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72화 (72/233)

〈 72화 〉 손녀의 첫사랑.

* * *

스칼은 자꾸만 달달 떨리는 자신의 다리를 손으로 눌러서 멈췄다.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괜찮겠지­?

스칼은 살랑살랑 걸어가던 여우의 뒷모습이 생각나며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여우에게 일을 맡기는 게 올바른 판단이었을까.

아니 자신에게는 다른 카드가 없었다.

더 이상의 습격을 막지 못하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으니까.

이 미친놈들만 가득한 곳에서 수도 한복판에 있는 용사 아카데미에 잠복시킬 사람도 여우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여우의 장난 어린 미소가 자꾸만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우는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

여우가 이쪽을 배신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했다.

여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그가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서 그것을 훔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밖에 없었다.

문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우의 그 속내이다.

유일하게 여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여우가 어떻게든 그 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밖에 없었다.

어쩌다 신수인 그녀가 그자에게 붙잡혔는지 모르겠지만.

신수인 그녀의 생각을 일개 인간인 자신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칼님­ 이번에 처녀 공급을 담당했던 9번이 파괴되어 처녀 공급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어느새 들어온 놈이 스칼에게 일정한 음으로 말했다.

스칼의 머리는 이제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다음 처녀 공급 담당이었던 놈들에게 먼저 공급하라고 해­"

스칼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예 알겠습니다. 그분에게는...?"

놈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일단 보고하지 말도록.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우를 보냈으니까 말이야."

저 그지 같은 놈도 그는 무서운가 보네.

스칼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 여우를 움직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스컬님. 알겠습니다. 일단 보고 올리는 것은 보류하겠습니다. 하지만 좀 더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는..."

사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 그지 같은 새끼가 만약 그가 알게 될 때는 주저 없이 내 핑계를 대려고 하는구만.

물론 스칼은 저놈이 그에게 먼저 보고를 올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저놈도 지 목이 제일 중요하니까.

"흥. 같잖은 협박이군. 꺼져라"

스칼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사내는 조용히 뒤로 사라졌다.

사내가 나가는 것을 본 스칼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물론 주먹에는 마법을 걸어뒀기 때문에 아프지 않았다.

내 인생을 여우에게 걸 줄이야.

아마 몇 달 전의 자신이라면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다른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처녀교가 제국과 붙는다면 제국에게 큰 피해를 주기는 하겠지만, 이길 수는 없다.

그럼 나같이 윗대가리들은 다 제국 공적으로 지명되어 도망 다니다가 잡혀서 머리가 성문에 자랑스럽게 걸리겠지.

제국 공적으로 지명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아래에는 빨간 글씨로 처녀교­ 라고 적힐 게 분명했다.

시발 처녀교라니.

어떤 새끼가 만든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칼은 절대 그따위 이름을 위해서 죽고 싶지 않았다.

가장 좋은 것은 처녀교가 출범하기 전에 처녀교가 자신을 쫓지 못할 만큼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 때 도망치는 것이다.

스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다시 꾹꾹 누르며 계획을 검토했다.

계획의 가장 윗부분에 적힌 여우라는 두 글자가 다시 한번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그래 아무리 생각 없는 여우라도­

이 임무의 중요도를 아니까.

딴 짓거리는 하지 않겠지.

어느새 스칼의 다리는 다시 달달 떨리고 있었다.

***

부담스러운 여우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스프를 떠먹었다.

여우가 직접 만들었다던 스프는 그냥 고기가 들어간 스프였다.

물론 성당의 그 좆같은 스프보다는 맛있지만, 그냥 흔히 스프하면 떠올리는 그대로의 맛이었다.

"으음! 맛있네요. 완전!"

나는 긴장감 때문에 굳은 얼굴을 애써 풀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게 무슨 뜻이야?"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따라서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완전 최고라는 뜻이에요."

나는 반대쪽 엄지까지 들어서 여우에게 보여줬다.

