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98화 (98/233)

〈 98화 〉 부넬라 성 나들이.

* * *

오랫동안 세상을 덮을 것처럼 무겁게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쳤다.

해를 가렸던 먹구름이 비켜나며 따스한 기운이 땅을 내리쬐었다.

사람들은 하늘에 말갛게 뜬 해를 보며 반갑게 웃으며 거리로 나왔다.

그제야 가라앉았던 부넬라 성에 활력이 다시 찾아왔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생기를 곳곳에 뿌렸다.

물웅덩이에서 물방울이 튀며 햇빛을 잘게 쪼개었다.

상인들이 부랴부랴 가게를 열 준비를 했다.

마을의 처녀들은 그동안 밀렸던 빨래를 들고나와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다.

그렇게 성이 무겁던 잠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좆같은 날씨. 진작 좀 그치지 시발. 성에 들어오니까 비가 안 오네.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창밖을 보며 차오르는 욕지기를 뱉었다.

"맞아맞아. 조옷같은 날씨야!"

내 위에 행복한 표정으로 엎어져 있던 루나가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런 루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루나가 금세 다시 부들부들 떨며 쓰러졌다.

­딸꾹! 오랜만이구만 소년! 딸꾹!

그래.

오랜만에 듣는 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제라도 그친 게 어딘가. 자네는 어차피 먼 길을 떠나야 하지 않나?"

번듯한 옷으로 갈아입은 스칼이 차를 마시며 물었다.

재수 없게 생긴 스칼이 저렇게 각잡고 앉아 있으니 잘생긴 귀족의 표본 같았다.

그 모습에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쓸모도 없는게 괜히 잘생겼어.

"그거야 어차피 루나가 있으니까요. 그렇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거칠게 쉬는 루나를 톡톡 두드렸다.

루나가 파묻은 얼굴을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아직도 킁킁거리며 내 냄새를 맡고 있었다.

"자네에게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보군. 내가 태어나서 겪은 일 중에서 제일 이해가 안 되는 일이야."

나와 루나를 스칼이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사실 나도 아직 루나가 나를 좋아하는 게 이해가 안 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기 때문에 루나의 머리를 괜스레 쓰다듬으며 스칼에게 자랑스럽게 웃어줬다.

스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아저씨는 뭐 할거에요?"

내 손길에 루나가 기분 좋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와 마주친 제국군들이 내 이름을 듣자마자 황급히 성까지 안내했기 때문에 따로 검문을 받지 않았다.

그 덕분에 스칼은 운 좋게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경계가 허술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내 일이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성에 들어온 우리는 꽤 깔끔하고 괜찮은 숙소를 잡았다.

분명 다들 방 하나씩 잡았지만 내 방에 모여 있었다.

루나는 루나니까 내 배 위에서 신나게 뒹굴고 있었고 스칼은 혼자 방에 있다가 제국군에게 잡혀갈까 봐 두려운 것 같았다.

"음... 나는 내가 가진 마법들로 사업을 해보려고 하네. 꽤 잘되지 않겠나?"

스칼이 할 줄 안다고 했던 마법들이 생각났다.

이쁜이 수술 마법, 처녀막 복원 마법.

그런 마법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나?

"마법?"

루나가 마법이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스칼을 쳐다봤다.

"으음! 네. 여성의 미용과 관련된 마법들을 할 수 있습니다."

루나와 눈이 마주친 스칼이 화들짝 놀라며 경직된 말투로 대답했다.

"미용 마법?"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 미용이기는 한데..."

스칼이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스칼은 루나의 어려 보이는 외형 때문에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하긴 스칼의 마법들이 죄다 그 모양이니까.

"어떤 미용 마법?"

루나의 호기심에 찬 눈이 빛났다.

"그...그게 좀 말하기 좀 그런 것들이라... 하하."

스칼이 루나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흐렸다.

머뭇거리는 스칼의 반응에 루나가 내 위에서 뛰어 스칼의 옆에 섰다.

고양이가 연상될 정도로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루나와 스칼이 작게 중얼거리며 대화했다.

"남자들은 보통 처녀막에... 음부의 색이... 그 향기가..."

둘의 대화에서 가끔 들리는 흉악한 단어들에 애써 시선을 창으로 돌렸다.

