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88화 (88/233)

〈 88화 〉 불안한 특급 신도.

* * *

금색으로 빛나는 크고 높은 왕좌에 앉은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욕심과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노인의 머리를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왕관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 무거운 왕관은 노인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서 이제는 몸과 같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왕관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졌다.

당연하게 쓰고 있던 시절이 지나가고 이제는 목과 허리에 잔뜩 힘을 주어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왕관이 없다면 자신은 그저 꼬장꼬장한 노인네라는 것을 아는 노인은 목이 짓눌려도 내려놓지 못했다.

"클레어 아리안 비헨 드 에포닌 님의 편지입니다."

그런 노인의 앞에 화려한 옷을 입고 엎드린 사내가 양손으로 공손하게 편지를 건넸다.

클레어 아리안 비헨 드 에포닌이라...

노인은 천천히 자신의 기억을 뒤졌다.

아­ 그 북쪽에서 온 여인의 자식이었지.

그 여인의 이름이 뭐였더라...

뭐 상관없지.

그래도 노인은 여인의 가슴이 컸다는 것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도 가슴이 크려나?

그건 좀 궁금하군.

"읽도록­ 아니 요약해서 말하도록."

노인은 최대한 근엄하게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눈이 침침해 글을 읽기 힘들었다.

생각하는 것도 점점 귀찮았다.

"제국에 반하는 종교 단체가 발견되어 황녀님이 직접 뒤쫓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의 이름은 '처녀교'로 처녀가 아닌 여자들을 죄인으로 여기고 심판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적혀 있는 처녀교의 규모는 제국에서 파악하지 못했으면 문제가 될 정도로 큰 규모입니다. 정보국 쪽에도 몇 번 보고가 올라오긴 했었지만, 규모가 다르게 올라왔었습니다. 이에 필시 정보국 내부에 처녀교의 끄나풀이 있는 거로 파악됩니다."

사내는 숨도 쉬지 않고 능숙하게 말을 끝냈다.

처녀교라 이름만 봐서는 죄다 멍청한 녀석들 같잖아.

노인은 자꾸만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무리 이름이 웃겨도 봐주는 건 안 된다.

노인이 부드럽게 왕좌를 쓰다듬었다.

죽는 날까지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니까.

꽤 오랜 세월 황제를 한 노인에게는 약간의 노하우가 있었다.

기어오르는 놈들의 머리를 다 잡아 부수면 한동안 이 자리가 안전하다는 것.

물론 그렇게 다 부숴놔도 다시 기어 올라온다.

마치 꿀에 몰려드는 벌처럼.

다만 그 머리 부수기를 얼마나 거칠고 가혹하게 하느냐에 따라 그 기간이 정해진다.

음 이번에는 어떻게 죽여야 역사에 길이 남을까.

노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볼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고민했다.

그럼 반반으로 하지 뭐.

"가족까지 반반. 정보국도."

말하기 귀찮아진 노인이 작게 명령했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오랜 시절 노인을 모신 사내는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내는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

다시 노인이 짙은 권태에 몸을 눕히려 하는데 황급히 뛰어오는 기사가 보였다.

황제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해당 기사를 멈추어 세웠다.

뛰어 들어온 기사와 잠깐의 대화를 나눈 기사가 황제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었다.

"무어냐."

투구를 벗고 찧어야 안 아플 텐데 말이야.

그런 기사를 보며 노인이 입을 열었다.

"... 알레트리스 님이 처녀교에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사내가 머리를 한 번 더 크게 찧었다.

알레트리스라...

노인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뒤졌다.

아­ 그 내 보신용 엘프.

알레트리스는 어느 순간부터 발기가 되지 않아 납치해 온 하이 엘프였다.

그 외모가 극에 달했다는 하이 엘프의 나체를 보면 다시 발기되지 않을까 해서 데리고 왔지만, 효과가 없었다.

앞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것이 있었지만 먹지 못하는 노인은 화가 나서 그 이후부터 이런저런 화풀이를 했다.

마지막에는 몽둥이만 들어도 절정에 달하면서 액을 뿜어내는 게 일품이었지.

