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09화 (109/233)

〈 109화 〉 실전에 강해도 연습은 필요하다.

* * *

띠리리링­

덕철은 시계 소리에 얕은 잠에서 깼다.

아직까지 몽롱한 정신을 돌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주변에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입을 헤­ 벌리고 쇼파에 달라붙어 있는 황녀.

곧은 자세로 검을 끌어안고 자는 키아나.

대놓고 퍼져서 배를 긁으며 자는 비키까지.

슥슥­

종이 넘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딸 혜진은 아직 자료를 작성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자지 그랬느냐­"

"괜찮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자면 되니까요."

혜진이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며칠 동안 에이든이라는 아이의 선행을 찾기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선행 찾는 게 이렇게 힘든지.

가벼운 선행을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왜 그런 인간을 도와주기 위해 저런 소녀들이 모인 건지 의문이었다.

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법 열처리기에 물을 올렸다.

향긋한 냄새가 퍼지면서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졌다.

쿵­

커피를 들고 돌아오던 덕철이 실수로 케이트가 앉아있는 의자를 쳤다.

"으아악! 에이든은 간악한 처녀교의 불바다 공작 속에서! 저를 구하기 위해! 마치 영웅 탄생 신화의 한 장면처럼 목숨을 바쳐서! 저 해가 뜨기 전 새벽처럼 빛나는 검을 뽑아! 지옥의 용암처럼 뜨거운 화염을 베어내어!! 저를 지켜내었습니다! 아아아­ 이것이 용사 아니 영웅의 업적이 아니면 뭐라는 말입니까?! 여러분!!"

케이트가 발작하듯이 일어나 눈을 까뒤집고 대사를 줄줄이 외웠다.

거의 끝부분에는 울부짖고 있었다.

저건 너무 간 거 아닌가?

분명히 어제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저렇게 대사가 바뀐 거지?

당황한 덕철이 뒷걸음질 치다가 이번에는 키아나가 앉아 있는 쇼파를 쳤다.

"...에이든은 항상 자신의 안에 있는 거대한 악과 싸워왔습니다. 그 존재 때문에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들이 아카데미에 돌았지만, 심지 굳은 에이든은 이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험하고 굳은 길을 가는 와중에도 잠깐의 여유를 내어 주변 인물들을 챙기는..."

검을 끌어안고 있던 키아나가 눈을 뜨더니 쉬지 않고 말을 뱉어냈다.

"으응? 뭐야 벌써 아침이네."

대사를 끝마친 케이트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 저도 커피 한 잔 마셔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키아나가 덕철에게 물었다.

덕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가리켰다.

"삼일이나 여기에 처박혀 있으려니 몸이 막 찌뿌둥하네."

케이트가 일어나 몸을 풀었다.

"그래도 오늘이 재판날이니까요.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혜진이 종이를 모아서 테이블 위에 정리했다.

저 종이에는 몇 개 없는 에이든의 선행을 모은 다음 부풀린 내용이 가득했다.

덕철도 저게 재판장에서 통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원래 증명하는 내용보다 그 사람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황녀인 케이트가 읽는다면 그 무게가 다를 것이다.

"당연하지! 삼일이나 거의 잠을 자지 못하며 만든 건데! 이게 통하지 않으면... 알지?"

케이트가 눈을 지그시 뜨며 덕철을 노려봤다.

"저는 이번 재판에 제 인생에서 제일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노력이 뭐가 중요해. 결과가 중요한 법이지­ 그렇지?"

케이트의 한쪽 입꼬리가 불길하게 올라갔다.

덕철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재판의 판사가 자신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야! 무식하게 가슴만 큰 년!! 일어나!! 재판 가야 하니까!!"

케이트가 아직도 자는 비키의 쇼파를 발로 차며 깨웠다.

덕철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주장과 반론들을 되새겼다.

승산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신은 승소시킬 수 있다.

"그럼 가보자고!"