­딸꾹! 꽤 강해졌군 소년? 재능이 전혀 없는 소년과 어울리지 않는 빠른 성취인데? 딸꾹!

검의 목소리에는 놀람이 가득 담겨 있어서 내 기분을 좋게 했다.

그렇지­ 내가 누군데 나 에이든이야 에이든.

천재 에이든이라고.

­크흡­ 그러니까 자네가 어떻게...딸꾹! 아니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딸꾹! 축하하네!

나라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데 뭘 축하까지.

내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딸깍­

문이 열리며 엉거주춤하게 선 드숀이 들어왔다.

성에 도착했을 때 나는 대부분의 흉터를 루나가 준 포션으로 치료한 후라서 따로 치료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누적된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서 휴식이 필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차마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곳을 다친 드숀은 성에 도착하자마자 냉큼 성당으로 달려갔다.

"...흐어어엉­ 크흐으으읍! 끄윽끄윽­"

드숀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방의 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자신의 주먹을 입에 물고 숨죽여서 울었다.

울 거면 다른 데 가서 울지 왜 굳이 남의 방에 와서 우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순결을 잃은 놈을 차마 쫓아낼 수 없었다.

드숀은 구석진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울었다.

"괜찮냐."

세상 서럽게 우는 드숀의 모습에 괜히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그래도 나 구하겠다고 온 녀석인데, 저런 꼴이 됐다니.

"...크흐으읍­ 나는 성당의 그 딱딱한 의자에서 찢어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내 차례를 기다렸지.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나는 부끄럽지만, 이 기분 나쁜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치료실로 향했지. 하지만 그 치료실 안에는 정말 참하게 생긴 수녀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참한 수녀님이 내게 어디를 다쳤냐고 묻더라고... 나는 고뇌 끝에 수녀에게 똥꼬가 아프다고! 시발!! 내 똥꼬가 헐었다고! 내 똥꼬가 씹창이 났다고!!! 으허어어엉!!! 그래도 그 착한 수녀님이 괜찮다고 웃어주면서 자신에게 다친 곳을 보이라고 하는 거야... 이를 악물고 흉한 침대에 누워서 수녀님에게 내 씹창난 똥꼬를 드러내버렸네! 수녀님이 내 똥꼬에 손을 올리고 치료했어... 치료하면서 구겨진 수녀님의 얼굴을 보고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억지로 참았다고! 그런데 그 수녀가...! 치료가 끝난 뒤에 또 남자와 관계를 가질 때에는 괄약근을 좀 더 풀어주고 하라고...! 급하게 삽입했다가는 이렇게 또 상처가 벌어질 수 있다고...!!! 나한테 충고했다니까!!! 으허어어엉! 나는 게이가 아닌데!!! 게이가 아니야!!! 크흐으읍­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가!! 그 수녀님 가슴도 커서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흐어어엉!!! 사랑했습니다...! 잠깐이지만 정말 사랑했어요!!! 이름 모를 수녀님!!!"

내 목소리를 들은 드숀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처럼 절절하게 말을 뱉어냈다.

나는 드숀의 말에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원하게 웃고 싶었지만 그러면 정말 드숀이 혀를 깨물것 같았다.

겨우 얻은 평화를 드숀의 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푸흡...그래도 치료했으면 큽! 이제 된거지. 살았잖아."

아 잠깐 이걸 어떻게 참냐고.

"나는 이제 끝났어... 내 똥꼬는 씹창이 난 거야... 씹창이... 내게는 이제 심기체 처녀를 따질 자격이 없어..."

말을 마친 드숀이 쭈그려 앉아서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적였다.

"그럼 처녀막을 에일 버드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어?"

"하하하... 아마 마나가 조금 많이 들기는 하겠지만 가능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론상으로는 맛도 조절할 수 있다는 거야? 에일 버드 튀김 같은 것으로?"

"그렇기는 한데... 음부에서 그런 맛이 난다고... 상대방에게 매력이 있을지는..."

어느새 루나와 스칼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씹창난 똥꼬를 가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주변에서 들리는 정신 나간 대화들에 눈을 조용히 감았다.

그래, 그냥 잠이나 자자.

