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맛없게 생긴 드숀.
* * *
키아나가 살짝 가빠진 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쳤다.
"프할할할! 정말 많이 늘었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나도 귀가 닳을 정도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너에 비하면 범재...아니 그보다도 못하구나. 벌써 그 나이에 그 경지라니! 프할할할!"
스승님이 검을 탈탈 털면서 검집에 거칠게 집어넣었다.
분명 스승님의 검은 황제께서 하사하신 귀중한 검이라고 들었는데, 항상 동네 대장간에서 산 것처럼 거칠게 다루었다.
나는 사제가 선물해준 레이피어를 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닦았다.
동생의 결혼식 이후부터 가문의 지원을 거부하고 있는 내게 검을 살 돈은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받은 검이 무뎌져도 바꿀 돈이 없었다.
아무리 욕심이 없다고 해도 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좋은 검이 탐날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사제를 따라갔던 무기점에서 정확히 자신에게 맞는 검을 만났다.
키아나는 처음으로 운명이란 것을 느꼈다.
눈대중으로 봐도 정확히 잡힌 무게 중심과 자신의 머리색과 비슷한 금색의 손잡이까지 저 검은 자신을 위한 검이 분명했다.
하지만 키아나에게 저런 고급 검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생활비로도 빠듯했다.
사제에게 메론빵도 사줘야 한다.
남들 모르게 침을 삼키며 레이피어의 자태를 훔쳐봤다.
누가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검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가문에 한 번만 부탁해볼까
자꾸만 차오르는 욕심에 키아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더 보고 있어 봐야 잡생각만 많아질 뿐이다.
들고 있는 검이 아니라 들고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키아나는 애써 욕심을 눌렀다.
하지만 자꾸만 돌아가는 시선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거 선물이에요."
사제가 밝게 웃으며 내게 그 레이피어를 건넸다.
순간 이게 자신의 욕심이 만들어 낸 환상인가 싶어서 키아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사저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사제의 미소는 그동안 내 안에 있던 모든 응어리를 녹일 만큼 따뜻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검을 선물 받은 것은.
가족들은 항상 내게서 검을 뺏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는데.
사제는 평민이라 돈도 여유롭지 않은 데, 바보같이 착한 사제는 내 마음을 헤아려 무리해서 산 것이 틀림없었다.
사제의 사정을 생각해서 거절해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했지만, 이기적인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제의 선물이었다.
사제의 선물을 내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제 손에 들려 있는 레이피어는 아까 장식장에 걸려 있을 때보다 더욱 빛나고 아름다웠다.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서 또 바보같이 사제 앞에서 울어 버렸다.
바보처럼 착한 사제를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반드시 어떻게든 사제에게 받은 은혜를 갚을 거야.
레이피어를 품 속으로 소중하게 끌어 안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 사제가 혼자서 힘들어하고 있다.
내가 믿음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제는 내게 털어 놓지도 않았다.
모든 게 모자란 내 잘못이야.
키아나는 도서관에서 그 소설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소설의 내용은 마치 사제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은 것처럼 비슷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키아나는 어떤 낡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에게 봉인된 괴물은 그 힘이 말도 안 되게 강했다.
피처럼 붉은 불타는 듯한 피부
단어 그대로 산 만한 덩치.
입에서는 불을 뿜어내고 오직 세상을 증오하며 멸망만을 희망하는 괴물.
소설 안에서도 그 괴물을 막을 수 없어서 봉인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키아나는 조금이라도 비슷한 마물을 찾기 위해 매일같이 도서관에 들렀다.
제국 역사서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를 뒤졌다.
일단 최근 20년 안에 발생했던 마물들 목록을 만들고
그중에서 확실하게 해치운 흔적이 없는 애들을 추렸다.
그리고 그중에서 위의 외관과 비슷한 느낌이 있는 마물들을 추렸다.
사서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최종 목록을 만들었다.
키아나는 그 목록을 최최최종에이든마물목록 이라고 정의했다.
