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빗치 수녀.
* * *
"그럼 내일 저녁 6시에 아카데미 정문에서 만나요."
스칼렛이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인사했다.
"네. 그럼 그때 봐요."
부드러운 스칼렛의 태도에 나도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럼 너도 잘 지내렴."
스칼렛이 안드레아에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드레아는 그런 스칼렛을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 봤다.
스칼렛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면서 방에서 나가자 이유 모를 긴장감이 옅어졌다.
"그... 에이든 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 에이든 님이 아직 환자라서 약간 걱정됩니다."
스칼렛이 나가자 안드레아가 내게 바짝 붙었다.
과보호라니까 그거.
나 이제 좆밥 아니라니까.
"괜찮아요. 몸은 스칼렛님 치유 덕분에 완전 멀쩡한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안드레아에게 웃어줬다.
내가 웃자 안드레아가 따라서 단아하게 웃었다가 다시 인상을 썼다.
한참이나 입을 달싹이면서 인상을 썼다 풀었다 하던 안드레아가 내게 좀 더 가까이 붙어서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저 스파게티는 신성 아카데미 시절에 소문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붙은 안드레아의 숨결이 느껴졌다.
근데 스파게티가 아니고 스칼렛이라고 하지 않았나?
소문이라니까 괜히 궁금했다.
"소문이요?"
작은 안드레아의 목소리에 괜히 내 목소리도 작아졌다.
"네. 제 입으로 말하기 좀 그런 소문이라..."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괜히 안드레아가 저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했다.
"괜찮습니다. 뭔데요?"
내 말에 안드레아가 약간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키아나를 힐끔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수녀인데도 성관계를 너무 좋아한다고... 심지어는 선생들과도 여러 번 하다가 걸려서 제적도 당했었다고 들었습니다. 에이든 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순수하고 깨끗한 에이든 님이 그런 더러운 여자한테 더럽혀질까 걱정됩니다."
안드레아가 말하다가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 그 수녀가 성관계를 좋아한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수녀치고는 눈매가 매우 요염했던 것 같았다.
그 고양이 눈매가...
그런 빗치 수녀가 내일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 거야?
그럼 그 저녁이...
수녀복 밖으로 언뜻 드러난 스칼렛의 날씬한 몸매가 생각이 나서 괜히 하체에 힘이 들어갔다.
입안에 잔뜩 고인 침을 소리 안 나게 삼켰다.
빗치 수녀.
오히려 좋아!
고개를 돌리니 안드레아가 여전히 걱정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수한 수녀인 안드레아는 그런 빗치 수녀랑 내가 저녁을 단둘이 먹는다는 사실이 못내 걱정스러운 듯했다.
빗치 수녀...
스칼렛의 요망한 눈웃음이 생각났다.
나는 자꾸 헤실거리는 입꼬리를 힘주어서 내렸다.
"아 알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미 그녀랑 약속해서..."
왜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지.
다시 입꼬리를 힘주어서 내렸다.
"네... 이미 약속을 했으니 어쩔 수 없죠."
안드레아가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후
안드레아가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안드레아가 단아하게 웃고 인사했다.
"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안드레아님."
안드레아가 방문을 잡은 채로 멈추어서 나를 돌아봤다가 단아하게 웃어주고 나갔다.
방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내일 그 빗치 수녀와 내가 저녁을 같이 먹는다니.
그래도 스테이크가 낫겠지?
저번처럼 와인 살짝이랑...
"...사제"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키아나가 안드레아와 같이 나간 줄 알았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스칼렛과의 약속을 상상하던 나는 괜히 드는 창피함에 헛기침했다.
눈을 뜨니 키아나가 슬픈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꼭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게. 걱정하지마 사제."
키아나가 가까이 다가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뜬금없는 키아나의 헛소리에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믿음직스럽지 않은 사저지만... 힘들면 나한테 언제든지 말해도 돼. 내가 꼭 사제를 지켜줄게."
