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소리를 키워줘! 드숀님의 속삭임이 더 잘 들리도록.
* * *
꽤 널찍한 방에 빨간 베레모를 쓴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었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같이 시가나 연초 같은 것들이 물려 있었고 방안은 이미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앞이 잘 안 보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조사해 본다는 것은 어떻게 됐습네까?"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가 연기를 깊게 내뿜으며 물었다.
"...드숀 그 간나 새끼가 얼마나 철저한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 했습네다. 정말 철저하게 은폐한 모양인지 정보부 동지들을 총동원해도 이상할 정도로 허름한 남작가 출신이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네다."
송충이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가 침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숟가락 개수까지도 알아낸다는 공화국 정보부 동지들로도 무리였다는 말입네까? 허 참... 도대체 뒷배경이 무엇이길래"
험상궂은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부가 이렇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건 처음입네다. 어찌나 철저한지 정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네다."
송충이 눈썹 사내가 머뭇거리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럼... 그 행동 대장 은?"
눈에 피멍이 든 사내가 천천히 말했다.
행동 대장.
사내의 말에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아 있는 모두가 몸을 흠칫 떨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드숀 패밀리의 행동 대장 에이든에게 한 번 이상씩 맞아봤다.
그리고 두 번 이상 맞은 사람도 제법 됐다.
눈에 피멍이 든 사내는 얼굴이 좆같다는 이유로 다섯 번이나 맞았다.
억울했지만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었다.
그 악마처럼 악랄한 행동 대장은 끝까지 들러붙으며 쥐어팼다.
"크흠"
"흠..."
침체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사내들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행동 대장 에이든에 대한 정보도 모았지만, 전부 신빙성이 떨어지는 정보들입네다. 전투력이 형편없다는 것과 용사 아카데미에서는 유급생이었다는 것 그리고 특별한 가문도 없다고 적혀 있습네다. 단 하나 제국 제일검님의 제자라는 점 말고는 특이점이 없습네다."
송충이 눈썹 사내는 '제국 제일검의 제자'라는 부분을 강조했다.
그에 모든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제국 제일검의 제자니까 자신들이 손도 못 쓰고 당한 거지.
그 악마 같은 자식이 말도 안 되게 강한 것일 뿐, 자신들이 약한 게 아니었다.
"혹시 그들의 약점 같은 것은 없었습네까?"
조용히 듣고 있던 김재환이 입을 열었다.
"...드숀은 아카데미에 친분이 있는 인물이 행동 대장밖에 없습네다. 다만 행동 대장 쪽은 친분 있는 인물이 꽤 있지만..."
송충이 눈썹 사내가 말을 흐리면서 천천히 눈치를 봤다.
"뭡네까. 속 시원히 말하라우."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가 그런 송충이 눈썹 사내를 독촉했다.
"그 상대가 마법학 교수인 루나와 정령학 조교인 에포닌이라고 합네다."
송충이 눈썹 사내가 천천히 말을 마쳤다.
김재환은 뱀같이 뜬 눈을 빙그르르 돌리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교수급을 건드리는 것은 조금..."
"그래도 아직 루나 교수 쪽의 무력은 잘 모르지 않습네까?"
"에포닌 쪽도 제국의 황녀라..."
"어차피 제국은 이제 풍전등화의 신세 아닙네까."
사내들이 테이블 위로 열띤 대화를 주고받았다.
"일단은 그쪽은 신경 쓰지 말고 그 간나 새끼들을 어떻게 무너뜨릴 지부터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슴둥."
김재환의 말에 다른 사내들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측에서는 아직도 별말 없습네까?"
"그렇슴둥. 애초에 대륙 아카데미가 지어질 때 각 국가 간의 학생들 사이의 일에 대한 협약이 있었다고 합네다. 부정한 행위들을 방지하기 위해 맺은 협약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네다. 결국 앞으로도 아카데미 측에서는 참여하지 않을 것 같습네다."
송충이 눈썹 사내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긴 대륙의 화합을 위해 지은 대륙 아카데미에서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이렇게 막장으로 치달을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사내들은 조금씩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자력으로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내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뒤에
"혹...시 김재환 동무의 아바이께서는 아직 아무 말씀 없습네까?"
송충이 눈썹 사내가 주저하면서 김재환에게 물었다.
김재환은 순간 열이 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눌렀다.
평소라면 욕을 한 바가지 했겠지만, 지금은 자신이나 이들이나 신세가 비슷했다.
