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07화 (107/233)

〈 107화 〉 넘치는 욕은 상대를 감동 시킨다.

* * *

"음... 그러니까 저 사람이 그 사막의 영웅인가 뭐시기 라는 거죠?"

아무리 봐도 약하게 생겼는데 삐쩍 말라서 가슴은 제법 있기는 하지만.

"사막의 영웅 뭐시기가 아니라! 사막의 영웅 사비에르트 님이시라네!"

스칼이 황급히 내 입을 막으며 말했다.

아까 기절했던 깜둥이는 어느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정자세로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근데 사실 저는 사막의 영웅이 뭔지 모르는데요."

뭔가 어디선가 들었던 거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이 안 났다.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모르는 것 아닐까?

모르는 내 잘못이 아니라 깜둥이의 업적이 부족한 것 아닐까?

으드득­

깜둥이에게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모를 수도 있지 왜 저래.

"... 용사 아카데미 학생이 사막의 영웅 사비에르트를 모른다고?"

스칼의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커졌다.

아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길래 저런 반응이지.

"저 깜... 아니 사막의 영웅님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에요?"

자꾸만 말이 헛나오네.

"...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사막에 소수 민족이 살고 있었던 건 알고 있나?"

스칼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알죠. 그거 깜... 아니 소수 민족분들이 모여 살았다고."

"그래. 제국이 한창 영토를 확장할 때 그 소수 민족을 끝까지 지키신 분이 저 사막의 영웅 사비에르트 님이시라네. 사비에르트 님때문에 제국이 사막을 장악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과 병력이 들었다고 알고 있네. 심지어 소수 민족들이 제국민으로 편입되기도 했지. 사비에르트님은 소수 민족의 마지막 전쟁 때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황실의 감옥에 갇혀 있을 줄은 나도 전혀 몰랐네."

스칼의 목소리에는 짙은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

"근데 사막 부분도 결국 제국에 포함되지 않았나요?"

내 기억이 맞다면 동쪽에 끝에 있는 사막까지 제국의 영역일 텐데.

"...그래 그렇게 됐지. 뭐 아직 몇몇 소수 민족들이 모여서 저항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소수 민족은 제국민으로 편입되었지­"

"잠깐, 아직 저항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고?"

조용히 듣고 있던 깜둥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손과 발에 묶인 굵은 쇠사슬 때문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깜둥이의 눈에서는 깊은 분노가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

분명히 방금까지 곧 굶어 죽을 것 같았는데, 그 기세가 매우 흉흉했다.

나는 그런 깜둥이의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서 스칼 뒤로 숨었다.

"...예. 아직 저항하는 조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왜 저항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스칼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멍청한 것들. 내가 그렇게..."

스칼의 말에 깜둥이가 주저앉으면서 조용하게 읊조렸다.

'안 됩니다! 대전사 님의 희생으로 사는 삶이 명예로울 리가 없습니다!!!'

사비에르트가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거부하던 전사들의 외침이 떠올랐다.

'... 그 삶이 명예롭든, 명예롭지 않든 우리들의 가족들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명예로운 죽음보다 명예롭지 않은 삶이 더 나을 것이니.'

사비에르트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쇠사슬에 기대어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뭐­ 여하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저기서 저러고 있데요?"

건방진 제국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놈의 목소리에는 뭔가 사람 속을 미묘하게 긁는 무언가가 담겨 있어서 자꾸만 사비에르트의 정신을 끌어왔다.

대뜸 깜둥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정말 못 배워먹은 사내인 것이 분명했다.

"그건 나도 모른다네. 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알겠지만..."

다른 사내가 동정을 담은 눈동자로 사비에르트를 응시했다.

동정이라니­

사비에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사막의 대전사였던 내가 옆 방의 죄수에게 동정이나 받는 신세라니.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랜 시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몸이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허한 배가 점점 더 사비에르트의 영혼을 가볍게 만들어줬다.