케이트가 기세 좋게 사무실 문을 발로 차며 외쳤다.

그거 그냥 손으로 밀면 열리는 데­

덕철은 마지막으로 나가며 손수건으로 문에 난 케이트의 발자국을 지웠다.

***

"그럼 가시죠."

오랜만에 입은 정복을 매만지며 로버트 추기경이 말했다.

재판장에서 황실 쪽에 압박을 주기 위함이니 최대한 화려한 게 좋을 것이다.

손에는 큼지막한 금색 지팡이도 하나 들었다.

"예."

이제 성녀의 길을 걷기로 한 안드레아는 예의 그 검은색 수녀복을 벗고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 위에는 갈색으로 줄이 그어져 대지신의 성녀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 모습을 보는 로버트 추기경은 다시금 감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대지신의 성녀라니.

비록 아직은 다섯 날개를 피워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피워낼 수 있을 것이다.

대지교의 모든 힘을 집중시켜서라도 그렇게 만들 것이니.

대지신의 성녀 등장은 꽤 큰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으득­

스칼렛은 성녀 복을 입은 안드레아의 모습을 보며 창자가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안드레아가 하는 것만큼 자신도 했는데, 왜 쟤는 벌써 날개를 피워낸 거지?

자신이 안드레아보다 부족한 게 있을 리도 없는데.

문득 나체인 안드레아가 무릎 꿇고 개처럼 에이든의 정액을 핥아 먹던 게 떠올랐다.

혹시 자신의 행동에는 진심이 담기지 않아 차이가 벌어지는 건가.

아무리 노력해도 진짜는 이길 수 없는 건가?

스칼렛은 뒤틀어진 속을 다스리며 천천히 자신의 행동을 되짚었다.

아가사가 그런 스칼렛의 얼굴을 재밌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슬금슬금 엉덩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이제 스칼렛 수녀복의 엉덩이 부분을 찢어 단추를 달아놓은 상태라 금방 맨살을 만질 수 있었다.

스칼렛은 아가사의 말에 따라서 속옷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천박한 년­

아가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아흑­

스칼렛은 더이상 질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작게 숨을 뱉은 안드레아가 대지신의 문양이 그려진 금색 목걸이를 목에 매었다.

금색 목걸이가 잠시 따사로운 빛을 뿜어냈다.

준비는 마쳤다.

대지신의 성녀와 추기경이 증언하면 에이든 님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자꾸만 드는 불안한 생각을 애써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로버트 추기경님?"

문득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은 이 드레스가 에이든 님의 눈에 이쁘게 보일지 궁금했다.

"예. 안드레아 성녀님."

로버트 추기경이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 드레스 잘 어울리나요?"

가슴 부분이 좀 더 파여 있으면 좋지 않을까?

"...예 무척 아름답습니다. 마치 미의 여신님이 세상에 내려온 것 같군요. 마치 새벽에 핀 꽃처럼 청초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로버트 추기경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청초하다­

그래 어차피 자신은 가슴으로 그 빨간 여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유리하겠지.

"그럼 가시죠. 신을 위하여­"

안드레아는 굳은 얼굴을 풀며 늘 그렇듯 단아하게 웃었다.

***

제국의 수도 공개 재판장이 이른 시간부터 활기를 띠웠다.

평소에 공개 재판은 민간인에게도 열려 있지만, 그 참여율이 저조했다.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장소에는 자극적인 모습에 많은 사람이 모이지만, 따분한 재판에는 사람들이 관심 없었다.

재판장에 참석하는 일반인이라고 해봤자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들 아니면 할 일은 없는데 집에 있기 눈치 보여 밖으로 나온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제법 많은 사람이 공개 재판장에 나타났다.

그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판결을 맡은 신입 판사 오헬리언은 당황했다.

분명히 선배들이 대충 듣는 척하다가 황실 쪽이 제시한 판결을 내려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했는데?

오헬리언은 황급히 오늘 있을 재판에 대한 기록들을 확인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을 보고 오헬리언은 헛기침을 했다.