"아바이께서 만약 제가 제국놈에게 맞았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저뿐만이 아니라 동무들도 같이 끌려갈 게 분명합네다. 아바이는 제국 쪽과 관련된 일은 민감합네다."
눈에 들어간 힘을 애써 풀며 김재환이 설명했다.
김재환의 입에서 나온 끌려간다는 단어에 다들 침음성을 삼켰다.
지옥에 가는 것보다 김재환의 아비에게 끌려간다는 소리가 더 두려웠다.
"아! 알겠습네다! 최대한 저희끼리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습네다!"
질문했던 송충이 눈썹 사내가 다급하게 김재환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큰 지출이 있기는 했지만, 꽤 많은 수의 상급 전사들을 섭외하지 않았습네까?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봅네다."
험상궂은 사내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상급 전사
사내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모두 생각에 빠졌다.
그 악마 같은 행동 대장을 상급 전사들이 막을 수 있을까.
다들 몸에 각인된 고통에 조금씩 몸을 떨었다.
이겨야만 했다.
이기지 못한다면 자신들은 평생 그 공포 속에 살아가야 하니까.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나도 이렇게 불러 놓고 말이야."
테이블 위로 쭉 뻗은 다리를 올려놓은 매력적인 흑발의 여성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사내들은 여인의 다리에 눈을 줬다가 이내 목에 새겨있는 검은 뱀 문신을 보고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피를 파는 자들
대륙 어디든 분쟁이 있는 곳이라면 항상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악귀 무리.
이들도 피를 파는 자들까지 부르고 싶진 않았지만,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불렀다.
사내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고용했지만,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찝찝했다.
"...그 쪽이 나설 일 없을 겁네다."
얼굴을 굳힌 김재환이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흐음 그거는 내가 판단할 거고. 내 몸값은 꽤 비싸니까 말이야. 아! 물론 다른 의미의 몸은 조금 더 비싸"
여인이 훤히 드러난 가슴을 손가락으로 슬쩍 문질렀다. 그에 거의 꼭지만 가린 탄력적인 가슴이 뭉개졌다.
사내들은 본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 손길에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어때?"
여인의 두툼한 입술 사이로 나온 피처럼 붉은 혀에 사내들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쉽네 모처럼 젊은이들인데 말이야. 아아 어디 큰 거 없나?"
여인이 따분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쾅!
"동...동무들! 큰일 났습네다!"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다급한 표정의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뭡네까?"
험상궂은 사내가 더욱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드.. 드숀 패밀리가 먼저 움직였습네다!! 지금 간나 새끼들이 2층에 전부 모여서 무기를 들고 올라올 준비 중입네다!!!"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에 회의장 안에는 가벼운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에
"각자 위치로 갑네다! 전에 했었던 가상훈련대로 움직이는 겁네다!!!"
김재환이 다급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쟁이다!!! 전쟁!!!"
다른 사내들도 결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움직였다.
미친 문디 새끼들.
진짜로 전쟁이라도 할 생각인 건가.
자신을 쥐어 박으며 실실 웃었던 악마 같은 행동 대장의 얼굴이 떠올라 김재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래도 승산은 이쪽에 있었다.
이미 우리는 많은 수의 실력자들을 고용했으니까.
김재환은 심장에 내려앉은 공포를 물리기 위해 다시금 되뇄다.
요즘 애들은 재밌게 논단 말이야
여인의 붉은 혀가 다시 한번 입술을 핥았다.
그럼 나도 돈값은 해볼까?
아까 저 녀석들이 말한 루나와 에포닌이라는 계집을 데리고 와 제법 돈이 될 것 같으니까 말이야.
여인의 그림자가 일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가 사라진 여인은 아무렇지 않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다시 한번 켰다.
***
다른 방들보다 유난히 크고 쾌적한 방안에 교수들과 조교들이 모여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아카데미 내부의 곳곳을 비추는 화면들이 가득 띄워져 있었다.
꽤 가격이 나가는 마법 도구였지만, 스티루마 측에서 무조건 필요하다고 주장해 설치한 도구였다.
그 값만으로도 웬만한 건물 몇 채는 살 정도의 값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학생들 싸움을 구경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마법 도구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공화국 측의 모습과 전열을 가다듬는 드숀 쪽이 보였다.
"캬! 드디어 움직일 생각인가 봅니다!"
온몸에 상처가 잔뜩 새겨져 있는 사내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크게 외쳤다.
"이미 다들 보고 있어요. 헤르만! 그렇게 바보처럼 소리 지르지 마요."
중요 부위만 겨우 가린 시타리가 그 옆에 앉아서 헤르만을 책망했다.
