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명품 엉덩이.
* * *
애미 시발.
있으면서 왜 안 여는 거야.
멀뚱멀뚱 쳐다보는 놈들을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아직도 문을 찬 발이 얼얼한 점도 내 화를 부추겼다.
"뭘 쳐다봐 개 같은 새끼들아."
각자 무기를 꼬나쥐고 있는 녀석들을 보며 거친 말을 쏟아부었다.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보이는 놈 중에는 강한 녀석은 없었다.
이 정도면 다 쥐어팰 수 있다.
"이게 무슨...! 지금 쫓기는 몸으로 혁명단 지부로 들어오면 어떻게 하자는 겁네까!!!"
잠깐의 정적 후에 정신을 차린 녀석 하나가 큰소리를 쳤다.
"어쩌라고 병신아. 쫓기고 있는 거 알면 저 문이나 빨리 다시 달던지."
등에 점점 식어가는 이지수의 몸이 내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정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은 커서 이지수를 눕히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지금 어디를 들어오려고 하는 겁네까. 우리는 허락한 적 없슴둥."
다시금 녀석들이 무기를 쥐고 내 앞을 막았다.
"...아"
이지수의 작은 신음이 들렸다.
"너네 혁명단 아니야? 얘도 혁명단이라던데."
주먹이 나가려는 걸 억지로 참고 다시 한번 말했다.
"...맞슴둥. 그 아이는 우리 혁명단입네다. 하지만 지금 자네들은 공화국의 추격을 받고 있지 않습네까. 자네들을 받으면 우리는 이 지부를 포기해야만 함네다."
사내 한 명이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무기를 쥐고 있는 사내의 손에 생긴 힘줄이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알려줬다.
"어쩌라고 시발. 그건 너네가 해결해야지. 그럼 너네는 혁명단원이 추격받으면 그때마다 버릴 거야? 존나 무책임하고 쓸모없는 새끼들이네 이거."
점점 주먹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 그건 아니지만 안 됩네다... 어찌 됐건 지금 우리는 자네들을 받아줄 수 없슴다."
잠시 말을 잃은 사내가 다시금 억지로 대답했다.
이제 못 참겠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았지.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
"들여보내세요."
계단에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한 여성이 내려왔다.
옅은 갈색 생머리에 풍만한 몸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에 걸린 따뜻한 미소까지 보는 남자로 하여금 안기고 싶게 만드는 외모의 여성이었다.
여자는 편한 티셔츠와 아래는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하...하지만 서아님"
여자의 지위가 꽤 높았는지 여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당황했다.
"어차피 그대들로는 저자를 막을 수도 없습니다. 들여보내시고 추격을 지우는 게 먼저입니다."
여성의 큼지막한 눈과 잠깐 마주쳤다.
여자의 눈에 담겨있는 따뜻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그 눈길을 피했다.
잠시 고민하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몇 명은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몇 명은 문을 낑낑대며 들어서 다시 맞췄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테이블 위에 이지수를 눕혔다.
이지수의 상의는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서 축축했다.
"윽"
이지수의 질끈 다문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병신 새끼.
참으로 답답한 모습이었다.
"의사 없나 여기?"
"있습니다. 곽철 씨?"
조용히 중얼거린 내 목소리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여성이 대답했다.
가까이 붙은 여성에게서는 생소한 향기가 낫다.
"예"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른 남자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여성의 부름에 다가왔다.
"이 아이를 치료해주세요."
여성이 이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지수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여기는 수술하기에 좋지 않으니 안쪽으로 옮겨야 합네다."
남자가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손가락질했다.
짜증이 났지만, 화를 꾹 참으며 조심스럽게 이지수를 안아 들었다.
그래도 치료를 해준다는 게 어디야.
남자를 따라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철제 의자가 보였다.
나는 그 의자에 조심히 이지수를 눕혔다.
"어떻게 된 일임니까?"
표정이 진지해진 남자가 내게 물었다.
"왼쪽 어깨 총상, 총알 내부 존재, 응급 처치"
어느새 다시 내 옷깃을 잡고 있는 천오가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음 응급 처치는 훌륭하게 했네. 자네는 나가고 거기 소녀는 나 좀 도와주지."
남자가 나를 보며 귀찮다는 듯 손을 젓더니 천오를 가리켰다.