그 목록에 있는 괴물은 총 셋이었는데, 하나같이 살벌한 마물들이었다.
지금 키아나의 힘으로는 턱도 없었다.
사실 키아나는 그동안 본인도 모르는 사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모두가 신의 축복을 받은 재능이라고 떠받들었으며, 학생 중에는 학년 상관없이 자신의 상대가 없었다.
물론 훈련을 단 하루도 쉬지 않았지만,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아마 자신은 스승님의 말처럼 결국 언젠가 제국 제일검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가진 키아나는 절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저 목록에 있는 마물들 중 하나라면...
자신은 한낱 개미에 불과했다.
키아나는 짙은 무력감때문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목표가 바뀌자 그동안 미천한 실력임에도 안일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제는 저렇게 혼자 끙끙 앓을 동안 안일하게 있었다니.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다짐이 돌처럼 키아나의 가슴에 눌러앉았다.
스승님에게 말해볼까도 생각 해봤지만 말하지 않았다.
아직 사제가 말하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멋대로 사제의 비밀을 남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키아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언젠가 때가 왔을 때, 사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한 번이라도 검을 더 휘두른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악착같이 검을 휘둘렀다.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검술 실력이 늘기는 했지만, 아직도 부족했다.
부족해
부족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이미 거친 손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물집이 잡혔다.
괜찮다. 어차피 이미 흉한 손이었다.
머릿속에는 검과 사제에 대한 걱정만 가득 차서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개인 훈련장으로 향했으며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수업은 참여하지 않았다.
갈증처럼 느껴지는 부족함에 대한 자각은 키아나를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절실함은 키아나의 재능과 더불어 말도 안 되는 증진을 가져왔다.
마침내 오늘 키아나는 제국 제일검이 오랜만에 자신의 검을 꺼내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호랑 말코 같은 녀석은 왜 오지 않는 거냐"
스승님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에이든은 지금 상태가 좋지 않아서 쉬고 있습니다. 스승님도 저번에는 너무 심하셨습니다!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은 아이를..."
문득 사제가 쓰러져있던 모습이 생각나서 키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허허 제자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더니. 키아나야 벌써 그놈 편을 들고 있는 게냐."
스승님이 짓궂게 웃으며 키아나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그때 사제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는데 스승님이 신경 쓰지 않고"
그런 스승님의 말에 키아나의 얼굴이 붉어지며 황급하게 답했다.
"됐다 됐어. 에잉 쯧 열심히 가르쳤더니 남자한테 푹 빠져서 스승한테 소리나 빽빽 지르고"
스승님이 짐짓 토라진 척 땅을 세게 밟으면서 걸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그냥 사제가 걱정돼서!"
키아나는 스승님의 장난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저! 또 스승한테 소리지르는 것 보소!"
"...죄송합니다."
키아나는 툴툴거리며 훈련장을 나가는 스승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로 빠르게 실력이 늘다니 천재라는 단어로도 부족하다
키아나에게는 안 보였지만, 제국 제일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역시 그놈을 들이기를 잘했단 말이야.
제국 제일검이 좋은 인상은 아닌 녀석의 상판을 떠올리면서 웃었다.
한창때의 아이들에게 사랑만큼 좋은 촉진제는 없다.
근데 그놈도 우리 키아나를 좋아하는 거겠지?
문득 떠오른 의문에 제국 제일검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 상판대기에게 우리 키아나는 너무 아까웠다.
아니 너무라는 단어로도 부족했다.
키아나는 이미 실력보다 그 외모로 제국에서 유명했다.
만약 키아나를 자신이 제자로 들이지 않았다면.
이미 황실 쪽에서 어떻게 해서든 데려갔을 것이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놈이 주제도 모르고 키아나를 거절한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그럴 리가.
어느 누가 저 완벽한 키아나를 거절하겠어.
제국 제일검은 멍청한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스워 시원하게 웃었다.
훈련장 문이 닫히자 키아나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다시 검을 잡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아직 자신은 좀 더 휘두를 수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줘 다시 자세를 잡았다.
