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굉장히 친절한 수녀님
* * *
"이거를 저희가 다 치워야 되는 겁니까?"
프랭크가 코를 손으로 잡고 인상을 찌푸린 채 불평했다.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이 새끼야. 그냥 치우기나 해!"
이런 짬 처리가 짜증이 났지만 뭐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찰리는 혹시 몰라서 코에 수건을 박아두고 그 위에 면까지 둘렀는데도 소용없었다.
도로 가득히 풍기는 피비린내는 아무리 코를 막아도 가릴 수가 없었다.
약간의 어지럼증에 찰리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우웩
피비린내에 못 이겨 막내 하나가 토악질 하고 있었다.
"저저 시발 치우려고 왔더니 오히려 일거리를 만들고 있네. 저 개새끼 빼서 기합 줘!"
이럴 때는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서로 치우기 싫어서 뒤로 뺀다는 것을 꽤 오랜 병사 생활을 한 찰리는 알고 있었다.
막내 하나를 그 옆에 있던 병사가 끌고 나갔다.
근데 저 새끼 웃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확실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빨리 빨리 치워라. 안 그러면 점심도 여기서 먹어야 한다 우리."
짝 찰리가 박수를 치면서 주위를 환기했다.
우웩
병사들이 헛구역질하면서 움직였다.
찰리는 그나마 자신이 이 중에서는 병사 생활을 오래 해서 지휘만 해도 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아마 자신도 가까이 가면 못참고 토악질을 할 게 분명했다.
"근데 어떻게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할 수가 있습니까?"
자신 다음으로 짬이 찬 프랭크가 은근슬쩍 자신의 옆에 붙어서 담배를 하나 건넸다.
그래 이 새끼 정도면 직접 치울 짬은 아니지.
마스크를 올려서 프랭크에게 받은 담배를 물었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별 차이 없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마스크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 같았다.
"저번에 황녀 납치했다는 놈들 중 한 명이 다시 나타났다던데. 후"
코를 막은 상태에서 담배를 피우니 역겨운 냄새가 느껴졌지만 애써 참았다.
"한 명이요? 그럼 한 명이 다 죽인 겁니까?"
프랭크도 마찬가지였는지 인상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아니. 죽은 건 황실 기사단 4명이 다라던데."
"저런 지옥도가 4명이 죽은 거로 가능한 겁니까? 최소 수천 명은 죽은 것 같은데."
프랭크가 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그 한 명이 괴물처럼 재생력이 엄청났다더군."
다 피운 담배를 대충 바닥에 짓이겨 껐다.
이것도 이따 막내한테 치우라고 해야겠어
"크흠 그러면 저게 한 명의 피라는 겁니까?"
프랭크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찰리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곳부터 보이지 않는 곳까지 빨간 페인트로 빈틈없이 칠한듯한 거리.
빼곡하게 널브러져 있는 사람의 팔과 다리들.
그 팔과 다리들이 아예 같은 모습이라 더욱 기괴하게 느껴졌다.
아마 지옥이 있으면 지금 이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자세히 보고 있으니 헛구역질이 다시 올라왔다.
도대체 저거를 우리한테 어떻게 치우라는 건지.
윗 놈들 사고방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 계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라도 보내주던가.
쯧
우웩!
눈치 보던 병사 하나가 구역질을 했다.
구역질하고 슬쩍 이쪽 눈치를 보는 것을 보니 저 새끼는 안 되겠네.
"야! 너는 니가 토한것도 같이 치워!"
쳇
저 새끼 맞선임 누구야!
"저 정도면 오히려 재생되는 게 불운으로 작용한 거네요."
카악 퉤
"그렇지. 뭐 초반에는 좋아했다던데. 어느 순간부터는 울면서 빌었다더군. 물론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빌어요? 누구한테요?"
"저게 그 용사 아카데미 학생 중 한 명이 한 일이라더군."
"용사 아카데미 학생이 원래 이 정도로 강했습니까? 제가 아는 중급 용사도 이 정도는 못할 텐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용사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해봤자 용사 지망생 아닌가. 뭐 여튼 천재로 유명하긴 하더라고."
"그래서 빌었는데요?"
"대꾸조차 안 했다더라고. 그렇게 한참이나 그놈을 분해하고 자르고 토막 내고 으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
"저도 듣는 데 소름이 쫙 올라왔습니다."
프랭크가 과장되게 자신의 팔을 보여줬다.
