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드숀의 청춘.
* * *
"막내야 이게 다 없어졌어."
여우가 복슬복슬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런 여우의 앞에는 내가 사다 바친 딸기 케이크의 상자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벌써 몇 개를 사다가 바친 거지.
항상 두둑이 채워져 있던 내 주머니는 이미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많은 딸기 케이크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우의 얼굴에는 아직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입술을 다물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여우가 딸기 크림이 묻은 접시를 포크로 긁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내 심장까지 가져다 바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내 가벼워진 주머니가 내 정신을 깨웠다.
이미 내 한 달 치 식비를 써버렸다.
더 이상은 안 돼.
"오늘 많이 먹었잖아요. 아무리 맛있는 거라도 넘치게 먹으면 질려서 다시는 먹고 싶어지지 않을걸요?"
내 얇아진 주머니가 내 주둥이를 기름칠한 것처럼 매끄럽게 움직였다.
"이건 아무리 먹어도 질릴 것 같지 않은걸? 딱 한 개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여우는 이제 접시를 손으로 들어 핥아먹고 있었다.
"원래 약간의 아쉬움이 남을 때 멈추는 게 제일 가치 있게 만드는 법이라고 했어요."
누가 그랬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맞는 말 같기는 했다.
"아쉬움이 남을 때?"
여우가 핥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접시는 만지면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했다.
"네. 그래야 다음 만남이 기대되니까요."
"나는 이미 다음 딸기 케이크와의 만남이 충분히 기대되는걸!"
여우의 꼬리가 다시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럼 딱 멈추기 좋은 순간이네요. 지금 멈추면 다음 딸기 케이크는 더 맛있을 거예요."
그리고 다음에는 니 돈으로 좀 사 먹어.
"흐응 그래! 뭐 막내 말이 맞겠지."
여우가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쉬움이 남을 때
여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파산하기 전에 여우를 멈출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막내는 참 착하구나"
여우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네. 제가 좀 그렇기는 하죠."
내가 좀 착하기는 하지.
그래서 손해도 많이 보고 말이야.
'크흐으음'
검이 거칠게 기침을 했다.
"응. 그런 거 같아. 이렇게 맛있는 것도 주고 말이야. 그놈들은 이상한 맛대가리 없는 것들만 줬는데"
여우의 꼬리 중 하나가 길어져서 내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놈들이요?"
부드러운 여우 털 감촉에 목이 근질거렸다.
내가 여우 알레르기가 있었나.
"응. 그래도 그중에서는 심장이 그나마 맛있었는데 그것보다도 이게 더 맛있어. 완전 이거야 이거! 심지어 심장은 먹으면 귀찮게 손에 묻으니까 말이야."
여우가 환하게 웃으며 양손의 엄지를 내게 내밀었다.
애미 시발.
심장이라니.
그걸 왜 먹어요 시발.
괜히 열심히 뛰고 있는 내 심장 소리가 여우에게 들릴까 봐 조심스레 팔짱을 끼며 내 가슴을 여우에게서 가렸다.
잠깐 여우의 외모에 홀려서 까먹고 있었다.
얘는 우리를 납치했던 년이다.
"역시 막내에게 오기를 잘했어"
여우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면서 코를 자꾸 움찔거렸다.
"근데 왜 저를 찾아오신 거에요?"
나는 웃고 있는 여우의 기분이 좋아 보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아! 그때 막내를 구해줬던 그 인간 여자 아이 때문에 왔어! 걔 때문에 좀 곤란해졌거든"
조금? 많이?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나를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루나 때문에 곤란해졌다니?
근데 왜 나를 찾아온 거야.
걔 그 도서관 가면 있을걸.
"그때 보니까 그 인간 여자아이가 우리 막내를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막내 주변에 있으면 그 아이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살랑살랑 거리던 여우의 꼬리가 여우의 뒤로 말려 들어가더니 다시 사라졌다.
여우의 말은 어느 정도 정답이기는 했다.
거의 매일 밤 루나는 나를 찾아오니까.
여우는 루나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인가?
