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혁명해라.
* * *
토굴은 생각보다 정말 길었다.
우리는 한참이나 걷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높게 떠서 우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후하!!! 이제야 좀 살 것 같습네다!!"
이지수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활기차게 소리쳤다.
그에 맞춰 큰 가슴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밖으로 나와 상쾌한 공기를 맡자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온몸에 묻은 흙을 털어 없애고 몸을 풀었다.
숙이고 다니느라 목이 찌뿌둥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천오도 나를 따라 흙을 털었다.
하지만 천오의 정수리에는 흙이 떡하니 남아있어서 내가 털어줬다.
천오가 고개를 작게 저으며 남은 흙을 털었다.
"다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앞쪽에서 소리치는 사람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상단처럼 보이는 마차들이 놓여 있었다.
혁명단 측에서 미리 준비해둔 것 같았다.
마차들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제일 뒤에 있는 마차로 안내됐다.
대부분은 걸어가는 듯했지만, 우리는 조금은 허름한 마차 하나를 배정받았다.
이미 충분히 걸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우리 말고도 네 명이 타 있었다.
한쪽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껴서 앉았다.
부드러운 이지수의 살결이 느껴져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내 팔에 닿을 때마다 이지수가 움찔거렸다.
"오 당신이 그 에이든 님입네까?"
앞쪽에 앉은 사내 하나가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사내는 내 또래처럼 보였는데,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마차를 배정받을 정도면 꽤 지위가 있는 인물일 것이다.
혁명단 사이에서 나는 꽤 유명했다.
하긴 그 난리를 치고 들어왔는데 안 유명한 게 이상하지.
"네. 에이든 입니다."
나는 사내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하하! 저는 이종진입네다!"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꽤 열심히 훈련한 모양인지 사내의 손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출발하겠습네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 에이든 님이 김재환의 죽음을 보셨다는 게 사실입네까?"
이종진이 조용한 목소리로 슬그머니 물었다.
나를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보는 혈기왕성한 청년을 보면서 불현듯 재밌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맞습네다!! 여기 에이든 동무가!! 김재환의 마지막 순간을 따당!! 했습네다!"
사내의 질문에 잔뜩 흥분한 이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따당이 뭐야.
그리고 드숀이 죽였다니까.
쿵
"으엑!"
일어난 이지수가 흔들리는 마차에 넘어질 뻔한 걸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고맙습네다 동무!"
살짝 얼굴을 붉힌 이지수가 중얼거렸다.
"잘하셨군 기래!! 그 김재환은 아주 악랄한 녀석이었습네다!"
대뜸 이종진이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그에 맞춰서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김재환 녀석이 내 생각보다 더한 악질인 듯했다.
하긴 생긴 것도 뱀처럼 비열했지.
드숀이 착한 일 했네.
그 이후로 사람들과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슬슬 운을 떼었다.
"그나저나 동무들은 어쩌다 혁명단에 가입하게 됐습니까?"
본격적으로 혁명을 시작할 차례였다.
"저 말입네까? 저는 악랄한 공화국 관리들의 수탈에 못 이겨서..."
"저는 동생이 관리한테 납치되어..."
그들의 입에서 각양각색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이 공화국이 뿌리까지 썩어있고 다 불태워 없애야 하는지 절실히 느껴지는 사연들이었다.
참으로 악마 같은 공화국임이 틀림없었다.
"다들 정말 쓰레기 같은 공화국 때문에 아픔이 많으시군요."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말에 공감했다.
"그렇습네다. 공화국은 이미 뿌리까지 썩었지라"
내 말에 이종진이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다른 공화국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슬그머니 운을 띄우며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맞습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동무들은 고통받고 있을 겁네다."
내 말에 이종진의 부리부리한 눈에서 안타까움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우리 혁명단 동지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니 곧 동무들을 구할 수 있겠죠?"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너네 시발 일 안 하고 있잖아.
"...그그렇습네다."
내 예상이 맞은 듯 이종진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혹시 혁명단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제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몰라서 말입니다. 하하."
좆까는 소리 하네.
너네 이상한 핑계 대면서 놀고 있었잖아.
"악마에게 고통받는 동무들을 구해 주거나 악덕 관리들에 대해 고발을 하는 쪽으로... 아 그리고 다음 승계 순위에 있는 분을 모시고 있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 있게 말하던 이종진의 목소리가 마지막에는 거의 기어들어 갔다.
"아 그렇군요. 크흠."
상체를 슬쩍 뒤쪽으로 기대며 헛기침을 했다.
"하하지만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미지근한 내 태도에 당황한 이종진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악랄한 그들과 같아지면 안 되죠."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내 말에 굳어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풀렸다.
유명한 말이 있다.
괴물과 싸울 때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사실 그것은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 아닐까.