나를 쳐다보는 천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 내가 있어도 도울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 나는 곱게 방에서 나왔다.
밖에 나오자 아까 그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 옆에는 갈색 강낭콩처럼 생긴 덩치 큰 사내가 나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꽤 강한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아마 최상급 정도
최근 들어 최상급을 자주 보는 것 같네.
대륙에서 흔한 등급이 아닌데.
"곽철 씨는 훌륭한 의사시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자가 다시금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 걱정은 그쪽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혁명단원인데."
여자의 미소가 부담스러웠다.
"말조심해라 애송이."
강낭콩 사내가 험상궂게 인상을 썼다.
"민철님"
그런 사내를 여성이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꽤 예민한 시기라."
여자가 가슴 부분을 손으로 가리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강낭콩 사내는 그런 여자를 보며 더욱 인상을 구겼다.
"뭐 그럴 수도 있죠. 딱 보니까 사춘기 같은데."
최대한 이죽거리며 강낭콩 사내를 쳐다봤다.
그런 내 태도에 강낭콩 사내가 움찔거렸지만, 이내 깊은숨을 내쉬며 참았다.
꽤 교육이 잘 된 사내 같았다.
그래도 좀 더 긁으면 반응이 올 거 같은데?
"그럼 위쪽 방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여성이 부드럽게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여기 방 앞에는 의자도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를 따라 걷는데 강낭콩 사내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내 머리를 부술 생각을 하는 것처럼 손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놀리고 싶어서 자꾸만 입과 몸이 간질거렸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저 강낭콩 사내를 화나게 하고 싶었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앞에서 걷는 여자의 씰룩거리는 엉덩이 쪽으로 손을 슬금슬금 움직였다.
입에는 최대한 비열한 웃음을 건 채로.
"이 놈이 감히!!!"
반응은 생각보다 금방 왔다.
강낭콩 사내의 억센 주먹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내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강하네 시발.
나는 황급히 팔 쪽에 기운을 보내 사내의 주먹을 안간힘을 다해 흘려냈다.
쾅
겨우 흘려냈지만 팔 쪽이 터졌는지 피가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터진 상처는 신성력으로 금방 회복됐다.
"민철님!!! 이게 무슨!!"
별안간 치고받는 사내들을 보며 여자가 당황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 천박한 놈이"
다시금 내게 주먹을 먹이려는 민철이 여자의 목소리에 멈췄다.
"어찌 됐거나 저희 혁명단원을 구해주신 분입니다! 왜 이런 무례를!!"
여자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강낭콩 사내를 타박했다.
"하지만... 아닙니다."
얼굴이 붉어져 레드빈이 된 사내가 거친 숨을 뿜으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더 다가왔으면
그런 강낭콩의 태도에 검 손잡이를 잡았던 손을 풀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사과는 제가 아니라 저분에게 하셔야죠!"
인상을 찡그린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사과를 독촉했다.
"하지만 이놈이 아가씨의 엉덩이를!!"
그것만은 도저히 못 하겠는지 강낭콩이 언성을 높였다.
"엉...엉덩이요?!"
강낭콩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여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여자의 시선이 강낭콩의 말에 대한 사실 여부를 물어보는 것 같았다.
"아 바지에 뭐가 묻으셨길래 떼주려고 했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아!!"
내 대답에 여자가 황급히 손을 내려 자신의 엉덩이 쪽을 만졌다.
여자의 손에 여자의 큼지막한 엉덩이가 뭉개졌다.
"거짓말입니다!! 아가씨의 엉덩이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강낭콩이 그에 황급히 소리쳤다.
"어? 설마 당신 아가씨의 엉덩이를 보신 겁니까?"
나는 이때다 싶어 강낭콩을 손가락질했다.
자신이 모시는 상관의 엉덩이를 보다니 완전 쓰레기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에 당황한 강낭콩이 큼지막한 양손을 저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아가씨의 엉덩이에 뭐가 묻었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가씨! 저는 단지 저놈이 아가씨의 엉덩이를 만지려고 하기에!"
"저는 때 주려고 했다니까요. 그리고 그런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저 아가씨의 엉덩이는 어떤 남자라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명품 엉덩이니까요."