하지만 루나가 여우에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루나는 누구에게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럼 나는 루나가 나타날 때까지 여우가 사고 치지 않게 잘 데리고 있기만 하면 루나가 알아서 해결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맛있는 것까지 먹을 수 있다니! 역시 막내를 찾아오길 잘했어!"
여우의 머리와 눈동자가 다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 루나는 이따가 저녁에 올 텐데요. 아니면 지금 도서관으로 가면"
나는 빨리 문제를 루나에게 떠넘기고 싶었다.
"아니아니!"
여우가 내 말을 갑자기 잘랐다.
"이왕 수도까지 온 김에! 좀 더 구경하고 싶어 이렇게 맛있는 것도 더 먹고 싶고."
여우가 밝게 웃으면서 내게 눈처럼 하얀 손을 내밀었다.
그런 여우의 미소가 마치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때가 묻어있지 않아서 거절하기 힘들었다.
물론 애초에 여우의 말을 거절할 힘이 없기도 했다.
여우와 아카데미를 벗어나도 될까.
물론 나한테 무슨 가치가 있겠냐만 그래도 한 번 납치됐던 몸인데.
"싫어?"
늦어지는 내 대답에 여우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여우의 눈동자가 어느새 다시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하... 뭐 그러죠."
마음속으로 루나를 간절하게 불렀다.
제발 빨리 와줘.
나는 억지로 손을 내밀어 부드러운 여우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자리를 치우고 일어나서 아카데미를 나가기 위해 정문으로 향했다.
간절히 주변을 둘러보며 아는 사람을 찾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납치범과 손을 잡고 아카데미 정문을 나섰다.
"어이 평민!"
그때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필 아는 사람을 만나도 쟤를...
고개를 돌리자 주황색 머리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잔뜩있는 드숀이 보였다.
드숀은 나를 놀릴 생각에 얼굴을 씰룩거리며 다가왔다.
"응? 누구야?"
여우가 고개를 내밀어 드숀을 확인했다.
"이제 아카데미를 벗어났으니 너는 평민이고 나는... 으힉?!"
좆같은 얼굴을 씰룩거리며 다가오던 드숀이 내 옆에 있는 여우를 확인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드숀은 내게 딱히 친구라고 소개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아하! 안녕! 나는 여우야! 반가워"
기분이 좋은 여우는 발랄하게 손을 흔들어 드숀에게 인사했다.
드숀은 여우의 인사에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주근깨가 잔뜩 있는 얼굴이 붉어지니 마치 딸기와도 같은 모습이 됐다.
후하후하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심호흡을 한 드숀이 표정을 고치고 입을 열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콘레드 드숀 이라고 합니다. 레이디"
드숀이 짐짓 멋진 표정을 지으며 발음을 늘어뜨렸다.
제딴에는 멋진 표정이라고 지은 것 같았지만, 이미 주근깨 가득하고 얼굴이 잔뜩 붉어진 드숀이 말하니 딸기가 말을 하는 것 같은 기괴한 느낌을 들게 했다.
"와하하 안녕!"
여우는 그 모습이 웃긴지 크게 웃고는 인사했다.
드숀이 내게 시선을 주면서 눈으로 여우를 가리켰다.
아마 이 미인은 누구냐고 묻는 거겠지.
여우가 교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런 미인이 아카데미에 있었다면 남학생으로서 모른다는 게 말이 안되기는 했다.
드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끌어들여서 같이 개죽음 당하게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상남자니까.
싸가지 없고 좆같은 드숀이었지만, 나는 친절하게 꺼지라고 손짓을 해줬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매한 드숀은 그런 내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어디 가시는 지요?"
드숀이 내 의도를 무시하고 미소지으면서 여우에게 물었다.
"우리 막내랑 수도 구경하려고!"
여우가 내 손을 끌어당기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 제 가장 친한 친구인 에이든에게 이런 미인이신 누님이 계셨다니! 에이든 이 놈! 왜 이런 눈부신 누님을 숨긴 것이냐! 하하하!"
드숀이 내 반대쪽 어깨에 어깨 동무를 하면서 익살스럽게 말했다.
병신...
"막내의 가장 친한 친구였구나! 반가워!"
여우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끄리힉! 하하하! 에이든은 수도 지리를 잘 모를 텐데... 귀족인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저는 수도에서 나고 자라서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입니다!"