격렬한 싸움 중에도 거울을 들여다볼 틈이 있을 때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고통받고 있을 동무들이 걱정되기는 하네요."
그런데 시발 너네가 지금 그런 여유가 있어?
이 시간에도 동무들은 굶어죽고 있을 텐데?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는 게 점점 더 힘들었다.
내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굳었다.
***
"에이든 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네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들과 대화할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가기 전 나는 그들의 가슴 속에 작은 불씨를 심을 수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혁명이 과연 효과적일까? 라는 아주 작은 불씨.
"당연히 에이든 동무의 말은 혁명적으로 모두 맞습네다! 혁명!"
그리고 열심히 내 말에 추임새를 넣는 이지수 덕분에 일이 더 수월했다.
이지수는 프로 바람잡이들도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온 감정을 담아 내 말에 동의했다.
그런 이지수의 말에는 나조차 내가 옳은가? 싶을 정도의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자꾸만 큰 가슴이 흔들려 내 집중이 깨지기는 했지만, 이지수 덕분에 이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동무를 외면하며 저희에게 편한 길을 추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네다.."
이종진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마물을 잡으려면 마물이 돼야 한다.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유명한 말에는 반대가 되는 유명한 말이 존재했다.
"맞습네다! 악마 같은 공화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저희도 혁명적으로 변해야 합네다!"
이지수는 이제 그 큼지막한 눈에 눈물까지 고인 상태로 나를 응시했다.
너가 그렇게 감동하면 어떻게 해.
크흠
작은 정적이 마차에 내려앉았다.
톡.
옆을 보니 어느새 눈을 감은 천오가 내게 기대어 있었다.
나는 그런 천오가 편하게끔 어깨를 좀 더 낮추어 줬다.
"그러면 에이든 님은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네까?"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이종진이 전보다 더 불타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저는 혁명이란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을 가다듬으며 약간의 틈을 주었다.
꿀꺽
조용한 마차 안에 이지수의 침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손을 내미는 것. 동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흔들리는 천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잡아 고정시켰다.
잔뜩 긴장한 채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한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내 말이 끝나자 짙은 정적이 마차를 감쌌다.
입을 벌리고 있던 이지수가 다시금 박수를 치려고 할 때
쿠웅
마차가 급작스럽게 멈췄다.
"아! 밖에 무슨 일이 있나 봅네다!"
그에 정신이 돌아온 이종진이 마차 문을 밀며 말했다.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마차 밖으로 나가는 이종진이 허리춤에 매여있는 허름한 검 손잡이를 힘을 주어 잡았다.
천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옮겨 마차 벽에 기대게 하고 나도 밖으로 나갔다.
"머...멈춰라!! 여기부터는 우리 구역이다!!"
"그래!! 가진 것만 내놓으면 보내주겠다!!"
밖에 나가니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손에는 각자 칼이나 곡괭이 같은 것들을 꼬나쥐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훈련되지 않은 민간인인 게 보였다.
옷은 곳곳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헤진 상태였고 그 사이로 드러난 몸은 먹지 못했는지 삐쩍 마른 상태였다.
한 눈으로 봐도 악랄한 관리의 수탈에 못 이겨 도망친 농민들이었다.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재밌어 질 듯했다.
"어서 가진 걸 다 내놓으라우!!!"
"우리 무서운 사람들입네다!!"
농민들이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지르며 무기를 공중에 휘둘렀다.
그중 곡괭이 하나의 앞부분이 날아가 땅에 떨어지자 농민은 황급히 뛰어가 다시금 맞춰 끼웠다.
생각보다도 더 허술한 모습에 혁명단원들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요!"
그때 서아가 다급하게 외치며 혁명단 앞으로 나섰다.
그 뒤에는 인상을 잔뜩 쓴 서윤이 따라 움직였다.
역시 옆에서 보니 서아 쪽의 가슴이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물론 둘 다 이지수 보다는 작았지만.
옆에 있던 이지수가 내 시선에 방긋 웃었다.
"뭐...뭡네까! 다가오면 다칩네다!!"
순간적으로 서아의 얼굴에 눈이 팔렸던 농민이 황급히 손에 쥔 몽둥이를 휘둘렀다.
"저희는 같은 공화국민입니다. 이렇게 서로 무기를 겨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농민의 모습에 서아가 금방이라도 눈에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필요?! 무슨 필요를 말하는 겁네까!! 이미 우리 자식들은 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에겐 필요합네다!!"
서아의 부드러운 말에 농민들이 언성을 높였다.
인상을 찌푸린 서윤이 검 손잡이를 잡았지만, 서아가 손을 들어 말렸다.
"저희가 먹을 것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위쪽에 보고도 올리겠습니다."
서아가 다시금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먹을 걸 준다고?"
