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13화 (113/233)

〈 113화 〉 해치웠나?.

* * *

천천히 남자의 인상이 굳었다.

나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보며 이 남자에게는 유머 감각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마 저렇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유머가 필요 없던 것 아닐까.

저 정도면 맛있다­ 만 외쳐도 여자들이 꺄르르 웃을 테니까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남자가 천천히 손가락을 올려서 나를 가리켰다.

문득 저 손짓에 나와 자웅을 겨루던 수간충 늑대가 가루처럼 사라졌다는 게 생각났다.

"그 잠깐만요! 잠깐만! 서프라이즈라니까~ 에이! 서프라이즈 몰라요? 아­ 인간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시는구나! 제가 그걸 생각 못 했네요! 하하하! 서프라이즈라는 건 깜짝 선물이다­ 이런 뜻이에요! 하하! 이런 거 모르면 인간 세상에서 바보 되기 쉽답니다~?"

설명이 필요한 농담은 망한 농담이라는 말은 알고 있지만, 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주둥이를 움직였다.

내 설명이 오히려 역효과였는지 남자의 얼굴은 더욱 굳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기세에 내 입과 몸이 굳었다.

죽을 때 부모욕도 못 박겠네! 시발.

어떻게든 욕을 하기 위해 입을 움직였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손 떼라고!! 이 새끼야!!"

이제 죽나 싶을 때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이를 악문 케이트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저 새끼는 시발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분명 다른 사람들과 악마들은 이 남자의 기세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제일 좆밥인 케이트만 움직이고 있었다.

걸음 걸음이 힘겨운 듯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눈에 실핏줄이 다 터져나가고 있었지만, 케이트는 악착같이 온 힘을 다해 천천히 다가왔다.

남자는 눈에 흥미를 띠고 그런 케이트를 응시했다.

마치 팔다리 뽑힌 벌레가 기어다니는 걸 구경하는 느낌으로­

"쓰레기 같기는...해도! 나한테 필요하단 말이야!! 떨어져!"

실핏줄이 잔뜩 터진 케이트의 눈에서 자그마한 붉은 선이 뚝뚝 흘러내렸다.

빡 대가리 새끼야­ 그냥 가만히 좀 있어 시발.

네가 다가온다고 무슨 도움이 되냐고.

스스로 순장을 당하기 위해 다가오는 빡 대가리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했다.

주제를 알면 당장 버리고 튀어야지 시발.

입을 열어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 황녀야! 황녀!... 너 큰일 난 거야! 싯팔!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떨어지라고!!"

케이트의 입에서 나오는 욕이 너무 어색해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온몸이 진동하는 것처럼 덜덜 떨려도 이를 악문 케이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가 짓누르는 것처럼 자꾸만 땅에 엎어졌지만, 악착같이 다시 일어나서 걸었다.

여러 번 땅에 엎어진 케이트의 무릎은 다 까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빡 대가리가 고집이 존나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마침내 케이트는 나와 남자의 바로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케이트의 몰골은 곧 죽을 사람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실핏줄이 다 터진 눈은 흰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붉었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씹은 입술은 다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흉하니까 보지마!!"

나를 흘깃 본 케이트가 눈을 찌푸리면서 소리쳤다.

이 와중에도 지랄하네.

그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같이 죽자 미친년아.

저승길이 외롭지 않다는 게 못내 안심됐다.

저승에서도 가슴 만질 수 있나?

"...정실 펀치!"

자세를 낮춘 케이트가 천천히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케이트의 작은 주먹은 마침내 남자의 옆구리에 부딪혔다.

"이것도 그 서프라이즈인가?"

물론 아무 효과도 없었지만, 남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케이트의 주먹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극적인 효과를 내지는 않았지만, 남자에게 약간의 동요를 안겨주었다.

그 덕분에 내 몸이 약간 풀려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기술을 떠올렸다.

사실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내 최강 기술은 검 같은 게 아니였다.

"루나!! 이 미친년아!!! 어딨어!!!!"

