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에이든의 선행.
* * *
비키의 말이 끝나고 길길이 날뛰던 케이트가 진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큼큼. 여러분들이 단어의 뜻을 오해하고 있으신 것 같아서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선행이란 착하고 어진 행실을 뜻합니다. 그러니 제게 피고인의 가벼운 선행을 이야기해 주세요."
덕철이 목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특히 선행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덕철의 말이 끝나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덕철은 그들이 자신의 말을 오해해서 선행이라는 것을 너무 대단한 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친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와줬다던가"
"나나! 나 있어! 나! 납치됐을 때 에이든이 구해줬어!"
케이트가 덕철의 말을 자르고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오! 황녀를 구하다니 그거야말로 참된 용사로서..."
"에이든 씨는 황녀님과 같이 납치되었을 뿐, 황녀님을 구한 건 제국 제일검님과 황실 기사단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덕철의 말을 혜진이 잘랐다.
"...그렇긴 하지만, 그 납치된 중에도 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어."
묘하게 자신감이 사라진 목소리로 케이트가 대답했다.
"그렇죠! 같이 납치된 입장이면 피고인이 황녀님을 도와준 일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것을 제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납치된 과정을 처음부터 같이 되짚어보죠. 피고인은 어쩌다가 황녀님과 같이 납치된 겁니까?"
드디어 보이는 희망에 덕철의 목소리가 묘하게 상기됐다.
덕철의 말에 케이트는 납치된 날을 되짚었다.
에일 버드 튀김집 앞에서 만나서
같이 걸어 다니다가.
'움직이지마 개새끼들아! 움직이면 이 년 조립식으로 가져가야 될 거야! 앙?! 삐뚤빼뚤하게 자를 거라고! 앙?!'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고 악에 받쳐서 소리 지르던 에이든이 떠올랐다.
케이트는 황급히 머리를 흔들어서 그날의 기억을 집어넣었다.
"아냐아냐! 그 사건은 아닌 거 같아. 오히려 악영향일 거 같아! 다른 거로 하자."
다급한 표정의 케이트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예 뭐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친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와준 일이 있을까요?"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케이트의 안색이 좋지 않아 물어볼 수 없었다.
"아! 저도 있습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키아나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예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도대체 이 여자들은 우리끼리 있는데도 왜 손을 드는 거지.
"그... 제가 점심을 먹지 않아 배가 매우 고팠던 날에 사제가 제게 메론빵을 주었습니다!"
키아나가 약간 머뭇거리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제게 아무 이유 없이 메론빵을 줬습니다!"
주변의 반응이 없자 키아나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거는 그냥 피고인이 키아나님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도대체 이 아이들은 선행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덕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끄윽?!
덕철의 말에 키아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무슨 관심이야! 그냥 얘가 불쌍하게 생겨서 빵 준 거지! 딱 봐도 못 먹고 다니게 생겼잖아!"
케이트가 발작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키아나를 가리켰다.
도대체 어떻게 봐야 저 고귀한 외모가 불쌍해 보일 수 있을까.
덕철은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황녀와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그거 말고 다른 거로 이야기해보죠."
사제가 여러 번 사주었는데
왠지 간지러운 느낌에 키아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성별이나 계급으로 차별받고 있던 친구를 도와줬다든가 하는 거 없습니까?"
주변의 조용한 반응에 덕철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차별은 늘 민감한 주제니까.
"...아! 나나! 에이든이 성별과 계급 상관없이 자기보다 약한 애들은 다 쥐어팼어! 심지어 에이든은 황녀인 내게도 주먹질을 했는걸?!"
케이트가 이번에는 정말 확실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케이트의 얼굴에는 확실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덕철은 순간 자신이 황녀의 말을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어때? 완전 평등하지 않아? 걔는 자기보다 약하면 성별이나 계급은 신경 안 써!!"
신나서 말하는 황녀를 보며 덕철은 자신이 제대로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보다 약자를 때렸다는 게 선행으로 볼 수는 없으니까요. 정말 선행이 없습니까...?"
슬슬 덕철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담겼다.
"교..."
"교미에 관련된 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비키가 입을 열자 덕철은 황급히 말을 잘랐다.