"으응 최고라는 뜻이구나. 그럼 내가 만든 스프가 이거네!"

여우가 나를 따라 양손의 엄지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하하... 네 완전 이거네요!"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으니까­ 어서 더 먹어봐."

여우가 양손의 엄지를 든 채로 말했다.

더 먹으면 긴장감 때문에 체할 것 같았지만, 억지로 웃으며 식판에 담긴 음식들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목이 잘려서 죽는 것보다는 체하는 게 더 나으니까.

결국 나는 식판에 담겨진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었다.

"어때? 이거야? 이거?!"

내가 음식을 다 먹자 여우가 환하게 웃으며 양손의 엄지를 들어 보였다.

존나 체한 거 같아.

속이 마치 쇠라도 집어 삼킨 것처럼 굳게 더부룩했다.

"하하 네 완전! 최고네요!"

웃으며 여우에게 양손의 엄지를 보여줬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여우가 꺄르륵­ 거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지금 저렇게 웃고 있는 여우의 모습을 보니 당장 내 모가지를 날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일어나서 가는 건 올바른 선택지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용사 아카데미 안이니까 내 목을 갑자기 날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여우가 가면 사내의 목을 대뜸 날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일단 더부룩한 속을 애써 누르며 여우의 웃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근데 여기는 왜..."

여우의 웃음소리가 작아졌을 때, 용기를 내서 물었다.

"으응? 그거야 막내 보러 왔지! 맛있는 우리 막내!"

크게 웃느라 눈에 고인 눈물을 살짝 닦으며 여우가 나를 쳐다봤다.

그 모습이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표정이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나저나 얘는 왜 자꾸 나한테 맛있을 거 같다고 하는 거야.

칭찬인지 욕인지 너무 애매한 말이었다.

"그리고 겸사겸사해야 할 일도 있고!"

여우가 손을 짝­하고 부딪혔다.

"해야 할 일이요?"

"응. 해야 할 일! 중요한 일이야."

여우가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근데 여우가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무리 좆같은 용사 아카데미라고는 하지만 허술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경비 마법은 철저했다.

아니 철저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곳에 마물처럼 보였던 여우가 당당하게 들어와 있다니.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구만.

"하하. 중요한 일 잘 마치시기를... 그럼 저는 이만."

나는 여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잽싸게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여우가 나를 따라서 일어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식판을 반납하고 식당 밖으로 도망치듯이 나왔다.

최대한 빠르게 뛰어서 식당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나를 따라오는 듯한 인기척은 없었지만, 괜히 불안했다.

마침내 식당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실습실 뒤로 돌아가 벽에 등을 기댔다.

여기라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다.

귀족 놈들한테 불려가서 얻어맞은 곳이기도 했다.

그때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누구도 오지 않았다.

등에서 난 식은땀 때문에 옷이 축축하게 늘어붙어 있었다.

긴장감에 거칠어진 숨을 고르게 쉬며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후­"

깊게 심호흡을 하자 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괜찮아.

무사히 도망쳤어.

그래 자기 할 일이 있다잖아.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근데 여기는 왜 온 거야 막내­?"

옆에서 꿀을 바른 것처럼 달콤하고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애미 시발!

갑자기 들린 소리에 너무 크게 놀라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으응? 막내 뭐 하는 거야?"

내 옆에는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땀도 많이 났네?"

나쁘지 않은 맛이야­

내 볼에 흐르는 땀을 여우가 혀로 할짝댔다.

그 느낌이 마치 사탕이 되어 인간에게 씹히기 전 느낌 같아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는 맛없는 사탕이에요 시발.

"하...하 여우님 할 일이 있으시다고..."

마치 쇠를 매단 듯 무거운 입술을 애써 움직여 물었다.

"응. 할 일!"

여우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쿡 찔렀다.

여우가 할 일이라는 것이 나라는 뜻 같았다.

내가 왜 할 일인데.

혹시 나를 암살하기 위해서 여우가 온 건가?