"그 간혹한 관리 놈의 술수일 수도 있습네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아의 제안에 농민들 사이에서는 작은 소란이 발생했다.
잠시 뒤 농민들은 결정을 내렸는지,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먹을 게 너무 없어 다 같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먹을 걸 나누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네다."
사내는 굳은 얼굴로 서아를 향해 절을 올렸다.
서아는 황급히 그런 사내를 말리려고 했지만, 서윤이 붙잡아 사내에게 가지 못하게 막았다.
"괜찮습니다. 저희야 다시 구매하면 되니까요."
입술을 질끈 깨문 서아가 뒤쪽에 손짓했다.
그러자 뒤쪽에서 무언가가 잔뜩 실린 상자들을 들고나왔다.
정말 아낌없이 나눠주는 모습에 내 머리가 아팠다.
저기에 내가 먹을 것도 있을 거 아니야.
나 배고픈데 시발.
이 조직은 내 생각보다 더 물렀다.
"아아 감사합네다 감사합네다!"
"감자야 감자!"
상자들을 본 농민들이 황급히 뛰어나와 상자들을 받아 들었다.
결국 큼지막한 상자 다섯 개가 농민 쪽으로 넘어갔다.
농민들은 상자들을 받고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입맛을 다시며 우리의 마차를 쳐다봤다.
그러다 강낭콩과 눈이 마주쳤는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강낭콩은 어떤 흉악범도 마음을 고쳐먹게 만들 외모였다.
"우리는 다 같은 동무니까요. 혹시 어쩌다 이렇게 되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서아가 입을 열었다.
"... 저희 성에 부임한 관리가 세를 절반이 넘게 올렸습네다"
농민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뻔한 타락한 관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날 관리가 말도 안 되게 올린 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농민들은 땅과 부인 그리고 딸을 빼앗기고 성 밖으로 몰렸다는.
이 시대에는 흔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은 혁명단원들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아마 그들의 이야기와도 비슷하리라.
"여기서 가까운 성이라면 안수성입니까?"
한없이 착잡해진 표정의 서아가 물었다.
"예 맞습네다. 안수성. 저희는 안수성에서 몇 대째 살아오던 사람들인데 관리가 갑자기 미쳤는지..."
농민이 서아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위쪽에 보고를 올려서 꼭 땅을 되찾게 해드리겠습니다."
서아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소용 없습네다! 이미 우리가 편지도 보내고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공화국은 묵묵부답이었습네다!!!"
서아의 말에 농민 중 하나가 잔뜩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맞습네다! 이미 공화국은 뿌리까지 썩었습네다!"
"...그래도 저희가 보고를 올린다면 효과가"
농민들의 격한 반응에 당황한 서아가 뒷걸음질 쳤다.
서윤이 농민들을 노려봤지만, 이미 잔뜩 화가 난 농민들은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다른 혁명단원들은 그런 농민들을 이해하는지 한숨을 쉬며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던 중
"언제까지 저희는!!! 고통받는 동무들을 지켜봐야 합네까!!!"
내가 심어둔 작은 불씨가 타올랐다.
잘한다 잘해!!
악에 받쳐서 소리치는 이종진의 모습을 보며 박수를 치고 싶어 움찔거리는 몸을 겨우 참았다.
"...이종진 동무?"
갑작스럽게 혁명단 쪽에서 나온 큰소리에 서아가 당황했다.
서아의 옆에 있던 강낭콩이 인상을 쓰며 나를 쳐다봤다.
강낭콩이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듯했다.
"그들과 다른 방법 인도적인 방법!!! 그런 허울만 좋은 이야기로 언제까지 저희 동무들을 외면해야 합네까!!"
이종진의 말에는 절절한 아픔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아까 관리의 수탈에 못 이겨서 나왔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 농민의 모습에서 자신의 예전 모습을 봤겠지.
"맞습네다!! 우리는 그저 공화국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아닙네까?!"
"이런 방식으로는 언제 고통받는 동무들을 구할 수 있겠습네까!!"
같은 마차에 탔던 다른 사내들도 이종진의 말에 동조했다.
그들의 눈에는 동무들의 고통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우리는!! 피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아닙네까!"
이종진이 마치 피를 뱉는 듯한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담긴 절절함과 분노가 혁명단을 뒤흔들었다.
아마 혁명단 중 대부분이 저 농민들의 분노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정상적인 생활을 했으면 목숨걸고 활동하는 혁명단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불씨가 내 마음을 간질였다.
조금 더 뭔가가 부족한데.
그리고 그 부족함은 이지수가 채워줬다.
"혁명해라!!! 혁명해라!!!"
이지수가 대뜸 양손을 위로 들더니 절규하듯 외쳤다.
이지수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만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문구는 마치 불이 옮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옮겨갔다.
혁명해라
혁명해라
활활 타오르는 모습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박수를 쳤다.