키아나는 사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다시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
"에이든 누나! 나도 만질 거야!!"
기절해있던 드숀이 기분 나쁜 소리를 외치며 일어났다.
헉헉
드숀은 아직도 고통스러운 모양인지 가슴 쪽을 쥐며 쭈그려 앉았다.
그러니까 좆밥인데 왜 나댔어.
좆밥 생존 수칙을 잊은 드숀의 잘못이 컸다.
드숀이 품에서 손수건 하나를 더 꺼내더니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도대체 저 새끼는 손수건을 몇 개나 산 거야.
포부만은 남다른 새끼인 게 분명했다.
"결국 누님은... 크흑!"
피를 닦은 수건을 땅바닥에 던지더니 품 안에서 새로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 멍청한 놈! 나를 버리고 가라니까! 아무리 우리의 우정이 깊다고 하여도 나를 버렸어야지! 나는 누님을 위해 얼마든지 웃으며 희생할 수 있는데! 멍청한 놈!"
드숀이 이제는 눈물이 가득 담긴 두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게 뭔 개소리야.
너와 나 사이에 언제부터 우정이 있었다고.
살짝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내 안에 들어간 다섯 잔의 모래 맥주가 자비를 베풀었다.
"크흑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내 여자를 뺏긴 이 치욕 절대 잊지 않겠다! 이 치욕은 나를 강하게 만드는 연료가 되어..."
드숀이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주절주절 입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퍽 재밌어서 방금 새로 받은 모래 맥주를 마시면서 구경했다.
소설 속 자신의 여자를 뺏긴 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근데 분명 드숀은 여우를 만난 지 세 시간도 안 됐을 텐데.
뭐 굳이 저 좆밥을 이해할 필요는 없지.
드숀의 울부짖음이 절정에 달해서 양손을 위로 들고 '콘레드 가문은 이날을 잊지 않는다!'라고 애절하게 외칠 때, 술집 문이 열리면서 여우가 들어왔다.
여우가 양손을 들고 울부짖는 드숀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여우의 옷은 아까와 또 달라져 있었다.
지금은 짧은 남색 치마에 통 넓은 티를 입고 있었다.
저 옷들은 자꾸 어디서 구해오는 거야.
여우의 표정은 나가기 전보다 개운한 표정이었다.
마치 종일 물을 못 마시다가 마신 듯한 느낌이 드는 표정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앉아서 붉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는 여우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자 눈동자가 다시 검은색으로 변했다.
"흐응 역시 맛없을 것 같았는데... 맛없었어. 웩"
여우가 다시 토하는 시늉을 했다.
"누...누님?!"
그제야 여우가 돌아온 것을 확인한 드숀이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드숀의 태도에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숀이 일어나서 냉큼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엉덩이 부분이 아팠는지 잠깐 드숀의 얼굴이 구겨졌다.
거기 내가 때린 거 같은데.
마치 잃어버린 부인과 재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참을 침묵하던 드숀이 입을 열었다.
"저는 누님이 처녀가 아니게 됐어도 괜찮습니다. 비록 저는 경험이 없지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드숀이 눈물 자국이 잔뜩 남아있는 얼굴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 개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여우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드숀을 쳐다봤다.
"그러니 저 드숀 여우 누님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드숀은 여우의 침묵이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나는 이내 드숀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남은 모래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다 보니까 입이 좀 심심한데.
먹을 것 좀 시킬까.
에일 버드 튀김은 안 파나?
드숀은 아직도 열심히 개소리를 찍어내고 있었다.
"... 그러니 저와 결혼합시다."
마침내 드숀은 개소리의 정점을 찍어버렸다.
드숀은 아까 구타 당할 때 머리를 맞은 게 틀림없다.
3시간 전에 만난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해?
심지어 우리는 아직 여우의 이름도 모른다.
아마 드숀의 가정환경이 매우 정상적이지 못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싫어"
여우가 인상을 와락 구기면서 단박에 거절했다.