나는 명예롭게 죽었나­

전사들의 오아시스에 오를 수 있을까.

그것이 사비에르트의 마지막 고민이었다.

거기에 오르지 못하면 내 영혼은 여기서 묶여 있어야 하나­

"흐음­ 그래도 얼굴은 반반한데요?"

건방진 놈의 시정잡배 같은 말이 다시 사비에르트의 심기를 거슬렸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집중하던 사비에르트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눈을 뜨니 쇠창살에 바짝 붙어서 자신을 관찰하는 건방진 놈이 보였다.

놈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쇠창살을 두들기고 있었다.

한참이나 쇠창살을 두드리고 당겨 보던 사내가 만족한 표정으로 떨어졌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아래로 몇 번이나 관찰했다.

혹시 사내가 음침한 생각을 하는가 해서 사비에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사비에르트의 옷은 오래 입어 해져서 곳곳이 드러나 있었다.

"곧 뒤지겠는데요. 이 깜둥이?"

건방진 놈이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제야 사비에르트는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저 건방진 놈은 혹시나 사비에르트가 자신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한 거였다.

"... 사비에르트님에게 너무 무례하게 대하지 말게. 그래도 영웅이셨던 분이니."

"영웅이고 뭐고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인데 그런 게 왜 필요해요. 간수님!! 여기 그 렉시드 피그 스테이크 있나요?!"

건방진 놈은 다른 사내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다른 사내가 대신해서 사과를 표했다.

사비에르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건방진 놈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어차피 곧 죽는다.

그런 몸이 무슨 명예가 필요하겠는가.

"스­테이크! 스­테이크!"

간수에게 새로운 음식을 받은 건방진 놈이 신나서 춤을 추었다.

그 꼴불견인 모습이 묘하게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죽어서 가는 오아시스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딴 뜬구름 같은 것보다 저는 지금 단 한 모금의 물이 필요합니다.'

제국과의 전쟁 도중에 뻔뻔하게 말하고 도망친 녀석.

그 녀석이 있었더라면­

다시금 생기는 미련을 애써 접었다.

이미 지난 일이다.

부족민들은 제국민으로 편입되었고, 사막에서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을 것이다.

자신만 사라지면 그들의 안전은 보장되니까.

그나저나 렉시드 피그 스테이크라­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

사비에르트는 익숙한 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으에? 먹고 싶어요?"

자신의 시선을 눈치챈 건방진 놈이 이죽거렸다.

사내의 말에 사비에르트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 건방진 놈에게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데.

저 건방진 놈의 얼굴을 당장이라도 짓뭉개고 싶었다.

"안 되지롱~ 흐헤헤헿"

건방진 놈이 혀를 빼꼼 내밀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사비에르트는 정말 사내를 짓뭉개고 싶었다.

쇠사슬에 묶인 손이 덜덜 떨렸다.

"자네 도대체 왜 자꾸 사비에르트님에게 무례하게 하는 건가!"

얼굴이 울퉁불퉁해진 사내가 화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비에르트도 그게 의문이었다.

물론 자신이 먼저 험한 말을 한 것도 있기는 한데, 사내의 놀림은 도를 넘어섰다.

응당 사내놈들이라면 항상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저렇게 처음부터 대놓고 적의를 표출하는 남자는 없었다.

제국 놈들의 기사들도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떻게든 챙겨주려고 하지 않았나.

"에? 뭐에요. 스칼 저 여자 좋아해요?"

건방진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퍽 얄미워서 헛웃음이 났다.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영웅이셨던 분인데 예를 표하는 게 도리 아닌가."

"도리가 어디 있어요. 저 사람이 제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리고 저는 저 죽은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요."