또 난리 피우는 케이트를 진정시킨다고 시간을 버릴 수 없었다.
"...사제는 혼자서 악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않으며..."
뜻 모를 소리를 작게 중얼거리는 키아나는 일단 무시했다.
"황녀님밖에 없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피고인의 선행을."
덕철은 자꾸만 입맛을 다시는 비키와 혼자서 중얼거리는 키아나를 애써 외면하면서 케이트에게 애원했다.
"흐흥 역시 에이든과 가장 오래 알고 지낸 게 나니까. 저런 것들은 도움이 안되지! 흐흫."
케이트가 한껏 고개를 치켜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피고인과 황녀님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그때 별 다른 일이 없었나요?"
"첫 만남...?"
덕철의 물음에 케이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야! 꺼져! 거기 내 자리니까! 뭘 쳐다봐?! 내 자리라고 꺼져!'
"아냐... 그것도 선행은 아닌 것 같아..."
케이트는 다시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처녀교의 집행관이 수도에 왔을 때도 에이든은 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어!"
자신의 앞을 지키며 목숨을 걸었던 에이든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꿈에 나타나 자꾸만 케이트의 머리를 뜨겁게 만들던 모습.
"오! 드디어!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마침 처녀교에 관한 선행이네요!"
그렇지 사람이라면 선행이 하나도 없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황녀를 지키기 위해 처녀교와 목숨을 걸고 맞서다니.
"그러니까 그게 에일 버드 튀김 집 앞이었는데, 나는 에일 버드 튀김을 먹기 싫었거든? 근데 에이든이 하도 내게 먹으라고 해서... 귀여운 에일 버드 들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 입을 먹었는데 그 맛이 정말 짜증 나고 화가 날 정도로 맛있는 거야!! 막! 겉은 바삭바삭하고 안에는 부드러운 육즙이 터져서 나오는 환상적인 맛이었어. 그래서 내가 성질내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내게... 잠깐만! 이 부분은 필요 없는 것 같아! 하여튼 그래서 갑자기 그 이상한 놈이 터지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에이든이 그림같이 내 앞을 지켰어!"
케이트가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에일 버드 튀김 이야기밖에 머리에 남지 않았다.
왜 황녀는 에일 버드 튀김 묘사를 그렇게 길게 한 거지?
그래도 결론적으로 피고인이 황녀를 목숨 걸고 지킨 것은 사실 같았다.
"그것은 선행이 맞는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이상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황녀님을 지키기 위해 피고인이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덕철의 말에 케이트가 비키와 키아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하게 비웃는 얼굴이었다.
"...사제가 제게 이 검도 선물해줬습니다!!"
키아나가 자신의 검을 보여주며 언성을 높였다.
"그건 아까도 제가 말했듯이 피고인이 키아나님에게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있어서"
덕철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끝을 흐렸다.
아아
그런 의미가
하지만 우린 사제지간인데...
아까보다 더욱 얼굴이 붉어진 키아나가 말을 삼켰다.
"무슨 소리야!!! 그냥 네가 꾀죄죄한 검을 매고 다녔던 거 아니야?! 네가 불쌍하게 생겨서 그런 거라니까! 그리고 너는 공작가라면서 평민인 에이든한테 검 선물을 받고 있어!! 그리고 네가 사저라며 네가 에이든에게 선물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케이트가 다시 발작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키아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렇지만 거절하면 사제가 너무 상심할 테니까...
사제가 슬퍼하는 것은 싫은데
키아나는 이미 생각에 깊이 빠진듯 케이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자꾸만 애한테 헛바람 넣지 말라고! 에이든은 저렇게 불쌍하게 생긴 애 안 좋아한다니까?!"
불같이 화내는 황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덕철은 알겠다고 답했다.
"혹시 그럼 내게 딸기 우유를 바치던 것도 선행인가?"
한참이나 골똘히 생각하던 비키가 물었다.
애초에 바친다는 단어를 쓰면서 선행이냐고 묻는 비키의 모습에 덕철의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아니... 그 친구의 청소를 도와줬다던가 과제를 도와줬다던가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던가 하는 정말 사소한 선행이 없습니까?"
덕철의 물음에 셋 다 조용해졌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침묵을 보며 덕철은 의문을 가졌다.
