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씹창난 수도. (1부 끝)
* * *
크롸롸롸롸롸롸!
모든 것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드래곤의 존재감에 악마건 인간이건 할 것 없이 말을 잃었다.
쾅!
그때 루나가 남자에게 박아놨던 돌덩어리가 작게 쪼개지면서 안에 있던 남자가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남자의 머리에 작게 있었던 뿔이 이제는 양의 뿔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검은 불길이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며 핏빛 날개가 배는 길어져 피가 남자의 발아래를 흥건히 적셨다.
전에도 끔찍한 기운을 뿜어내던 남자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욱 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악마 같았다.
"아 문이 활짝 열렸군. 몸이 가벼워졌어."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어째서 벌써?"
그 앞에 있던 루나는 남자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드래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도마뱀이라"
남자도 그런 루나는 흘깃 보더니 드래곤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롸롸롸롸롸롸!
남자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드래곤이 다시 한번 크게 울부짖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막대한 기운이 눈에 보일 것처럼 선명하게 드래곤의 주둥이로 빨려 들어가며 드래곤의 목이 붉게 빛났다.
애미 시발.
저거 그거 하는 거 맞지?
그거잖아 그거 시발!
"모여요! 시발!! 루나 돌아와!!!"
나는 다급하게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주변 사람들을 모았다.
한창 악마다 뒹굴던 비키도 내 말에 땅을 박차고 뛰어왔다.
"응응 나 왔어!"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루나는 밝게 웃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 미묘하게 굳은 얼굴이 보였다.
"저거 막을 수 있어?"
이제는 터질 것처럼 부푼 드래곤의 주둥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 내 주변으로는?"
내 물음에 루나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답했다.
가까이 다가온 루나에게서 아까 악마들에게 났던 옅은 유황 냄새가 났다.
미묘하게 굳은 루나의 얼굴과 루나에게서 나는 연한 유황 냄새가 내게 기시감을 들게 했다.
에이 설마
아무리 미친년이라도 수도 하늘에 지옥과의 문을 열겠어...
문득 루나가 아무리 미친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감에 마른 목을 풀기 위해 침을 삼켰다.
"...아니 무조건 막아. 못 막는 건 없어."
어느새 내 뒤에는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다.
우습게도 내 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에는 절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정상인은 아니야.
내 말에 루나의 표정이 이번에는 보일 정도로 굳었다.
그 반응에 내 불안한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졌다.
그래도 설마 아무리 미친년이라도...
"만약 루나가 이번 일과 연관이 있다면..."
말을 다시금 삼켰다.
내가 입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굳어지는 루나의 얼굴과 덜덜 떨리는 루나의 흰 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도 되나?
당장이라도 루나의 덜덜 떨리는 손이 나를 가리킬 것만 같았다.
아니야.
미친년이기는 해도 지금까지 내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잖아.
주변 인물을 건드리려고 하기는 했어도
루나의 불안한 눈동자에 점점 눈물이 맺혔다.
천천히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골랐다.
다신 안 볼 거야?
아냐 너무 강한 의미를 포함한 것 같아.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떠오르는 말들을 다듬었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나에게 실망할지도 몰라."
고르고 고른 단어 중에 제일 함축적이고 열린 의미의 단어를 사용했다.
확실하게 닫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좋은 의미도 아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루나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며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루나가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 옷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나는 저 멀리서 주둥이가 터질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 드래곤보다 앞에 있는 루나가 더 두려웠다.
떨리는 손을 애써 움직여 내 옷을 잡은 루나의 손을 쳐냈다.
루나의 흰 손 등이 내게 맞아 붉게 부어 올랐다.
시발 그렇게 세게 때리지는 않았어!
"..."
루나가 덜덜 떨리는 손을 움츠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똑바로 막아."
입에 가시가 돋친 듯 말을 하면서 자꾸만 말이 걸렸다.
이제 루나의 눈에는 더 이상 초점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처음 만났을 때 같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물론 좋은 의미의 두근거림은 아니지만.
"...나를 구해. 저 드래곤에게서"
루나의 초점이 아예 사라지기 전에 천천히 말을 내밀었다.
"응응응! 내가 꼭 구할게! 저런 도마뱀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제발 그러니까 나를 싫어하지 말아줘. 에이든은 나를 사랑하잖아? 그렇지? 알고 있어 나는"
제발제발제발제발
루나가 끊임없이 절절함을 입에서 내뱉으며 내게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 손이 나를 잡기 위해 나왔다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나를 위험하게 하는 사람을 싫어해."
