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86화 (86/233)

〈 86화 〉 구름섬의 어린 신수.

* * *

이렇게 세게 휘저으면 가끔 아래의 풍경이 보이기 때문에.

여우는 지상과의 경계인 구름에 발을 넣고 열심히 휘저었다.

하지만 구름을 치우기에는 여우의 발이 아직 작았다.

구름섬은 높이 있는 만큼 아래에 펼쳐진 풍경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늘 구름섬을 두르고 있는 구름들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드러났던 지상의 모습은 아직까지 여우의 머리에 생생했다.

그렇게 여우가 한참 동안 열심히 휘젓고 있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아래 보고 있었나요?"

촉촉한 물기를 잔뜩 머금었지만, 그보다 더 따뜻한 기운을 담은 목소리.

이 따분한 섬에서 제일 따분한 현무 님이었다.

"네. 아래가 궁금해서요."

여우가 열심히 움직이는 발을 멈추지 않고 답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러다 기적처럼 여우의 발아래에 있던 구름이 순식간에 밀려갔다.

와­아.

가려진 구름이 밀려나고 드러난 풍경은 그때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여우는 그 풍경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어느새 현무가 옆에 앉아서 손을 간단히 휘젓고 있었다.

현무의 자애로운 미소에 여우는 만족스럽게 웃어주고 열심히 아래를 구경했다.

현무는 지상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여우의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의 자신을 그렸다.

먼 옛날에는 자신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는 아득한 기분을 습관처럼 미소를 지으며 즐겼다.

"그렇게 내려가고 싶나요?"

슬금슬금 몸이 앞으로 기우는 여우를 보며 현무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네! 여기는 너무 따분하거든요­ 늙은이들밖에 없고..."

여우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우의 시선을 따라 같이 고개를 돌리던 현무에게는 마르지 않는 풍족한 섬이 보였다.

부족함을 못 느껴본 자가 풍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

이 섬을 짓는다고 용을 쓰던 청룡이나 백호가 들으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말을 이 어린 신수는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뒤에 이어진 여우의 늙은이라는 말에 현무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신경 썼다.

신수인 현무에게 주름이라는 것이 생길 리 없었지만, 어린 신수의 말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여우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직 지상에 내려가 본 적 없으니까요."

현무는 다시 지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굴이 잔뜩 풀어진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우의 머릿결은 언제 만져도 비단 같았다.

"저 언제 내려갈 수 있다고 했죠?!"

여우가 눈을 옆으로 굴리며 물었다.

이미 여우가 천 번 이상 물어본 질문이었지만, 이 어린 신수는 질리지도 않고 물어봤다.

아마 이 늙은이들이 나이에 못 이겨 답을 착각해 그 기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 원하는 거겠지.

"지금 여우님이 100살이니까... 400년 남았네요."

현무는 여우의 치기 어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으악!! 너무 많이 남았잖아요!!!"

여우가 현무의 대답을 듣자마자 벌러덩 뒤집어지며 몸을 뒤틀었다.

품위 없이 인간 아이처럼 생떼를 부리는 모습에 현무는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생떼 부리던 여우가 현무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다시 일어났다.

"왜 꼭 500살이어야만 하죠?!"

여우가 이번에는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질문을 했다.

매번 똑같은 수순에 현무는 다시 한번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저 질문에 현무가 친절히 이유를 설명해주면 또 한참이나 몸을 뒤틀다가 현무의 유희 생활은 어땠는지 물어볼 게 뻔했다.

"그 정도 나이가 되어야 지상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안전하게 구름섬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현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친절하게 답했다.

"저는 이미 500살 넘은 그 건방진 토끼도 때려잡았는데요?!"

여우가 주먹을 공중에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현무는 문득 여우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자신에게 와서 한탄을 늘여놓던 달토끼가 떠올랐다.

'그 어린 것이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하마터면 내 떡방아를 꺼낼 뻔했다니까 진짜로!! 걔 관리 좀 해야 돼!'

떡방아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100살인 여우가 천 살이 넘은 달토끼를 쥐어팬 것은 한동안 구름섬을 떠들썩하게 했다.

여우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강함은 지상에 내려가고 싶다는 열망이 만든 것이 분명했다.