내 안에 남은 모든 힘과 악착같이 소리쳤다.

"시끄럽군­"

내 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

"...앗! 아직 아니었는데­ 습관적으로."

나와 남자 사이에 찝찝한 얼굴의 루나가 나타났다.

뭐가 아직 아니야.

2초만 더 있었어도 내가 뒤졌겠구만 시발.

"내가 에이든 구한 거야?"

루나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면서 내게 물었다.

루나의 손길에 남자가 무언가에 세게 맞은 것처럼 쭉 밀려 날아갔다.

한참이나 날아가던 남자가 공중에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감동이야? 나밖에 없어? 고마워?"

내게 초점이 없는 눈을 고정한 루나가 빠르게 물었다.

진짜 개 미친년.

그 모습에 혹시 내가 오크 피하자고 드래곤에게 뛰어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잖아 이 미친년아. 저것 좀 치워봐 시발­"

"응응응! 금방 치울게! 나도 에이든 사랑해!"

내 거친 욕지기에 루나의 얼굴에 화사한 꽃이 피었다.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한주먹 거리야! 한 주먹!"

루나가 팔 부분의 로브를 거둬서 얇고 가는 흰 팔뚝을 자랑하며 웃었다.

"저저 뛰어온다!!!"

그런 루나의 뒤로 핏빛검을 뽑고 달려오는 남자가 보여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니까 에이든에게는 나만 있으면 돼­ 에이든은 나만 사랑하면 돼­"

불길하게 웃은 루나가 사라졌다.

미친년 시발.

잔뜩 긴장하던 다리가 풀려 휘청였다.

쾅쾅쾅쾅!

어느새 남자의 앞에 나타난 루나와 남자가 굉음을 내며 부딪혔다.

"...으엑!! 속이 울렁거려!!!"

긴장이 풀린 케이트가 옆에 쭈그려 앉아 토하기 시작했다.

"빡 대가리 새끼야! 여기를 왜 오냐고 시발 같이 뒤질 생각이야?!"

케이트의 작은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줬다.

"웩!웩! 야! 보지마! 웩! 토하는 거! 흉하니까 보지 말라고! 눈 돌려! 웩!"

케이트가 토하면서도 연신 나를 힐끔거리며 짜증 냈다.

"... 빡 대가리 새끼."

그런 병신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웩!우웩!

콰아아아앙!!!

루나와 남자가 부딪히는 곳에서 케이트의 토하는 소리가 묻힐 만큼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저는 이제 구제 불능의 대 흑마법사가 된 거 아닐까요?"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엘린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 업적이면 지옥에 가도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겠군!! 너는 죽으면 꼭 지옥에 올 것이다! 하하하!"

사브나크가 연신 박수를 치며 아래에 펼쳐진 참상을 구경했다.

"지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니... 이번 생은 망했어­ 내가 원한 흑 마법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엘린은 그런 사브나크를 보며 울먹거렸다.

"그런데 저 여자는 도대체 뭐지? 아무리 바네인님이 억압을 받았다고 해도..."

사브나크가 자꾸만 훌쩍이는 엘린을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인간이 분명한 자그마한 여자는 대장군 급 악마인 바네인님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아니 대등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항상 무표정이던 바네인님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반면에 여자는 웃고 있었으니까.

설마 여자가 일부러 바네인님을 가지고 노는...

아니지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해요 저? 이대로면 역사서에 최악의 흑 마법사로 남겨져서 길이길이 욕먹는... 으어어엉! 스승님 죄송합니다!! 못난 제자가!! 말도 안되는 업적을 세웠어요!!!"

엘린이 검은 로브의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연신 울었다.

시끄러운 목소리에 사브나크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직 여자를 죽일 수 없었다.

이 여자가 저 문을 열었으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대장군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을 연 거지?

물론 저 이상한 여자가 마나를 공급하기는 했어도 결국 문을 연 것은 이 여자였다.