­딸꾹! 처녀교에서 있었던 일들 좀 이야기해주게! 딸꾹! 소년! 그곳은 정말 처녀만 가득한가?! 딸꾹!

닥쳐 잘 거니까 시발.

***

잠시 잠을 자고 일어나니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시끄럽던 주변이 조용했다.

고개를 돌려 방을 살피니 다들 사라지고 내 발 쪽에 루나만 남아 있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일어나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루나가 손을 뒤로 숨겼다.

붉어진 얼굴과 묘하게 들뜬 숨이 무언가를 저지른 것 같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하지만 루나의 이상한 태도를 제외하고는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잠을 잔 것치고는 몸에 힘이 별로 없었지만.

아무래도 바로 회복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나?

피로를 회복하고 나니 허기짐이 느껴졌다.

"루나?"

내가 부르자 루나가 다시 내 위로 엉금엉금 올라왔다.

그 모습이 마치 애완동물 같아서 우스웠다.

"응응응."

내게 눈을 맞춘 루나가 힘차게 대답했다.

가까운 거리에 맡아지는 루나의 숨결이 달콤했다.

"나 배고파. 나가서 뭐 좀 먹을까?"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이 먹고 싶었다.

"응응응. 수도로 돌아갈까?"

루나가 내게 작고 하얀 손을 내밀었다.

아직 다른 애들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아 수도로 먼저 가기는 좀 그랬다.

그래도 나를 구하러 왔다는데 얼굴은 보고 가야지.

"아니. 그냥 여기까지 온 김에 구경 좀 하고 가자."

루나의 손을 잡는 대신에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나가 내 손길에 마냥 해맑게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풀린 다리에 애써 힘을 주어 선 다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팔에 루나가 냉큼 붙어서 나를 올려보며 헤실거렸다.

루나와 같이 밖으로 나왔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굳이 나를 막지 않았다.

해가 살짝 저물어 갈 때쯤이라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냄새에 홀린 것처럼 따라 걸었다.

내게 시선을 고정한 루나는 그저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앞을 보지 않는데도 넘어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들었나? 제국군이 처녀교를 거의 멸살했다고 하더군."

"나도 들었네. 처녀교도 제법 규모가 있다고 들었는데 역시 제국군에게는 안 되는 구만."

"그래도 처녀교 쪽에서 이상한 방법을 써서 제국군 쪽에도 제법 피해가 있다고 하더군."

주변에서 가끔 처녀교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렸다.

당연하지만 이 병신들은 제국군에 제압당한 것 같았다.

하긴 그 처녀막 연구를 하는 놈들이 제국군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놈들이 제국군 쪽에 유의미한 피해를 줬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걷다 보니 제법 많은 식당이 보였다.

"저기 갈까?"

루나가 내 손을 잡아끌며 옆에 있는 식당을 가리켰다.

식당에는 몽키 라면­ 이라고 적혀 있었다.

"루나는 라면 안 좋아하지 않아?"

라면도 괜찮기는 했지만, 그때 루나가 라면을 거의 먹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아니아니아니! 무조건 좋아해! 나 라면 완전 좋아해!"

내 질문에 루나가 발작하듯이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루나는 내 손을 끌고 라면 식당 쪽으로 향했다.

"아니. 오늘은 라면말고 고기가 먹고 싶어."

달려가려는 루나의 손을 살짝 끌었다.

나를 당기던 루나가 내 손에 끌려와 자연스럽게 내 품에 안겼다.

내가 그 정도로 세게 당기지는 않았는데.

"그래...? 근데 나 라면 진짜 좋아해...!"

킁킁거리던 루나가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키가 부족해 나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냥 고기가 먹고 싶어서."

"응응응! 그러네! 나도 고기가 먹고 싶네! 나 고기 완전 좋아해!"

루나가 방긋 웃으며 냉큼 내 말을 따라 외쳤다.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웃자 루나도 따라서 웃었다.

"여기로 가자 맛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는 큼지막하게 고기가 그려진 식당을 가리켰다.

이름은 '마법과 함께 고기' 라고 적혀 있었다.

고깃집에 마법이라니?

"응응응! 완전 맛있을 것 같네!"

루나가 내 말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인기가 많은 식당인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고기가 얼마나 맛있길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지.

괜히 그 맛이 더 궁금해졌다.