꽤 다부진 팔 위에 프랭크의 말처럼 닭살이 올라와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부수면서 다니니까 황실 기사단이 출동하고 수도에 비상이 걸리니까"
찰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원래 중요한 순간에는 살짝 멈췄다가 말하는 것이 몰입감을 올리는 법이다.
"그래서요?"
프랭크가 대답을 재촉했다.
"짠 하고 사라졌다더군. 둘 다."
"에이 그게 말이 됩니까? 무슨 드래곤도 아니고 공간 마법을 그렇게 쓴다니. 그거는 막내한테 이야기해도 안 믿습니다."
프랭크가 열심히 구역질을 하는 얼빵한 병사 한 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도 몰라. 그냥 들은 대로 이야기하는 거라니까. 그리고 내가 니한테 거짓말 쳐서 얻을 게 뭐 있냐?"
어어
치우던 병사 하나가 핏물위에 그냥 혼절해버렸다.
"아이 씨! 저 얼빵한 새끼 빼내고 지원 더 요청해! 이거 우리끼리 안 되겠다! 전문가 불러!"
아무래도 이번 작업은 굉장히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찰리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급하게 뛰어가다가 피 위에 엎어지는 병사를 보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문가 불러!
찰리가 다시 한번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
"그러니까! 왜 못 들어가게 하냐고! 니가 뭔데! 이 건방진 수녀야!"
밖에서 들리는 큰 소음에 정신이 돌아왔다.
등 뒤로 느껴지는 딱딱한 침대의 촉감.
익숙한 느낌의 침대였다.
아마 성당 내에 입원한 방이겠지.
여기를 이번 학기에만 벌써 몇 번째 오는 거야.
몸을 좀 더 조심해야겠어.
주제 넘게 나대지 말고.
눈을 떠보니 내 예상이 맞았다.
익숙한 흰색 천장과 소박한 물품들.
전보다는 방이 커진 것 같았지만 성당이 확실했다.
"에이든 님은 지금 절대 안정을 취해야합니다. 누구도 방문할 수 없습니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내가 뭘 한데?! 괜찮은지 얼굴만 본다니까! 비켜! 나 황녀라고! 목 뎅겅하고 싶어?!"
그리고 저 땍땍거리는 건 케이트겠지.
그나저나 수녀한테 목 뎅겅이라니.
평소처럼 땍땍거리는 것을 보니 케이트도 무사한 모양이었다.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며 화들짝 놀랐다.
저 빡대가리 때문에 지금 내가 다쳤는데 왜 안심하는 거야 시발.
"에이든 님에게는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해요. 그리고"
뒷 내용은 안드레아가 작게 말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너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따구로 말하는 거야!? 그게 내가 일부러 그런 거야!?"
아우 시끄러워.
땍땍거리는 케이트의 목소리가 문을 넘어서도 생생하게 들렸다.
"그게 황녀님의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저는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안드레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 착하던 안드레아가 저렇게 차갑게 말할 수 있다니.
의외였다.
"이익! 너 나중에 봐!"
케이트의 마지막 땍땍과 함께 조용해졌다.
문이 조용하게 열리며 안드레아가 들어왔다.
들어온 안드레아가 딸깍 하고 문을 잠궜다.
왜 문을 잠그는 거지?
"아 정신을 차리셨군요. 에이든님"
안드레아가 단아하게 웃었다.
"예. 뭐 하하"
대화를 훔쳐 들었다는 생각에 멋쩍게 웃었다.
"몸은 어떤가요? 일단 외부적인 상처는 다 치료했는데.."
안드레아가 내 옆에 놓인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일단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딱히 아픈 곳도 없는 것 같고."
딱히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다행이에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입원하셔야 해요! 저번처럼 도망가지 마시고!"
안드레아가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그... 그게 그때는 도망이 아니라 몸이 괜찮아져서"
진짜 멀쩡했다니까 그때는 몸이.
"그래도 안 돼요. 제 신성력으로 하는 치료가 만능은 아니라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안드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단호한 안드레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드레아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 이유가 있겠지.
안드레아가 다시 단아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았다.
"이 정도는 제가..."
"제가 할게요. 에이든 님은 환자니까요."
가까이 붙은 안드레아의 감촉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아는 수건으로 부드럽게 내 얼굴을 닦았다.
안드레아가 내게 너무 가깝게 붙어서 숨결과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을 의식하게 되자 점점 더 깊게 의식하게 됐다.
"에이든 님? 얼굴이 붉어졌는데 괜찮아요?"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던 안드레아가 손등으로 내 볼을 만졌다.