이 여자만 잘 빼돌리면 앞으로도 문을 몇 번이나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랜 숙원인 중간계 정복을 이룰 수도 있었다.

엘린을 보는 사브나크의 눈에 탐욕이 떠올랐다.

"흐아아아앙­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자가 흑마법에 너무 뛰어난 게 죄입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영특한가!!! 으어어엉!"

엘린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드러누워 울기 시작했다.

사브나크는 그런 엘린의 모습에 자꾸만 드는 혐오감을 애써 지웠다.

문을 열 수 있는 흑 마법사는 저 여자가 유일하니까.

대업을 생각하면 저렇게 시끄러운 것도 참을 수 있었다.

"흑 마법에 너무 뛰어난 죄! 난 그 죄를 지어버렸어! 대 흑마법사! 흐아아앙!"

엘린이 목소리에 음까지 넣어서 신나게 외쳤다.

그 모습에 사브나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혀 정도는 뽑아도 되지 않을까?

"크큭... 문을... 열다니 크큭... 대단하군... 시기가 좀 이르지만 말이야... 크큭..."

사브나크와 엘린의 사이에서 꺼림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뭐야.

황당함에 고개를 돌린 사브나크에게 해골 안대를 눌러 쓰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를 본 사브나크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 어떤 악마라도 남자의 정체를 모를 수 없었다.

"다...당신이 왜 여기에?! 분명 당신은­"

사브나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해골 안대를 쓴 남자의 손에는 어느새 사브나크의 심장이 붙들려 있었다.

심장을 잃은 사브나크의 몸은 허물어져서 쓰러졌다.

사브나크의 몸은 다른 악마들과 다르게 역 소환되지 않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 엘린은 비명도 지르지도 못하고 공포에 젖어 몸을 잘게 떨었다.

"크큭... 재밌군... 침묵의 여제가 문을 열다니... 크큭... 그럼 나도 작은 장난을 쳐볼까... 크큭..."

남자가 불길을 내뿜어내는 심장을 들고 천천히 엘린에게 다가갔다.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몸을 떨고 있던 엘린이 남자에게 머리채를 붙잡혔다.

남자는 천천히 심장을 엘린의 입에 가져다 댔다.

이건 그냥 먹으면 입천장 다까질 것 같은데요!!

엘린은 입 앞으로 다가오는 불을 내뿜는 심장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태울 것처럼 후끈한 느낌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크큭...꼭 꼭 씹어라... 장군급 심장은 귀하니까 말이야... 크큭..."

몸이 터질 것처럼 강한 마나가 엘린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자꾸만 찢어지려는 마나 통로를 억지로 붙잡았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엘린은 악착같이 버티며 필사적으로 마나를 움직였다.

정말 몸이 터져나가기 바로 직전에 이름 모를 기운이 엘린의 몸으로 들어와 붙잡아줬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엘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엘린의 눈동자에는 묘한 열기가 섞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공포심이 들게 했다. 엘린의 피부는 하얗다 못해 얼음장처럼 투명했다.

"...아­"

엘린은 이제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느꼈다.

이론은 완벽했지만, 마나가 부족했던 엘린은 그 단점이 채워지자 격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아... 당신은­"

격을 넘은 엘린은 이제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크큭... 문을 더 열어라... 아이야..."

해골 안대를 쓴 남자가 그런 엘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엘린은 몸안에 가득차서 넘치는 마나를 움직여 하늘에 있는 균열을 더욱 크게 키웠다.

엘린의 마나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인 균열이 점점 더 그 크기를 키웠다.

이제 균열은 하늘의 끝에서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끼에에에에엑!!!"

"크하하하! 인간이다 인간!!!"

"찢어라! 마셔라! 축제다!"

더 커진 균열에서 전보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악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이제 더 이상 중간계와 지옥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악행을 저지른 엘린이었지만, 표정이 평온했다.

남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크큭... 조금 이르지만 일어날 때다­ 크라헬레이스. 크하하하!"