"강함의 문..."

"강함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과 연륜의 문제에요! 라고 말씀하시겠죠!! 이미 천 번은 넘게 들었으니까요!"

여우가 현무의 말을 자르고 자신이 대신했다.

속에 들어찬 불만처럼 빵빵해진 여우의 볼을 보며 현무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웃어요! 지금 심각해 죽겠는데!! 저 진짜 따분해서 죽을 수도 있다니까요!!"

꺄르르 웃는 현무의 웃음에 여우는 인상을 구기며 다시 지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흐­ 미안해요. 여우님의 모습이 옛날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을 참지 못했네요."

현무가 깊은 눈동자를 지그시 감으며 여우를 달랬다.

"옛날의 현무님 모습이요­? 옛날에는 현무님도 늙은이가 아니었어요?"

금세 다시 눈동자에 활기를 띤 여우가 현무를 보며 물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늙은이라는 단어가 무어라고 생각하는 걸까.

"네. 저도 여우님 같이 어린 시절이 있었죠.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전이지만."

현무가 아련히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시선을 주며 말했다.

"우와­! 그럼 지상에 내려갔던 이야기 좀 해주세요! 늙은이가 되기 전 시절에­"

여우가 그런 현무를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쳐다보며 졸랐다.

현무는 늘 그렇듯 그런 여우에게 못 이기는 척 자신의 유희 이야기를 천천히 풀었다.

천천히 자신에게 새겨진 오랜 흉터를 더듬었다.

자신의 유희가.

얼마나 험난했고­

얼마나 달보드레했으며­

얼마나 따뜻했으며­

얼마나 사랑했는지­

굳이 여우가 말하는 늙은이들이 모두 아는 유희의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끝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이는 언제나 행복한 꿈을 꾸어야 했으므로.

여우는 이미 천 번 이상이나 들은 현무의 이야기였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금세 빠져들었다.

언젠가 그 주체가 자신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아앗! 그 부분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그러니까 그의 몸이 저와 포개졌을 때­"

늘 같은 부분에서 다시 말해달라는 당돌한 어린 신수를 보며 늘 그렇듯 부끄러운 목소리로 현무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늘 그렇듯 흉터의 제일 깊은 부분이었다.

***

"쟤를 진짜 저렇게 둬도 되는 거야?"

흰 눈썹을 찌푸리며 백호가 물었다.

물론 신수 회의에서 결정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백호는 저 어린 신수가 못내 못 미더웠다.

늘 까칠한 척하지만 언제나 신수에 관한 일이라면 온 신경을 쏟는 백호였다.

그럴 거면 굳이 왜 까칠한 척을 하는지 현무는 항상 의문이었지만.

백호의 시선을 따라 현무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신난 표정으로 구름섬에서 뛰어 내려가고 있는 여우가 보였다.

열심히 발을 움직이면서도 들킬까 봐 불안한지 연신 뒤를 확인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신수의 첫 유희란 늘 이렇다.

권태를 참지 못해 늘 정해놓은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몰래 도망가는 게 신수 첫 유희의 전통이었다.

물론 그것을 상정하고 첫 유희 가능 기간을 최대로 늘려 놓은 거지만.

그래도 200년 만에 뛰쳐나간 건 저 아이가 처음이었다.

"쟤가 어디 가서 당할 애냐! 쥐어 팼으면 쥐어팼지!!"

오른쪽 눈에 멍이 잔뜩 든 달토끼가 멍이 든 부분을 지그시 누르며 투덜거렸다.

"너는 고작 200살 된 신수한테 쥐어 터지고 다니냐­ 쯧!"

머리의 끝부분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는 주작이 그런 달토끼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너도 저 아이한테 한번 맞아보라니까! 손이 얼마나 매운지 참! 두억시니의 방망이보다 아팠다니까!!"

달토끼의 목소리에는 물기 젖은 서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니가 못난 짓을 하니까 맞지! 그 떡이 뭐가 아깝다고 그냥 아이한테 주면 될 것이지!"

애절한 눈빛으로 주변에 동의를 구하는 달토끼를 보며 주작이 쪼아댔다.

내겐 떡이 전부라고­

작게 중얼거리던 달토끼는 주작의 살벌한 눈빛에 뒷말을 삼켰다.