여우의 웃음을 본 드숀이 이상한 추임새를 넣고는 신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병신...
그런 드숀의 모습이 불쌍했지만, 그래도 드숀을 데리고 가면 혹시나 여우의 마음이 변했을 때 던져줘서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지금 상태라면 본인이 오히려 좋아서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뻐킹 어글리. 아니 드숀! 우리 누나를 위해서 수도 안내 좀 부탁하겠네!"
드숀의 간절한 눈빛에 중간에 단어를 바꾸어서 점잖게 말했다.
"하하! 나만 믿게! 저만 믿으세요. 누님! 제가 완전 쫘악 풀코스로 안내하겠습니다. 풀코스로! 하하하하!"
드숀이 익살스럽게 손동작까지 동원해서 열심히 말했다.
"응응! 잘 부탁해"
보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는 여우의 미소를 보며 드숀은 다시 한번 우렁차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병신...
여우가 단순히 내 아름다운 누나라고 생각하는 드숀은 정말로 열심히 우리를 데리고 돌아다녔다.
심지어 여우가 관심 있어 하는 음식이나 물건들을 모두 흔쾌히 사줬다.
여자에게 홀려서 주머니를 활짝 여는 드숀을 보니 드숀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여우는 눈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최소한 두 개 이상씩 입에 넣었다.
저 마른 몸에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 의문이었지만, 어차피 내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은 없었다.
나는 다만 여우가 음식을 먹고 풀릴 때, 옆에서 꼬리 조심하라고 귓속말만 해줬다.
괜히 수도 한복판에서 마물이랑 같이 다녔다는 죄로 잡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드숀! 저기는 어디야?!"
여우가 손에 든 사탕을 우물거리며 맥주 모양이 그려진 술집을 가리켰다.
술집은 한 눈에 봐도 허름했다.
술집을 나오는 사람이 값싸 보이는 무기를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것을 보니 하급 용사들에게 유명한 술집인 것 같았다.
저런 곳에 여우를 데리고 들어가면 무조건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물론 이제 하급 용사들은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굳이 일부러 들어가서 귀찮아질 이유는 없었다.
"저기는 모래 맥주로 유명한 술집이에요"
드숀은 여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마냥 얼굴이 풀어졌다.
그 모습이 보기에 심히 끔찍했다.
"맥주? 맛있어?"
여우가 눈을 큼지막하게 뜨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우의 기호는 이미 파악했다.
여우는 무조건 단 것만 좋아했다.
짜고 맵고 이런 거 다 싫어하고 무조건 단 것만.
그런 여우에게 모래 맥주가 맛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음식 이름에 모래가 들어가다니 애초에 맛있을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아뇨. 맛없을걸요."
나는 여우의 호기심을 막기 위해 단호하게 대답했다.
"흐응 맛없다니... 그래도 약간 궁금하네"
물론 여우의 아이같은 호기심은 쉽게 자를 수 없었다.
"그럼 한번 모래 맥주를 마셔볼까요?"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잔뜩 붉어진 드숀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여우가 신나는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결국 우리는 무겁고 곳곳이 녹슨 나무문을 열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하게 차 있었다.
주변의 욕지기가 섞인 대화를 들으며 비어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여우가 지나갈 때 옆에 있는 사내들이 대화를 멈추고 여우의 얼굴을 연신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드숀이 짐짓 인상을 쓰며 마주 쳐다봤지만, 사내들은 드숀을 신경 쓰지 않았다.
구석에 있는 비어있던 테이블에 앉았는데, 의자가 심각하게 끈적거렸다.
아마 이 술집은 더러움이라는 일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만요!"
드숀이 앉으려는 여우를 막은 다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의자에 깔았다.
그리고는 짐짓 점잖은 얼굴로 무게를 잡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드숀 녀석도 나처럼 소문에 속아서 손수건을 샀던 게 확실했다.
심지어 손수건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단 한번도 쓰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여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수건 위에 앉아서 술집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그런 여우를 드숀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넋놓고 보고 있었다.
"뭐로 드릴까"
얇은 티를 입은 온몸이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가 다가와서 주문을 받았다.