그렇다기에는 너무 강한 사람을 보낸 거 아니야?

어떤 조직인지는 모르겠지만, 효율적이지 않은 조직이 확실했다.

나보다 적당히 강한 사람을 보내야 조직도 효율적으로 굴러가고 나도 혹시나 살 수 있나? 라는 생각에 열심히 반항하지.

나 같은 좆밥을 잡는데, 저런 괴물을 보내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너네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조직 굴리면 얼마 못 가고 망한다고 망해!

그리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너네 목적 애초에 케이트였잖아.

걔 황녀라며.

그러고 보니 최근에 케이트가 안 보인 것 같았다.

설마...?

"저요?"

많은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지만, 나는 겨우 두 글자만을 뱉어낼 수 있었다.

"응. 막내."

여우가 내 가슴을 찌른 손가락을 끌어 내리며 활짝 웃었다.

"하하...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용사 아카데미 학생일 뿐인데요..."

나는 최대한 좆밥같아 보이게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별 볼 일 없었지만... 지금은 나름 괜찮은데? 그래도 인간 중에서는 쓸만할 정도야. 음 아마 이 정도?"

여우가 엄지를 위로 들었다가 천천히 손을 옆으로 돌렸다.

돌아가던 엄지는 마침내 아래부터 15도 정도 각도에서 멈췄다.

문득 저 손모양은 투기장에서 패배자의 처리를 결정하기 위해 관객들이 투표할 때 죽이라고 손짓을 하는 모양과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

응응 이 정도일 거야­

여우가 그런 살벌한 엄지를 내게 내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예?!"

너무나 대놓고 하는 여우의 살인 예고에 너무 놀라 입 밖으로 비명을 질러버렸다.

케이트 이 새끼 어디로 튀었어 시발.

다행히 여우는 나를 바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냥 계속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따라다녔다.

내 입장에서는 그게 마치 죽음의 순간에 나타난다는 악마가 때를 맞추기 위해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도무지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결국 여우는 내가 수업을 듣는 강의실까지 따라왔다.

자꾸만 꼬이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뒷자리에 앉으니까 약간 마음이 놓였다.

옆에서 여우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막내야­ 저건 뭐야?"

여우가 흰 손가락을 들어 초록색 칠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칠판이라는 거에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여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답했다.

"으응 칠판이라는 거구나. 그럼 이거는?"

여우는 옆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질문했다.

여우는 아까부터 나를 따라다니면서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 모습이 마치 수도에 처음 올라온 시골 아이 같았다.

나는 최대한 여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에...에이든 쿤?"

옆에서 덩치가 곰같이 큰 케일이 몸을 잔뜩 부풀리고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막내야­ 저건 뭐야? 마물이야? 인간이라기에는 너무 큰데?"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케일은 손가락질했다.

흡­

여우의 손가락질에 케일이 몸을 더욱 부풀렸다.

케일의 모습은 거의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 비슷했다.

"그... 제 친구입니다. 케일이라고."

"으응­ 막내의 친구. 안녕 반가워! 나는 여우라고 해."

여우가 생글생글 웃으며 케일에게 인사했지만, 케일은 묵묵하게 앞을 보며 덩치를 부풀릴 뿐이었다.

그런 케일의 우스운 모습에 잠깐이나마 긴장이 풀렸다.

이윽고 검술 이론 수업 담당인 라인하르트 선생님이 들어왔다.

라인하르트 선생님이 특유의 매서운 눈빛으로 강의실을 둘러보고 수업을 시작했다.

"저 사내는 꽤 강하구나. 막내야­ 저 사내는 뭐 하는 거야?"

여우가 내 팔뚝을 콕­ 찔렀다.

"선생님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이시죠."

나는 조용히 여우의 물음에 답했다.

"흐응 선생님이라. 꽤 재밌어 보이네."