"으에?"
드숀의 머릿속에는 거절 당할 거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 같았다.
"너 맛없어 보여"
여우가 아래로 향한 엄지를 내밀었다.
엄청우웩
여우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드숀이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마치 마비 마법을 맞은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맛없게 생겨서 거절한다니.
아마 고백 거절 방법 중에 최악이지 않을까.
"우리 막내처럼 맛있어 보이면 모를까"
여우가 혀를 내밀어 내 볼을 핥았다.
가까이 붙은 여우에게서 짙은 피 냄새가 맡아져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득 여우가 왜 옷을 갈아입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쿵
내 볼을 핥짝이는 여우를 본 드숀이 그대로 기절해서 옆으로 쓰러졌다.
넘어지면서 세게 부딪힌 것 같았지만, 표정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게 왜 맛없게 생기래.
뻐킹 어글리 오렌지.
머리에 설탕이라도 뿌리고 다니던지.
"근데 막내야. 나 처녀야"
여우가 쓰러진 드숀은 본 채도 안 하고 내 귀에 녹을 것처럼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대체 그런 사실을 왜 내게 전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여우의 입에서 나는 피냄새가 더욱더 짙게 맡아졌다.
"하하. 이제 그만 용사 아카데미로 돌아가죠."
자꾸만 달라붙는 여우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놔두면 다음에는 무슨 소리를 할지 두려웠다.
인간 남자는 처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잠깐 입을 다물고 눈썹을 찌푸리던 여우가 이내 미소 지으면서 따라 일어났다.
"그래 가는 길에 맛있는 거!"
여우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면서 말했다.
문득 이제부터 내 돈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기절한 드숀을 다시 봤지만, 드숀은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다.
"잘 먹었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들어오기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났는지 해가 지기 전 상태 같았다.
그렇게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이는데,
"꺄아아악!"
옆에 있는 골목에서 길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여자가 골목에서 뛰어나왔다.
주변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멈추고 그 여자를 쳐다봤다.
"저저 안에 사람 시시시체들이!!! 우웨엑"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거칠게 쉬는 여자가 말을 더듬다가 토악질을 했다.
여자의 말에 잠시 멈춰있던 세상이 다시 빠르게 돌아갔다.
몇몇 무기를 찬 사람들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고, 상인들은 장사를 접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몇몇 아이들이 골목으로 가려고 하는 것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말렸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려 여우를 쳐다봤다.
여우는 마치 몰래 장난친 아이처럼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왜?
여우에게서 나던 피냄새가 더 짙어졌다.
애미 시발.
나도 모르게 저 골목길 안의 시체들을 상상하고는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물론 여우를 데리고 나간 사내들이 좋은 결말을 맞이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됐을 것이다 라고 의심하는 것과 실제로 그 사실을 받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 질 나쁜 녀석들이라잖아.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이 감정은 죄책감이라기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내 손을 세게 잡은 이 여자가 방금 다섯 명을 죽인 여자라는 것에서 오는 공포.
그리고 다섯 명을 죽인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생글생글 웃으며 쳐다보고 있다는.
"그럼 아카데미로 돌아갈까요?"
나는 애써 굳은 얼굴 근육을 움직여서 미소 지었다.
여기에 더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았다.
"응!"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여우가 밝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웃는 여우의 어금니 부근에 빨간 물체가 자그맣게 껴있었다.
애미 시발.
저 이에 낀 거 뭐야 저 시뻘건 거.
루나야 어디 갔어.
이러다 나 진짜 잡아 먹히겠어.
루나야...
"하하..."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여우를 데리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아카데미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다행히도 살아서 무사히 아카데미의 내 방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여우의 양손에는 이미 먹을 게 잔뜩 들려 있었다.
도대체 저게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내 주머니에는 이제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검은 문을 어떻게 열지 몰라서 당황했지만, 내가 다가가자 자동으로 열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우가 들어갈 때 검은 문에서 작은 소리가 난 것 같았다.