키아나의 아름다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뜬금없이 애절한 연극의 마지막 장면으로 급발진하는 키아나를 나는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메론빵을 언제 마지막으로 바쳤었지?
키아나가 메론빵을 못 먹어서 미친 것이 분명했다.
살면서 내가 본 어느 모습보다도 아름답게 키아나가 미소 지었다.
웃는 키아나의 눈가에 맺힌 투명한 눈물이 키아나의 고운 볼을 타고 흘렀다.
내 뺨을 쓰다듬는 키아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 뺨을 때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건가?
"그러니까 너무 혼자만 힘들어하고... 참지 말고 나도 있으니까... 알았지?"
키아나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건.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고개를 끄덕이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이 되니까.
그런 나를 본 키아나가 밝게 웃으며 내 얼굴을 끌어안았다.
상황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키아나의 가슴을 느끼며 만족했다.
그래 얘도 원래 정상은 아니니까.
그럴 수 있지 뭐.
"그리고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말고 사제. 좀 더 본인을 생각해도 돼."
키아나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도 그렇긴 해.
지금까지 내가 너무 착하게 살기는 했지.
'크흠'
분위기 깨지 말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사저."
잠깐동안 나를 안고 있던 키아나가 내게서 떨어졌다.
"그럼 푹 쉬어."
키아나가 아름답게 미소 짓고는 방에서 나갔다.
키아나의 가슴 부드럽고 말랑말랑했지.
에이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방문을 나서는 키아나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
'딸꾹'
익숙한 무게감에 잠에서 깼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루나겠지.
눈을 뜨자 내 배 위에서 웅크린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루나가 보였다.
이런 소름 끼치는 상황이 익숙해지다니.
나는 익숙하게 손을 들어 그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루나의 입꼬리가 기분 좋은 듯 올라갔다.
처음에는 이런 루나가 무서웠지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이상하기는 해도 루나는 절대 나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루나는 이상하기는 해도 나를 지켜주면 지켜줬지 내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덕분에 루나를 대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그래 이상해도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되니까.
부드러운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루나의 얼굴에서 피곤함이 보였다.
"피곤해?"
자다가 일어나서 말하니 목이 잠겨 있었다.
"응응. 그래서 충전하러 왔어."
루나가 배시시 하고 작은 꽃처럼 웃었다.
그래 충전.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 천재 소녀가 하고 싶다면 하고 가야지.
"저녁은 먹었어?"
루나가 눈을 깜박이지 않고 내게 물었다.
저녁을 안 먹었지만, 짙은 피로감때문에 배가 하나도 안 고팠다.
안 먹었다고 하면 이번에는 얘가 뭐를 들고 올지 모르니까...
그냥 대충 먹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루나가 짧은 팔을 쭈욱 내밀어 내 머리를 유리잔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루나는 내가 정말 잘했다는 듯 밝게 웃고 있었다.
애도 아니고 밥을 먹었다고 칭찬을 받으니 괜히 느낌이 이상했다.
그런 루나의 밝은 미소를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루나는 왜 내게 이러는 걸까.
누구도 관심이 없던 나였는데.
왜 나였을까.
어쩌면 실력이 늘어남에 따라 내 담력도 커진 것 같았다.
전에는 루나에게 질문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루나"
나는 무거운 입술을 움직여 루나를 불렀다.
"응응응"
루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루나는 내가..."
막상 물어보려니까 뭐라고 물어볼지 고민됐다.
내가 왜 좋아?
루나가 나를 좋아하는 걸까.
객관적으로 보면 좋아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저녁도 사주고.
내가 위험할 때 항상 구하러 나타나고.
내 과제도 대신해 줬으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 표현들이 이상하기는 해도 말이야.
근데 내가 저런 미인한테 '내가 왜 좋냐?'라고 물어보는 게 이치에 어긋나는 일 같았다.