아니 그런 작은 선행조차 하지 않았다고?
저 정도의 선행은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몇 번은 하게 되지 않나?
도대체 에이든이라는 사람은 뭐 하는 새끼지?
호로록
침묵 속에서 혜진이 차를 마시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싼 도시락에서 튀김을 내게 줬어!! 물론 나는 튀김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방긋 웃으며 말하는 케이트를 보며 덕철은 생각보다 어려운 변호임을 깨달았다.
"황실 쪽에서 제시한 재판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진지하게 기억을 되짚어 봅시다. 만약 선행이 없다면 지어내기라도 해봅시다. 우리"
덕철이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 사람을 대신 쥐어팼습니다! 물론 제가 듣지는 못했지만..."
고민하던 키아나가 손을 들고 주장했다.
"쥐어팼다는 게 들어가면 선행이 아닙니다."
덕철이 단호하게 키아나의 말을 잘랐다.
***
루나는 위치 마법의 신호에 따라 에이든의 위치로 이동했다.
해당 위치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시설이 나쁘지 않은 감옥이었다.
에이든이 묵던 기숙사 방보다도 넓고 좋아 보였다.
감옥 안에 에이든과 그때 그 남자가 같이 자는 것이 보였다.
에이든은 전 회차에서도 남자를 끔찍이 싫어했으니 남자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근데 어쩌다가 에이든이 감옥에 갇힌 거지?
전 회차에서 에이든이 감옥에 갔었나?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습관적으로 에이든을 데리고 가려던 루나가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황실 지하 감옥이라면
다른 건방진 쓰레기들은 에이든에게 접근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자꾸만 기웃거리는 쓰레기들을 막을 수 있다.
"누구냐!"
옆에서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루나는 에이든이 깰까 봐 수면 마법을 걸고 고개를 돌렸다.
갈색 쓰레기가 보였다.
치울까?
"은인에게서 떨어지거라!! 이 마녀!! 쇠창살 따위가!"
갈색 쓰레기가 기운을 움직이기 위해 발악했지만, 손에 두른 쇠사슬이 기운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갈색 쓰레기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필사적으로 쇠창살에 몸을 부딪치며 괴성을 질렀다.
주먹에서 피가 터졌지만, 쓰레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루나는 쓰레기의 발악을 구경하며 쇠창살을 확인했다.
쇠창살에는 형편없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 쓴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아마 이 정도만 돼도 저 쓰레기는 뚫을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기운도 사용하지 못하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루나는 쇠창살에 손을 올려 마법을 더욱 강화했다.
이제 저 쓰레기는 절대 나의 에이든에게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다.
에이든의 옆 방에 있는 저 쓰레기를 치우면 일이 번거로워질 수도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치웠겠지만, 굳이 일을 키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흥미를 잃은 루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 에이든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달콤해 보였다.
정말 머리가 녹아 버릴 정도로
그래, 요즘 열심히 했으니까.
나에게 상을 줘도 될 거야.
그리고 이런저런 일로 쓰다 보니 에이든의 액도 부족했다.
에이든의 위에 올라간 루나는 자꾸만 흐르는 침을 애써 삼키며 천천히 로브를 거두었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아 금세 루나의 투명할 정도로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쾅쾅
"이 마녀!! 지금 은인에게 무슨 짓을...!!"
쓰레기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쇠창살에 몸을 처박고 있었다.
쓰레기가 주제도 모르고 절규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루나는 더욱 보란 듯이 로브를 허리춤 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에이든의 바지를 내렸다.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으응? 은인...?!"
아
루나는 몸이 부서지는 것만 같은 통증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악착같이 움직였다.
에이든이 주는 고통은 자신에 대한 사랑의 증거니까
조금이라도 에이든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흑 마법사도 준비가 끝나가니까
이제 에이든을 다시 한번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에이든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거야.
'루나가 없었으면 나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이번에는 어떤 달콤한 말을 내게 속삭여 줄까?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풀어졌다.
루나는 아래가 찢기는 것만 같이 깊은 사랑을 느끼며 억지로 움직였다.
"무...무슨..."
사비에르트는 이해 못 할 마녀의 행동에 사고가 멈췄다.
***
뭐야 몸이 왜 이렇게 무겁지.