"어찌 끝이 정해져 있는 바람에 타려고 하는지 참..."

양손을 위로 들고 신나게 내려가는 어린 신수를 보며 백호가 침음성을 삼켰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우리에게는 끝이 정해진 이야기가 필요하니까요. 그 달콤함이나 씁쓸함이 너무 오래 씹어 무뎌지더라도 말이에요­"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막상 눈썹은 찌푸려진 백호를 보며 현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말하는 백호 너도 구름섬에 다시 올라올 때는 그 살벌한 두 눈에서 달토끼의 떡 같은 눈물이 줄줄­"

청룡이 갑자기 익살스럽게 웃으며 백호를 놀렸다.

"네! 이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리고 그랬어도 이미 그건 까마득히 먼 옛날 아니더냐!"

백호가 온몸의 흰 갈기를 세우며 청룡에게 달려들었다.

"와하핫­ 그러니까 우리 신수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거야! 이렇게 너를 계속 놀릴 수도­ 이크! 있고! 말이야!"

청룡이 백호의 큼지막한 발톱을 날래게 피하며 계속해서 놀렸다.

똑같은 것으로 만 번을 넘게 놀리는 청룡이나 그에 매번 같은 반응을 하는 백호나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라도 없었으면 자신들은 억겁처럼 무거운 세월이 짓누르는 권태에 이미 먹혔을 것임을.

다른 신수들은 늘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이 계속 늘여져만 가고 줄어들지 않아 변화가 없는 곳에는 늘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했다.

현무는 시선을 돌려 연신 뒤를 확인하며 입꼬리는 잔뜩 올라간 여우를 보았다.

아직 저 아래를 모르는 어린 신수는 늘 사랑옵다.

현무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작게 바랬다.

저 어린 신수의 유희가 부디 크지 않는 흉터로 남기를­

그리고 무사히 우리에게 돌아와 새로운 이야기를 잔뜩 풀어줄 것을­

"어? 저거 뭐야?!"

눈을 가늘게 뜨며 계속 여우를 확인하고 있던 달토끼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달토끼의 외침에 아직도 쫓고 쫓기던 백호와 청룡이 멈추고 아래를 확인했다.

그 둘의 모습을 보며 익살스럽게 웃던 다른 신수들도 황급히 아래를 확인했다.

지상에 도착한 여우의 바로 앞에는 범상치 않은 사내가 마주 서 있었다.

"왜 바로 입구에 저런 놈이 있는 건데! 딱 봐도 나쁜 인간처럼 생겼잖아! 신수 표시도 없고! 야! 떡두꺼비 너 입구 관리 안 했냐?! 니 차례잖아!"

주작의 머리에 붙은 불이 전보다 더 크게 활활 타오르며 열기를 뿜어냈다.

"끄윽­?!"

그 시선을 받은 떡두꺼비가 길게 트름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붉어진 볼과 물씬 풍겨오는 술 냄새에 떡두꺼비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다들 눈치챘다.

어린 신수의 첫 유희 때는 입구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만 했다.

"이 미친 술 주정뱅이 두꺼비야!!!"

주작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수들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듯 지상에 내려가는 어린 신수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려보내지 않는다.

그러기에 지상은 너무 차갑고 냉혹하므로.

어린 신수들이 나가는 출입구는 한 군데밖에 없었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신수들을 모시는 마을을 마련해두었다.

거기까지만 가면 거기서 기본적인 지상에 대한 교육을 받도록 안배해뒀다.

그 전에 다른 인간을 마주친다면­

현무는 정말로 오랜만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오직 진실만을 말할 수 있는 신수들 사이에서 자란 저 어린 신수는­

지상에 있는 생명체들은 거짓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여우가 자신의 머리띠를 사내에게 넘겨주었다.

현무가 여우에게 선물해 준 머리띠가 여우의 이번 유희 매개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현무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는 진짜 오늘 나한테 죽어보자 일로와!!!"

"끄으으윽­!!!"

두꺼비의 낮은 비명이 구름섬을 가득 흔들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백호가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잔뜩 조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뛰어내릴 것처럼 움직였다.

"그만해라­ 이미 저 아이의 유희는 시작되었으니."