엘린의 머리를 쓰다듬던 남자가 아련함을 담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강대한 기운이 멀리서 꿈틀거리는 것이 엘린에게도 느껴졌다.

***

한참 토하다 쓰러진 케이트를 품 안에 안고 아직도 기절해있는 안드레아의 옆으로 갔다.

스칼렛과 아가사에게 케이트의 치료를 맡기고 안드레아의 옆에 주저앉았다.

안드레아는 좋은 꿈을 꾸는지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었다.

아까 내가 때린 뺨이 부어있어서 약간 미안했지만, 키스 한 번 했다고 기절한 안드레아의 잘못이 컸다.

"사제 괜찮아?"

몸에 악마들의 피가 덕지덕지 묻은 키아나가 다가왔다.

"네. 뭐 이렇게 살아남았네요. 사저는 괜찮아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아까 받아들인 빛의 힘이 내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상태는 전투가 일어나기 전보다 오히려 좋았다.

"응. 나도 괜찮아. 사제가 괜찮아서 다행이야."

키아나가 시원하게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 작은 행동에서 키아나가 더욱 성장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죽을 위기를 겨우 넘기면서 여기저기서 도움받으면서 성장했는데...

나처럼 기연도 없이 혼자서 끊임없이 성장하다니­ 세상 억울했다.

[자네가 유별나게 재능이 없다고밖에는...]

닥쳐 나 천재인데 무슨 소리야.

꺄하하하하!

비키는 아직도 연신 광소를 터뜨리며 악마들과 뒹굴고 있었다.

이제는 악마들이 그런 비키를 피해 도망갔지만, 비키가 놓아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루나는 정말 대단하네."

검에 묻은 피를 닦던 키아나가 말했다.

키아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악마와 여유롭게 전투를 펼치고 있는 루나가 보였다.

루나는 그 와중에도 내게 시선을 주며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남자를 가지고 놀았다.

"인간이 어찌 이런 이치에 벗어난 힘을!!!"

멀리 있는 남자에게서 심장을 옥죄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지만, 루나는 벌레를 쫓듯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 작은 동작에 남자가 기세를 잃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남자가 발리는 모습을 보며 혹시 남자가 그냥 폼만 잡던 좆밥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만, 아까 내가 느낀 남자의 강함은 진짜였다.

다만 루나의 강함이 남자의 말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것뿐.

작게 손을 흔든 루나의 행동에 남자가 빠르게 튕겨 나갔다.

공중에서 다시금 자세를 잡은 남자의 뒤로 흉측한 날개들이 튀어나왔다.

피가 뚝뚝 흐르는 날개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공포심이 들게 했다.

남자의 검에서 핏빛 검기가 피어오르며 다시 루나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루나도 조금 버거웠는지 손 두 개를 움직여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검을 휘둘러 무형의 기운을 버겁게 찢어내며 루나에게 다가갔다.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는지 남자의 피부에는 핏줄이 흉하게 올라와 있었다. 마침내 남자가 루나 앞에 도착했을 때, 루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루나를 찾았지만, 그 전에 루나가 있던 자리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에 밀려 튕겨 나오던 남자가 공중에서 날개를 펄럭거려 자세를 잡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타난 루나에게 다시금 접근했다.

남자가 가까이 왔을 때 루나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루나 주변의 땅이 푹­하고 깊게 꺼지며 루나에게 날라오던 남자도 땅으로 끌려 내려갔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날개를 흔들었지만, 헛된 반항에 불과했는지 힘없이 떨어졌다.

루나가 양손으로 주먹을 쥐니 옆에서 성만 한 크기의 돌들이 치솟았다. 루나는 따분한 표정으로 그 큰 돌덩어리 두 개를 남자가 박힌 곳에 쑤셔 넣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앙!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굉음을 내며 돌덩어리들이 땅에 박혔다.

그 옆에 있던 것들은 악마, 제국군 상관없이 다 끌려 내려가 형체조차 안 보였다.

돌덩어리를 박은 루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애미 시발.

저렇게 강하다고?