말로는 가시를 내뱉으며 천천히 루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상반된 행동에 루나의 입꼬리가 위아래로 자꾸만 움직였다.
"그게 루나라도 말이야. 루나는 나를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 거지?"
굳어 있는 입꼬리를 억지로 움직여 미소를 그려냈다.
멀리서 이제는 터질 것처럼 가득 찬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졌다.
제발 통해라 제발.
"...응응응! 절대 에이든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게. 다시는!"
내 말에 고민하던 루나가 다시금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시는 이라니 시발.
결국 진짜로 이 미친년이 이 짓을 벌인 거야?
도대체 왜?
루나의 대답에 내 손이 살짝 굳자 루나의 얼굴도 같이 굳었다.
나는 황급히 억지로 웃으며 천천히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막아."
"응응응!"
내 손을 끌어당겨 길게 입맞춤을 한 루나가 밝게 웃으며 돌아섰다.
나도 고개를 돌려 공중에서 천천히 날갯짓하며 기운을 모으고 있는 드래곤을 응시했다.
아마 저 드래곤은 전설로만 내려오는 제국의 수호용일 게 분명했다.
제국의 수도가 회생 불가능한 위기에 도달했을 때만 나타나 제국의 위협을 멸하는 수호용.
그래도 제국 수호용이니까
악마들만 없애겠지...?
뭔가 잔뜩 불만에 가득 차 있어 보이는 드래곤의 표정이 내 심정을 불안하게 했다.
혹시 휴가 같은 게 부족했던 거 아니야 제국 새끼들아?
그래도 제국 수호용이면 우리 편일 것 아니야.
나도 제국민이니까.
혹시 제국 표시라도 띄워야 하나?
나는 황급히 죄수복에 그려진 제국 표시를 눈에 보이는 곳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바지가 찢어졌지만, 사는 게 더 중요하니까.
크롸롸롸롸롸롸!!!!
때마침 드래곤의 입에서 강대한 기운이 세상으로 뿜어져 나왔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느껴지는 기운이 수도의 곳곳을 밀어버렸다.
그 모습에 이성을 긁어버릴 정도의 분노와 울분이 섞여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성이 있는지 악마가 있는 곳으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기운의 크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것도 다 휘말렸지만
미친 드래곤이다!! 시발!
드래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파멸적인 기운이 수도를 씹창내기 시작했다.
나는 깨달았다.
저 드래곤은 집에 있는 벌레를 잡기 위해 집을 몽땅 태워버리는 쾌 드래곤이라는 것을.
기운이 점점 움직이며 수도의 모든 곳을 씹창냈다.
그때 내 눈에도 꽤 큰 악마 한 마리가 용사 아카데미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문제는 그 모습을 드래곤도 봤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생각했던 용사 아카데미가 망하는 이유 중 악마가 아카데미에 숨어들어 드래곤이 악마를 잡기 위해 씹창 내버리는 경우도 있었는지 기억을 되짚었다.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용사 아카데미는 꽤 큰 크기로 수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드래곤도 좆같은 용사 아카데미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건물 하나하나 다 깨끗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그 모습에 좆같은 용사 아카데미가 혹시 드래곤도 차별한 적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용사 아카데미가 씹창나는 모습은 내게 미묘한 감정을 들게 했다.
분명 좆같던 아카데미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 형체마저 사라졌다니
후련하기도 하고 돌아갈 곳이 사라진 것 같아서 섭섭하기도 했다.
드숀 케일
너희들의 마지막을 기억할게.
비록 지옥으로 가겠지만, 거기서도 잘 지내!
오늘 보니까 꽤 괜찮게 생긴 악마들도 있더라.
물론 그런 악마들도 다리가 몇 개 더 많다던가, 얼굴이 짝수거나 하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드숀과 케일이라면 만족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둘 다 내가 인정한 병신들이니까.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작게 묵념했다.
그때 용사 아카데미를 씹창낸 드래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도의 모든 부분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찬란하던 제국의 수도는 자신의 모습을 잃어갔다.
펄럭
"그래도 도마뱀이 더 재밌을 것 같군."
그때 심하게 잘생긴 남자가 이제는 전보다 3배는 커진 것 같은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남자는 이제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온전하게 꿈에서 볼까 두려운 악마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잠시 공중에서 날갯짓하던 남자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에 널려있던 피들이 남자의 손으로 끌어 당겨져 하나의 형체를 천천히 띠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의 손에는 어느새 10미터는 될 것 같은 피로 된 검이 만들어졌다.