"꽤 흥미진진하겠습네다."
베레모를 눌러쓴 최지수가 인상을 굳히고 말했다.
"팝콘! 여기 팝콘도 있어요! 단돈 5 실버!"
그 와중에 스티루마 쪽 사람은 팝콘을 팔고 있었다.
"팝콘? 그게 뭔가"
맥주를 단번에 마신 헤르만이 입가에 거품을 대충 닦고 물었다.
"아! 옥수수를 튀긴 것인데 그 맛이 일품입니다. 저희 스티루마에서는 이런 것들을 볼 때 필수인 음식이죠."
스티루마 사람이 친절한 미소를 띠며 손에 든 봉투를 슬쩍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향긋한 냄새가 방 가득히 풍겼다.
"하하! 냄새가 좋군! 그래 기분이다! 여기 방 안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한 개씩 돌리게! 내가 살 테니!"
헤르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스티루마 사람의 손에 있는 봉투를 하나 가져왔다.
"헤르만! 또 그렇게 바보처럼 돈을 펑펑 쓸"
"어때? 맛있나? 시타리?"
헤르만은 시타리가 또 잔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냉큼 팝콘을 시타리의 입에 넣었다.
"...맛있네요."
인상을 쓰던 시타리가 입을 오물거렸다.
"자자! 다들 하나씩 가져가시죠! 입맛이 까다로운 시타리도 인정했습니다!"
헤르만이 시원하게 웃으며 봉투를 나눠줬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그런 밝은 분위기 속에서 키아나의 얼굴만 굳어 있었다.
"응? 또 뭐가 걱정이냐 키아나야."
어느새 입에 팝콘을 넣은 제국 제일검이 반문했다.
"사제가 저렇게 다른 학생들이랑 유혈 사태를 벌이게 두는 것이 맞는 건가요 스승님?"
키아나가 굳은 얼굴의 에이든이 나오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크할할할! 저 못난 놈이 걱정되느냐 참으로 지극 정성이다!"
제국 제일검이 경박하게 웃었다.
"당연히 걱정되죠! 제 사제인데!"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누르며 키아나가 대답했다.
"원래 저 나이 때의 남자 애들은 다 저렇게 서로 칼침도 놓으며 친해지는 거다. 그렇지 않나? 헤르만?"
제국 제일검이 슬쩍 옆을 보며 물었다.
"읍읍읍! 예! 어르신 말이 맞습니다! 저도 저 나이 때는 친구들이랑 서로 죽일 듯이 싸웠었죠. 아 지금 생각하니 다 좋은 추억들이군요. 하하!"
입에 잔뜩 머금은 팝콘을 대충 삼킨 헤르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들었느냐 그러니 너도 그렇게 굳어 있지만 말고 좀 즐기도록 해라. 이런 재미난 구경이 또 언제 있겠느냐! 크할할할할!"
괴상하게 웃은 제국 제일검이 다시금 화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어차피 죽지만 않으면 그 성녀 뭐시기가 다 고쳐둘 거고 서로 칼침 놓으면서 경험도 쌓으니 이 얼마나 완벽한 기회인가!"
"맞습니다! 크 저때는 저런 아리따운 수녀들이 없어서 팔 잘린 놈은 잘린 대로 다리 잘린 놈은 다리 잘린 대로 살았어야 됐는데 말입니다! 하하!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헤르만이 큰 맥주잔 하나를 제국 제일검 앞에 놓으며 웃었다.
"자네 보기보다 괜찮은 젊은이구만! 크할할할!"
제국 제일검이 경박하게 웃으며 헤르만의 어깨를 두드렸다.
키아나는 사이 좋은 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안에서는 뭔가를 열심히 소리치고 있는 에이든이 보였다.
물론 사제가 이번 사태에서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제는 몰라볼 정도로 강해져 있었으니까.
여기 있는 교수들을 제외하고 사제를 이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키아나는 저 사태가 사제 안에 봉인된 그것을 건드리지 않기 만을 바랐다.
"자자! 대결하면 빠질 수 없는!!! 내기의 시간이 왔습니다!! 과연 어느 측이 아카데미를 장악할까요!! 지금 바로 거세요!! 모든 결과가 깨끗한 스티루마 특산 내기입니다!!!"
팝콘을 다 판 스티루마 사람은 이제 빛나는 판을 들고 와서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캬 역시 돈에 대해서는 절대 스티루마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군요."
사람들은 금세 스티루마 사람의 판에 열광하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영감님은 어디에 거실 겁니까? 저는 그래도 공화국 측에 걸었습니다."