루나가 풋하고 웃으며 '내가? 너를?' 하고 대답하면 정말 자살하고 싶을 것 같은데.
"응응응?"
내가 뒷말을 말하지 않자 루나가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와서 독촉했다.
루나의 얼굴은 이제 내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달콤한 루나의 숨결이 맡아졌다.
근데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왜 좋아?"
그런 루나의 독촉에 나도 모르게 뒷말을 뱉어버렸다.
말을 하자마자 후회했다.
미친 시발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얼굴에 열이 확 올라왔다.
내 질문에 루나가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왜? 왜? 왜?
루나가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질문을 한 게 후회됐다.
미친 내가 뭐라고 한 거야.
"아냐 내가 잘못..."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다급히 말을 잇는데 루나가 내 말을 잘랐다.
"그냥 에이든이라서? 이유는 없어. 그리고 좋아하는 거 아니야."
루나가 갑자기 정색하고 대답했다.
으악 시발 개 부끄러워.
좋아하는 게 아니라잖아.
병신 에이든 진짜.
수명의 반을 바쳐서라도 조금 전으로 돌아가 내 질문을 취소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거야. 나는 에이든을. 아니 사랑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해."
루나가 어느 때보다도 밝게 웃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달빛이 루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췄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치 가을밤에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워서 꾸는 포근하고 달콤한 꿈 같이 느껴졌다.
'사랑해.에이든 이제 절대 떨어지지 말자.'
문득 루나와의 첫 만남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첫 만남 때부터 사랑한다고 했었지 얘는.
걱정하고 있던 마음이 우스워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연모? 아니야 부족해.
흠모? 아니야 이상해.
사랑으로는 부족한데...
루나는 그 이후로 한참이나 내 위에서 이런저런 단어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나중에는 루나가 이상한 외계어들까지 입에 올렸다.
그런 루나를 보며 한참이나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쓰다듬자 루나의 중얼거림이 점점 작아지고 루나의 숨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작은 루나에게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따뜻함에 나도 다시 눈을 감았다.
***
다음날도 입원해야 해서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었다.
밖에 나가서 달리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안드레아가 극구 만류했다.
갑자기 단호해진 안드레아의 태도에 포기하고 그냥 침대에 누워있었다.
점심 때쯤 안드레아가 좆같은 성당 스프를 먹여주기 위해 들어왔다.
내가 먹을 수 있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아기 새처럼 안드레아가 먹여주는 맛없는 성당 스프를 먹었다.
내게 스프를 먹여주는 안드레아는 전보다 더 내게 가까이 붙었다.
붙은 정도가 아니라 안드레아의 가슴이 내게 계속 비벼지고 있었다.
자꾸만 느껴지는 그 부드러운 느낌에 나는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순수한 수녀에게 또 저번처럼 그런 짓을 시킬 수 없었다.
내게 스프를 다 먹여준 안드레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단아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나갔다.
오늘은 안드레아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스칼렛과 약속한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다행히도 안드레아와 마주치지 않고 성당에서 나올 수 있었다.
기숙사에 들러 환자복을 벗고 나름 괜찮은 옷들로 갈아입었고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밖에서 먹으려고 나가는 건가.
약속 시간이 한 5분 정도 지났을 때, 누가 나를 콕콕 찔렀다.
기다리느라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돌아봤다.
스칼렛이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근데 정말 스칼렛은 빗치 수녀가 맞는지 그 옷차림이 아주 바람직했다.
가슴골이 훤히 보일 정도로 파인 얇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원피스는 발목까지 올 정도로 길었지만, 다리에 딱 붙어 있어서 스칼렛의 날씬한 몸매가 잘 드러났다.
오히려 훤히 드러난 다리 보다 저렇게 딱 붙게 입은 것이 묘하게 더 야시시한 느낌을 풍겼다.