그때 살짝 발기될 뻔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이후부터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가서 괴롭혔는데­

결국 발기가 되지 않아 괴롭히기만 하고 처녀로 놔둔 그 엘프가 납치된 모양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노인은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

내 발기 보양식을 감히 훔쳐 가?

"당장 가능한 모든 병력을 이끌고 가서 그 처녀교인지 뭔지 하는 놈들 다 쳐죽이도록. 최대한 빨리­ 그리고 엘프 지키고 있던 쓸모없는 새끼들도 다 쳐죽이고. 그 가족까지도­"

노인은 오랜만에 긴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무 오랜만에 말을 길게 했더니 목이 조금 칼칼했다.

"그것만은!!! 끄윽!"

노인의 말이 끝나자 황급히 달려왔던 기사가 애절하게 소리쳤지만 금세 주변의 기사들에게 제압당했다.

서러운 기사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노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무거운 왕관을 오래 쓴 노인에게 더 이상 타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권태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하이 엘프보다 더 이쁜 것이 뭐가 있었더라­

노인의 머리 위에 있던 왕관이 살짝 미끄러졌다.

하지만 늙어서 쇠한 노인은 떨어질 것처럼 삐뚤어진 왕관을 알아채지 못했다.

***

"추가적 늑대 인간 쪽 병력 집계입니다. 예상보다 적습니다."

이미 잔뜩 서류가 쌓인 스칼의 책상 위로 뭉툭한 서류 뭉치가 하나 더 올라갔다.

이 개자식들이 내 머리를 말려 죽일 속셈인가.

스칼은 슬쩍 서류 뭉치를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앞에 있던 사내가 냉큼 다시 정리했다.

서류 뭉치들이 마치 한 무더기처럼 높게 쌓아 올려졌다.

"병력 집계 담당 하나 뽑아. 지금 그쪽으로 신경 쓸 정신 없다."

스칼은 손에 들린 제국 쪽 동향이 적힌 글에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분이 스칼님한테 최종 확인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내의 목소리에 은근히 섞여 있는 웃음기가 스칼의 기분을 더 상하게 했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뭉치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읽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 지휘부 중에 어떤 놈이 겁도 없이 그분에게 올라갈 처녀를 건드려 머리가 터져 죽은 이후로 스칼에게 부담은 더욱 가중됐다.

도대체 그 새끼는 무슨 깡으로 처녀를 빼돌린 거야.

'아아­ 죽을만한 가치가 있는 처녀였다. 최고의 섹스였어!'

녀석이 그에게 머리가 터지기 직전에 했던 대사가 스칼의 복잡한 머리를 더욱 어지럽혔다.

아무리 쓰레기들이라고 해도 죽기 전에는 그럴듯한 말을 하게 되지 않나?

스칼은 자신이 마지막에 할 말을 고민했다.

그래도 예전 마법사 시절에는 책을 꽤 많이 읽었었는데.

딱히 생각나는 구절이 없네.

스칼의 예상답게 지부 파괴 소식을 들은 그가 전쟁 준비를 명령한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속으로 설마설마했지만, 그는 참으로 한결같은 인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스칼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굴러가는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처녀교가 크게 일을 벌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직 제국 쪽에서 처녀교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제국의 정보국 쪽에도 처녀교 신도 몇 명이 섞여 있기도 하고.

선공권은 우리에게 있다는 점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병력을 집계하기 위해 정보를 모아보니 생각보다 병력이 많기도 했다.

이 정도면 내가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늑대 인간 쪽은 좀 많이 비네? 이거 왜 이래."

스칼이 확인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때 여우님이 데리고 작전 나갔었잖아요. 다 죽었데요 그때."

사내가 들고 있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또 여우야.

그때 여우가 데리고 나갔던 애들이 늑대 인간 쪽이었지.

늑대 인간들은 의외로 유용한데 그것들을 다 죽이다니.

머리 통증에 스칼은 습관적으로 서랍 안에 있는 마법 연초를 쥐었다가 놓았다.

"후­ 여우 들어와서는 사고 치지 않고 있지?"

"네. 요즘 특급 신도 중 한 명이랑 매일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 여우가 특급 신도랑?"

"예. 저도 의외였어요. 여우님은 여기 교에서 사람들이랑 절대 안 어울렸잖아요? 막 맛 없어 보여 으웩­ 하면서. 하핫"

사내가 장난스럽게 여우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종이를 한 장 넘겼다.