"닥쳐라 이놈!!! 어찌 그런 천박한 말을 아가씨에게!!"
"아니 명품 엉덩이라는 게 왜 천박한 겁니까. 명품 엉덩이라니까요! 전국 엉덩이 협회에서 들으면"
"그만!!! 그만해주세요 두분다!!"
이제는 터질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 여자가 황급히 우리 둘의 대화를 막았다.
분노에 가득 찬 강낭콩은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붉어진 상태로 몸을 움찔거리며 주먹을 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강낭콩이 이성을 잃고 덤벼들까 봐 걱정이 되기는 했다.
꽤 목줄이 잘 잡혀 있는 듯해서 놀린 건데, 너무 신나서 놀렸나?
"제 엉덩이에 묻은 건 나중에 제가 떼겠습니다. 일단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여자가 황급히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 상황에서도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니 꽤 뛰어난 인성의 소유자 같았다.
하지만 꽤 크게 당황했는지 가리지 못한 옷 사이로 여자의 꽉찬 가슴과 가슴골이 보였다.
가슴도 명품이었네 이 아가씨.
"아니 아가씨 그게 아니라"
"민철씨도 제발 그만해주세요! 충분합니다! 이제!"
여자에게 큰소리를 들은 강낭콩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그리고 제 엉덩이를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여자는 감사를 꼭 표해야 한다는 확실한 가정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자 미처 가리지 못한 옷 사이로 여자의 꽉 찬 가슴이 다시금 내게 인사했다.
명품 맞네.
"아가씨..."
강낭콩이 마치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정말 명품 엉덩이라니까요. 아가씨 엉덩이가 제가 본 엉덩이 중 최고입니다.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나는 엄지를 들어 올리며 여자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제 엉덩이 이야기는 그만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귀까지 빨개진 여자가 말했다.
더 놀리면 정말 쫓겨날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곱게 고개를 끄덕였다.
붉어진 얼굴로 어색하게 웃은 여자가 돌아서서 걸었다.
그러다 생각났는지 뒷짐 지는 척하면서 자신의 엉덩이를 손으로 가렸다.
물론 큼지막한 엉덩이를 가리기에는 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질끈 묶은 머리 덕분에 뒤에서도 보이는 여자의 붉은 귀가 못내 웃겼다.
으드득
옆에서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눈에서 불을 뿜어내는 강낭콩이 보였다.
나는 그런 강낭콩에게 피식 웃어주며 여자를 따라 걸었다.
여자가 안내한 방은 단출하지만 넓은 방이었다.
방 중앙에는 큼지막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런저런 종이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여자는 테이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건너편을 가리켰다.
어느새 다시 본래의 안색으로 돌아온 여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명품 엉덩이 씨."
나는 다시금 여자를 놀렸다.
"아앗!! 제 이름은 서아입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여자가 작은 비명을 지르더니 금세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이 마치 내 입을 막으려다 멈춘 것 같아 작게 웃었다.
"아! 그렇군요. 서아 씨. 저는 에이든입니다."
나는 그 부드러운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했다.
크흠
우리 둘의 악수가 못내 거슬리는지 강낭콩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 그렇군요 에이든님! 일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서아가 큼지막한 눈을 끔벅거리며 내게 질문했다.
"음"
나는 천천히 기억을 뒤집어 어디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는지 떠올린 다음 입을 열었다.
서아는 내 말에 중간중간 반응을 하며 주의 깊게 들었다.
"그래서 김재환이 죽었다고요?"
서아의 아름다운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강낭콩도 숨을 들이켜며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의 반응에 나는 내 행동이 이들에게 꽤 큰 도움이 됐다는 걸 느꼈다.
"큼큼... 오래 이야기하니까 목이 좀 아프네요."
나는 짐짓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서아와 강낭콩이 의문섞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멍청한가 얘네들.
"여기는 마실 게 없습니까?"
강낭콩아 물 떠오라고.
"아! 저희가 물도 안 드렸군요. 제가 금방 가서"
"아가씨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벌떡 일어난 서아를 강낭콩이 말리며 움직였다.
방에서 나가기 전에 나를 노려보는 것을 보니 허튼짓을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마실 것도 안 드렸군요. 험한 길이었을 텐데요."