건방진 놈이 포크로 사비에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썩은 낙타의 눈을 지닌 놈이 지금 누구의 눈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사비에르트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봐봐요! 지금도 눈이 썩어있잖아요. 자신이 할 일을 다 했으니 지금 죽어도 상관없다는 그런 눈빛. 저런 썩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런 애들이 꼭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응 난 할 일 다 했어­'이러고 그냥 포기해버린다니까. 그럴 거면 애초에 만나기 전에 뒤지던가. 결국, 포기한 주제에 저렇게 뻔뻔하고 당당하게 있냐 이 말이에요"

건방진 놈의 눈은 사비에르트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죽어서 가는 오아시스가 무슨 소용입니까­'

'대 전사님이 그렇게 가시면 저희는 어떻게­'

'저희가 목숨을 걸고라도 꼭 구하러 가겠­'

사내의 말과 이전의 기억들이 뒤섞여서 사비에르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니 포기만 하지 말아 주십쇼!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깊은 사막의 밤처럼 빛이 보이지 않아도­'

울부짖으며 쇠사슬에 묶이는 자신을 부르짖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깊은 밤 뒤에 더 빛나는 태양이 뜨듯 저희가 언젠가 반드시 대 전사님을 찾을 테니­'

그들의 눈 깊이 자리 잡아 있던 귀한 물기가 떠올랐다.

'아직 몇몇 소수 민족이 모여서 저항하고 있다고는'

그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었구나­

'그러니 대 전사님은­ 포기하지만 말아 주십쇼­'

나는 포기했었나.

아아­

사비에르트는 사내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어느 순간 해가 보이지 않는 이 깊은 밤에 먹혀 포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전한 다짐을 자신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명예롭지 않더라도 살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말한 것과 다르게 자신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아아­"

수분이 부족해 나오지 않는 물을 대신해서 피가 사비에르트의 눈가에 맺혔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머릿속에 너무 깊이 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비에르트는 밤을 깨워야 한다.

"...왜 지랄이지 갑자기."

뜬금없이 발광하는 깜둥이를 보며 천천히 멀어졌다.

너무 도발했나.

하지만 저 깜둥이의 눈빛은 예전의 그를 떠올리게 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상대에게 화를 참을 이유가 없었다.

"아아아!!!"

깜둥이가 괴성을 지르며 쇠사슬에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머리를 박았다.

채찍을 맞았던 기억이라도 떠올랐는지, 깜둥이는 울부짖으면서 몇 번이나 쇠사슬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 기괴한 모습에 놀라 뒷걸음질로 멀어졌다.

도망치던 내 몸은 벽과 붙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농담이라고! 진정해요!"

다급하게 변명을 했지만, 이성을 잃은 깜둥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쇠사슬에 머리를 박던 깜둥이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죽었나?

아직 몸이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안 죽었다 아직.

오아시스를 위하여­

뭐라고 중얼거린 깜둥이가 땅바닥에 떨어진 튀김 조각을 주워 먹었다.

깜둥이는 정말 맛있는 것을 먹는 것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나 씹었다.

미친년인가 봐­

깜둥이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연스레 생기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꿀꺽 삼킨 깜둥이가 천천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깜둥이의 깨진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깊은 두 눈가에는 피눈물이 흘러 마치 문신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 그 스테이크를 제게 줄 수 있나요?"

마치 빛을 뿜어내는 것 같은 눈빛을 한 깜둥이가 내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갑자기 변한 깜둥이의 기세가 적응되지 않았다.

"짖으면 줄게. 개처럼."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꼬인 심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자네 그게 대체 무슨! 도대체 자네는 뭐가 문제인가!!"

옆에서 스칼이 호통을 쳤지만, 이미 말을 뱉은 후였다.

그러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그냥 속이 뒤틀린 놈이라 그런가.

나는 황급히 말을 취소하고 스테이크를 주기 위해 접시를 들었다.

"그­"

"...왈! 왈! 크르르릉! 왈!왈!"

내가 막기 전에 깜둥이가 정말 개처럼 짖기 시작했다.