분명히 자고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피곤했다.
천천히 몸에 기운을 돌리며 몸 상태를 회복했다.
"하하... 자네 일어났는가?"
옆에 누워있던 스칼이 뻣뻣하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와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침대가 둘이 누워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참을 만했다.
"뭐에요? 그 눈빛은."
이상한 스칼의 반응에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아닐세! 하하! 간밤에 잠을 좀 설쳐서 말이야."
스칼이 억지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잠을 설쳤나 몸이 좀 찌뿌둥하네요. 이거 침대가 구진거 같은데."
굳은 허리를 두드려 풀며 침대를 툭툭 쳤다.
"크흠 아마 침대의 문제가 아닐걸세. 뭐 개인의 연애사니까 상관은 안 하겠다만 자네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쾅
"은인!! 몸은 괜찮습니까?!"
깜둥이가 대뜸 쇠창살 사이로 얼굴을 집어넣으며 내게 물었다.
"예? 예. 뭐 조금 찌뿌둥하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왜요?"
이제 깜둥이의 과한 친절에 조금 적응이 된 상태였다.
"그게 간밤에... 그... 아닙니다! 은인의 몸이 괜찮다면 됐습니다!"
깜둥이가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왜 다들 아침부터 지랄이지.
"어이 간수 스프랑 빵!! 깜... 아니 사비에르트님도 드실래요?"
습관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예! 은인님! 저도 먹겠습니다!"
깜둥이는 아직도 쇠창살 사이에 얼굴을 넣고 있었다.
"간수! 스프랑 빵! 많이!"
문을 한참 두드리자 밖에서 알았다는 대답이 나왔다.
간수가 점점 더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곧 재판이 열릴걸세."
물로 떡진 머리를 대충 헹군 스칼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탕탕!
"벌써요?"
문 아래로 들어온 스프랑 빵들을 집어서 가져왔다.
근데 이거 스프는 어떻게 주지?
그릇을 쇠창살에 대봤지만 절대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일단은 깜둥이에게 빵부터 건넸다.
"은인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내가 사주는 것이 아니지만 깜둥이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감사를 표했다.
스프 접시는 그냥 쇠창살 앞에 두었다.
"그러니까 이제 곧 재판이라고요? 좀 아쉽기도 하네요. 여기 나름 괜찮은데."
달라는 건 다 주기도 하고 말이야.
"...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감옥일세. 햇빛을 못 보면 사람은 무너지게 되어 있네. 밖으로 나가야지."
스칼이 스프에 빵을 푹 찍어서 입에 넣었다.
"그럼 스칼은 밖에 나가면 그 보지 마법인가 할 거예요?"
켁켁
"아니 도대체 어디서 보지 마법이라는 단어가 나온 건가! 나는 자네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스칼이 더럽게 먹던 스프를 뱉어내며 따졌다.
"으 어차피 대충 거기에 관련된 마법들이잖아요."
혹시나 내 스프 그릇에 튈까 봐 그릇을 황급히 치웠다.
깡깡
시끄러운 소리에 돌아보니 깜둥이가 스프 접시를 쇠창살 안으로 넣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귀찮은데 진짜.
하지만 깜둥이에게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혹시 쟤가 감옥에서 나온 다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수도 있었다.
어제만 해도 나가면 꼭 찾아가서 복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았는가.
"줘봐요. 제가 해드릴게요."
쇠창살 앞에 쭈그려 앉아서 그릇에 담긴 스프를 스푼으로 떴다.
"아... 그렇게까지! 역시 은인님은"
정말 부담스러운 깜둥이의 반응을 애써 무시하며 스프를 깜둥이에게 먹여줬다.
한 숟갈 먹일 때마다 깜둥이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며 나에 대한 복수심을 옅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스프를 전부 깜둥이에게 먹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 오아시스처럼 깊은 은혜는 제가 밖에 나가게 되면 꼭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은인이시여"
깜둥이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다시 한번 내게 복수를 예고했다.
시발 스프 다 먹여줬는데, 그걸로도 부족해?
인종 차별 좀 했다고 너무하네 진짜.
사람이 살다 보면 인종 차별 할 수도 있지.
"사비에르트님은 왜 여기에 갇혀 있는 건가요?"