장덕철.

아니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분명 최근에 정년을 맞이했다고 들었는데, 왜 자신이 맡은 재판의 변호인으로 있는지 원망스러웠다.

아직도 호랑이 같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호통치던 모습이 생생했다.

오헬리언은 황급히 서류를 다시 읽어내려갔다.

증인 1. 클레어 아리안 비헨 드 에포닌

증인 2. 키아나 엘리아스 랄프예 드 샤르페.

증인에 황녀의 이름과 공작가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공작가의 이름만 적혀 있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그 위에 황녀의 이름까지 적혀 있다니.

오헬리언의 머리는 어지럽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자! 딱 재판장에 들어가! 일단 그냥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그다음에 양쪽 주장과 증명이 다 끝나면 앞에 무거운 망치 하나 있을 거야. 그걸로 탕탕 두드린 다음에 대충 황실 쪽에서 제시한 대로 대충 맞춰서 말하면 끝이야. 어때 쉽지? 그러니까 점심에 뭐 먹을지 정해서 와.'

선배 판사가 시원하게 웃으며 자신의 등을 떠밀던 모습이 생각났다.

증인에 황녀의 이름이 적혀 있으면 도대체 어디가 황실 쪽 의견인 거죠?

오헬리언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선배 판사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자리에 앉아버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서류를 넘기는 것밖에 없었다.

공개 재판장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더 나타났다.

이번에는 대지교의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은 성직자들이었다.

"서...성녀! 대지교에 성녀가 나타났다!!"

그들을 유심히 보던 경비 병사 중 하나가 큰 소리를 내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린 오헬리언의 눈에 성녀의 상징인 목걸이를 걸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자애롭게 미소지으면서 천천히 앞쪽 좌석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추기경과 수녀들 그리고 성직자들이 따라 들어왔다.

근 몇십 년간 대지교 성녀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렇게 비어있던 대지교의 성녀가 왜 이 자리에 나타난 거야.

오헬리언은 판사의 위엄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판사 복을 벗어 던지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했던 오헬리언의 노력이 발목을 붙잡았다.

'우리 아들이 판사가 됐어요! 동네 사람들!!'

세상이 떠나갈 듯 웃으며 마을에 돼지고기를 뿌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마 판사를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돼지 잡던 몽둥이로 맞아 죽을 게 분명했다.

오헬리언은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확인하는 척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황실 측과 피고인 측의 중간쯤으로 판결을 내리면 둘 다 만족하지 않을까?

아니면 일단 피고인 측의 주장대로 판결을 내린 다음 선배한테 꾸중을 듣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때 문이 열리고 손이 묶인 피고인들이 등장했다.

"은인님! 이따 뵙겠습니다!"

갈색 피부가 매력적인 이국적인 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앞으로는 잘생긴 사내 한 명과 평범하게 생겼지만, 인상은 좋지 않은 사내 한 명이 있었다.

"이거 조금 긴장되는데요? 그 보지 마법 말고 사람 진정시키는 마법은 없어요? 막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은데­"

인상이 좋지 않은 사내가 투덜거리며 피고인 측 자리에 앉았다.

"...제발 내 마법을 그런 천박한 단어로 부르지 않으면 안 되나?"

"보지 마법 맞잖아요. 보지 마법."

"아니... 그래, 그렇다고 하지."

잘생긴 사내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자리에 앉았다.

오헬리언은 문득 사내들이 말하는 보지 마법이라는 게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마법이길래 이름이...

"판사님 재판 시작 준비됐습니다."

옆에서 들리는 말에 오헬리언은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재판 시작하겠습니다."

오헬리언은 어젯밤에 연습한 대로 목소리를 낮게 깔며 선언했다.

하지만 잘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다.

덕철은 그런 오헬리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판사로 아는 얼굴이 나왔다.

심지어 자신에게 몇 번이나 혼났던 신입 판사다.

승기가 이쪽으로 더 기울었다.

