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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94화 (94/233)

〈 94화 〉 멈추지 않는 주둥이.

* * *

"정말 에이미야? 에이미­ 진짜로 나를 구하러 온 거야? 나 너무 무서웠어. 다 포기하고 싶었어­"

에이미의 손에 매달린 에밀라가 간절하게 불렀다.

에이미는 에밀라를 보는 순간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어떻게 자신이 에밀라를 포기할 생각을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에밀라는 에이미의 전부였다.

아니 전부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비록 에이든과 몸을 섞으며 잠깐동안 정신이 흐려졌었지만, 에밀라를 보는 순간 흐릿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늘 몸이 약해 마을 아이들과 놀지 못하던­

그런 에밀라를 지키기 위해 에이미는 열심히 수련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아름다운 여자로 사는 것만큼 힘든 건 없었으므로.

결국 에이미는 중급 용사 자격까지 딸 수 있었다.

에이미가 중급 용사를 딴 날 에밀라와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었다.

중급 용사가 된 후에 작은 임무를 받기 위해 마을을 떠났었다.

그때 이유 모를 불안감이 들었지만, 에밀라가 웃으면서 떠밀었다.

어서 갔다 오라고 자신은 이곳에 있을 테니까.

에이미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마을은 이미 박살 나 있었다.

에이미는 이곳이 지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급히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뛰어갔지만, 그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밤마다 자신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던 희고 가는 팔이 핏물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슬플 정도로 고운 손은 무언가를 강하게 쥐고 있었다.

에이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손안에 담겨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어느 날 지나가다가 자신이 보고 이쁘다고 했던 반지가 들려 있었다.

언젠가 이런 반지로 청혼을 받고 싶다고 장난스럽게 말했던 그 반지.

그 반지가 피로 점철된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응응 나야 에밀라! 내가 좀 늦었지 미안해­"

에이미는 자신의 옷을 벗어 에밀라를 덮어주고 다시 걸었다.

"흐윽­ 에이미를 다시 볼 수 있다니... 신이 정말 존재하나 봐­ 내가 매일같이..."

에밀라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애타게 에이미를 불렀다.

신이 있었으면 눈처럼 착한 너한테 이런 일을 겪게 하지 않았겠지.

불같은 분노를 느끼며 에이미는 욕지기를 삼켰다.

에밀라는 욕을 싫어하니까.

"... 걱정하지 마 에밀라는 내가 꼭 지킨다고 했잖아."

에이미는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가벼운 에밀라를 안으며 속삭였다.

"...응 믿고 있었어­ 에이미. 고마워 내 사랑 에이미."

에밀라가 힘없이 웃으며 에이미의 품에 파고들었다.

에이미가 그런 에밀라의 입에 작게 입 맞추려 했다.

"나 더러워졌어 에이미­ 내 더러움이 에이미에게 옮을지도 몰라..."

에밀라가 에이미의 입맞춤을 고개를 돌려 피했다.

에이미의 눈에 흉터 가득한 에밀라의 몸이 보였다.

으득­

다 죽여버릴 거야.

"걱정하지 마. 에밀라는 늘 에밀라니까. 에밀라가 어떻게 더러울 수가 있겠어? 나의 에밀라인걸"

에이미가 그런 에밀라의 볼을 작게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에이미의 눈치를 보던 에밀라가 작게 저항하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에밀라의 볼에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지금 다른 놈들은 다 밖에 있다고 하니까 나갈 수 있을 거야."

에이미가 에밀라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문득 두고 온 에이든이 생각났다.

마음이 마치 돌덩어리가 들어간 것처럼 무거웠다.

어떻게 됐든 자신의 약속을 들어주기 위해 도망치지 못한 거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들을 지키려 기꺼이 검을 뽑아 남았다.

아마 에이든은 죽겠지.

상대는 자신이 보기에도 강했으니까­

"괜찮아 에이미?"

에밀라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 괜찮아 빨리 가자."