스칼렛을 보자마자 짜증 나서 구겨져 있던 내 인상이 누군가가 힘을 줘서 푼 것처럼 쫙 풀렸다.
"미안해요 옷 고르다가 좀 늦었어요."
스칼렛이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그런 스칼렛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있었다.
"하하. 저도 방금 왔어요. 딱 맞춰 오셨네요!"
나도 모르게 너무 환하게 웃어버렸다.
풋
그런 내 모습에 스칼렛이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크흠.
너무 바보 같이 웃었나.
괜히 부끄러워 헛기침했다.
나도 모르게 스칼렛을 다시 한번 위아래로 흞었다.
다시 봐도 너무 바람직한 의상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스칼렛이 자신의 가슴골 부분을 손으로 슬쩍 가렸다.
"왜요? 이상해요? 이게 제일 유행하는 거라 했는데..."
스칼렛이 더 붉어진 얼굴로 작게 말했다.
"아니요! 그냥 너무 잘 어울려서요. 하하"
그런 스칼렛의 반응에 다시 한번 바보 같이 웃었다.
"저 배고파요. 어서 가죠!"
스칼렛이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 팔에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내 오른팔에 스칼렛의 부드러운 가슴이 비벼졌다.
아아 빗치 수녀.
이 얼마나 바람직한 단어인가.
"어떤 음식이 좋아요?"
스칼렛과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음 저는 음식을 가리지 않아서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에이든 님 먹고 싶은 거로 먹어요. 저는 뭐든 다 좋아요"
스칼렛이 요망한 눈웃음을 지었다.
뭐든 다 좋아요
스칼렛의 마지막 말이 내게 묘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얼굴 표정이 바보처럼 풀렸다.
스칼렛이 웃을 때마다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으드득
어디선가 들어본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뭐야 시발 이 소리.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상한 점을 찾지는 못했다.
"어서 가요"
스칼렛이 내 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아 빗치 수녀라니.
최고야.
***
"27번 24번 13번 8번이 파괴됐습니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보고에 스칼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지부가 왜 이유도 없이 터지고 그 안에 있던 인원들이 몰살 당했다는 거야.
세를 늘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 자신들은 외부로 뚜렷하게 저지른 일도 없었다.
스칼이 세우고 있던 계획들이 지부들이 파괴되면서 같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어서 지시를..."
이 좆같은 상황에서 무슨 지시를 달라는 거야 이 새끼는.
그래도 내가 지휘부니까...
스칼은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을 애써 눌렀다.
"각 지부에 경계 태세를 최고 단계로 올리고 항상 주의해서 경계하라고 일러라. 다음 차례가 어디가 될지 모르니까."
스칼은 습관적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면서 명령했다.
스칼의 명령이 끝나자 주변에 있던 검은 놈들이 흩어졌다.
벌레 같은 놈들.
그 모습을 보며 스칼은 인상을 찌푸렸다.
몇 명 없는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범인은 검은 단발머리의 미인과 집행관이었다.
검은 단발머리의 미인이 저 지부들을 모두 부숴버리고 그 모습을 집행관이 옆에서 박수치면서 구경했다고 한다.
지부의 위치야 집행관이 알려줬다고 치지만 혼자서 지부들을 부술만한 무력이 있다니.
그 정도의 무력을 지닌 이는 제국 제일검과 진리를 맛본 자들뿐인데...
마법사인 것 같다고 했으니까.
진리를 맛본 자들 중에 있다는 것인데...
진리를 맛본 자들의 그 변태같이 비밀스러운 특성때문에 정보가 밖에 알려지지 않아 확실하게 판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젊은 미인이 진리를 맛본 자들에 있을 리가 없는데.
시발 근데 집행관 새끼는 왜 갑자기 그쪽에 붙은 거야.
스칼이 본 집행관은 뼛속까지 그 좆같은 신념으로 가득 찬 놈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교를 배신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심지어 그 새끼는 죽지도 않잖아.
