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95화 (95/233)

〈 95화 〉 탈출하는 에이든.

* * *

그는 정말 오랜만에 나약함을 느꼈다.

능력을 얻고 나서는 거의 처음 느껴보는 압도적인 나약함.

자신의 모든 것을 꺼냈지만 여우의 손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아니 손끝이 아니라 저 흰 도복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우습게도 불타 없어진 오른팔에서 통증을 느끼며 그는 숨죽였다.

마치 죽은 것처럼.

그에게는 일어날 힘조차 않았다.

그는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여우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연민을 느끼도록 최대한 아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우는 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여우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치며 기다렸다.

올 때가 됐는데, 왜 이렇게 늦는 거지.

공간이 찢어지며 익숙한 얼굴이 쑤욱­ 하고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술냄새가 가득 퍼졌다.

"오랜만이다! 여우야."

널찍한 두꺼비의 얼굴을 보며 여우는 의아했다.

"아저씨! 아저씨가 오셨어요? 의외네요?"

오랜만에 보는 다른 신수에 대한 반가움이 여우의 목소리에 가득 담겨 있었다.

"크흠­ 뭐 그런 일이 있었다. 의외로 유희를 일찍 끝냈구나. 나는 네가 꽤 오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두꺼비가 주변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둘러보며 대답했다.

"저도 오래 있고 싶었는데­ 일이 그렇게 됐어요."

여우가 짙은 아쉬움이 물씬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으냐.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야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고. 크흠."

두꺼비가 짐짓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뭐야? 아저씨도 그 말 알아요?"

여우가 두꺼비를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습관처럼 하는 말 아니냐­ 쿠후훗! 그래서 나는 항상 마지막 잔을 버리지! 쿠후후훗!"

두꺼비가 입에 물린 술잔은 빼면서 웃었다.

"아저씨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그거 기분 나빠요."

여우가 경박한 두꺼비의 웃음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 뭐. 이로써 여우 너의 유희는 끝났다."

두꺼비가 여우의 시선을 피하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묘한 두꺼비의 태도에 여우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여우는 두꺼비가 자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음을 짐작했다.

"일단은 구름섬으로 돌아가자꾸나. 다른 신수들이 너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두꺼비는 필사적으로 여우의 시선을 피했다.

이 눈치 빠른 꼬마 신수가 벌써 뭔가 눈치챈 것 같은 느낌에 불안했다.

최대한 느긋한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날카로운 여우의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

"흐응­ 일단은 돌아가죠.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말이에요."

두꺼비 아저씨였구나­

여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이대로 그냥 가도 되느냐?"

"왜요?"

"이거­ 아직 살아있는데?"

그는 남자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와 동시에 오른팔의 통증도 그를 덮쳤다.

"저 봐봐 움직이잖아. 펄떡! 펄떡! 마치 물고기 같구나­"

두꺼비가 익살맞게 웃으며 그를 가리켰다.

"네. 선물이에요 선물."

여우는 그가 아직 살아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고작 팔 하나 뽑았다고 죽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의 신력으로 팔을 태웠으니 치료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했던 팔 부분을 신력으로 태운 만큼 그가 약해지기도 했고.

"저게 선물이냐는 말이냐?"

두꺼비가 짧은 발로 그를 쿡 찔렀다.

그가 움찔했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네­ 적당히 약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인간들은 적당한 위기가 있어야 강해지더라고요. 이상하지만."

여우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검을 든 막내의 모습을 상상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속이 따뜻해지며 이유 모를 포만감이 느껴졌다.

지금도 저 두꺼비의 널찍한 머리를 때려 기절시키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어차피 다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여우가 두꺼비를 마치 먹이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응시했다.

"참 악취미구나. 뭐 네가 그렇게 판단한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두꺼비가 품에서 이상한 언어가 잔뜩 적힌 종이를 꺼냈다.

"내게 붙어라. 구름섬으로 단숨에 갈 테니."

두꺼비가 이유 모를 말들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저씨. 제가 몰래 나올 때 우리 구역 안에 저 아이가 있던데... 담당 누구였어요?"

두꺼비에게 여우가 붙으며 작게 물었다.

두껍!

여우의 질문에 두꺼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눈치 빠른 꼬맹이.

