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05화 (105/233)

〈 105화 〉 감옥에 가게 된 에이든.

* * *

무거운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이 새끼들은 평소에도 말이 없는지 단 한마디도 없이 묵묵하게 분위기만 잡고 있었다.

"그... 혹시 실례되지만 벙어리신가요?"

그에 따분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옆에 있는 덩치에게 조용하게 물었다.

덩치가 내 질문이 어이없는지 인상을 구겼다.

"벙어리 맞네... 그런 불편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라오신 모습이 대단합니다. 이렇게 번듯한 직장도 얻으시고."

불쌍한 사람들.

안쓰러운 눈빛으로 벙어리인 덩치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벙어리 아닙니다. 원래 죄인 호송할 때는 입을 열지 않는 게 규칙입니다."

내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수첩을 넘기며 말했다.

"아하­ 조용히 계시길래 벙어리인 줄 알았죠. 벙어리가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슬프겠어요. 이렇게 무슨 말이든 하면 심심하지도 않고 서로 친목을 도모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근데 죄인이라뇨? 아직 저는 혐의가 인정되지 않은 상태 아닌가요? 벌써 죄인이라니... 너무 당혹스럽네요."

옆에 있는 덩치의 팔뚝을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자꾸만 드는 불안감에 입을 계속 움직였다.

마차에는 창문도 없어서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괜스레 덩치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근데 정말 팔 근육이 돌덩어리처럼 딱딱하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죄인이 아니라 피고인 상태입니다."

머리가 아픈지 남자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네. 저는 그런 거에 민감하니까 조심해주세요. 혹시 팔뚝을 이렇게 두껍게 만드는 방법이 따로 있나요? 근육이 정말 돌덩어리처럼 딱딱하네요."

와 진짜 엄청 딱딱해.

밥 먹고 운동만 하나?

덩치도 자신의 팔근육이 자랑스러웠는지 무거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팔을 내가 더 만지기 편한 위치로 움직였다.

자꾸만 들썩거리는 입을 보니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애써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조금만 더 긁으면 말할 거 같은데?

만약 덩치가 말하게 되면 남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와­ 진짜 엄청 단단하고 굵네. 이 정도면 웬만한 마물은 다 때려죽일 수 있겠어요. 보기만 해도 무섭기도 하고. 흐으음­ 근데 여자들은 이런 근육 안 좋아한다던데?"

말하면서 슬그머니 근육쟁이들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을 꺼냈다.

덩치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움직였다.

눈도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게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는 듯했다.

입 열어라 이 새끼야!

말하고 싶어서 간지럽잖아!

한참이나 입을 달싹이던 덩치가 앞에 있는 남자를 힐끔 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거 생긴 것과 다르게 의외로 참을성이 뛰어나네.

그럼 이것도 참을 수 있을까?

"흐음... 근데 근육투성이인 상체와 다르게 하체는 좀 부실하네요. 원래 근육이란 건 밸런스가 중요한데. 밸런스 알죠? 밸런스­. 상체 운동법은 아시지만, 하체 운동법은 잘 모르나 봐요? 혹시 다음에 시간 나면 제가 운동이란 걸 제대로 알려줄게요. 운동 잘 모르는 사람이 막무가내로 운동하다가는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하하핫"

나는 슬그머니 녀석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내 팔근육을 자랑하며 이죽거렸다.

입 열어!

딱 봐도 좆밥인 놈이 너한테 운동 알려준다잖아.

이번에는 덩치에게서 격렬한 반응이 나왔다.

덩치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얼굴은 심하게 붉어졌다.

입은 마치 붕어처럼 계속해서 뻐끔거리고 있었다.

말해!

좆밥이 운동에 대해 뭘 아냐고 따지라고!

우직한 덩치의 반응에 이제는 이유 모를 호승심까지 생겼다.

하지만 덩치는 무식한 외모와 다르게 정말 인내심이 뛰어난지 이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라도 못 참았을 거 같은데 말이야.