드래곤이 고개를 돌려 남자 쪽으로 기운을 뿜어내자 기수식을 취한 남자가 검을 뻗으며 기운에 맞서 달려들었다.
새로운 자살 방법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남자의 검은 천천히 드래곤의 기운을 베어내며 전진했다.
드래곤은 그런 남자의 모습에 더욱 가슴을 부풀리며 기운을 뿜어냈다.
천천히 남자와 드래곤이 부딪힌 곳에서 기운의 스파크가 튀었다.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
굳은 표정으로 말한 루나가 천천히 입을 열어 주문을 외웠다.
루나가 주문을 외우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사뭇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다들 여기서 벗어나지 말래요!! 화장실이 급해도 지금은 좀 참아요!! 아니면 그냥 바닥에 싸던가!"
나는 황급히 뒤쪽으로 소리쳤다.
행여나 벗어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친절하게 설명도 덧붙였다.
"뭐...뭐라는 거야!! 미친!!! 나는 황녀라 화장실 같은 거 안 간다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조슈아에게 기대어 앉아있는 케이트가 소리쳤다.
"황녀님!! 황족도 화장실은 갑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을 평민들에게 심어주면..."
"닥쳐 조슈아! 닥치라고! 황녀 명령이야 제발 닥쳐!!!"
케이트는 정말 끝까지 지랄 맞았다.
"흐응 한창 재밌었는데, 아쉽네."
검은 피에 흠뻑 젖어있는 비키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너무 태평해 마치 운동하고 잠깐 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화장실 안 급해 사제! 더 참을 수 있어!"
검을 닦고 있는 키아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도 괜찮습니다. 혹시 에이든님이 화장실이 급하시다면 저를 이용하셔도"
안드레아가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는데, 주변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와 드래곤이 부딪힌 곳에서 세상이 터질 것만 같은 큰 충격이 주변으로 퍼져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눈이 타는 것만 같은 빛에 눈을 질끈 감으며 앞에 있는 루나의 로브를 움켜쥐었다.
로브 너머로 잔뜩 굳어있는 루나의 몸이 느껴졌다.
"막아!! 막으면 사랑해줄게!!! 미친년아!!!"
간절함을 가득 담아 루나의 등에 소리쳤다.
제발 우리 미친년이 저 애미 터진 새끼들보다 강하기를
기운을 악착같이 일으켜 충격에 대비했다.
내게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빛이 루나까지 감쌌다.
그에 루나의 몸이 약간은 풀어졌다.
응응응! 나도 사랑해!
루나의 대답이 굉음에 휩싸여 사라졌다.
"꽉 잡아 다들 !!!!!"
세상이 잠시 무너진 것처럼 빛에 휩싸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
"후 그래서 우리가 몇 번째로 왔다고?"
베르티오 왕자는 급하게 달려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와 옷차림을 빠르게 정리하며 물었다.
"열다섯 번째라고 합니다."
알렉스리스가 옷 정리를 옆에서 도와주며 대답했다.
"젠장. 너무 늦게 온 거 아닐까? 왜 하필 거기서 마차의 바퀴가 부러져가지고... 괜히 다른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될까 봐 걱정되는군."
인상을 찌푸리며 베르티오 왕자가 목을 가다듬었다.
베르티오는 회담 초대장을 받은 순간을 회상했다.
제국에서 주최한 대륙 회담에 벨리마 왕국은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대륙에서 떨어진 섬에 있는 벨리마 왕국이 초대된 것도 신기했다.
보통 대륙인들에게 물어보면 벨리마 왕국의 이름조차 잘 몰랐는데 이렇게 회담에 초대까지 해주다니.
저번에 수출했던 조개 구이가 정말 인기 있었던 걸까?
제국에서 지옥으로 연결된 문이 열리고 악마들이 세상으로 뿜어져 나온 게 벌써 일주일 전 이야기다.
하지만 일주일 전이라고 하기에는 그 잠깐 사이에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제국에서 뿜어져 나온 악마들은 대륙의 곳곳으로 퍼져서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식자재를 팔던 곳은 이제 무기를 팔고 있었으며, 성당은 성물과 성수를 찍어내고 있었다.