덕철은 후임들을 혼내던 표정을 지으며 오헬리언을 쳐다봤다.

끄읍­

그런 덕철과 눈이 마주친 오헬리언은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황급히 숨을 고르며 표정을 유지했다.

"... 피고 에이든과 스칼의 처녀교 입교 혐의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검사 측 주장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오헬리언은 달달 외운 순서에 맞춰 재판을 시작했다.

"큼큼­ 황실 검찰국 소속 제퀴안입니다."

오헬리언의 지목을 받은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발 벌금형.

제발!

오헬리언은 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근엄한 표정으로 검사에게 집중했다.

"피고인들은 저희에게 처녀교 입교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처녀교는 최근에 제국에서 일어난 신흥 종교 단체로 처녀들은 납치하고 처녀가 아닌 여자들은 다 때려죽이는 아주 위험한 종교 집단입니다."

말을 하던 검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이거 완전 사회에 크게 악영향을 미치는 집단이군.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종교 단체에 입교한 혐의는 처녀교 특별법에 의거하여 사형으로 다스릴 큰 범죄지만..."

"이의 있습니다."

덕철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주장이 끝난 후에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판사 출신인 덕철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자꾸만 자신을 쥐어뜯는 황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하마터면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검사측 주장을 다 듣고 나서 피고인 측 주장을 듣겠습니다."

오헬리언은 덕철의 눈을 애써 피했다.

"큼큼 그럼 이어서 말하겠습니다. 처녀교 입교 혐의는 사형으로 다스릴 흉악한 죄질이지만, 저희 검사 측은 조사를 더욱 깊게 하면서 두 피고인들에게 혐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검사 측은 두 피고인에 대한 기소를 포기하겠습니다."

검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헬리언은 망치를 들었다.

두 번 두드리라고 했나?

기억이 애매한 오헬리언은 일단 망치로 세 번 두드렸다.

뭐든 부족한 것보단 넘치는 게 좋으니까.

"판결 선고하겠습니다. 검사 측에서 혐의없음으로 기소를 포기한 관계로 피고인 측에 무죄를 선고합니다."

오헬리언은 다급하게 판결을 내렸다. 오헬리언은 판결을 내리고 나서야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어. 오헬리언은 혐의 입증을 포기한 검사 측에게 입맞춤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예에에에! 나는 무죄다! 나는 결백하다! 무죄! 결백! 정의는 승리한다!!"

인상이 좋지 않은 사내가 일어나 양손을 위로 들고 엉덩이를 흔들며 신명 나게 춤췄다.

잘 생긴 사내는 옆에서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뭐라고?!! 뭐가 이렇게 쉽게 끝나!! 너네 뭐야!!"

"황녀님! 우리가 이긴 겁니다! 진정하세요!"

"이기긴 뭘 이겨!! 우리가 며칠 밤을 새웠는데 이렇게 싱겁게 끝나냐고!!! 서로 막 손가락질 하면서 싸워야 할 거 아니야!!!"

"무죄라고 판결 나왔잖아요! 진정하세요 황녀님! 우리가 이긴 겁니다!!"

"저 새끼 춤추고 있는 것 봐!! 얄밉잖아! 내가 왜 저딴 새끼를 위해서!!!"

"황녀님!!"

놓으라고­!

찢어지는 황녀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허무하게 재판이 끝났다.

"그... 성녀님?"

로버트 추기경이 불안한 목소리로 안드레아를 불렀다.

재판이 너무 허무하게 끝나 자신이 나설 기회조차 없었다.

로버트 추기경은 혹시나 안드레아가 마음을 바꿨을 까 불안했다.

아아­ 역시 에이든 님은...

안드레아는 에이든의 춤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재판 끝났는데 왜 제가 여기 있어야 해요?"

무죄라며. 손에 있던 수갑을 풀어준 것 보면 끝난 것 같은데.