"...운동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풋"

그럼 이것도 참을 수 있을까?

"이 운동의 운자도...!"

당연히 참을 수 없던 덩치가 입을 열었다.

"네프릭­"

남자가 수첩을 닫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덩치를 불렀다.

"게리 님 하지만..."

덩치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나와 남자를 번갈아 봤지만, 나는 이미 천장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네프릴."

남자는 그저 다시 한번 덩치의 이름을 불렀다.

"...죄송합니다."

덩치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겼다. 근육 쟁이야.

나는 덩치에게만 보이게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덩치의 팔이 부르르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듯했다.

저 두꺼운 팔에 맞으면 많이 아프겠지.

그 순간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 문이 바깥에서 열리고 남자가 먼저 내렸다.

나는 남자의 손짓에 따라서 내렸다.

바깥에는 태어나 처음 보는 건물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암울해 보이는 분위기의 회색빛이 감도는 큰 건물.

그리고 그 주위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저 건물 불안하게 생긴게,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밖으로 못 나올 것 같은데.

나 들어가기 싫어.

나 무죄라니까.

"가시죠."

남자가 차갑게 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덩치들이 내 팔을 강하게 잡고 움직였다.

전보다 더 세게 잡는 것 같은데.

아아 시발 피 안 통한다고!

내가 노려봤지만, 덩치들은 피식 웃으며 무시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쪼잔한 놈들인 게 분명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남자와 같은 차림을 한 사람들이 굳은 얼굴로 많이 돌아다녔다.

남자는 건물 안에서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던 사람들 몇몇이 남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지만, 남자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남자가 들어간 방에는 남자와 같은 차림을 한 여자가 다리 꼬고 앉아 있었다.

여자는 검은색 숏커트에 깔끔하게 생긴 미녀였다.

계속 남자들이랑 있다가 오랜만에 미인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여자 옆에는 똑같은 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여자는 따분하다는 듯이 하품하고 있었지만, 나는 여자가 이 중에서 제일 강하다는 걸 느꼈다.

"베어. 오늘도 열심히 일하네?"

여자가 남자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저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캐서린."

남자가 딱딱하게 대답하고는 나를 가리켰다.

"역시 베어는 재미 없다니까­ 야! 일로와!"

여자가 하품하면서 내게 손가락질했다.

­ 핑크색 티 팬티! 여자가 꽤 남자가 급한 모양이군 하하.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나를 무슨 애 부르듯이 하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물론 나는 여자 앞에 빠르게 달려가서 섰다.

"그래그래 빠릿빠릿하니까 좋네. 너희는 나가 있어. 끝나면 부를 테니까."

여자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남자가 내 팔에 있는 쇠뭉치를 풀었다.

그리고 남자와 덩치 둘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오랜만에 찾은 두 손의 자유에 손이 자꾸만 가려웠다.

자꾸만 검 손잡이로 손이 움직이려 했다.

"다 벗어. 그 검도 내려두고."

"예?"

"다 벗으라고. 귀먹었어?"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황급히 검을 풀어서 내려둔 다음 옷을 천천히 벗었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나를 감상하듯 쳐다봤다.

결국 나는 속옷 차림만 됐다.

"뭐야 그 안에 든 거는?"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속옷을 가리켰다.

"...에?"

뭔 개같은 소리야.

"뭐냐고 그거 꺼내 봐."

여자의 손가락은 정확히 내 그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의 말에 난감했지만, 천천히 속옷을 내렸다.

속옷도 갈아입어야 하는 건가?

정말 좆같은 곳이네.

"미친! 다시 입어! 그냥 생식기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리고 무슨 인간 생식기가 그렇게 커!"

내가 속옷을 내리자 여자가 당황하면서 소리쳤다.

네가 벗으라며 시발.

속옷 안에 당연히 생식기가 있지 그럼 뭐가 있겠어.