"흐음­ 그리고 이번 귀환 담당은 제 기억이 맞다면 백호 아저씨일 텐데... 어찌 된 일이려나?"

여우의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호선으로 휘었다.

두꺼비는 등에서 술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여우의 말을 무시했다.

일단 구름섬으로 빨리 돌아가 구름 속에 숨으면 이 꼬맹이는 자신을 못 찾을 것이다.

빨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두꺼비의 주문이 점점 더 빨라졌다.

"다음 유희 차례 아마... 두꺼비 아저씨였죠?"

두꺼어어업!!

비명 같은 두꺼비의 주문이 끝나며 둘이 사라졌다.

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붙어낼 수 있었다.

나를 살려주다니 그 선택을 꼭 후회시켜주마.

그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처녀를 100명만 더 흡수했어도­

아니 90명만 더 흡수했어도 여우를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오른팔을 잃었다는 것은 뼈아프지만 살았다는 게 더 중요했다.

자신의 능력은 그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았으니까.

기고만장한 건방진 신수들도 나중에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빨리 나가서 닥치는 대로 처녀들을 겁탈하자.

지금까지 너무 안일하게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힘을 돌렸다.

몸이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통쯤이야 그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머릿속으로 가장 가까운 마을을 떠올렸다.

거기는 저번에 교에서 수확하러 갔기 때문에 아마 처녀가 없을 것이다.

그 처녀들을 다 자신이 수확했다면 이 정도로 무력하게 지지는 않았을 텐데.

단체를 만드는 판단은 그에게 처녀를 더 편하게 공급해주었지만, 그가 모든 처녀를 취할 수도 없게 됐다.

그가 마침내 자리에서 바로 설 수 있었다.

건방진 신수들...

반드시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그의 눈이 붉은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때 그의 귀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직 나가지 않은 신도가 있었나 보군­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여우도 못 이긴 자신이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건 분명했다.

일단 신도들을 뒤로 물리고 처녀들을 더 많이 공급하도록 바꾼 다음에...

뚜벅뚜벅­

묘하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쪽으로 오거라!!"

그는 흘린 피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소리쳤다.

마침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교에 저런 미인이 있었나?

아니 확실히 없었을 것이다.

저렇게 위험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를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가슴이 작은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훌륭한 아니 최고의 처녀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삐익­

***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고깃덩이 앞으로 흰 가면을 쓴 사내가 다가갔다.

"아하하핫!!! 드디어! 드디어! 아아!"

사내가 광소를 터뜨리며 고깃덩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저는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아하핫! 그분은 왜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안배를 주신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흥분한 사내의 머리가 기괴할 정도로 빠르게 돌아갔다.

우드득­ 우드득­

머리를 몇 바퀴나 돌린 사내는 개운한 듯이 기지개를 켰다.

사내는 천천히 자신의 가면을 벗어서 옆에 내려놓았다.

가면을 벗고 드러난 사내의 얼굴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했다.

얼굴 가득한 흉터에 마치 고기를 막무가내로 뭉쳐둔 것 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구멍의 크기로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입인지 대충 확인할 수 있었다.

사내는 가장 큰 구멍을 더욱 크게 벌려 땅에 떨어진 고깃 덩어리들을 주워서 넣었다.

으득 쩝쩝.

소름 끼치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사내는 핏물에 절은 고깃덩이들을 열심히 주워 입으로 넣었다.

"구워 먹을 걸 그랬나? 구워 먹는 게 훨씬 맛있던데!! 하지만 그러면 그분의 안배가 사라질지도 모르잖아요? 아하핫!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사내의 흉측한 얼굴에서 점점 상처가 사라져갔다.

"아하핫!!!! 이런 느낌이였군요!!! 멍청하기는!!! 이런 힘을 가지고도 이런 장난밖에 못하 다니!!! 아하핫! 잘 보세요!!"

사내가 익살맞게 머리를 돌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건 저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할 테니까!!! 아하핫!"

사내는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우드득­

***

사내의 품에 안겨서 도망가는 것은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차라리 비키한테 안겨 있었던 때가 더 나았다.

그때는 내 마음을 위로해줄 파멸적으로 거대한 덩어리들이라도 있었지.

그래도 사내는 의리가 있는 성격인지 나를 끝까지 챙겼다.