"어서...옵쇼! 두 분이신가요?"

우리에게 인사하던 종업원이 루나의 얼굴을 보더니 잠깐 말을 멈췄다.

"예. 두 명이요."

"...아! 두 분이시군요! 지금은 자리가 없어서 저쪽 대기실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내 대답에도 멍하니 루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종업원이 내 손짓에 정신을 차렸다.

종업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열 명 정도 입구 옆에 앉아있었다.

설마 저게 줄인가?

무슨 고기를 저렇게 줄 서서 먹어.

"기다려야 한다는데. 그냥 다른 데 갈까?"

아무리 고기가 맛있다 해도 한 시간은 좀 그렇지.

"...안 기다려도 돼!"

내 말에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응? 아니 저기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대기실을 가리켰다.

그런데 분명 방금까지 가득 차 있었던 대기실에 한 명도 없었다.

분명 방금까지 저기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기다림에 지쳐서 다들 급하게 갔나?

심지어 얼마나 급하게 갔으면 땅바닥에 물건들도 떨어져 있었다.

"이쪽에 성함을 적어주고 가시면 됩니다!"

종업원이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내 이름을 적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루나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얼마나 급하게 나갔으면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 있지?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에 대기실로 종업원이 왔다.

휑한 대기실을 둘러본 종업원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안내했다.

"이 집에서 뭐가 제일 유명한가요?"

"저희 식당은 렉시드 피그 고기로 제일 유명합니다. 넓은 초원에서 방목되어 자란 렉시드 피그는 그 육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이런 질문이 익숙한 듯 종업원의 입에서 설명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럼 그걸로 2인분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종업원이 상업적인 미소를 짓고 돌아갔다.

"렉시드 피그 고기 먹은 적 있어?"

"응응응! 맛있다고 했었어! 에이든이!"

루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루나의 전 남자친구 이름이 에이든이 아닐까.

루나는 에이든이라는 이름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고.

나름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럼 루나는 어땠어?"

"나도 맛있었어! 엄청! 에이든이 맛있었으니까­"

루나가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종업원이 우리 앞에 작은 판을 놓고 그 위에 고기를 올렸다.

"마법 판입니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주죠. 저희 식당의 인기 비결입니다. 하하!"

고깃집에서 마법 도구까지 사용하다니.

괜히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게 아니었구나.

하지만 마법 도구라기에는 느껴지는 기운이 매우 적었다.

고기 익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향긋한 고기 냄새에 금세 침이 고였다.

"그럼 맛있게 드십쇼!"

고기를 다 구운 종업원이 깊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적당한 크기로 잘려서 윤기가 줄줄 흐르는 고기를 포크로 찔러 집었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고기야.

괜히 고기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고기를 입에 넣고 씹자 말도 안 되는 맛이 느껴졌다.

아아­ 존나 맛있어 시발.

아마 나는 렉시드 피그 고기를 먹기 위해 그 역경을 헤쳐온 게 아닐까?

그동안 내가 겪었던 역경과 고난들이 고기의 기름에 씻겨져 흘러내려 갔다.

아마 지금도 울고 있을 드숀에게 먹이면 드숀도 눈물을 그치게 할 것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내가 먹기에도 부족한데 남자에게 줄 건 없었다.

나는 정신을 놓고 불판에 놓인 고기들을 집어 먹었다.

그렇게 마지막 한 점까지 먹어 치우고 배가 어느 정도 차니까 루나가 생각났다.

고개를 드니 루나가 아련히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역시 에이든이구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루나가 행복을 가득 담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고기를 먹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지만 굳이 이해하려 하지는 않았다.

루나가 루나한거니까.

당황하지 말자.

나는 손을 들어 2인분을 추가시켰다.

소스가 몇 가지 놓여있었는데 그중에서 초록색 소스가 눈에 걸렸다.

초록색이니까 무슨 풀 맛이려나?

그 소스 맛이 궁금해 고기를 소스에 듬뿍 찍어서 루나의 입에 넣어줬다.

"으흣! 하아­ 흐읍! 매워! 진짜 매워..."

루나가 얼굴이 벌게지면서 훌쩍였다.

반응을 보니 굉장히 매운 소스인 것 같았다.