나는 황급히 속옷을 다시 올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항의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끌려왔으니까 웬만해서는 사고를 치지 않는 게 좋을테니까.

"이... 이거 입어. 무슨 생식기가­"

여자가 옆에 있는 옷을 내게 던지고는 힐끔 쳐다봤다.

왜 자꾸 훔쳐보는 거야.

나는 내 앞에 떨어진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옷은 흰색 바탕에 검은 줄이 수평으로 그어져 있었다.

이거 시발 죄수복 아니야?

나 아직 죄수 아닌데 시발.

"네 소지품들은 이곳에 담고."

여자가 내게 상자를 밀었다.

나는 상자에 차곡차곡 내 옷들을 담았다.

근데 검은 그 크기 때문에 상자에 들어가지 않았다.

"검은 나한테 줘."

여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나중에 다시 보자구 소년. 하핫.

나는 검을 여자 손에 넘겼다.

파지직­

검을 잡은 여자의 손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뭐야­ 에고 소드?"

스파크가 튀고 있는데도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검 손잡이를 잡고 쭉 빼냈다.

그러자 매끈한 검신에 '루나에이든' 이라고 적혀 있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자가 정말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제 여자 친구가 백일 기념 선물로 준 거라 하하."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요즘 애들은 에고 소드를 백일 선물로 주나 봐? 에고 소드는 정말 보기 드문데 말이야. 반발력으로 보면 내가 본 에고 소드 중에서도 최상급이고.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니까."

여자가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더니 내 옷이 담긴 상자랑 같이 챙겼다.

"저쪽 문으로 나가면 돼. 이 물품은 나중에 네가 출소할 때 다시 받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여자가 내가 들어온 문의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출소라니 나 무죄라니까.

물론 여자한테 항의해봤자 변할 건 없으니 곱게 여자가 가리킨 문으로 나갔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을 나가자 짙은 푸른색 옷을 입은 사내가 인사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중에서 제일 친절한 태도였다.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남자와 같이 움직였다.

남자는 자꾸만 계단으로 내려갔다.

아니 근데 너무 내려가는 거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 햇빛도 들지 않아서 횃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지치지도 않고 더 깊게 내려갔다.

그 끝은 아마 지옥과 연결되어 있을 거야.

이 새끼들 나 지옥에 처넣으려고 하는 거야?

탐스러운 남자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제국을 등지고 이 대륙에서 살아갈 곳은 없다.

애미 시발.

좆 됐네 이거.

무거운 발소리만이 계단을 채웠다.

***

스칼은 손에 들린 포크로 스테이크를 집어 먹었다.

소금으로 양념 된 스테이크가 입안에서 그대로 녹았다.

고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스칼도 이 스테이크는 최고급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이든과 헤어지고 난 후에 스칼은 바로 제국군에게 향했다.

스칼은 황실의 지독함을 잘 알고 있었다.

황실은 처녀교의 마지막 한 명까지 어떻게든 알아내서 척살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혹시나 황실 쪽에서 사람이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속에서 평생을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 스칼은 황실과 거래를 해야 했다.

스칼에게는 처녀교에 관련된 모든 인물의 이름이 적힌 서류가 있었다.

서류에는 처녀교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귀족들의 이름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스칼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처녀교 초기부터 공을 들여 작성했기 때문에 직위가 있는 신도라면 모두 적혀 있었다.

아마 이 서류라면 황실 쪽에서도 거래에 응해줄 것이다.

그런데 황실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했다.

거래에 올리는 서류의 완벽함.

완벽함을 위해 서류에는 단 한 명의 이름도 빠져서는 안 됐다.

비록 자신을 구해준 에이든이라도.

스칼은 황실과의 거래 조건에 자신뿐만 아니라 에이든의 사면 조건도 올렸다.

어차피 에이든은 특급 신도였기 때문에 자신이 아니더라도 황실 쪽의 조사에서 걸릴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걸리면 에이든은 재판도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사형이다.

자신을 구해준 에이든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였다.