서아가 고운 눈썹을 찌푸리고는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반응까지 좋으니 놀리는 맛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또 입이 근질거렸다.
"괜찮아요. 서아 씨의 명품 엉덩이를 보니까 피로가 싹 사라지더군요."
나는 참지 못하고 또 놀려버렸다.
"예에?! 예? 아뇨!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아! 일단 감사합니다. 제 엉덩이가 에이든님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제발 엉덩이 이야기는 그만..."
한 번에 목까지 붉어진 서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빠르게 말하며 말 끝을 흐렸다.
더 놀리면 얼굴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금 입을 열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강낭콩이 돌아왔다.
"이 파렴치한 놈이 아가씨에게 또 무슨 짓을!!!"
강낭콩은 잔뜩 붉어진 서아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대뜸 언성을 높였다.
"민철 씨!!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에이든님 물 여기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서아가 황급히 일어나 강낭콩의 손에 있는 물컵을 뺏어서 내 앞에 놓았다.
강낭콩이 붉으락푸르락 했지만, 내게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근데 저 새끼 여기에 침 뱉은 거 아니야?
문득 든 생각에 내 앞에 있는 물컵을 확인했다.
물이 투명하기는 했지만, 왠지 그랬을 것만 같았다.
내가 물컵을 들자 올라가는 강낭콩의 입꼬리에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 개새끼 좀 놀렸다고 물에 침을 뱉어?
"아 서아 씨 얼굴이 많이 뜨거워 보이시는군요. 이거 먼저 마시겠습니까?"
나는 슬쩍 물컵을 서아 쪽으로 밀었다.
"음..? 에이든님 목이 마르시다고"
내 행동에 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신사 된 도리로서 어찌 레이디가 먼저 마시지 않았는데 제가 마시겠습니까."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웃으며 물컵을 조금 더 서아 쪽으로 밀었다.
"아..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제국 쪽에는 기사도란 게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
기사도
잠시 고민한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얗고 긴 손으로 물컵을 쥐었다.
으득
이를 갈며 움찔거리는 강낭콩을 보며 내 예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이 빡빡이 새끼 좀 놀렸다고 침을 뱉다니
참으로 야박한 강낭콩이었다.
"감사합니다. 저도 목이 조금 말랐습니다."
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컵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안됩니다!!!"
그때 강낭콩이 황급히 서아의 손에 들려있던 물컵을 뺏어서 단번에 마셨다.
"민철씨?! 이게 무슨...?!"
그런 강낭콩의 태도에 당황한 서아가 말을 더듬었다.
"죄송합니다. 목이 너무 말라서..."
강낭콩이 고개를 숙이며 서아의 시선을 외면했다.
"오늘 민철 씨의 행동들이 정말 이상합니다. 처음 뵙는 에이든 님 앞에서 왜 이런 모습들을"
이내 눈에 노기를 띈 서아가 강낭콩을 책망했다.
강낭콩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곁눈질로 나를 노려봤다.
그러니까 그런 뻔한 수를 쓰면 어떻게 해 나이도 있으신 양반이.
나는 그런 강낭콩에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강낭콩의 주먹이 내 마음을 기쁘게 했다.
"나가 있으세요."
서아가 서늘한 표정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하... 하지만 이 사내와 아가씨를 단둘이 어찌"
강낭콩이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서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에이든 님은 장난이 심하시기는 해도 무례한 분은 아니니까요!"
서아가 짐짓 인상을 굳히며 나를 쳐다봤다.
음음 다 옳은 소리네.
나는 그런 서아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점잖은 척 미소 지었다.
으드득
"네 이놈 혹시라도 아가씨에게 해를 끼쳤다가는"
강낭콩이 이제는 정말 이가 닳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민철 씨!!!"
서아가 그런 강낭콩을 다시 한번 질책했다.
강낭콩이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너무 심하게 놀렸나?
그렇다고 강낭콩의 침이 들어간 물을 마실 수는 없잖아.
"죄송합니다 에이든님. 민철 씨가 원래 저런 분이 아니신데. 제 안전에 관련된 문제에는 민감해서..."
서아가 말끝을 흐리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가려서 보이지 않는 가슴이 못내 아쉬웠다.
"괜찮습니다. 저라도 모시는 아가씨가 서아 씨처럼 아름다우면 밤에 걱정돼서 잠도 안 오겠는 걸요."