나였으면 남자 따위 버리고 갔을 거 같은데.

사내는 아래로 입구가 난 토굴로 향했다.

정말 들어가기 싫게 생겼다.

"몰래 만들어 둔 비상구라네. 정문으로 가면 그 미친놈들이랑 조우해야 하니까 말이야."

내 시선을 눈치챈 사내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토굴 부분에서는 나도 스스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아직 못 먹은 에일 버드 튀김이 많아.

애미 시발.

격렬한 움직임에 배의 상처가 다시 터져 잠시 몸이 흔들렸다.

심지어 토굴이라 스스로 내가 누울 무덤에 들어간 느낌 같았다.

이 정도면 바람직한 시체인가.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마침내 토굴 밖으로 나왔을 때 밖은 비가 시원하게 오고 있었다.

여름날에 내리는 비라 끈적한 습기가 몸에 잔뜩 들러붙었다.

오랫동안 동굴 생활을 해서 그런지 밖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눈이 부셨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게."

먼저 나와 앉아있던 사내가 조언했다.

사내의 말에 따라 천천히 눈을 적응시켰다.

그렇게 둘이 빗속에서 한참이나 멍하게 앉아 있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사내의 부축을 받아 옆에 있던 큰 나무의 밑동을 기대 앉았다.

몸이 빠져나간 피와 차가운 비에 젖어서 점점 더 차가워졌다.

추위에 몸이 존나 떨리지만 애써 참았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다른 남자한테 춥다고 안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까 보니 상처가 있는 것 같던데, 이걸 뿌리게."

사내가 내게 투명한 유리병을 건넸다.

애미 시발 이거 그거잖아.

내 보급품 상자에 있었던 거.

"처녀의 애액이 들어가기는 했어도 그 효과만큼 진짜니까 믿어보게. 하하 그리고 간부용이라 죽지만 않으면 모든 상처가 회복 될 거야."

사내가 작게 웃으며 내게 유리병을 던졌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유리병을 땄다.

근데 유리병에 담겨 있는 액체에서 이상하게도 익숙한 향이 났다.

내가 시발, 이 향을 어디서 맡았더라?

킁킁­

이거 시발 성수랑 향이 똑같네?

왜 시발 성수랑 처녀의 애액으로 만든 거랑 향이 같은 거지?

미묘하게 머리를 가렵게 하는 느낌을 받으며 유리병을 상처에 부었다.

"아악! 존나 따가워 시발!!!"

상처를 불로 쑤시는 듯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내 비명은 쏟아붓는 빗소리에 금세 눌렸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끔찍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하하하! 내가 말해주지 않았군. 그거 존나 아프다네."

사내가 시원하게 웃으며 내게 설명했다.

애미 시발 그런거면 빨리 말해줘야지.

사실 빨리 말해줘도 별 차이는 없지만.

상처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사내의 말처럼 효과는 진짜인지 상처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사라졌다.

효과 안 좋았으면 넌 나한테 뒤졌어 시발.

존나 아프네.

나는 기운을 조금이라도 차리기 위해 남은 액체를 들이마셨다.

익숙한 비린맛이 입을 타고 넘어갔다.

이 액체가 내가 물처럼 마셨던 성수와 맛까지 비슷하다는 점이 묘하게 찝찝했다.

"여기서 좀 쉬고 가지. 이대로 움직였다가 마물을 만나면 끝이니까 말이야."

사내가 피곤함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될 대로 되라지 시발.

"일어나게."

사내의 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비가 조금 약해져 있었다.

뭐야 시발 나 잔거야?

"한 다섯 시간 정도 지났네. 슬슬 움직이지."

사내가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감았다가 뜬 거 같은데 벌써 다섯 시간이라니.

그래도 눈을 감기 전보다 몸에 기운이 돌아오기는 했다.

기운을 돌려서 몸에 남은 한기를 제거했다.

안간힘을 다해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워 몸을 휘청이며 옆에 있는 나무를 잡았다.

"괜찮은가?"

사내가 떨어져서 물었다.

다행이었다.

혹시나 부축하려 했으면 주먹을 날렸을지도 몰라.

"후­ 예. 뭐 대충 걸을 만 합니다."

깊게 숨을 내쉬며 발을 풀었다.

"그럼 움직이지."