"흥흥"
어느새 여우가 옷장 위에 올라가서 손에 들린 사탕들을 소중하게 핥아먹었다.
여우가 왜 저기에 올라간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여우와 멀어졌다는 점에서 안심했다.
시간이 약간 지난 뒤에, 여우가 마지막 빨간 사탕을 오독하고 깨물었을 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루나가 나타났다.
"쓰레기"
루나는 방에 나타나자마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여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잘한다! 우리 루나!
근데 나가서 해주면 안 될까?
***
"내가 직접 간다고 하지 않았나!"
베네딕트 국왕이 거칠게 널찍한 원목 책상을 내려쳤다.
"고정하세요. 본인이 국왕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면 제국으로 직접 가겠다는 말의 무게를 알 텐데요."
유일하게 녹지 않는 왕국에서 베네딕트 국왕에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보니타 왕비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 한 떨기 꽃처럼 순수한 에포닌이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을 좋아한다잖아! 이걸 어떻게 가만히 있는가! 할아버지 입장으로서 당연히 쓰레기같은 놈을 패죽..."
베네딕트 국왕이 보니타 왕비의 눈치를 보며 슬쩍 언성을 낮추고 항변했다.
"구체적으로 에포닌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설명도 안 했는데 벌써 쓰레기 같다고 하는 건 실례입니다."
보니타 왕비가 싸늘한 눈빛으로 크게 숨을 내쉬는 베네딕트 국왕을 노려봤다.
"아무튼 그래도...! 우리 손녀 에포닌에 관계된 일인데 내가 직접 못 간다니! 그럼 그냥 이 국왕 자리를... 아닐세 허허 내 말이 헛나와버렸구만."
열을 내면서 호소하던 베네딕트 국왕이 보니타 왕비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바꿨다.
"당신이 에포닌만 관계되면 이성을 잃는 건 이해해요. 당신뿐만 아니라 에포닌은 저에게도 소중합니다. 아니 녹지 않는 왕국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에포닌을 소중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국왕 자리를 내팽개치고 간다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베네딕트?"
보니타 왕비의 말이 점점 차게 식으면서 손에 든 찻잔을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이 마치 진정하지 않으면 얼굴에 뿌려버리겠다는 모습 같았다.
베네딕트 국왕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헛기침하면서 보니타 왕비의 눈치를 봤다.
"일단 당신이 직접 가는 건 절대 안 되고 올가를 보내도록 하죠. 그 아이라면 충분히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보니타 왕비가 손에 들린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 올가! 그 아이라면 믿길만하지. 저번에는 올가가 마물의 창자를 꺼내서... 허허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구만."
베네딕트 국왕이 보니타 왕비의 말에 짝소리가 나도록 크게 박수를 쳤다.
"올가를 불러오도록."
베네딕트 국왕이 뒤에 있던 기사에게 명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뒤에 하얀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에는 감정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동으로 불편함이 들게 했다.
그 아름다운 얼굴과 특유의 생기 없는 분위기 때문에 마치 얼음을 깎아서 만든 조각 같았다.
올가는 베네딕트 국왕 앞에서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는 보니타 왕비 쪽을 쳐다봤다.
"일단 에포닌의 안전을 최선으로 경호하고 그다음에 에포닌이 빠졌다는 사내에 대해 알아보거라. 만약 그 사내가 에포닌보다 부족하다거나 심성이 곧지 않다면"
보니타 왕비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명하다가 마지막에는 말을 삼켰다.
올가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런 올가를 바라보는 베네딕트 국왕의 얼굴에는 만족함이 가득했다.
인사를 하고 뒤돌아선 올가는 짙은 따분함을 느끼며 긴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크흠 그래도 올가는 너무 심한가...?"
올가가 사라지자 베네딕트 국왕이 머리를 긁적였다.
"심하기는 뭐가 심해요. 우리 에포닌이 관련된 일인데. 당신은 마음이 너무 여리다니까요."
보니타 왕비가 베네딕트 국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지
베네딕트 국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