우락부락한 몸만큼 사내의 목소리도 거칠었다.
"모래 맥주 3잔."
그에 나도 짐짓 목소리를 깔고 답했다.
나름 멋진 목소리가 나온 것 같아 뿌듯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돌아갔다.
"여기는 죄다 맛없는 것들밖에 없네?"
주변을 둘러보던 여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맛없는 거요?"
나도 따라 주변을 둘러봤는데, 잔뜩 인상을 쓴 사내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사내들에게 내 옆구리에 달린 루나검을 톡톡 쳐서 보여줬다.
좆밥들이 어디를 노려봐.
'으히힉 간지럽다네! 거긴 예민한 부위라네 으히힉'
기분 나쁜 루나검의 목소리는 무시했다.
"응. 막내랑은 다르게 다 맛없어 보여."
여우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래도 모래 맥주는 수도에서 꽤 유명한 술이니까 마셔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도 얼굴이 붉은 드숀이 굳게 주장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아까 그 사내가 큰 잔을 세 개 들고 돌아왔다.
사내는 잔들을 쿵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았다.
그로 인해 넘쳐흐르는 맥주를 보면서 왜 테이블과 의자가 끈적거렸는지 깨달았다.
잔을 내려놓은 사내가 가격을 말했고 드숀이 냉큼 돈을 내밀었다.
맥주는 크고 투명한 잔에 담겨 있었는데, 주황색과 황토색 그 사이의 색이었다.
그리고 맥주 아래에는 진짜 모래처럼 생긴 알맹이들이 가득 굴러다니고 있었다.
애미 시발 진짜 모래 맥주야?
굴러다니는 모래를 집어넣어 돈 받고 팔다니 아까 그 사내는 보기와는 다르게 머리가 뛰어난 것 같았다.
여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지 한 손으로 큰 맥주잔을 들고 여기저기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아래 깔린 알맹이들은 갈색 설탕인데, 그 모습이 모래와 비슷하다고 해서 모래 맥주로 불린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맛은 유명하니 믿고 마셔도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한 드숀이 두 손으로 잔을 들어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으음 진짜 맛있나?
나도 상남자답게 한 손으로 잔을 들어 마셨다.
처음 마시는 맥주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함과 그 끝에 느껴지는 단맛 덕분에 괜찮게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상남자는 원샷이니까.
크 시원하다
이내 한 번에 비운 맥주잔을 쿵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시원한 것을 너무 한 번에 마셔서 머리가 약간 찌잉했다.
내 모습을 본 여우도 맥주잔을 한 손으로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반쯤 마시고 여우가 잔을 내려놓았다.
"웩 맛없어."
그리고 입안에 담겨 있던 맥주를 그냥 뱉었다.
여우의 붉은 입술로 맥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괜...괜찮으세요?!"
맥주를 도로 뱉는 여우의 모습은 흉했지만, 드숀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이래서 외모가 중요하다.
이쁘니까 먹던 것을 도로 뱉어내도 저렇게 챙겨주지.
드숀이 재빨리 품에서 다른 손수건을 꺼내서 여우에게 건넸다.
근데 저 새끼는 손수건을 몇 개나 산 거야.
생긴 것과 다르게 포부는 큰 놈이었다.
웩 맛없어 맛없어.
여우는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완전 이거야 이거!"
여우가 찡그린 얼굴로 양손의 엄지를 아래로 내렸다.
"하하 아가씨가 아직 맥주 맛을 모르는구만."
그때 내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덩치 큰 대머리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뒤에는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네 명 더 있었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팔근육을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고 싶어서 주먹에 힘을 주고 있는 듯, 주먹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어때? 이런 애송이들 말고 진짜 남자인 우리한테 맥주 맛을 배워 보는 게? 더 맛있는 것도 많은데 말이야"
대머리 사내에게도 순정은 있는지 여우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맛있는 거?"
여우가 사내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사실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일단 나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것 같은 상대들이기도 했고 심지어 그들이 작업을 거는 상대가 여우였으니까.
하지만 드숀의 생각은 달랐던 거 같다.
쾅
드숀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강하게 치면서 일어났다.