인간들은 연합해서 악마들을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지만, 도시가 아닌 외곽에 있는 성 중 몇몇은 이미 악마들에게 함락되었다고 들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피해가 큰 곳은 수도가 박살난 제국이었지만, 괜히 제국이 아닌 듯 아직까지는 잘 수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벨리마 왕국은 그나마 다행인 게 대륙의 끝쪽에 있는 섬에 있어서 아직까지 악마에 의한 피해가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지옥문이 열린 제국에서 회담을 열다니 어떻게 보면 대단하군."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국왕을 대신해 제국까지 걸음 한 베르티오는 그런 제국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는 제국입니다. 아무리 지금 피해가 크다고 해도 제국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렉스리스는 아직 치기를 벗지 못한 베르티오 왕자를 보며 쓰게 웃었다.
"후 걱정하지 마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들어가자."
베르티오는 억지로 표정을 풀어 미소를 지으며 회담장 문을 열었다.
회담장에는 아직 회의 시작 전이었지만, 이미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베르티오는 조심히 회담장의 끝부분에 벨리마 왕국이라고 적힌 의자에 앉았다.
다른 의자들보다 조금 더 작은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럼 회담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뒤 엄숙한 목소리가 회담의 시작을 알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 입네까?"
빨간 베레모를 눌러쓴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직설적으로 제국 쪽을 보며 물었다.
험상궂은 얼굴에 빨간 베레모.
베르티오는 오기 전 외워야 할 리스트에 제일 위에 적혀 있던 아스트론 공화국의 김익한 주석을 떠올렸다.
제국 다음으로 강력한 세를 가지고 있는 공화국
베르티오는 남자의 얼굴을 익히기 위해 눈길을 집중했다.
"... 무엇을 말하는 것이죠? 김익한 주석?"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매력적인 아름다운 여자가 피곤한 얼굴로 되물었다.
금발에 차가운 인상의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
베르티오는 곧바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제국의 제1 황녀 엘리아스 시나 비헨 드 프라타.
대륙에서 제일 아름다운 인물로 거론되는 후보답게 그 미모가 말이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
아 여름이구나
황녀를 보는 베르티오의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제국의 수도에서 지옥문이 열려서 대륙이 이 꼴이 난 것 아닙네까?"
김익한 주석이 이죽거리며 되물었다.
평소보다 더욱 날카로운 김익한 주석의 말투에 나머지 사람들이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티오도 남들이 눈치 못 채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저희 쪽에서 설명해 드렸을 텐데요 제국에 앙심을 품은 흑마법사가 지옥문을 열었다고. 저희 쪽에서 연 것이 아닙니다."
평소 같았으면 눈치 보느라 아무 말도 못 했을 것들이
황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참았다.
"뭐 그거야 제국 측의 발표지 말입네다. 우리야 제국 쪽에서 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요. 그렇지 않습네까 동무들?"
김익한 주석이 형형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주석의 눈빛을 받은 사람들이 시선을 돌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도 무서웠지만, 저 깡패 같은 공화국도 만만치 않았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건설적인 이야기로 넘어가죠. 제 시간은 비쌉니다."
정장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안경을 고치며 말했다.
안경을 올리는 여자의 팔에 빛나는 금속들이 베르티오의 눈길을 가져갔다.
쇠로 된 팔을 가지고 있는 여자
스티루마라고 불리는 나라의 수장인 우노치.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지만, 제법 괜찮은 국력과 남다른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베르티오는 괜히 쇠로 된 여자의 팔이 멋져 보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희 측에서 했던 조사에서도 제국 측의 짓이 아닌 것을 확인했습니다."
로브와 모자를 짙게 눌러쓰고 흰 턱수염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게 난 사내가 큼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건... 흠 아닙네다. 마도 왕국의 대마법사님이 그렇다면 그런 기겠지."
주석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하며 다시 말을 삼켰다.
"그럼 여기에 우리 모두를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
얼굴에서 찬란한 빛을 뽐내는 귀가 긴 여자가 황녀를 쳐다보며 고급스럽게 물었다.
"다들 악마들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황녀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위엄있게 말을 시작했다.
가장 큰 피해는 제국 아닙네까?
주석이 작게 이죽거렸다.
"역사적으로 이런 위기 앞에서 인간들 그리고 이종족들은 뭉쳤습니다."
주석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면서 황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황녀의 말에 회담장에 있는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주석을 제외하고.
위기 앞에 똘똘 뭉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능과도 비슷했다. 물론 엘프 왕국의 여왕은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그래서 저희 제국은 여러분들 모두에게 동맹을 요구합니다."
황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끝냈다.
황녀의 말에 잠깐의 정적이 회담장에 내려앉았다.