헤르만이 제국 제일검에게 물었다.
"크흠 어이 거기! 지금 배당이 어떻게 되는가! 나는 무조건 역배에만 건다네!"
제국 제일검이 내기라는 소리에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소매로 닦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가 공화국 내부에 있다 보니 공화국 측이 압도적입니다. 심지어 그쪽은 외부 인력까지 잔뜩 동원했으니까요."
스티루마 사람이 잔뜩 뭔가가 적힌 판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럼 나는 드숀 쪽에 걸겠네! 역시 내기는 역배지! 크할할할할!"
제국 제일검이 주머니에 있는 돈이란 돈을 다 끌어모아서 스티루마 사람에게 건넸다.
그 액수가 제법 되어 스티루마 사람의 눈이 빛났다.
스승님은 마지막 도박판에서 큰돈을 잃고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 다짐하셨었다.
그 결심이 무색하게 지금 스승님의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고 손은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누가 봐도 도박쟁이 늙은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제 이겨야 해
지면 스승님이 사제를 죽일지도 몰라.
키아나는 화면 안에서 열심히 뭔가를 떠들고 있는 에이든을 보며 간절하게 빌었다.
진짜로 지면 죽을 수도 있어.
무조건 이겨야 돼.
이건 사기도박이 분명하다!!! 이 사기꾼 녀석들이 감히 나에게 사기를 쳐?!
키아나는 스승님이 자신의 돈을 딴 도박장이 있는 성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던 게 아직도 눈에 선했다.
***
후
누군가가 뱉은 긴장감 가득 찬 한숨이 무거운 공기를 깼다.
"야! 너는 돌아가 있어."
문득 정신이 돌아온 나는 내 옆에서 주먹을 풀고 있는 케이트에게 말했다.
"뭐?! 이 재밌는 걸 너 혼자 하겠다고?! 싫어!! 나도 애들 쥐어팰 거라고!!"
내 말에 케이트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거절했다.
도대체 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격렬한 케이트의 거부 반응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는 우리처럼 학생이 아니라 조교잖아. 나중에 무슨 불이익이 있을 줄 알고. 돌아가 있어."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케이트를 설득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케이트가 주먹을 다시금 쥐었다 폈다.
아니 이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여기에 끼려고 하는 거야.
"아카데미 측에서 학생들 사이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너는 조교잖아.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후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금 케이트를 설득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지 혼자만 재밌는 거 하려고 치사한 놈"
케이트가 툴툴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응시했다.
패싸움을 재밌는 거라고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제국의 미래는 확실하게 어두웠다.
"그럼 나는 돌아가 있을 테니까 일이 끝나면 나도 그거 해줘..."
케이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작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게 뭐야."
뭐라는 거야 시발.
"아! 그거! 그거 있잖아 왜 모른 척이야?!"
케이트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거가 뭐냐고. 시발 똑바로 말을 해."
내 욕지기에 케이트가 인상을 잔뜩 쓰면서 얼굴을 붉혔다.
"...너가 아까 그 얄미운 꼬맹이한테 해준다고 했던 거"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케이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아 이뻐해 준다는 거?"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진짜!"
케이트가 주먹으로 내 가슴을 작게 두드렸다.
주먹에 힘이 담겨있지 않아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 왜 지랄이야."
정상인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빡 대가리였다.
"...그니까 그거 해달라고 나도 기다릴 테니까"
얼굴을 푹 숙인 케이트가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았어. 끝나면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뻐해 줄게. 됐냐?"
자꾸만 간질거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말이 험하게 나왔다.
"됐냐는 왜 붙이는 거야!! 됐냐 빼."
케이트가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이뻐해 주겠다고."
멋쩍음에 볼을 긁었다.
"...어 잘 갔다 와."
그제야 케이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볼을 두드렸다.
내게서 떨어진 케이트가 이번에는 내 옆에 있는 닌자 저능아와 혁명무새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머리를 끌어당긴 다음에 뭐라고 속삭였다.
"닌닌!"
"알겠습니다!! 절대 안에 하지 않겠습네다! 혁명!"
바짝 기합이 든 둘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둘의 반응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케이트가 다시금 내게 손 인사를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일단 제일 큰 문젯거리 하나 치웠고
"그럼 다시 시..."
"잠깐만요!"
이건 또 뭐야 시발.
나를 말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이름이 레데르... 였나?
깽판을 치기로 결심하고 나서 거의 초기에 들어온 학생 중 하나였다.