아까까지만 해도 익살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청룡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렸다.

구름섬을 나선 순간부터 모든 것은 유희니까­

청룡의 말을 되새기며 현무는 어지러운 속을 다스렸다.

그래.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얻기 위한 걸음이.

유희니까.

"쓸모없는 두꺼비 새끼! 죽어! 그냥 죽어!!"

"꾸웨에엑!"

***

"어때?! 어때?! 내 처녀막은 오늘도 완전 이거지?!"

여우가 밝게 웃으며 양엄지를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복숭아 향을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며칠이 지났을까.

이제는 처녀교 생활도 제법 익숙해졌다.

신수의 자위만 도와주면 딱히 해야 되는 일도 없고 식사도 나쁘지 않았다.

또 다른 특급 신도들까지 다 쥐어 패놔서 제법 대접을 받는 것도 좋았다.

의외인 점은 루나가 금방 찾아내서 구하러 올 줄 알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다른 좆밥들을 다 쥐어 패놓으니까 내가 좆밥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특급 신도들의 전담 처녀의 이름을 물어봤는데 아직도 에밀리를 찾지 못했다.

루나가 오기 전에 에밀리를 찾아야 하는데... 약간씩 초조해졌다.

"네. 완전 이거네요. 오늘도."

"후흣! 그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내 처녀막이 이거야 이거!"

여우가 어깨를 들썩들썩하면서 양손의 엄지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제는 원피스도 입지 않고 완전한 나체인 여우가 그 춤을 추니 탐스러운 가슴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저 춤은 여우가 양엄지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내게 더 큰 표현 방식을 요구해 알려준 춤이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여학생의 치마 속을 우연히 훔쳐본 케일이 기쁨에 못 이겨서 췄던 춤이었다.

물론 본인은 우연이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4시간 동안이나 계단에 둘이 쪼그려 앉아 있던 건 우연이 아니었지만.

"자 그럼 검사 끝났으니까 그거 하자! 그거!"

여우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복숭아 향이 확­ 풍기며 언제봐도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졌다.

그래 이게 본업이니까.

나는 그런 여우에게 익숙하게 손을 올리고 움직였다.

이제는 손에 기운까지 둘러서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매만져주자 여우가 긴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가 꺾였다.

여우가 확실히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치 않게 손 쪽에서 기운을 돌리는 것이 점점 섬세해지고 있었다.

신수라서 그런지 저렇게 해둬도 여우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면 또 매달려서 부탁할 게 뻔했으므로 그 전에 여기에서 나가야 했다.

검사 결과가 써진 종이를 주웠다.

이미 복숭아 물에 양껏 젖어 있었지만, 그 위에 적힌 글자들은 보였다.

여우가 물어보면 내가 답변하고 그것을 여우가 다시 받아적는 종이였는데, 그 위에는 내가 불러준 내용이 하나도 적혀있지 않았다.

­언제 그거 하자고 하지? 그거 하고 싶다. 막내가 그냥 빨리 그거부터 하면 좋을 텐데. 그거!그거!그거!

그냥 자위에 중독된 신수의 흔적만이 남겨져 있었다.

아이가 그린 것처럼 뭉툭한 엄지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신수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내 손에서 복숭아 향이 짙게 맡아졌다.

아니 손뿐만이라 온몸에서 복숭아향이 물씬 풍겼다.

복숭아 물로 샤워한 것만 같네.

나는 그 종이를 곱게 접어서 품에 넣고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자 나를 찾는 재클린이 보였다.

"어! 에이든 님 돌아오셨군요!!"

재클린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했다.

방금까지 신수라는 정체답게 아름다운 여우의 얼굴을 보다가 재클린의 음침한 얼굴을 보니 그 큰 괴리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뭐."

그에 따라 내 입에서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하핫 이번에 학회 회의가 있어서 이렇게 모시러 왔습니다."

재클린은 내 대답에 아무렇지 않은지 미소를 유지한 채로 답했다.

"학회?"

"네네! 처녀막 학회 회의가 이번에 열립니다!"

시발 뭐라고?

처녀막 학회­?

애미 시발.

"그게 언젠데."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지금이요! 저랑 같이 가시죠! 하핫!"