"아 살짝 더워서요"
진정시키기 위해 정신을 애써 돌렸다.
"아 잠시만요."
안드레아가 일어나서 옆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맑은 공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들으니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후하
"근데 혹시 제가 쓰러진 다음에 어떻게 된 지 들으셨습니까?"
루나가 나타났으니 어떻게든 해결했을 것 같은데.
"저도 전해 들은 거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안드레아가 다시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에이든님이 기절하고 난 뒤에 루나 님이 나타나서 전투를 벌이셨다고 들었어요. 계속 싸우다가 어느 순간 둘이 같이 사라졌다고... 그 뒤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안드레아가 수건에 물을 적셔서 내 얼굴을 다시 닦았다.
근데 수건 적신 물이 성수인가?
미묘하게 성수 냄새가 나는데.
이 성당은 모든 물을 다 성수로 쓰는 건가.
뭐 루나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비키나 키아나같은 다른 분들은?"
얼굴에 닿은 수건이 시원했다.
"다들 무사하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성당에 안 오신 것을 보니까 다치지 않으신 것 같아요."
안드레아가 단아하게 웃었다.
시발 그럼 또 나만 다친 거야?
좆밥 억울해서 살겠나.
'억울하면 강해져야지. 소년'
그건 나도 알아 시발.
누군 안 강해지고 싶어서 안 강해지나.
'강해지고 싶나?'
당연하지.
'그렇군. 크흡'
왜 웃냐.
"에이든 님은 본인 몸부터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예?"
"매번 남을 위해 몸을 던져서 이렇게 다치시잖아요."
안드레아가 약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남을 위해 몸을 던진다니...?
그랬었나?
"에이든 님의 올바른 성품은 알지만 그래도 좀 더 본인을 생각하시는 게..."
안드레아가 부드러운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안드레아의 손길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 성품이 너무 남을 생각해서 손해 보는...
'크흡 참으려고 했는데, 듣고 있기 좀 힘들구만. 하하.'
그냥 좀 분위기 맞춰봐 시발.
"에이든 님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요."
묘한 감정을 담은 눈빛으로 안드레아가 쳐다봤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안드레아는 나를 걱정해줄까?
표정을 보니 착해서 걱정해줄 것 같기도 했다.
"하하. 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할게요."
맞아 내가 제일 중요하지.
내 얼굴을 닦던 수건을 안드레아가 옆에 두더니 새로운 수건을 꺼냈다.
새로운 수건에 물을 적셔서 내 상의 속으로 손을 넣었다.
"에?!"
너무 당황해서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아 몸도 닦아야 되니까. 가만히 있으세요."
안드레아가 붉어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이 정도는 제가 할게요!"
아무리 나라도 안드레아 같은 미인에게 몸을 닦게 할 수는 없었다.
"에이든 님은 환자이니까 가만히 있어요!"
안드레아가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도..."
"그냥 가만히 있으시면 돼요. 이건 제가 할 일이니까요."
안드레아의 단호한 태도에 더는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원래 이렇게까지 관리를 해주는 건가?
수녀가 보기보다 힘든 직업이네.
내가 저항하지 않자 안드레아가 부드럽게 내 몸을 닦기 시작했다.
배와 등 그리고 수치스러운 겨드랑이까지 안드레아는 붉어진 얼굴로 열심히 닦았다.
이렇게까지 자기 일에 진심이라니.
이 얼마나 참된 수녀인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을 애써 눌렀다.
저렇게 성실한 수녀님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안드레아가 내 상체를 꼼꼼히 닦은 다음 수건을 치웠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아쉬움과 다행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안드레아의 손길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드레아의 손이 내 바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안드레아를 쳐다봤다.
더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붉어진 안드레아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요. 아래쪽도 닦아야 하니까."
내 시선을 느낀 안드레아가 나를 쳐다보며 속삭였다.
그 묘한 눈빛과 부끄러워하는 안드레아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하체에 힘이 들어갔다.
안 돼! 이 녀석아 지금 힘을 내면!
물론 상남자의 결정체인 그 녀석을 말릴 수 없었다.
안드레아가 약간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수녀한테 흥분하다니.
진짜 나는 구제 불능인가 봐.
수치심을 느끼며 안드레아의 손을 빼기 위해 잡았다.
그런 내 손을 안드레아가 반대쪽 손으로 잡아서 부드럽게 밀었다.
안드레아가 붉어진 얼굴과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며 단아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안드레아의 달콤한 숨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괜찮아요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물론 더이상 안드레아를 말릴 이성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안드레아에게 몸을 맡겼다.