"뭔데."
점점 늦어지는 출발에 내 인상이 구겨졌다.
"아... 그 전투 바드 밴드들이 준비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레데르가 뒤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레데르의 손짓에 복도를 채우고 있던 학생들이 비켜섰고 제일 뒤에 요상한 발판 위에 올라가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발판에 바퀴가 달린 것을 보니 움직이는 용도인 물건 같았는데, 그 위에 있는 녀석들의 의상이 범상치 않았다.
다들 몸에 딱 붙는 붉은 옷과 얼굴에는 앞이 보일까 의문스러운 마스크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그리고 각자 손에는 기타나 드럼 스틱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쟤네는 또 뭔데 시발."
절로 욕지기가 나오는 모습이었다.
작은 두통에 머리를 꾹꾹 눌렀다.
"스캐빈저들인데 이번 우리 전쟁에서 데뷔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합니다. 모습은 조금 그래도 효과는 좋습니다"
묘한 동경을 담은 눈빛으로 녀석들을 쳐다보며 레데르가 말했다.
레데르의 말에 나도 조금은 기대를 했다.
과연 내가 알던 최고의 보지 바드 보다 훌륭할까.
근데 그 녀석 이름이 뭐였지?
뭐 상관없지만.
한참이나 악기를 손보던 녀석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제일 앞에 있는 녀석이 기타를 메고 있었는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끼이잉! 끼이잉
"뭐야! 시발 개 좆같은 소리 나잖아."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내 욕지기에 기타를 멘 녀석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아 튜닝이 안 됐다고 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레데르가 말했다.
무슨 시발 데뷔전이라면서 튜닝도 안 하고 와.
준비성 없는 녀석들의 모습에 다시 한번 욕지기가 입 끝까지 올라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다른 학생들의 표정을 보니 다들 뭔가를 기대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더 기다렸다.
잔뜩 열기에 젖어있던 학생들이 잠잠하게 녀석들의 튜닝을 기다리는 기묘한 모양새가 됐다.
나는 손가락으로 팔을 두드리며 점점 달아가는 인내심을 다독였다.
그렇게 또 잠깐의 시간이 지나가고 녀석들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넷
타닥 타닥 타닥
드럼 스틱 치는 소리가 지나가고.
지이잉 지잉
기타에서 심금을 울리는 낮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았다.
후
누가 내뱉은 지 모르겠는 긴장감 가득한 한숨이 들렸다.
아마 다들 긴장하고 있겠지. 나도 제법 긴장이 되기는 했다.
아무리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여기서 퇴학당하지 못하면 미친 노망난 노인네한테 맞아 죽을 테니까.
이건 내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빠밤 지이잉 징징
밴드가 본격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노래는 사람을 쉽게 고조시켰다.
나는 천천히 발을 떼었고 내 뒤로 육십의 학생들이 따라왔다.
띠링 띠리링 지잉
낮은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소리를 키워줘 악마의 속삭임이 더 잘 들리도록"
괴상한 마스크를 쓴 녀석이 노래를 시작했다.
"야! 시발 잠깐만!"
나는 다급하게 손을 들어 녀석들을 막았다.
모두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지금 대륙이 악마에게 씹창이 나고 있으니까 악마라는 단어는 이 시국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원래 이럴 때는 단어 하나도 조심해야 하니까.
내 말에 학생들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노래 부르던 녀석이 손을 들고 내게 물었다.
"...악마를 드숀으로 바꾸도록 하지."
뭐 우리에게는 악마보다 더한 드숀이 있으니까.
"저희가 감히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아도?"
드숀이라는 단어에 학생들이 몸을 잘게 떨었다.
"걱정하지 말고 부르도록."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다시금 걸음을 옮기고
띠링 띠리링 지잉
낮은 기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를 키워줘 드숀님의 속삭임이 더 잘 들리도록"
이전보다 더 열정적인 목소리로 노래가 시작됐다.
전보다 훨씬 낫네.
앞쪽으로 조금 더 걷자 복도 끝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꼬나쥐고 있는 빨갱이 새끼들이 보였다.
지이잉! 지잉!
"아아 드숀님의 피가 내 몸속에 흐르고 있어!"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드숀의 이름을 외쳤다.
"길 열어라 애들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쪽에 손짓했다.
""옙! 드가자!!""
뒤에서 들리는 우렁찬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빠밤! 두두둥 지이잉!
"내 몸에 드숀님의 피가! 내 손에 드숀님의 이빨이! 아아 이제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어!"
으음
듣다 보니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