여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너무 이론적인 이야기만 하네. 어차피 죽일 때는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인데 말이야."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런 여우의 눈빛은 다시 붉어져 있었다.

아래를 향해있던 여우의 엄지가 다시 생각났다.

"그럼 만약 인간형 마물을 상대하게 되면 어떤 검을 사용하는 게 좋은가 하면­"

라인하르트 선생님의 굵은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여우의 붉은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몰라 시발.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사람 안 죽였어.

"하하 그렇네요."

물론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에는 중간시험을 볼 예정입니다."

그렇게 옆에서 조잘대는 여우에게 집중하느라 듣지도 못한 검술 이론 수업이 끝났다.

배고프다는 여우의 말에 나는 여우를 데리고 매점으로 향했다.

피처럼 붉은 거­

뭐를 먹고 싶냐는 질문에 여우가 저렇게 답했다.

나는 여우에게 주기 위해 체리 주스랑 딸기 케이크를 사고 더부룩한 속을 위해 소화용 포션과 여분의 메론빵을 구입했다.

혹시나 메론빵 중독자를 만나게 되면 주기 위해서.

늘 케일과 가던 운동장의 구석진 테이블에 앉았다.

이곳은 관리가 전혀 안 된 곳이라 입구가 다른 나무들에 가려 있어서 다른 학생들은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케일과 도망치다가 우연히 발견한 아지트였다.

"이게 뭐야 막내?"

내 건너편에 앉은 여우가 포크로 딸기 케이크를 콕콕 찔렀다.

"케이크에요. 딸기 케이크."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는 시늉을 해서 먹는 방법을 알려줬다.

도대체 얘는 뭐를 먹고 살았길래 케이크도 몰라.

여우가 딸기 케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한참이나 관찰했다.

나는 소화용 포션을 뜯어 마셨다.

소화용 포션의 맛은 진짜 좆 같았다.

이상한 향이 가득 담긴 액체를 마시니 더부룩한 속이 좀 괜찮아졌다.

이게 맛이 좆같이 없어서 괜찮아진 건지 포션의 능력으로 괜찮아진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한참이나 케이크를 관찰하던 여우가 결심한 표정으로 포크를 들어서 케이크를 쿡 찍었다.

여우의 피처럼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고 작은 크기의 케이크가 들어갔다.

눈을 감고 한참이나 꼭꼭 씹던 여우가 꿀꺽하고 삼켰다.

여우가 살짝 몸을 떨더니 눈을 떴다.

어느새 여우의 머리는 은발로 다시 돌아가 있었고 눈도 붉은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거 완전 이거네! 이거!"

목까지 붉어진 여우가 환하게 웃으며 양손의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여우의 등 뒤에서 그때 봤던 탐스러운 꼬리들이 나와서 배배 꼬고 있었다.

그 꼬리의 모습들이 각각 큰 엄지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

"이것도 먹거라 허허"

베네딕트 국왕이 팔불출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앞에 있던 큼지막한 고기를 케이트의 앞에 있는 접시에 올렸다.

"이미 많이 먹었다고­! 배불러!"

케이트가 손에 있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면서 베네딕트 국왕을 노려봤다.

"아니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배부르다니! 억지로라도 좀 더 먹거라."

베네딕트 국왕이 고집스럽게 케이트의 접시에 기어코 고기를 놓았다.

"더 먹으면 살찐다고 살!!"

케이트가 양손을 자신의 허리에 올리고 소리쳤다.

"이런 빼빼 마른 몸에 살이 어디 있다고 살을 걱정해!"

베네딕트 국왕이 케이트의 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몰라! 나 살 빼는 중이니까! 그만 먹을 거라고! 그만!"

케이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허허 그래 배부르면 그만 먹어야지."

단호한 케이트의 모습에 베네딕트 국왕이 한발 물러섰다.

조슈아가 그런 국왕과 케이트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자그맣게 웃었다.

조슈아뿐만 아니라 케이트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따뜻함이 가득했다.