에이미가 불안한 눈빛으로 보는 에밀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몸을 섞고 내가 에이든을 좋아하는가 착각하기는 했지만­

에이든은 에밀라가 아니니까.

에밀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았으면 좋겠어 에이든.

그러면 무엇이든 널 위해서 해줄게.

끝이 약간 올라가 좋지 않은 에이든의 인상이 생각났다.

에이미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지우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입구에 가까워졌을 때­

뚜벅뚜벅­

검은 단발 소녀가 동굴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온몸에 피를 잔뜩 묻힌 소녀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소녀는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 모습에 이유 모를 공포를 느낀 에이미와 에밀라는 숨소리마저 죽이며 천천히 걸었다.

마치 포식자가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녀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소녀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보였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아서 더욱 기괴했다.

마치 어둠마저 빨아들이는 것처럼 칠흑같이 검은 단발머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에이미의 손을 잡은 에밀라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에이미는 고개를 돌려 에밀라에게 애써 웃음 지어줬다.

에밀라는 눈을 질끈 감고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마침내 소녀의 옆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소녀는 불안한 그들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소녀에게서 조금 떨어졌을 때,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입구야."

덜덜 떨고 있는 에밀라를 다시 안아주며 에이미가 말했다.

에이든?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나가면 사람들 없는 곳에 가서 둘이 조용하...?!"

덜덜 떨면서 말하던 에밀라의 말이 멈췄다.

그들의 몸이 마치 투명한 거인에게 잡힌 것처럼 순식간에 공중으로 들렸다.

아무 전조도 없이 발휘된 힘에 둘 다 상황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

몸을 터뜨릴 것처럼 압박하는 힘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끄으읅­

몸이 약한 에밀라는 벌써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에이미는 그 모습에 어떻게든 여기서 풀려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마치 인간에게 들린 벌레의 심정을 느끼며 에이미는 이를 질끈 물었다.

둘이 보이지 않는 힘에 빠르게 동굴 안쪽으로 끌려갔다.

소녀의 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둘이 멈췄다.

"너 에이든 냄새가 나는데?"

소녀의 입에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에...!"

소녀의 입에서 나온 에이든이라는 단어에 에이미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압박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건방진쓰레기가에이든을건든걸까?"

소녀가 무감정하게 중얼거리며 에이미에게 다가왔다.

에이미는 그런 작은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공포에 온몸이 풀어졌다.

하복부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냄새나더러워"

에이미의 바로 앞에 선 소녀가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에이미를 가리켰다.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에이미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에이미의 배가 갈라지며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소녀의 흰 손이 갈라진 에이미의 배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마치 서랍에서 물건을 찾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움직이던 소녀의 손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소녀의 손에는 불투명한 액이 잔뜩 들려 있었다.

소녀는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손에 들린 액들을 소중하게 담았다.

가득 찬 유리병을 사랑스럽게 쳐다본 소녀가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건방진쓰레기들"

소녀는 다시 뒤로 돌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에밀라의 온몸이 조각나서 무너지는 게 에이미에게 보였다.

마치 애초부터 조각나 있던 것처럼 피가 쏟아지며 무너졌다.

에밀라가 너무도 작게 조각이 나서 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에이미는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았지만, 이내 자신의 몸도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철벅철벅­

피 웅덩이를 밟는 작은 발소리만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웃음기가 잔뜩 섞인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며 정신이 멀어졌다.

***

사내가 나를 향해 딱밤을 쥐었다.

사내에게 손가락 하나로 붙잡혀 있는 나는 그 딱밤을 피할 수 없었다.

이내 사내가 내 가슴에 딱밤을 먹였고­

쿵­!

몸이 부서지는 통증을 느끼며 뒤로 날아갔다.

애미 시발 무슨 딱밤이 저렇게 세!

저 새끼는 딱밤으로 세계를 평정할 게 분명했다.

사내의 딱밤에 날아간 나는 벽에 처박혔다.

딱밤을 맞기 전에 모든 기운을 가슴 쪽으로 돌려둬서 뼈가 부서지지는 않은 것 같지만,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느껴졌다.