이미 황실 쪽과는 서류가 증명되면 무죄 판결을 내려 주기로 거래했으니.

그전까지는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지만.

그래도 황실 쪽에서는 스칼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줬다.

황실 쪽에서는 스칼이 원하는 거라면 대부분 들어줬다.

지금 이렇게 감옥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것도 스칼의 요구 중 하나였으니까.

심지어 옆에 있는 침대는 처녀교에서 쓰던 침대보다 푹신푹신했다.

"죄인이 스테이크를 먹다니 제국 놈들이 썩을 대로 썩었군."

옆 방에서 마치 야수의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굵은 창살 너머로 손과 발에 굵은 묵색 쇠사슬을 차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마치 초콜릿처럼 탐스러운 갈색 피부에 보석을 박아둔 것처럼 빛나는 갈색 눈동자.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몸이 말랐지만, 그 눈빛만은 사람을 죽일 것처럼 형형해 괜히 시선을 피했다.

사막의 영웅 사비에르트 포테.

모래 사이의 진주,최상급 용사,사막 소수 민족의 영웅.

모두 그녀의 수식언들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최상급 용사까지 간 실력도 대단하지만, 그 실력보다도 빛나는 인품으로도 유명했다.

사막 소수 민족을 혼자서 끝까지 지키던 인물.

그런 그녀가 왜 여기에 갇혀 있는지 모르겠지만, 스칼은 그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녀는 모래 사이의 진주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국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보는 건 늘 즐겁다.

"스테이크 드릴까요?"

스칼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남은 고기 접시를 그녀에게 보여줬다.

어쩔 수 없었다.

스칼은 미녀에게 약하니까.

그리고 사비에르트는 이국적인 미녀였다.

그녀의 역사만 따지자면 나이가 꽤 있을 테지만, 일단 외관은 젊으니까.

항상 겉모습이 제일 중요하다.

"퉤­ 어딜 감히 제국 놈이 준 것을 내게 들이미느냐! 치워라!"

그녀가 침까지 뱉으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스칼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저런 갈색 피부의 이국적인 미녀가 취향이었나?

"그래도 먹어야 여기서 나갈 기회가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스칼은 그녀가 절대 먹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한 번 더 권유했다.

"퉤! 더러운 제국 놈들!"

그녀는 이죽거리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여기에 스칼이 온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그녀가 뭔가를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스칼은 기억을 더듬어 사막 소수 민족의 전통 요리를 찾았다.

물론 기억나지 않았다.

스칼은 그녀의 거부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스테이크를 마저 먹어서 치웠다.

그리고 입가심을 하기 위해 요구한 와인으로 입을 헹구고 고급 마법 연초까지 피웠다.

햇빛을 못 보기는 해도 나쁘지 않았다.

스칼은 감옥에서 웬만한 곳보다 나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후­

고급 마법 연초는 피우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좋았다.

다시 마법을 공부하기 위해 마법서를 피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곁눈질로 건너편에 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사비에르트를 훔쳐봤다.

그녀는 먹지 않아서 마른 몸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탐나는 미녀였다.

한참 그렇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감옥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음에는 경첩을 갈아달라고 요구해야겠군.

열린 감옥 문 사이로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에이든!"

스칼은 반가움과 기쁨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내가 자네에게 진 무거운 빚을 갚을 수 있게 됐네!

황실의 감시망에서 평생 숨어 살 필요 없도록 내가 자네를 도와주겠네!

감옥에 들어온 에이든과 스칼의 눈이 마주쳤다.

근데 왜 에이든이 저렇게 인상 쓰고 있는 거지?

에이든도 스칼이 반가웠는지 냉큼 달려왔다.

그 빠른 속도로 봐서 에이든은 사내간의 뜨거운 포옹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남자랑 안고 싶지는 않은데...

스칼은 고민하다가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 에이든이니까 팔을 넓게 벌리고 눈을 감았다.

서로의 목숨을 구한 사나이의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하며­

"이 시발!! 애미 터진 새끼야!!!"