에포닌의 앞에서는 녹지 않는 왕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든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얼음을 녹이는 꽃' 에포닌이기 때문에.

베네딕트 국왕이 손짓했다.

주변에 있던 시종들이 다가와서 수십 명이 동시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식탁 위에 있는 음식들을 치웠다.

식탁은 금세 다양한 다과들로 채워졌다.

"그래. 아카데미 생활은 괜찮았느냐?"

베네딕트 국왕이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응. 뭐 잘 지냈지! 하라버지­ 도 잘 지냈어?"

발음이 이게 맞았나?

케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하하하! 그럼 다행이구나."

케이트의 혀짧은 소리에 베네딕트 국왕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케이트가 왔다는 소리에 어느새 꽤 많은 사람들이 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케이트의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을 열심히 반응하며 들어주었다.

"그런데 가면을 쓴 변태들이 나를 납치를­"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던 케이트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쾅­!

사람 얼굴만 한 베네딕트의 주먹이 식탁을 내려쳤다.

두꺼운 원목으로 만든 식탁에 큼지막한 주먹 자국이 새겨졌다.

"감히 우리 손녀를 납치해? 근데 우리한테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말인가­! 이 개 같은 제국 놈들이­"

베네딕트 국왕의 입에서 험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아니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봐봐! 나는 멀쩡하잖아!"

케이트가 다급하게 베네딕트 국왕의 큼지막한 손을 잡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베네딕트 국왕에게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정순한 기운이 줄줄 흘러나왔다.

감히 우리 에포닌 님을­

베네딕트 국왕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따뜻한 눈으로 케이트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아니 되었다. 에포닌. 너는 이제부터 여기 있거라. 우리가 그동안 그들에게 너무 호의를 베푼 모양이다."

베네딕트 국왕이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하라버지­! 하라뻐지­!"

케이트가 다급하게 입을 뻐끔뻐끔 거렸다.

그런 케이트를 보는 베네딕트 국왕의 눈빛이 잠시 누그러졌지만, 이내 다시 매서워졌다.

"출정을 준비해라­"

베네딕트 국왕의 무거운 목소리가 홀을 진동시켰다.

"예­"

굳은 얼굴의 사내들이 한 몸처럼 일제히 대답했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아끼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납치당했었다는 사실 하나로 전쟁을 시작한다니.

심지어 그 상대가 제국이란다.

저 할아버지는 내가 제국의 황녀라는 자각은 하고 있는 걸까.

물론 할아버지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자신의 잘못이 분명했다.

굳은 얼굴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케이트는 심호흡했다.

이 멍청한 전쟁을 멈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더 큰 충격을 주어 전의 충격을 잊게 하는 방법.

그리고 저 팔불출 국왕에게는 뭐가 제일 충격적일지 케이트는 알고 있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케이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주변이 숨소리도 안 날 정도로 조용해졌다.

땡그랑­

접시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궁금증에 살짝 눈을 뜬 케이트는 마치 세상이 멸망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할아버지를 봤다.

"그 사람이 내가 납치 당했을 때도 나 구해줬어..."

정말 사랑에 빠진 소녀의 교본처럼 케이트가 목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그 후로도 한참의 정적이 지나간 후에­

베네딕트 국왕은 그 '검은 날'에도 느끼지 못한 절망감이 가슴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그 절망의 크기만큼 불같은 분노가 가슴 속에서 끌어 올라왔다.

감히 어떤 쳐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우리 에포닌의 사랑을 받아­?

마침내 베네딕트 국왕의 떨리는 입술이 열렸다.

"그...그게 누구...냐."

베네딕트 국왕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설사 황제더라도 패 죽일 자신이 베네딕트에게는 있었다.

아니 패 죽이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사지를 다 잘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베네딕트 국왕의 모습을 보며 조슈아는 직감했다.

아마 에이든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비밀이지! 바보 하라버지야!"

케이트가 귀엽게 혀를 쏙 내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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