"말도 안 됩니다! 저희보고 저런 똥 강아지들이랑 동맹을 하라뇨!"
"헹! 누가 할 소리인데! 사슴이랑 교미하는 놈들이 우리한테 똥 강아지라니!"
"우리는 사슴이랑 교미하지 않는다!"
물론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아와크 왕국과 티셔트 왕궁의 말을 필두로 곳곳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의외로 김익한 주석은 조용히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 김익한 주석의 귀에 옆에 있던 여자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좋습네다."
고개를 끄덕인 김익한 주석이 말했다.
김익한 주석의 말에 시끄러웠던 회담장이 단박에 조용해졌다.
"저도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합니다."
"현명한 제안입니다."
곳곳에서 강대국들의 동의가 이어지자 언성을 높이던 왕국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티오는 이미 아까부터 황녀의 얼굴을 훔쳐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한참이나 이런저런 동맹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물론 강대국이 아닌 왕국들은 발언권이 없었지만, 회담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말입네다 그... 제국의 용사 아카데미가 무너졌다고 들었습네다만?"
그리고 회담이 끝나기 전에 김익한 주석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네 그렇습니다."
황녀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런 김익한 주석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럼 이렇게 대륙적인 동맹이 구성된 기념으로 대륙 아카데미를 창설하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슴둥?"
김익한 주석의 얼굴에 마치 먹이의 목덜미를 문 맹수의 미소가 떠올랐다.
"...대륙 아카데미요?"
"사실 각 나라들은 자체적으로 아카데미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협동하는 차원에서 아카데미를 짓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슴둥?"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혹 그 아카데미 건설은 우리 스티루마에서 맡아도 되는지? 저희 기술력은 대륙에서 제일이니까요. 돈만 충분하다면 이번처럼 드래곤 브레스에 부서지지 않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꽤 많이 들겠지만."
우노치의 말이 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표정 또한 맛있는 음식을 보는 것만 같은 표정이라 괜히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입네다. 스티루마의 기술력은 모두가 알고 있슴둥."
김익한 주석이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는 마법사를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몸값이 조금 나가기는 하지만 저희 마도 왕국의 마법사는 그 질이 다르니까요."
이번에는 대마법사가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냉큼 얹었다.
"하하 좋습네다! 마도 왕국의 마법사라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데리고 오는 게 맞습네다."
대 마법사의 말에 김익한 주석이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황녀는 김익한 주석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 악랄한 새끼는 제국의 골수까지 빨아 먹을 생각이 분명했다.
어쩐지 쉽게 넘어가는 것 같더니만.
아마 제국 측이 사죄 차원에서 대륙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돈을 부담하라는 것이겠지.
대륙 아카데미를 짓는데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닐 게 분명했다.
심지어 저런 날강도들이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고 있으니...
하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제국 측에서 부담할만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대륙과의 전쟁도 생각하고 온 자리였으니까.
그리고 아카데미를 제국 쪽에 위치시키면 부가적인 수입으로 어떻게든 메꿀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국 측에서 대륙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돈은 전액 부담하겠습니다. 그럼 위치는"
셈을 마친 황녀가 애써 굳은 얼굴을 풀며 말을 이었다.
"아아! 역시 위치는 공평하게 대륙의 정중앙이 맞지 않겠슴둥?"
그런 황녀의 말을 주석이 빠르게 잘랐다.
"대륙의 정중앙은 저희 제국의 수도인"
주석의 말에 찝찝함을 느낀 황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아! 물론 저기에 있는 섬나라 벨리마 왕국까지 고려한다면!"
황녀의 말을 다시금 자르며 김익한 주석이 구석에 앉아있는 베르티오 왕자를 가리켰다.
멍하니 황녀의 얼굴을 구경하던 베르티오 왕자는 갑자기 쏠린 관심에 황급히 놀라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럼 저희 공화국의 끝자락에 걸치게 되겠슴둥?"
김익한 주석이 황녀를 보며 웃었다.
저 개새
황녀는 입 끝까지 나온 욕을 삼켰다.
"아... 그 저기 저희 왕국은 보트가 대륙 제일인데... 대륙 아카데미에 보트도 필요할까요?"
지목을 받은 베르티오 왕자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쟨 또 뭐야.
황녀는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는 베르티오 왕자를 보며 깊은 짜증을 느꼈다.
"하하! 물론입네다! 아카데미에는 당연히 큰 호수가 있어야합네다! 하하하!"
문득 황녀는 그냥 대륙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게 더 싸게 먹히지 않을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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