"말해보게­"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내 멀어지는 정신을 일깨웠다.

애미 시발.

뭘 말하라는 거야.

"뭐를 시발! 쿠흡­"

입에서 기침처럼 피가 잔뜩 뿜어져 나왔다.

나 진짜 뒤지나 봐 시발.

피 내뱉는 거 뒤지기 전에 하는 대표적인 거 아니야.

"정말 그 아이의 어미가 창부인가?"

사내가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내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필멸자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과도 같아 보였다.

"맞다니까 시발. 확실해 내가 그 새끼 어미한테 어제 실컷 박았거든 개새끼야. 한 열 번은 했을걸? 내가 정력이 좀 좋거든. 퉤!"

마치 나를 가지고 노는 것만 같은 사내의 행동에 욱하는 감정이 올라와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피가 잔뜩 섞인 침을 땅에 뱉었다.

아닌가 저 정도면 침이 섞인 피인가.

사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시원하게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그 아이의 어미가 여기 있을 리가 없으니... 거짓말이군?"

사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안도가 담겨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안에 싸지는 않았거든­ 니 조카 하나 더 생길 걱정은 안 해도 돼. 아닌가?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새끼들이 많이 쓴 것 같던데. 조카가 뒤졌으니까 하나 더 생기는 게 너한테도 좋지 않겠냐? 낄낄. 조카 불변의 법칙 뭐 그런 거처럼?"

어차피 뒤질 거 시원하게 입을 놀렸다.

여기서 저 새끼한테 빈다고 해도 자신의 조카를 죽인 나를 살려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거칠게 말을 내뱉으니 가슴이 시원해졌다.

내 욕지기가 사내의 인식 범위를 넘어섰는지 사내가 다시 멈췄다.

"왜? 너도 좋잖아? 조카 또 생기면. 시발 새끼야."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애써 움직여 검을 다시 잡았다.

검을 지팡이 삼아 다시 일어섰다.

가만히 뒤질 수는 없지 개새끼.

가슴에 남아있는 티끌만 한 기운을 억지로 움직였다.

[지금 소년의 몸으로는 무리라네!]

그럼 너가 나와서 저번처럼 돕던가 시발.

[내가 나가더라도 지금의 몸상태로는 가망이 없다네...]

그럼 시발 닥치고 있어.

어차피 뒤질 거면 나로 죽고 싶었다.

"후­ 시발. 왜 조카가 더 생긴다는 소식에 좋아 죽을 것 같아? 조카 선물로는 뭘 준비할 거야? 내 생각에는 힐링 포션이 좋을 거 같은데 그 새끼 어미한테 성병이 좀 있는 것 같거든. 어제부터 가렵더라고 시발. 어쩐지 존나 검붉은 색이더라니 쯧."

티끌만 한 기운이 내 의지에 따라 천천히 몸을 돌았다.

나는 항상 최후를 생각했었다.

내가 제일 두려웠던 건 보잘것없는 내가 보잘것없이 죽는 것.

예를 들면 오크한테 맞아 죽던가­

산적한테 삥 뜯겨 죽는다던가 하는 것 같은 보잘것없는 죽음일까 봐.

항상 두려웠다.

하지만 미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 정도의 사내에게 죽는다면­

보잘것없는 죽음은 아니겠지?

아마 어딘가에 작게 적힐 만하기는 할 거야.

각오를 다지며 기운을 다시 돌렸다.

처녀교의 수장에게 맞아 죽다­

아닌가 시발 좆같은데 이것도?

"...그만­"

사내가 고통스러운 듯 읊조렸다.

"그만은 뭘 그만이야 개새끼야. 그만은 매일 같이 수백 명의 사내를 받는 그 새끼 어미한테 그만이라고 해야지. 빨리 가서 말리라고!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새끼 어미는 헐떡이고 있다고!"

점점 떨리던 손이 진정되어 갔다.

그래 시발 저 새끼의 흉터투성이인 흉측한 몸에 빈자리 하나 찾아서 내 서명도 남기고 간다.

"그만!"