내가 소스를 엄청 듬뿍 찍어서 먹였는데...

매워­!

루나가 맵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루나는 매운 음식을 못 먹는 구나.

붉어진 얼굴의 루나가 두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고기를 뱉지 않고 꼭꼭 씹었다.

"너무 매우면 뱉어도 돼."

내 말에 루나가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더니 억지로 씹었다.

루나에게는 내가 줬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았다.

나는 루나의 격렬한 반응에 슬그머니 다른 소스를 찍어서 먹었다.

이 소스는 맛있는데.

든든히 가득 찬 배를 두들기며 루나와 거리를 걸었다.

거리에는 단단히 무장을 한 사람들이 제법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녀교가 아직 완벽하게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숲에서 방황하던 게 생각났다.

농담이 아니라 이번에는 정말 죽을 뻔했다.

심지어 마물한테 강간당할 위기도 있었다.

"고마워 루나."

그 생각을 하자 루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루나가 안 구해줬으면 나도 드숀마냥...

"응응응?"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걷던 루나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마워 이번에 구해줘서. 진짜 죽을 뻔했어. 죽기 전에 루나를 본 순간 내가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나를 올려다보는 루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구해줘서 고마워­?"

고운 눈썹을 모은 루나가 내 말을 되새김질했다.

"응. 만약 이번에 루나가 없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어. 역시 나한테는 루나밖에 없어."

죽을 위기도 넘겼고 맛있는 고기로 배까지 채워 기분이 너무 좋았다.

"..."

루나가 내 모습을 보며 눈썹을 모았다가 폈다.

"내가 위험할 때 나타나 줘서 정말 고마워. 감동했어."

맞다 얘가 이해력이 좀 느렸지.

기분이 좋은 나는 친절하게 다시 한번 루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구해줘서 감동이야? 나밖에 없어? 고마워?"

루나가 빠르게 내게 물었다.

"응. 루나가 없었으면 나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초점이 나간 것 같은 루나의 모습에 불안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응응응! 역시 나밖에 없지! 나밖에 없어... 위기에서 구해줬으니까 나는 응! 에이든을 구해줬으니까? 위기에서? 위기에서 에이든을 구했어!"

고개를 숙인 루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든에게는 나밖에 없어."

한참을 중얼거리던 루나가 나를 보며 불길할 정도로 밝게 웃었다.

루나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이거 시발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내가 실수를 했나?

"자... 잠깐만 루나?! 루나?!"

소름끼치는 느낌에 황급히 루나를 불렀다.

"...나 잠깐 갔다 올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루나가 갑자기 사라졌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지?

루나가 사라진 허공을 쳐다보며 내가 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그냥 고맙다고만 한 건데...?

마치 목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거슬렸다.

마지막으로 봤던 루나의 초점없는 눈빛이 두려웠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루나에게 했던 말을 곱씹었지만, 도저히 내 실수를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고맙다고만 했는데?

그냥 바쁜 일이 생긴 거겠지?

그렇다고 해줘 제발.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옆에 작은 카페가 보였다.

빵 종류도 파는 듯 맛있어 보이는 빵들이 유리 너머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빨간색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아련한 통증을 느낀 나는 홀린 듯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피 향과 빵 냄새가 가득 맡아졌다.

카페 안에는 사람이 몇명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푸근한 인상의 여자가 내게 인사했다.

"...딸기 케이크로 주세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전시된 딸기 케이크를 가리켰다.

여자에게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받아 빈 자리에 앉았다.

자그마한 포크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힘주어 포크를 움직여 딸기 케이크를 찍었다.

딸기 케이크가 포크에 부드럽게 뭉개졌다.

작은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존나 달아 시발."

딸기 케이크는 입 끝이 저릴 정도로 달았다.

너무 달아서 단맛을 제외한 다른 맛들을 잊을 정도로 달았다.

나는 억지로 얼얼한 입을 움직여 케이크를 꼭꼭 씹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케이크 끝에 나는 딸기 향이 복숭아 향처럼 느껴졌다.

딸기 케이크를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맛 때문에 입안이 얼얼했다.

역시 딸기 케이크는 내 취향이 아니야.

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어디 모래 맥주 파는 곳 없나­

터질 것 같은 배를 벅벅 긁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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