재클린이 나를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재클린을 따라 도착한 곳은 둥그런 책상이 놓인 넓은 방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8명 정도 되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미 회의는 시작한 모양인지 그 중 한 명이 일어나서 말하고 있었다.

나와 재클린은 그 중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므로 오크의 처녀막은 꽤 텁텁한 향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이는 처녀막 이론에서 제시한 오크 처녀막 부분을 보충하는 자료로 충분히 쓰일 만 하다고 판단됩니다. 그 처녀막을 얇게 잘라서 시식도 해봤는데 맛은 향과 비슷한 텁텁한 맛이었으며 질감은 고무와 비슷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처녀막의 향과 그 맛은 약간 비슷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어선 사내는 담담한 말투로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애미 시발.

그걸 왜 먹어봐.

사내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경악했다.

여우의 처녀막을 매일 관찰하는 게 그나마 나은 생활이었다.

오크­

트롤­

수인­

그 외 끔찍한 것들에 대한 처녀막 설명이 이어졌다.

이 새끼들은 그런 거를 어떻게 아니 왜 연구하고 있는 거지?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그럼 다음은 이번에 새로 개설된 보직 신수의 처녀막 담당 에이든 님의 설명이 있겠습니다."

나를 지목하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에 내게 꽂혔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여우의 처녀막에 대한 것을 이 음침한 녀석들에게 설명을 해야 된다는 사실이 조금 거슬렸다.

"신수는... 간부이신 여우님을 조사한다고 하셨죠?"

제일 중간에 앉아있던 사내가 나를 보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그 여우님이라니!!!"

"그 희고 긴 다리의 여우님!?"

주변에서 갑자기 큰 난리가 났다.

"혹시 여우님의 처녀막을 보셨나요?"

질문했던 사내가 약간은 날카로워진 말투로 내게 다시 물었다.

내게 꽂힌 그들의 시선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직 여우님이 허락해주지 않으셔서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음침한 녀석들에게 여우의 처녀막에 대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여우님이 그렇게 쉽게 승낙할 리 없지!"

"우리도 이미 예전에 몇 번이나 부탁드리지 않았었나?!"

"그때 몇 명이 죽었었지?"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 셀르몬! 크흑!"

"셀루나 아니었나?"

아쉬움이 잔뜩 담긴 한숨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 그럼 여우님의 집에 매일 같이 오랫동안 머문다고 들었는데­ 거기 안에서 무엇을 하는 겁니까?"

검은 후드 아래로 사내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쳐다봤다.

"그냥 집안일 해주고 나오는데요. 시키는 것들 말입니다."

천연덕스럽게 그런 사내의 물음에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하죠."

중간에 앉아있던 사내가 제일 지위가 높은지 회의를 마쳤다.

"혹시 여우님의 처녀막을 보게 되면 꼭 내게 무슨 맛인지 알려주게."

"여우님의 젖꼭지는 무슨 색인가? 아 못 봤다고? 아쉽구만 그것만 알면 꼭지의 색과 생식기 색의 연관성 이론으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며 내게 인사했다.

그런데 그 인사들이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괜스레 짜증이 났다.

"잠깐"

마지막 사내까지 인사를 하고 나가고 나도 이제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자 아까 그 사내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의 옆구리에는 검은색 장검이 매달려서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 지금처럼 주제를 알고 적당히 해라. 함부로 여우님을 건드렸다가는..."

내 바로 옆까지 다가온 사내가 내게 작게 귓속말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 담긴 살의가 꽤 절절했다.

"어쩔 건데?"

문득 생긴 궁금증에 사내에게 되물었다.

"깡은 좋군. 실력이 없는 깡은 객기지만 말이야.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알기 싫어도 말이야­

사내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나갔다.

사내의 말에 치기 어린 반항을 했지만 내 약자 레이더는 사내가 내게 다가오는 순간부터 끊임없는 경고를 보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내는 나보다 강했다.

그것도 꽤 많이.

잔뜩 긴장해 손에 잔뜩 고인 땀을 후드에 비벼서 닦았다.

갑자기 루나검이 없는 옆구리가 더 허전하게 느껴졌다.

어디서 검이라도 한 자루 못 구하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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