사내가 부르짖으며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분명 저 멀리에서 휘두른 주먹이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마치 산이 내게 밀려 들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애미 시발.

저 새끼 치사하게 원거리 공격하네.

쯧 서명 못 남기겠네.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내디디며 검에 기운을 담았다.

내게 밀려들어오는 저 태산 같은 기운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기운이 나를 덮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뜨겁지만 따뜻하기도 한 느낌이 들었다.

태산 같던 사내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내 앞에는 탐스러운 아홉 개의 꼬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짙은 복숭아향­

잊을 수 없는 냄새.

"막내­ 약속 시간 안 지키네?"

은색 빛으로 짙은 생머리 위에 탐스러운 은색 귀가 달린 여우가 나를 돌아보며 밝게 웃었다.

존나 늦게 오네 시발.

"저 개새끼가 방해했어요. 쿨럭!"

나도 따라서 멋지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피가 섞인 기침에 흉하게 웃었다.

여우가 내 거친 말에 꺄르르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이 짙게 담겨 있었다.

"저 개새끼 이길 수 있어요?"

소매로 입에 묻은 피를 닦으며 물었다.

"당연하지. 지금 내 꼬리가 아홉 개잖아? 식은 케이크 먹기란다!"

여우 말에 따라 탐스러운 꼬리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꼬리였다.

"그러니까 막내는 먼저 나가있어­ 방해되니까!"

여우가 환하게 웃으며 내 옷을 가볍게 잡았다.

저거 시발 그 대사잖아.

불안하게 왜 갑자기 그 대사를 내뱉는데.

"지랄하지 마요. 같이 싸워요 그냥."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잡은 손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여우가 내게 짧게 입을 맞추었다.

여우의 입을 타고 짙은 복숭아 향이 넘어왔다.

이제는 능숙해진 여우의 혀가 순식간에 나를 희롱했다.

"어때? 이거야?"

내게서 떨어진 여우가 달콤한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네! 완전."

나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 계약을 어길 셈이냐!"

사내의 기운이 공간을 무겁게 짓눌렀다.

작은 돌들이 공중에 떴다가 떨어졌다.

자기가 무슨 드래곤이야?

"진짜 저거 이길 수 있다고요?"

전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은 사내의 태도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럼. 식은 케이크 먹기라니까. 신수는 거짓말을 못 한단다­ 그러니 먼저 가 있으렴."

여우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좆밥인 내가 있어봤자 방해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우를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스칼! 얘도 데리고 가!"

여우가 소리치며 나를 밀었다.

내 몸이 보이지 않는 힘에 부드럽게 밀려 날아갔다.

날아간 나를 어떤 사내가 받아들었다.

얼굴을 보니 그때 위에 올라가서 설명하던 재수 없게 잘생긴 사내였다.

사내의 품에 안기는 건 별론데.

사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사내는 나를 땅에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이번만입니다."

스칼은 사내를 잡아 뒤로 뛰었다.

굳이 이런 짐 덩어리를 떠안고 싶지는 않았지만, 미인의 부탁이었다.

그것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미인의.

남자로서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여우의 혼이 나갈 것 같은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었다.

근데 더럽게 무겁네.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칼이 에이든을 안고 멀어지는 것을 보며 여우가 작게 웃었다.

"여우­ 네가 감히 계약을 어기고 무사할 것 같은가? 첫 유희가 이대로 끝나도 괜찮은 건가! 매개체가 없는 네가 꼬리를 전부 꺼내면 신수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급하게 말을 하는 사내를 보며 여우가 웃었다.

사내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의 자신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사내였다면 힘들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사내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결국 매개체를 찾아내지 못한건 아쉽지만­

"나름 충분했거든. 그리고 지금이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순간인 것 같아."

그래야 다음 만남이 제일 가치가 있어지니까­

여우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하늘거리는 여우의 꼬리에 영롱한 불들이 솟구쳤다.

으득­

사내는 여우를 보며 마주 기세를 폭발시켰다.

"어디 꼬맹이가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여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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