낮게 말한 사내가 걸었다.

사내가 길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나도 모르기 때문에 따라서 움직였다.

"...어쩌다 이런 조직에 있었던 겁니까?"

사내는 재수 없게 잘 생겨서 이런 조직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마치 도서관 사서나 마탑에 박혀서 연구하는 마법사 같은 게 잘 어울리는 외모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사람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자네도 그렇고."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정말 멀끔하게 생겼는데 말이야.

처녀교라니... 역시 사람은 겉이 다가 아니야.

나도 겉이 전부가 아니지.

괜히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둘이 한참을 걷다가 다시 나무 아래 앉았다.

이 숲은 나무가 정말 지겨울 정도로 끝도 없이 있었다.

하늘은 높은 나무들 때문에 보이지도 않았다.

목이 말랐기 때문에 입을 열고 내리는 비를 받아 마셨다.

"근데 꽤 높은 지위인 것 같은데 왜 도망가시는 겁니까."

그냥 조용히 둘이 앉아있기에는 뻘쭘해서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더 있어봤자 제국 공적이 되기밖에 더 하겠나­ 그 미친놈들이 제국군을 이길 수 있을 리도 없고."

사내가 인상을 쓰며 보이지 않는 하늘을 쳐다봤다.

"그것도 그렇군요."

내가 봤던 그는 강하기는 했지만, 그 미친 노인네만큼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 머저리 같은 놈들."

사내가 부스럭대면서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혹시 먹을 거인가 싶어서 나는 그런 사내를 유심히 관찰했다.

사내는 품 안에서 이상한 막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끝부분을 톡톡 치더니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뭡니까 그거?"

나는 궁금증에 사내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사내는 흠칫 놀라며 내게서 안 보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태도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좋은 거구나.

"저도 하나 주시죠. 혼자만 하지 마시고."

좋은 거면 같이 좀 하자.

"자네도 마법 연초를 피는가?"

사내가 작게 연기를 내뱉었다.

"아뇨. 근데 일단 줘봐요."

"딱 한 개 남았네."

사내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듬뿍 묻어있었다.

"그러니까 달라구요."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애연가들에게 마지막 한 개비의 의미는 매우 크다네."

"사내가 되서 쩨쩨하게 이럴거에요? 나도 해보자구요."

사내의 거부 반응에 내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사내는 포기하지 않는 내 태도에 얼굴을 구겼다가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이게 꽤 중독성이 있다니까. 괜히 배울 필요가 없는 거야. 나도 피는 걸 후회하고 있다네."

주머니에서 나온 사내의 손가락 사이에 막대가 들려 있었다.

"달라니까요­"

나는 사내의 덜덜 떨리는 손에 들린 막대를 뺏어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사내가 했던 것처럼 끝쪽을 툭툭 쳤다.

막대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며 매콤한 연기가 입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켁켁! 뭐야 이거 시발!"

목을 태우는 듯한 연기에 다급히 막대를 입에서 뗐다.

그러자 냉큼 막대를 가져가려는 사내의 손을 피하고 다시 입에 물었다.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사내한테 다시 주기는 싫었다.

다시 한번 맡아보니 전보다는 좀 더 괜찮은 것 같았다.

깊게 들이마시니 머리가 띵하면서 통증이 덜해졌다.

"나쁘지 않네요. 아픈 것도 괜찮아지고. 이런 게 있으면 나눠서 해야지 혼자만 하려 그랬어요?"

연기를 밖으로 내뱉었다.

"크흠..."

사내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입에 물린 막대를 소중하게 매만졌다.

"그런데 왜 저를 데리고 온 거예요?"

내가 사내였으면 버리고 갔을 것이다.

아까 나는 짐 덩어리 그 자체였으니까.

"뭐 나 혼자서 좌절의 숲을 벗어나기 힘들기도 하고­"

사내가 다 탄 막대를 물웅덩이에 던졌다.

후­

사내의 입에서 연기가 길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요?"

막대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쉬웠다.

나쁘지 않은 기분인데 이거.

"미인이 부탁했으니까­ 원래 남자라면 미인의 부탁을 거절하면 안 되지."

사내가 시원하게 웃었다.

재수 없는 얼굴로 웃으니 더 재수가 없게 잘생겼다.

"멍청하네요."