"그 특급 신도가 누군데."

여우가 조용히 있다는 말에 스칼은 괜스레 불안했다.

"집행관님이 요번에 데리고 온 신입이래요. 꽤 괜찮다던데­"

사내의 입에서 나온 집행관이라는 말이 스칼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집행관이 데리고 온 녀석이 여우랑 어울린다­

이 어색한 문장이 스칼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괜한 걱정이겠지.

"아직 제국 쪽에서는 눈치 못 챈 거 확실하지?"

스칼은 머릿속을 꽉 채운 불안감을 애써 외면했다.

"예. 우리가 아직 본격적으로 딱히 뭐 한 게 없잖아요? 설마 눈치챘겠어요? 하하."

"그렇지. 아직 표면적으로 드러난 게 없으니까 괜찮겠지..."

집행관과 여우가 관련된 특급 신도.

스칼은 자꾸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서랍 안에 구비해 둔 처녀교 정보가 담긴 서류 뭉치를 확인했다.

기회 봐서 튀기만 하면 되니까.

***

"왜? 걱정돼?"

여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미 시발.

걱정이 안될 리가 있냐.

제국이랑 전쟁한다는 데.

나는 가슴속부터 차오르는 불안감에 검은 후드를 살짝 벗었다.

황제 이름을 새긴 옷을 안에 입고 다녀야겠어.

제국군 마주치면 그걸 흔들면서...

"제국이랑 전쟁이라는 데 걱정 안 돼요?"

황제가 어떻게 생겼더라?

늙은이였던 거 같은데.

"막내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잖아?"

여우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더 짙은 복숭아 향이 물씬 풍겼다.

"그러고 보니 여우는 왜 여기 있어요?"

"흐응­ 사기당했어! 나쁜 놈한테."

여우가 입을 뾰족 내밀며 대답했다.

"원래는 어디 있었는데요?"

자꾸만 내 볼을 찌르는 여우의 손가락을 애써 무시했다.

"구름섬! 에서 내려왔지!"

여우가 다른 손도 들어서 내 반대쪽 볼도 찔렀다.

구름섬이라면 재클린한테 들었던 거 같은데.

"거기 좋아요?"

"아니 완전 따분해. 재미없어."

푝푝­

여우가 입으로 이상한 효과음을 내며 내 볼을 찔렀다.

"그럼­ 여우도호 전쟁에헤 참여할 거예요?"

자꾸만 볼을 찌르는 여우의 손가락 때문에 발음이 샜다.

"음 고민 중이야 지금."

푝­

"고민이요?"

"응 조금 번거로운 상황이거든. 푸하하!"

여우의 양 손가락이 내 볼을 좁혀서 내 얼굴이 마치 붕어처럼 변했다.

그 모습에 여우가 크게 웃었다.

"신수라면서요. 고민할 게 뭐 있어요."

"막내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야."

여우의 붉은 눈이 다시 빙글 돌았다.

"저를요?"

"응 막내는 약하니까. 전쟁에는 위험하겠지?"

여우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내 귀를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 입꼬리가 풀렸다.

맞아 여우에 비하면 약하지.

너는 신수잖아.

그래도 난 좆밥은 아닌데...

"저는 도망갈 건데요?"

"도망은 갈 수 있어?"

내 질문에 여우가 그대로 되물었다.

"그래도 도망은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목소리는 내가 생각해도 자신감이 담겨있지 않았다.

"흐응­ 그거 오늘 하루종일 해주면 내가 도와줄게."

여우가 다시 벌러덩 드러누웠다.

맙소사 신수가 자위 중독이라니.

역시 교미하고 오기를 잘했다.

나는 깊은 물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했을까­

여우의 표정이 전보다 개운해졌다.

물론 내 온몸에서는 복숭아 향이 잔뜩 풍기고 있었지만.

"후­ 좋아! 막내는 내가 책임지고 도와준다!"

양엄지를 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여우가 말했다.

"막내는 내 전용 그거 기구니까! 완전 이거인!"

여우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저는 기구가 아닌데요.

"대신 나중에 또 만나면 나에게 그거 해줘야 해?"

여우의 웃음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약간은 슬퍼 보였다.