에이든의 거친 욕설을 들었을 때, 스칼은 상황이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잠...잠깐만 자네 왜...!!!"

스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에이든의 주먹이 스칼의 얼굴에 꽂혔다.

"이 애미 터진 새끼!! 거기서 구해줬으면!! 나가서! 조용히! 그! 잘난! 보지! 마법! 이나! 팔면서! 살! 것이지! 나를 팔아?! 이! 호로 새끼! 뒤져 그냥!"

에이든의 불같은 주먹이 스칼의 곳곳을 난타했다.

정말 매운 에이든의 주먹에 스칼은 정신 차리지 못했다.

얼굴에 주먹이 꽂히고 나서야 스칼은 에이든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해를 모두 해명하고 싶었지만, 격렬한 폭력 앞에 스칼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끄아아악­!"

오직 고통에 가득찬 비명만 지를 수 있었다.

"제국 놈들 아니랄까 봐 말하는 게 아주 저열하군­"

옆 방에서 사비에르트가 이죽거렸다.

"뭐야?! 이 씨발 애미 터진 깜둥이 새끼는!! 너 얘한테 보지 고칠 거야?! 아니면 빠져 있어 시발!"

이미 에이든의 눈은 맛이 간 상태였다.

거친 욕설을 하면서도 에이든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뭐어어엇?!!"

사비에르트는 난데없이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거친 욕설에 충격받아 말을 잃었다.

평생동안 소수 민족을 위해 영웅으로 살아온 사비에르트에게 에이든의 욕은 너무나 저열하고 거칠어서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제국마저도 사비에르트를 인정해주고 대우해주는데 감히.

사막의 영웅 사비에르트에게 대뜸 인종 차별과 부모욕을 박아 버리는 에이든을 보며 스칼은 정신을 놓았다.

검은 피부가 아니라 초콜릿처럼 달콤한 갈색 피부­

정신을 잃기 전 스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

"응? 에이든?"

루나는 에이든에게 걸어둔 위치 마법이 아카데미 밖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을 확인했다.

이 위치가 어디였지­

수도 안이기는 한데.

아! 황실 감옥 위치구나.

왜 에이든이 거기 있지?

신호가 아직 에이든의 상태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루나는 확인해 볼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익­!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교육하고 있었어요! 인간 여자! 주문!"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졸고 있던 악마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칠흑보다 어두운 어둠 속에 자라나는 절망이여! 혼돈이여! 내게 강림하소서! 그 거대한 힘으로 이 미개한 세상을 모두 개혁하소서­!"

악마의 외침에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던 엘린이 반사적으로 양팔을 뻗은 다음 눈까지 까뒤집으며 말을 줄줄 내뱉었다.

"나 외출."

루나는 그런 둘을 신경 쓰지도 않고 공간 마법을 준비했다.

금세 공간의 마나가 루나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외출보다 어두운 외출 속에 자라나는 외출이여!!"

루나의 말에 반사적으로 엘린이 주문을 다시 외웠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엘린을 악마가 한심하게 쳐다봤다.

이내 공간을 채우던 막대한 마나와 루나가 사라지고 나서야 악마와 엘린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뱉는 엘린을 보며 악마는 열불이 났다.

"너는 흑 마법사라는 년이 그깟 주문 하나도 못 외워서! 그런 머리로 무슨 흑 마법을 한다고! 그냥 나가서 청소나 해!"

화를 참지 못한 악마가 엘린을 쥐어 박았다.

"이익! 주문이 너무 유치하잖아요!! 크흡! 어두운 어둠이래! 꺄하하하! 절망! 혼돈! 뭐야 그게!"

맞으면서도 웃는 엘린을 보며 악마는 힘을 조절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엘린은 오랜 세월 살아온 악마가 그동안 봤던 인간 중에서 제일 죽이고 싶은 인간이었다.

"꺄하하하­"

엘린의 맑은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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