"그 사비에르트님의 재판까지 끝나야 나갈 수 있다더군. 재판을 묶어서 하는 모양이야."

스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걔 재판은 하나도 안 궁금한데. 빨리 나가서 씻고 쉬고 싶다니까­ 왜 못 가게 하는 거야."

어차피 불평해도 안 보내줄 것 같아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비에르트 포테에 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혐의는 제국 영토 확장 사업 방해입니다."

따분하게 생긴 판사가 잠 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며칠 잘 먹다 보니 어느새 피부가 탱글탱글해진 깜둥이가 오연하게 서서 재판에 임했다.

누가봐도 영웅처럼 보이는 그 당당하고 오연한 모습에 재판장에는 가벼운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혐의가 제국 영토 확장 사업 방해라니.

누가 봐도 제국 쪽이 쓰레기 아닌가.

뭐 어쩌겠는가 힘 있는 놈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무기 징역이나 사형 선고가 나오겠지?

깜둥이 쪽 변호인은 관심도 없다는 듯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었다.

변호인까지 그런 태도를 취하자 재판장의 어디에도 깜둥이의 편은 없었다.

깜둥이가 말한 보여주기식 재판이라는 단어가 정확했다.

그렇게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깜둥이가 불쌍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깜둥이의 탄탄하고 큰 가슴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검사 측 주장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제국의 영토 확장 사업은 합법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비에르트 포테는 사막 부족의 대전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소수 부족들을 하나로 모아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방해를 지속적으로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국 측에 발생한 인적, 물질적 피해가 계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바­ 피고인 사비에르트 포테에게 무기 징역을 구형하는 바입니다."

검사 측이 종이에 쓰인 글을 성의 없이 읽었다.

아마 이런 재판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겠지.

그리고 늘 그렇듯 깜둥이는 이런 모욕을 받았을 것이다.

분명히 화가 날만도 했는데 깜둥이는 그저 덤덤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내게는 못내 답답했다.

아니 병신 같았다.

나라면 화나서 길길이 날뛰어서 다 뒤집었을 텐데.

뭐 어차피 내 일 아니니까.

나는 느긋하게 떡진 머리를 손으로 넘겼다.

문제는 재판장 안에 나 말고도 답답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였다.

"이런 쓰레기 같은 제국 놈들!! 침략자들인 주제에 감히 사비에르트 님에게 그런 쓰레기 같은 말을 하다니!!! 그 죄 죽음으로 속죄해라!!! 오아시스를 위하여!!!!"

갑자기 앉아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악에 받쳐 소리 지르며 무언가를 앞쪽으로 던졌다.

"오아시스를 위하여!!!"

그 사람의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곳곳에서 사람들이 일어나며 무언가를 던졌다.

그들은 아마 판사나 주변의 병사들을 겨냥해 던진 것 같았다.

야 근데 시발 너네.

...던지는 힘이 존나 부족한 거 같은데.

왜 시발 나한테 던져 이 미친 새끼들아.

이 미친 새끼들은 던지는 연습도 안 하고 바로 실전에 돌입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도 기본적인 연습은 필요한 법인데, 녀석들은 그것을 간과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이 간과한 죄는 내가 받게 생겼다.

흉하게 생긴 사각형 물체가 정확하게 내 앞에 떨어졌다.

덕지덕지 무언가를 덧붙인 것처럼 흉하게 생겼지만, 만든 놈의 정신이 이상한지 그 위에는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케일이 밥공기를 꽉꽉 눌러 담은 것처럼 그 사각형 물체 안에 꽉꽉 담긴 마나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크게 울렸다.

그렇지만 경고음을 들었을 때는 항상 늦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고.

콰아아앙­!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굉음이 울려 퍼지며­

후끈한 열기를 가득 담은 폭발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애미 시발련들.

나 무죄라니까.

역시 이 세상은 나처럼 청렴결백한 사람이 살기에 힘든 환경이었다.

"으익­?!"

나는 황급히 스칼의 멱살을 잡아 끌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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