"그러죠 뭐. 여우님 처음도 저한테 주기로 했잖아요."

그에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도 따라 웃었다.

"아 맞다! 그렇네! 내가 약속을 했었지! 그럼 그럼!"

여우가 내게 달려들어 부드럽게 나를 안았다.

이제는 여우가 익숙하게 내게 입을 맞추었다.

"역시 막내는 맛있어­"

한참을 내 입을 휘젓던 여우가 살짝 떨어지더니 내 볼을 핥기 시작했다.

여우의 혀가 내 볼을 간질였다.

여우는 볼에서 그치지 않고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까 내가 살짝 벗어뒀던 검은 후드를 활짝 벌리고는 천천히 내 온몸을 핥기 시작했다.

여우가 서 있던 나를 부드럽게 밀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뒤에 있던 푹신한 의자에 몸이 놓였다.

"잠깐만요­!"

나는 다급하게 내 옷을 마저 벗기는 여우를 말렸지만.

"가만히 있어."

이미 맛이 간듯한 여우의 붉은 눈동자에 말을 잃었다.

너무 맛있어­

여우가 열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구석구석 내 몸을 핥았다.

마치 사탕이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나는 그대로 굳었다.

"여기가 제일 맛있네?"

요염하게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여우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래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 내가 성욕은 아무리 빼고 와도 여우의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어? 맛있는 게 커졌어! 너무 큰데­?"

귀가 녹을 것처럼 달콤한 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아래에 보이는 황홀한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

"막내! 맛있게 먹었어! 그럼 이따 소집에서 봐!"

활기찬 여우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난생처음 듣는 종류의 감사 인사에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사탕이라면 이미 다 녹아서 없어지지 않았을까?

사탕 안에 있던 잼을 다 먹고 나서야 여우는 나를 놓아줬다.

이제 나는 잼 없는 사탕이야.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전체 소집이라 그런 거겠지.

나도 그 사이에 섞여 숙소로 돌아갔다.

"오셨군요! 에이든님! 같이 가시죠!!"

숙소 앞에는 재클린과 내게 맞았던 특급 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재클린을 제외하고는 나를 보자 정자세를 취했다.

그 기합이 잔뜩 든 모습이 은근 마음에 들었다.

"그래 가자."

재클린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안내했다.

사실 안내할 것도 없는 게 벌레처럼 검은 후드를 잔뜩 눌러쓴 사람들이 다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내가 들어 왔던 곳의 반대 방향으로 향했는데 따라서 걷다 보니 동굴의 더욱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마침내 아카데미 전체 크기만큼 큰 공동이 보였고 거기에 사람들이 마치 벌레떼처럼 가득 들어 있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나도 그 벌레들 중 하나가 됐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건 처음 봤다.

아니 병신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많은 사람이 모인 만큼 공동은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거를 조용히 시키는 것도 일이겠는데.

"여기서는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그분 심기에 거스를 수도 있으니까요."

가득 차 있는 사람들 때문에 내게 붙어있는 재클린이 내게 말했다.

도대체 다들 그분 그분 하는데 그분이 뭔데 시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나는 입을 닫았다.

"쿵­"

그러다 큰 울림이 공동을 흔들었다.

그 울림에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큰 공동에 순식간에 침묵이 자리 잡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따라서 쳐다본 곳에는 금색으로 밝게 빛나는 왕좌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왕좌에 그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그가 '그'라는 것을 깨달았다.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모두에게 군림하고 있는 사내.

옷을 입지 않아 여실히 드러난 상체에는 굵은 근육들과 그 위에 흉한 상처들이 즐비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검은색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가면이 분명히 앞을 향하고 있었는데, 묘하게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력한 존재감이 밀도 높게 느껴졌다.

아니 이 큰 공동 자체를 그의 존재감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존재감이 모두를 짓누르는 것처럼 커졌다.

공동안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 안에서 오직 그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모두가 그의 입에 집중해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길고 깊은 정적이 지나가고­

그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입이 짧은 단어를 뱉었다.

"처녀­."

""처녀!!!!""

그가 말하자 공동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따라서 소리쳤다.

애미 시발.

이 미친 조직에서 도망쳐야겠어.

"처녀!"

조용하게 나도 따라 외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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