나에게 화를 내던 스칼도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아니 시발 왜 진짜 하는 건데.

진짜 미친년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 소리가 개짖는 소리와 너무 흡사해서 혹시 깜둥이가 평소에 연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줄게요! 준다구요! 그만 짖어요! 시발! 멈춰요! 제발!"

나는 황급히 쇠창살 사이로 스테이크를 던졌다.

깜둥이가 시원하게 웃으며 땅에 떨어진 스테이크를 주워 먹었다.

깜둥이는 정말 열심히 스테이크를 씹어 삼켰다.

스테이크를 다 먹은 뒤에 눈을 감고 있던 깜둥이가 돌연 눈을 떴다.

깜둥이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몇 번이나 넘어지면서도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부들부들 떨면서도 악착같이 절을 올렸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가 됐던 제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은인님에게 이 오아시스처럼 깊은 은혜 꼭 갚겠습니다."

깜둥이가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두 눈에는 총기를 띄며 나를 응시했다.

악귀처럼 흉악한 모습이 내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애미 시발 왜 이래.

잘못했어.

깜둥이라고 안 놀릴게.

내 입이 원수지 진짜.

깜둥이의 입에서 나간다는 말이 들리니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네! 깜둥이가 이 감옥에서 나온 다음 복수하겠다고 나를 찾아오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아 괜찮아요. 은혜 안 갚아도 되니까! 아니지 제가 죄송합니다! 좆밥이 깝죽거려서 죄송합니다!"

나도 황급히 깜둥이에게 절을 몇 번이나 올렸다.

옆에서 구경하던 스칼도 분위기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절을 따라 올렸다.

그렇게 셋은 사비에르트가 쓰러질 때까지 한참이나 서로 절을 올렸다.

***

"...천천히 드세요. 체할 수도 있으니까."

마치 짐승처럼 음식을 흡입하는 깜둥이를 말렸다.

기운을 차린 깜둥이는 몇 번이나 음식과 물을 입에 때려 넣고 있었다.

그럴수록 점점 깜둥이의 기운이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은인."

깜둥이가 입에 가득 담겨 있던 음식을 삼키고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분명 깜둥이인데도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얼굴 가득 남아있는 핏자국 때문에 기괴했다.

"그...물로 얼굴 좀 닦는 게 어때요?"

쇠창살 사이로 물통을 건넸다.

"아­ 그렇군요. 닦겠습니다."

깜둥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물을 퍼부었다.

중간이라고는 없는 모습에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깜둥이의 이마에는 흉터가 마치 별 자국처럼 남아있었다.

눈 옆으로 흘러내린 피눈물을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붉은 줄로 새겨져 있었다.

시발 저건 왜 안 지워져.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었다.

"이제 정신이 또렷해졌습니다. 부끄럽군요. 대전사라고 불렸던 제가 이런 어둠에 먹혀서 포기하고 있었다니. 하하핫!"

살짝 얼굴을 붉힌 깜둥이가 시원하게 웃었다.

기운을 차린 깜둥이는 영웅의 면모가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아까 그 깜둥이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지 못할 만큼 기세가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바뀐 기세는 깜둥이를 대하기 묘하게 껄끄럽게 했다.

"은인­ 불편한 거라도 있으신지요?"

걱정되는 얼굴로 깜둥이가 물었다.

깜둥이의 묘하게 따뜻한 태도가 심하게 거슬렸다.

"그... 아닙니다.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보면 저보다 용사 선배신데."

스칼에게 깜둥이가 최상급 용사였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나서부터 깜둥이를 대하기 더 껄끄러워졌다.

그렇게 중요한 거를 왜 지금 말해주는 거야.

"안됩니다! 어리석은 제 눈을 뜨게 해주신 은인입니다. 제가 감히 말을 편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자꾸만 저 깜둥이가 쇠창살을 부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했다.

옆에서 보고 있는 스칼은 어이가 없었다.