깜둥이의 형량을 알아보기 위해 넌지시 물었다.
제발 무기 징역!
제발 사형!
제발 최소 50년!
"...제국과의 거래가 있었습니다."
내 물음에 잠깐 고민하던 깜둥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래요?"
"예. 사실 제국은 사막 소수 부족이 머무는 대지가 아니라 사막에서 나오는 검은 진주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소수 부족을 노예처럼 사용해 검은 진주를 채취하려 했었습니다. 그런 제국에게 대항하기 위해 대전사인 저를 중심으로 부족이 뭉쳤습니다. 소수 부족에게 대전사란 큰 의미니까요."
그때 기억을 떠올렸는지 깜둥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깜둥이가 잠깐 말을 쉬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저희는 전장이 사막이라는 이점을 최대한 살려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제국의 노예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요. 생각보다 강한 저희의 저항에 제국이 한발 물러섰습니다. 제국은 저희에게 대전사인 저를 내어주면 소수 부족을 제국민으로 편입시켜준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아무리 저항한다고 해도 제국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던 저는 그렇게 스스로 제국군에게 투항했습니다."
깜둥이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표정이 웃는 것 같으면서도 우는 것 같아 보였다.
자신의 부족을 위해 스스로 햇빛도 들지 않는 감옥에 갇히다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였으면 진작에 도망쳤을 텐데.
그깟 부족이 뭐라고.
그럼 무기 징역인가?
제국에서 당연히 놓아주지 않겠지?
답답했던 가슴이 약간 풀렸다.
"뭐. 어차피 갇혀 지낼 거면 최대한 이것저것 요구해서 제국 돈이라도 펑펑 쓰지 그랬어요."
나였으면 여기에 아예 살림을 차렸을 텐데 말이야.
"...그렇군요. 그런 작은 노력이라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깜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스프도 그냥 깜둥이가 시켜 먹으면 된 거잖아.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며 다시 스칼 옆으로 돌아갔다.
"크흠... 그러니 곧 재판이 열릴 테니까, 우리 나름대로 이야기를 맞추는 게"
스칼이 헛기침하며 주위를 환기했다.
쾅쾅!
뜬금없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간식을 가져다주나?
간수가 제법 교육이 된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예?"
모래 맥주도 좀 땡기는데 그걸로 달라고 할까.
"에이든, 스칼 재판날입니다. 나오세요."
곧이라는 게 오늘이었어?
황망한 시선으로 스칼을 쳐다봤다.
스칼은 의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이었어요?"
그럼 왜 어제 그렇게 술 마시고 놀았어 개새끼야.
사실 햇빛이 없는 이곳에서는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나도 여기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는지 감이 안 왔으니까.
"하하. 내가 말하지 않았나 곧이라고."
옷을 정리하는 스칼의 손이 불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맞춰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 뭐 별일 있겠나? 어차피 무죄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스칼이 머쓱하게 웃었다.
별일 있겠나라는 말이 불안하게 들렸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아무 일도 없겠죠...?"
애써 찝찝한 마음을 풀었다.
"사비에르트 포테님 재판날입니다. 나와주십쇼."
간수가 우리를 대할 때보다 훨씬 격식을 갖춰서 말했다.
깜둥이가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나 당당하게 간수를 따라나섰다.
스칼과 내게는 간수가 한 명씩 붙어 있었지만, 깜둥이의 옆에는 간수가 네 명이나 붙어있었다.
"은인님!"
깜둥이가 시원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근데 깜... 아니 사비에르트님은 왜 재판을 받아요?"
우리 바로 뒤에 붙은 깜둥이를 돌아봤다.
"아! 제국 놈들이 주기적으로 소수 민족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재판을 합니다."
깜둥이의 발에 달린 두꺼운 쇠사슬이 땅에 끌리며 듣기에 좋지 않은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간수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무 문제 일어나지 않을걸세 하하!"
자꾸만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스칼의 말이 불안했다.
'사비에르트님...'
돌피에르는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참으며 품 안에 챙긴 열쇠와 폭탄을 만지작거렸다.
드디어 사비에르트님에게 닿았다.
오아시스를 위하여
작은 중얼거림에 조그마한 불씨 같은 용기가 다시 살아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