"잠시만요 진정해주세요!!"
그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서아가 소리쳤지만, 금세 외침에 묻혔다.
서윤은 그저 인상을 찡그리며 서아의 앞을 지켰다.
혁명해라
어느새 농민들까지 손을 들고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일어나라.
혁명할 시간이다.
시끄러워서 깼는지 마차의 문을 열고 고개만 내민 천오와 눈을 마주쳤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천오가 손을 내밀어 남들처럼 흔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
"닌닌"
에이든의 그림자에 숨어있던 노노하는 김재환이 떨어지는 걸 본 순간 도망쳤다.
그리고 숨어있다가 케이트에게 잡혀 끌려온 게 방금이었다.
노노하의 앞에는 케이트와 수녀들이 있었다.
"뭐 혁명단?! 걔가 거기를 왜 들어가!!"
잔뜩 인상을 구긴 케이트가 소리쳤다.
"닌닌..."
노노하는 케이트에게 얻어맞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죽은 주석 아들이랑은 왜 연관된 건데!! 진짜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드래곤한테 죽을 뻔하고도 그렇게 또 사고를 쳐?! 걔는 사고를 안 치면 죽는 병에 걸린 거야?!!"
인상을 잔뜩 구긴 케이트가 소리치며 주변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찼다.
쾅
"이익! 아파!! 치료!!"
얼마나 세게 찼는지 케이트의 고운 발목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케이트는 울상을 지으며 안드레아에게 발을 내밀었다.
안드레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런 케이트의 발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제국 제일검이랑 그 여자도 제국으로 추방당했다며. 에이든이랑 연관된 건가?!"
멀쩡해진 발을 땅에 디디며 확인한 케이트가 말을 이었다.
"아마 그런 듯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교수진이 추방당할 리 없으니."
안드레아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근데 주석 아들은 드슈인가? 걔가 죽였다던데. 하여튼 에이든 친구 좀 잘 사귀지. 어떻게 그런 애랑 친구가 되서 쫓기는 처지가 된 거야?!"
케이트가 다시금 언성을 높이며 인상을 썼다.
"저기 저희에게 숨긴 이야기는 없습니까?"
안드레아가 노노하의 앞에 쭈그려 앉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닌닌! 닌닌!"
노노하는 저기서 소리 지르는 케이트보다 조용하게 묻는 안드레아가 더 두려웠다.
"...본래라면 좀 더 조사하겠지만, 일단은 알겠습니다."
슬쩍 손을 들어 노노하의 볼을 쓰다듬은 안드레아가 일어났다.
"어떻게 할 거야?"
케이트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물었다.
"일단은 에이든 님이 혁명단에 가입 하셨지만, 당장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살인자인 드숀도 재판을 받고 나서야 처벌하니까요."
안드레아가 앉느라 구겨진 수녀복을 손으로 피며 대답했다.
"응응 그렇지?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아무리 공화국이 막되먹었다고는 하지만 제국민을 그렇게 함부로 처리할 수 없으니까! 응응 당연한 추론이지!"
안드레아의 말을 들은 케이트가 잠깐 고민하더니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맞춰서 가슴 부분이 훤히 드러난 원피스가 크게 흔들렸다.
"저는 본단으로 갈 생각입니다. 거기서 에이든 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 될 방법을 찾을 겁니다."
굳은 얼굴의 안드레아가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안드레아의 뒤로 네 명의 수녀가 조용히 따랐다.
근데 수녀가 언제 저렇게 많아진 거야
방을 나간 수녀들을 보며 케이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옆에 있던 조슈아가 조용하게 물었다.
"우리는 일단 제국으로 돌아가자."
굳은 결심을 내린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를 봐야겠어
케이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닌닌..."
노노하는 여자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
"대지신!!! 문 열어!!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어!!!"
"내 화신 돌려달라고! 화신 자체를 가져가다니! 이건 반칙이지!!"
밖에서 화가 난 신들의 외침이 공간을 울렸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친하게 지내던 신들이 빚쟁이처럼 찾아와 공간을 두드리고 있었다.
대지신은 몸을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막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이기기만 해줘 제발
"열어!!! 이 화신 도둑아!!!"
공간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내가 훔친 게 아니라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애써 고개를 젓는 대지신의 눈에서 자꾸만 영롱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자 줄 서어어어! 히끅! 내가 화신을 도둑맞았을 때! 흐에 행동 방침을 알려줄게... 헤헤 먼저 화신이 흐엑! 씹창이 났다 이럴 때는 흐에"
바다신의 잔뜩 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지신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인트를 확인하고 다시 귀를 막았다.
이길 수 있어.
이기면 다 해결될 거야.
모든 게 다
그렇지...?
'혁명해라!!!'
또 대형 사고를 치는 사도의 모습에 대지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