강낭콩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라 속이 다 시원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에엑?! 아! 감사합니다. 에이든 님은 정말 칭찬을 많이 해주시는 분이군요."
다시금 얼굴이 붉어진 서아가 황급히 감사를 표했다.
아마 가훈이 '감사를 표하자' 아니었을까.
"아무한테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냥 서아님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말이 나온 겁니다."
짐짓 점잖은 체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알겠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서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다시 감사를 표했다.
이번에는 가리지 못한 가슴이 내 만족감을 채워줬다.
"그...그럼 일단 에이든님의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정말 난처하시겠군요. 그 드숀님이란 분이 김재환을 죽였다고는 해도 김재환의 죽음에 관련되셨다니."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서아가 말했다.
곤란하기는 해도 어차피 제국으로 가면 끝날 문제니까.
이지수 치료도 맡겼으니까 이제 슬슬 도망가야지.
다른 애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힘들었지만, 나 혼자서는 제국까지 도망갈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시군요 에이든님. 공화국은 원한은 절대 잊지 않으니까요 전만해도 공화국의 수배를 받은 사람을 30년이나 추격해서 타국까지 쫓아가 잡아낸 적도..."
서아의 말이 내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애미 시발.
30년이나 추격을 했다고?
존나 지독한 새끼들이네.
제국으로 돌아가 공화국을 잊고 살려는 내 계획이 전면 부정당했다.
아니 혹시나 잡히지 않더라도 평생을 두려움 속에 살 수 없었다.
"그래도 에이든 님은 제국민이시니까 제국으로 돌아가서 잘 숨어다니시면"
내 좋지 않은 안색에 서아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서아님?"
"예? 에이든 님?"
내 부름에 서아가 왠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혹시 혁명단의 가입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서아는 순간 에이든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혁명단의 가입 조건?
"혹시 제국민은 가입하지 못합니까?"
멍한 서아의 표정에 에이든이 볼을 긁적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런 건 없지만, 제국민인 에이든님이 왜 혁명단을?"
서아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으며 침을 삼켰다.
"공화국 쪽에서 저를 수배할 거라면서요?"
에이든이 무슨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되물었다.
"예. 공화국이라면 아마 최고 등급의 수배를 에이든님에게 걸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무기한이겠죠."
설마 이 사람
"그럼 제가 살려면 그 공화국을 없애야죠."
에이든의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담겨 있었다.
"저는 그런 불안함을 가진 상태로는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에이든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공화국이 자신을 수배했으니까 그 공화국을 부수기 위해 혁명단에 들어온다?
너무나 명쾌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사이에 낀 공화국이라는 단어에 실린 힘을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았다.
대륙에서 제국 다음으로 세를 펼치고 있는 공화국인데
하지만 앞에 있는 남자는 잠시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서아에게 물었다.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마치 동네 작은 도장처럼 쉽게 입에 담는 에이든을 보며 서아는 속이 근질거렸다.
그동안 두려움에 떨며 혁명을 준비하던 자신들이 겁쟁이처럼, 바보처럼 느껴졌다.
근질거림이 천천히 서아의 온몸으로 퍼졌다.
"푸하하하하!!! 하하하하!!"
공화국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웃지 못했던 서아가 배까지 잡으며 크게 웃었다.
이건 또 무슨 미친년이야.
내 앞에서 테이블을 두드리며 신나게 웃는 서아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분명 아까까지는 정상인 같았는데, 지금 서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을 가진 것처럼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제국민이 공화국 혁명단에 들어간다는 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
문득 입에서 굴려보니 생각보다 웃긴 문장이기는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공화국을 부수지 못하면 평생 쫓겨 다녀야 하니까.
평생을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 살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든 공화국을 부숴야지.
"그러니까 된다는 거예요? 안 된다는 거예요?"
한참을 웃던 서아가 조금 진정하자 다시 물었다.
"끄윽 푸하하하하!!!"
내 질문에 서아는 다시금 배를 잡으며 웃었다.
너무 크게 웃은 서아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땅바닥에 뒹굴었지만, 서아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큼지막한 명품 엉덩이까지 씰룩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보기는 좋네 미친년.
아무래도 이 세상에 정상인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