.
그래! 명색이 황녀 호위 기사인데 강해야지!
"아! 이 가면이요. 이건 저희 종교의 표식인데 아신다니 정말 신기하군요. 혹시 저희 종교와 관계있으신 분들인가요? 그렇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흰 가면의 사내의 목소리가 약간 들뜬 듯 했다.
종교라고 하니 그때 케이트의 피로 제사를 지내려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나서 늑대들의 등장.
그게 종교 행사였나.
그냥 미친 야만인들인 줄 알았는데.
"굳이 쓸데없이 말을 나눌 필요는 없지. 잡아서 조사하면 되니까."
조슈아가 딱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디선가 기사들이 열 명가량 조용히 튀어나와서 흰 가면 사내를 포위했다.
뭐야 시발 어디 있었던 거야.
저번 사건 이후로 케이트의 호위가 강화됐을 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종일 같이 다니고도 눈치채지 못한 건 충격이었다.
키아나와 비키의 표정을 보니 저 둘은 잠복하고 있던 기사들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괜히 나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것 같아서 실력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케이트의 놀란 표정을 보니 정작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저 빡대가리랑 내가 동급이라니 회의감이 더 짙어졌다.
일단 나도 알고 있던 것처럼 표정 관리를 했다.
"저는 그저 질문 하나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이라니. 혹시 죄를 저지르신 분들 이십니까?"
흰 가면의 사내의 고개가 한 바퀴 더 돌아갔다.
뿌득
"그럼 정말 기쁠텐데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사내의 목에서 났다.
으 시발 소름 돋아.
사내를 포위한 기사들도 그 모습에 놀란 듯 움직임이 멈췄다.
"재밌어 보이는 걸 하네. 그래. 질문이 뭔데?"
비키가 에일 버드 튀김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말이 통하시는 여성분이 있어서 다행이군요."
흰 가면의 사내가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과장되게 가면을 만졌다.
"제 질문은 이거입니다."
큼큼 하고 흰 가면의 사내가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 아름다우신 1등급 그리고 그 이상 등급의 미인 분들 중에 혹시."
흰 가면의 사내가 과장되게 키아나와 케이트, 비키 그리고 조슈아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처녀가 있으신가요?"
흰 가면의 사내가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친 시발 뭐라는 거야.
내가 잘못 들었나 ?
주변의 멍한 반응을 보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듯 했다.
"뭐해?! 저 새끼 죽여! 죽이라고! 빨리! 저 개새끼 죽여!!!"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케이트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흰 가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시발 그러면 너무 티 나잖아.
***
"스칼."
동굴을 나오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스칼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놀랐다는 것을 티 내기에는 자신의 직위가 너무 높았다.
스칼은 얼굴에 잔뜩 힘을 줘서 놀람을 애써 가라앉혔다.
"여우"
짐짓 목소리를 내리깔고 스칼이 말했다.
스칼의 뒤에는 어느새 흰 가면을 쓴 여우가 서 있었다.
아예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칼은 괜히 목이 따끔거렸다.
자신도 나름 높은 경지의 마법사인데...
"아까 그건 무슨 뜻이지?"
어떤 사내라도 따라갈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로 여우가 말했다.
"큼... 일단 여기는 이야기 하기 좋은 장소가..."
"말해 아무도 없으니까."
여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여우가 없다고 하면 없는 거겠지.
"저는 이 미친 계획을 멈추고 싶습니다."
자신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빌면서 마치 고백하는 소녀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이 계획에 가장 크게 기여한 스칼 네가? 이건 뭐지? 함정인가?"
스칼의 목에는 어느새 여우의 날카로운 단검이 겨눠져 있었다.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스칼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제발 물론 쓸데없이 높은 지위때문에 밖으로 티 낼수 없었다.
"그냥 머리가 한 번 깨졌다고 생각하십쇼. 진짜 멈추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여기에서 제일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요."
말할 때마다 살짝씩 부딪히는 단검에 따가웠지만 애써 참았다.
"그 스칼이 도망가고 싶어 한다니...믿기 힘드네."
여우가 단검을 회수했다.
스칼이 손수건을 꺼내 목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진짜 이 짐승같은 새끼들
속으로 욕지기가 치솟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냥 옆에 있던 놈의 머리가 날라가니까 제 머리도 날라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일단 지금 집행관 그 녀석이 수도에 가 있으니까..."
집행관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 스칼의 목소리가 떨렸다.
"집행관 그 녀석이 수도에는 왜?"
여우의 목소리에서 잔뜩 불쾌함이 느껴졌다.
그 불쾌함을 스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집행관 그 녀석은....
상상만으로도 두렵고 짜증났다.
"1등급 이상의 처녀를 찾아 오겠다더군요."
집행관 그 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깊은 곳에서 공포감이 올라왔다.
살기 위해서는 집행관 그 미친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일을 벌여야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