루나가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강한 게 말이 되나?

나와 눈이 마주친 루나가 손을 흔들며 입을 작게 중얼거렸다.

괜히 루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져 루나의 입 모양을 따라 움직였다.

'사'

'랑...'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제국군들도 천천히 악마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꽤 많은 사상자가 있어 보였지만, 그래도 악마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무죄 판결도 받았고 악마들도 무난하게 없애니까 이제 끝난 건가?

끝났다는 생각에 손잡이만 남은 검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네.

결국 전부 해치웠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황급하게 내 입을 막았다.

시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방금 한 말 취소입니다! 취소에요!

내 바램이 무색하게 하늘에 떠 있는 균열에서 아까보다 훨씬 강대하고 끈적한 마나가 느껴졌다.

다급하게 올려다본 균열은 전보다 더 크게 찢어지고 있었다.

하늘의 끝에서 끝까지 닿을 정도로 찢어진 균열에서 각양각색의 흉측한 악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애미 시발.

입이 원수지.

"저저 시발 애미 터진 악마 새끼들이 몰려온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더 크게 열리는 균열에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옆에 있던 키아나는 표정을 굳히며 다시금 검을 잡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일어나! 안드레아! 시발! 그만 쳐 자고 일어나라고!!"

아직도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안드레아를 다급하게 흔들었다.

"...에이든님?"

어깨를 거칠게 흔들자 안드레아가 눈을 떴다.

짝­

"일어나! 지금 저기 악마들이 좆같이 몰려온다니까!!"

아직도 몽롱한 표정을 짓는 안드레아의 따귀를 올렸다.

반응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다.

"아흑­ 네네! 정신 차렸어요! 다시 방벽을 세울게요!"

내게 따귀를 맞은 안드레아가 오히려 더 밝게 웃으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이제 안드레아의 양 볼은 내게 맞은 따귀 때문에 빨갛게 부어 있었다.

천천히 안드레아의 주변으로 흰색 원이 생겨났다.

그 원이 아까 전보다 훨씬 더 두꺼워서 내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심시켰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런 안드레아를 보며 아까 버렸던 검 손잡이를 다시금 들었다.

이제 손잡이밖에 남지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이럴 때 루나검이라도 있었으면­

문득 반납하고 온 루나검이 아쉬웠다.

그럼 몇 마리는 더 잡고 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차 있는 악마들을 보며 어렴풋이 종말을 떠올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세상이 끝날 것 같았다.

혹시 시발 내가 무죄 받았다고 저 지랄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손잡이를 잡은 손에 찬 땀을 바지에 비벼 닦았다.

그래도 시발 몇 마리는 데리고 간다.

들어와 이 개새끼들아.

굳게 다짐하며 다시금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아아­ 신이시여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종말이다! 종말이야!!"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느새 제법 가까이 다가온 제국군들이 하늘을 보며 절규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미 공포와 절망이 가득 차 있었다.

몇몇 놈들은 벌써 검을 떨구고 주저 앉았다.

굳이 그런 좆같은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되는데.

쥐어 패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집중해라! 우리는 제국이다! 제국은 지지 않는다!"

그런 병사들을 황금 문양이 그려진 기사가 다독였다.

우습게도 그런 기사의 얼굴에서도 절망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흉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악마들이 땅으로 내려오기 직전­

황실 쪽에서 거대한 기운의 파동이 느껴졌다.

세상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처럼 거친 파동이 일정한 박자에 맞춰서 퍼졌다.

그 파동에 악마건 사람이건 동작을 멈추고 집중했다.

전장에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마치 산이 일어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큰 거체가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애미 시발 저건 또 뭐야.

거체에게서 느껴지는 파멸적인 기운에 나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면서 손잡이를 굳게 잡았다.

크롸롸롸롸롸롸롸롸­

마침내 공중에 떠올라 갈라진 하늘을 가린 피처럼 붉은 드래곤이 온 세상을 찢을 것처럼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오랜만이군 빨간 도마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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