고통도 좋아하고.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미친놈을 끌어들인 거지?
스칼은 자꾸만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일들에 머리가 빠질 것만 같았다.
스칼은 앞에 놓인 차가운 물을 들이켜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
일단 이유가 뭐든 지부가 파괴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물론 스칼은 이대로 처녀교가 무너지면 좋겠지만, 저런 지부들이 부서진다고 처녀교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이대로 피해가 좀 더 누적되서 그가 눈치채면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무식한 놈이라면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세상을 뒤집기 위해서 출전할 게 분명했다.
출전하는 순간 스칼도 제국 공적이 될 게 분명했다.
아무리 처녀교의 수가 많아지고 그의 강함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해도 제국을 상대로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황녀 납치도 실패해서 제국 수호용 해결 방법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 처녀교가 무조건 제국한테 패배할 텐데.
스칼은 저런 좆같은 종교에 순교할 생각도 제국 공적으로 평생을 쫓겨 다니면서 살 생각도 없었다.
일단은 어떻게든 그 여자를 찾아내서 멈춰야 한다.
스칼은 손에 들린 잔을 톡톡 건드렸다.
"고민이 많은가 봐?"
옆에서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스칼의 옆에 여우가 와있었다.
여우의 드러난 흰 다리를 보며 스칼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여우와 잤던 남자들의 결말을 알고 있는 스칼은 올라오는 음심을 애써 눌렀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도 미인 앞에서 목소리를 멋지게 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좋은 머리를 지닌 스칼이 문제라니?"
여우가 간드러지게 말하며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상한 검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지부들을 막무가내로 부수고 있답니다. 그가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계획도 없이 세상을 뒤집기 위해 뛰쳐 나갈텐데..."
큼큼
스칼은 목을 다듬었다.
"검은 단발 머리의 여자? 마법사?"
여우가 자신의 흰 가면을 톡톡 쳤다.
"네. 마법사요. 혹시 알고 계시나요?"
여우의 대답에 스칼의 음성이 높아졌다.
"응. 그때 황녀 사건 때 나타나서 방해한 마법사가 걘데? 물론 이름이나 그런 건 모르지만"
여우가 은발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 풍성한 머릿결을 보며 스칼은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혹시 그 사람과 접촉할 방법이 있습니까?"
제발 걔 좀 멈추라고 해봐.
몇 날 며칠을 밤 새워가며 만들었던 내 계획들이 다 날아갔잖아.
"으음... 접촉이라... 잘하면 할 수 있을지도?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용사 아카데미로 가야 되는데?"
용사 아카데미라... 스칼이 단어를 되새겼다.
수도의 한복판에 있는 용사 아카데미에 접근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접근이 성공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내가 갔다 오지 뭐 그럼."
여우가 산책을 말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용사 아카데미는 수도에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 여우라면
스칼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 여우야. 핑계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줘. 아무도 의심 못 하게"
여우가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나서 스칼을 쳐다봤다.
흐응 막내
여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여우를 보며 스칼은 자신의 카드를 확인했다.
여우는 스칼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카드 중 하나였다.
물론 아직 확실하게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여우를 써야 하는가.
스칼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좋은 카드라고 아끼다 보면 결국 게임이 끝날 때까지 쓰지 못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 어차피 이대로 그한테 소식이 들어가면 모두 파국이다.
카드를 쓸 수 있을 때 쓰자.
"알겠습니다. 준비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결심한 스칼이 입을 열었다.
"그래 흐응."
여우가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여우가 사라져도 스칼에게는 아직 여우의 흰 다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대로면 머리가 계속 어지러울 게 틀림없었다.
일의 능률을 위해서.
"어이 밖에 누구 있나! 여자 좀 하나 가져와!"
스칼은 짐짓 두꺼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자요?!"
밖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멍청한 놈들은 어떻게 한 번에 알아듣지를 못해.
"여자! 흰 피부로!"
스칼은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