제가 억지로 시킨 거 아닙니다. 신님.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신앙심이 투철한 수녀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흣
부드러운 안드레아의 손길을 느끼며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오예! 아니 오해! 하지 마세요 신님.
제가 시킨게 아닙니다.
괜찮아요?
들뜬 목소리로 물어보는 안드레아의 목소리에 격렬하게 끄덕였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아마?
***
뜨거운 불길에 잠시 눈을 떴을 때, 에이든의 듬직한 뒷모습이 보였다.
납치당했을 때처럼 에이든은 나를 위해 다시 한번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던 왕자님 같았다.
어릴 적 동화책을 읽을 때, 항상 나는 공주님이 왜 남한테 구해져야 하는지 불만이었다.
그냥 내가 다 때려 부술 수는 없나?
커가면서 느꼈다.
혼자 다 부숴버릴 수는 없었다.
물론 아랫것들을 시켜 적당히 부숴버릴 수는 있었다.
황녀인 내가 못 부수는 것은 몇 가지 없었다.
에이든이 느릿하게 검을 뽑았다.
화염을 검으로 막으려 하는 멍청한 에이든의 모습에 나는 말리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멍청한 에이든 도망가야지! 그걸 왜 막으려고 해.
그렇지만 이기적인 나는 에이든이 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모습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이 가득 찼다.
에이든과 함께라면 죽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마침내 화염이 우리 쪽을 덮쳤다.
화염에 휩싸이기 전에 에이든이 검을 느리게 내려쳤다.
에이든의 검을 따라 화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모습이 마치 전설에 나오는 용과 싸우던 왕자님 같아서 머리가 멍해졌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열기 때문인지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까 먹은 에일 버드 튀김이 잘못 됐는지,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에이든이 화염을 다 베어내었을 때, 머리를 가득 채운 어지러움에 정신을 잃었다.
공주를 구하러 온 왕자님.
왜 공주님이 스스로 탈출하지 않고 왕자님을 기다렸는지.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에이든을 찾으러 나왔다.
옆에 있던 수염이 길게 난 노인이 말렸지만 시끄러운 주둥이에 주먹을 꽂아서 조용히 시켰다.
역시 말보다는 주먹이 빨라.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건방진 수녀가 문을 막고 있었다.
들어가려고 하자 건방진 수녀가 나를 막았다.
'에이든 님이 황녀님 때문에 또 위험해졌잖아요. 에이든 님을 생각해서라도 좀 거리를 두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 수녀 나부랭이가 나에게 말하는 꼬라지가 어이가 없었다.
감히 일개 수녀 주제에 황녀인 나한테 그렇게 말해?
뺨을 때려버리고 싶었지만, 에이든의 병실 앞이라서 참았다.
나중에 꼭 뺨을 갈겨버릴 거야.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아니 내가 에이든을 일부러 위험에 빠뜨린 거야?
그리고 심지어 이번은 나 때문이 아니라고.
나는 처녀가 아니라니까?! 이미 내 처녀는!
다시 그 날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쉬고 있는 에이든을 방해할까 봐 애써 참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 성질을 참은 날이었다.
운 좋은 줄 알아 건방진 수녀.
자꾸 수녀의 말이 거슬렸다.
내가 에이든을 위험에 빠뜨렸다니.
에이든의 뒷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사실 어느 정도 수녀의 말도 맞았다.
내가 좀 더 힘이 있었으면.
에이든이 그렇게 위험해질 일은 없었을 거야.
이대로는 안 돼.
다른 애들을 때려 부수기 위해서는 힘이 더 필요했다.
그 쓸모없는 이름만 황실 기사단인 놈들 말고.
이 반푼이들.
"황녀님!"
옆에서 멍청한 조슈아가 나를 붙잡았다.
"짐 챙겨."
아무래도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게 낫겠지.
할아버지에게 들을 잔소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네?"
조슈아는 얼마나 멍청한지 내 말을 한 번에 알아듣는 법이 없었다.
"짐 챙기라고!! 이 멍청아! 할아버지 보러 가게!"
"그분을요? 하지만 황녀님께서는 그분을 피하기 위해..."
"좀 그냥 챙기라면 챙겨 이 멍청아!!!"
내 고함에 조슈아가 황급히 움직였다.
꼭 소리를 쳐야 알아들어요 진짜.
답답한 놈들!
에이든 좀만 기다려.
내가 쓸만한 놈들로 데리고 올게.
에이든이 머무는 성당을 한 번 더 보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