"이런 안하무인한 무식한 놈들이! 누구보고 애송이라고 하는 줄은 아느냐! 이 몸이 누군지나 알고!"
드숀이 가슴을 쫙펴면서 남자답게 소리쳤다.
"이 몸으로 말하자면 콘레드 남작가의 둘째 드... 쿠왁!"
드숀은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대머리 사내의 주먹이 주근깨투성이인 드숀의 얼굴에 정확하게 박혔다.
쓰러지는 드숀의 옷깃을 사내가 잡아서 세웠다.
그 모습에 내 속까지 시원해졌다.
그래 그 뻐킹 어글리 오렌지로 주스 좀 만들어 보라고!
"크하하하! 요즘은 남작도 귀족이라고 힘주고 다니나 봐!"
사내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드숀이 그런 사내의 팔을 잡아 비틀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사내는 드숀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드숀은 파닥파닥 손을 흔들며 흉한 모습으로 땅에 나뒹굴었다.
그렇다. 드숀는 좆밥 중에서도 좆밥 개좆밥이다.
좆밥에게는 자신이 좆밥이라는 사실을 잊은 대가는 꽤 컸다.
"어디 우리 귀족님의 피는 다른 색인가 구경해보자고!"
사내들이 쓰러진 드숀에게 들러붙어서 신나게 걷어차기 시작했다.
"뻐킹! 어글리! 오렌지!"
그런 사내들의 모습이 신나 보여 나도 섞여서 조금씩 발로 걷어찼다.
드숀은 제법 때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다.
"와하하! 웃긴 녀석이군!"
옆에서 차던 사내가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가 시원하게 드숀의 배를 걷어차자 웃으면서 넘어갔다.
"으악! 에이든! 누님을 데리고! 악! 도망가! 악! 여기는 내가! 악! 맡을게!"
드숀은 끝까지 지지 않고 저항했지만, 세상에는 의지로 되지 않는 게 많았다.
마침내 드숀은 빨다만 걸레처럼 넝마가 되어서 바닥에 뒹굴었다.
"후 귀족이란 것들도 똑같은 색이구만. 그럼 아가씨 우리와 같이 가겠어?"
사내가 일을 마친 인부처럼 손을 시원하게 털면서 말했다.
그런 사내들의 모습을 따분하게 쳐다보고 있던 여우가 나를 돌아봤다.
여우의 시선에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갔다 올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여우는 턱을 매만지면서 잠깐 고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하하하! 기다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리는 제법 오래 걸리거든!"
사내가 여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신나게 웃었다.
그런 사내의 태도에 여우가 잠깐 노려봤지만, 이내 맛있는거라고 중얼거리며 따라갔다.
사내들이 바지를 움켜 잡으면서 여우를 데리고 나갔다.
그렇게 잠깐의 소동이 지나가고 나는 여우가 남긴 맥주를 홀짝였다.
모래 맥주
나쁘지 않은 맛이야.
"크흑 미안하다 에이든! 내가 조금만 더 강했으면...! 아버지! 어째서 우리는 남작밖에..."
구석에 구겨진 드숀이 엉엉 울면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는 정말 자신의 연인을 뺏긴 것 같은 절절함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여우랑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됐으면서.
그리고 애초에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괜찮겠나. 저 녀석들, 이 근방에서는 질 나쁘기로 유명한 녀석들인데."
아까 주문을 받았던 우락부락 사내가 물었다.
"아 예. 뭐 괜찮아요. 이거 모래 맥주 한 잔 더 주세요. 맛있네요. 이거."
나는 빈 잔을 흔들며 주문했다.
냉정하군
우락부락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그나저나 그냥 지금 도망갈까.
하지만 이미 여우가 용사 아카데미를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도망가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끄윽
절절하게 울던 드숀이 기절했다.
"이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데에 대한 서비스다."
우락부락한 사내가 아까보다 좀 더 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 감사합니다."
달콤한 모래 맥주를 홀짝이며 여우와 나간 녀석들의 명복을 빌어줬다.
질 나쁜 녀석들이라니까.
뭐 괜찮겠지.
크
맥주의 차가움에 머리가 또 찌잉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