에이든이 심한 욕을 하니까 사비에르트가 화가 났던 것까지는 이해했다.

그 욕에는 인종 차별과 부모 욕까지 섞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에이든이 굴하지 않고 더 심한 욕을 퍼부으니까 갑자기 사비에르트가 감사를 표했다.

심지어 사비에르트는 에이든을 은인이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대하고 있었다.

여기부터는 아무리 고민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왜 욕을 퍼부었는데 고맙다고 하는 거지?

혹시 이게 에이든이 여자를 끌어당기는 비법인가?

"은인! 제가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제가 사막에서는 몇몇 아이들의 발을..."

사비에르트가 쇠창살 사이로 어떻게든 손을 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사비에르트의 손에 묶인 두꺼운 쇠사슬이 쇠창살과 부딪혀 쾅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악! 싫어요! 싫어! 쇠창살 부수지 말아요! 잘못했다고요! 잘못했다고!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지레 겁먹고 도망가는 에이든을 보며 스칼은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사비에르트님의 기운이 살아났다는 게 중요하니까.

"저 방 바꿔줘요!!! 불편해요!!"

에이든이 문을 두드리면서 절규했다.

"은인 어찌 그런!! 제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십쇼!"

사비에르트는 그런 에이든의 태도에 더 열심히 쇠창살을 흔들었다.

쾅쾅­

사비에르트의 힘에 쇠창살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간수! 나 죽어요!! 깜둥이가 쇠창살 부순다고!! 으아악!!!"

울부짖는 에이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간수는 오지 않았다.

***

'가문의 이름을 쓰도록 허락하마. 대신 방학 기간에 가문으로 내려오도록 해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뒤에 쓰여 있는 말에 키아나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신의 아버지는 이렇게 쉽게 가문의 이름을 허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내려고 할 것이다.

키아나는 그 대가가 못내 두려웠다.

"야! 어떻게 됐어?!"

자신을 부르는 케이트의 목소리에 키아나의 정신이 돌아왔다.

"예. 가문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탄원서에 제 가문의 이름을 넣어도 됩니다."

"좋네! 그럼 다음은 어떤 걸 해야 해?"

"혐의를 반대할만한 자료들을 모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피고인이 평소 아카데미에서 했던 선행들이 있습니다. 피고인의 올바른 성품을 증명할 자료들을 제출하여 피고인이 자신의 의지로 처녀교에 입교하지 않았다. 단지 생명에 대한 협박을 받아 입교했다­ 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겁니다."

검은 머리를 부드럽게 뒤로 넘긴 중년의 사내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혜진은 자신의 아비 옆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대단한 분들이 발 벗고 나설 정도의 인품이니­ 피고인의 선행에 대한 자료들은 손쉽게 모을 수 있을 겁니다."

변호를 맡은 혜진의 아비 덕철은 간단히 승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평소의 행실을 증명하고, 납치되어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교의 행사를 도왔다고 끌어내기만 하면 되니까.

거기에는 용사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는 신분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아­ 올곶은 학생이라도 그런 악독한 종교에 납치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덕철은 가벼운 승리를 예상했다.

황실과의 재판에서 승리는 덕철에게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꿀 같은 재판을 가지고 온 자신의 딸이 그저 고맙고 대견하기만 했다.

"...선행?"

"선행 말입니까...?"

"...크흠."

덕철의 앞에 앉은 여성들이 덕철의 시선을 외면하며 다들 헛기침했다.

"그... 혹시 동급생들을 쥐어팬 것도 선행이야­? 아! 다 건방진 녀석들이기는 했어! 아닌 녀석들도 있었지만..."

황녀가 덕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거라면 저도 꽤 알고 있습니다!"

황녀의 물음에 키아나가 자신감 있게 외쳤다.

덕철은 그들의 태도에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교미를 잘하는 것도 선행에 포함되나?"

빨간 머리의 여자가 시원하게 웃으며 물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