막대가 더 줄어들었다.

아깝다.

더 없나?

"자네는 왜 거기 남아 있었나?"

사내가 나무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물에 손을 닦았다.

"저도 멍청했거든요."

마침내 내 입에 물려있던 막대도 다 탔다.

나도 아까 사내가 던졌던 것처럼 물웅덩이에 다 탄 막대를 던졌다.

물웅덩이에 빠진 막대가 마지막으로 연기를 작게 내뱉더니 사라졌다.

에이미는 잘나갔겠지­

어차피 내가 약속한 것은 지켰다.

대신 목숨까지 던졌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고 넘친다.

나중에 혹시라도 만나면 거스름돈을 받아야겠어.

"남자라면 멍청할 수밖에 없지. 특히 미인에게는 말이야."

사내가 손에 받은 빗물로 얼굴을 닦았다.

사내의 얼굴은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시원해 보였다.

크워어어어어!­

멀리서 마물이 숲을 울릴 정도로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몸을 이끌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몸을 풀면서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검을 휘두를 수는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손에 들린 검은 검을 대충 휘둘렀다.

보급품으로 받았던 검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다.

"그 검은 개리의 검이군. 자네가 해치웠나?"

내 검을 본 사내가 물었다.

"당연하죠."

나는 자신감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과정이 어떻게 됐든 내가 해치운 것은 맞으니까.

"자네 혼자서는 힘들었을 텐데­"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 누가 도와주기는 했어요."

"누가? 처녀교에서 자네를 도와 개리에게 대적할 사람이 남았었나?"

개리는 처녀교에서도 꽤 유명한 놈인데 말이야­

사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재... 뭐라고 했었지? 재..쿠련? 맞나? 하여튼 있어요. 최고의 남자 바드."

남자 이름 따위 기억할 필요 없었다.

검이 내 손에 착 붙었다.

좋네 루나검까지는 아니지만.

쿵!쿵!

마물이 냄새를 맡았는지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은 뭐 할 수 있는 거 있어요?"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에 집중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근육이 거의 붙지 않은 호리호리한 사내의 체형이 못 미더웠다.

그래도 간부니까 뭐라도 할 수 있겠지?

"음... 나는 마법사라네. 하지만 마물과의 전투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사내가 천천히 걸어서 나무 뒤쪽으로 향했다.

마법사인데 도움이 안 된다니?

심지어 그 조루였던 재 뭐시기도 한 방은 쐈는데.

"예? 마법사인데 도움이 안 된다뇨? 쓸 줄 아는 마법이 없어요?"

장난 치지마 시발.

"있기는 한데..."

사내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마법을 쓸 수 있는데요?"

뒷말을 흐리는 사내의 태도에 불안함을 느꼈다.

콰앙­!

크롸아아아아!

앞쪽에 있는 큰 나무를 우지끈 부수며 초록색의 큰 마물이 등장했다.

3미터는 될 것 같은 무식한 크기에 개를 닮은 입에서는 끈적한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마물이 코를 소름 끼치게 킁킁거렸다.

개새끼처럼 냄새를 잘 맡는가 보네.

비가 왔는데도 발견할 정도면 말이야.

"그... 부끄럽지만 이쁜이 수술 마법이라든지... 처녀막 복원 마법이라든지... 다 그런 종류의 마법들 뿐이라네. 미안하네­"

이제는 완전히 나무 뒤로 숨은 사내에게서 조심스러운 답이 나왔다.

애미 시발.

쓸 줄 아는 마법이 죄다 그따위라니.

처녀교 간부 맞네.

그냥 저 새끼들이랑 같이 뛰쳐나가서 뒤지지 그랬어 시발.

크롸아아!!!

쿵! 쿵! 쿵!

마물이 뛸 때마다 땅이 약간씩 진동했다.

나는 검을 다잡고 내게 달려드는 마물을 향해 뛰었다.

내디디는 발걸음이 물과 피곤함에 젖어 무거웠다.

이를 악물고 검으로 기운을 보내 피워냈다.

이제는 익숙한 회색빛의 검기가 나를 안심시켰다.

[투쟁하고 투쟁하라! 끊임없이 투쟁하면 늘 승리는 나의 것이니! 크하하하하!!!]

닥쳐 좀 시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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