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낭만 검사.
* * *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수도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서아가 내게 손수건을 건네면서 말했다.
"서쪽 문은 열려 있는 겁니까?"
나는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대충 닦으며 대답했다.
근데 이 손수건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인데?
으음
옆에 있던 드숀이 헛기침했다.
"예. 그쪽 담당하시는 분이 저희 쪽분이세요."
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볼에 묻은 피를 닦아줬다.
"다행이네요. 공화국 놈들 좆같이 많던데."
내 욕지기에 서아가 작게 웃었다.
"서아."
그때 앞에 있는 사람들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재수 없게 생긴 미중년이 다가왔다.
"자네가 에이든 이라는 놈인가."
서아를 부른 미중년은 나를 띠꺼운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
"... 그런데?"
미중년의 건방진 말투에 내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아..! 이쪽 분은 저희 혁명단 대장 김지훈 님이세요. 이쪽은 에이든 님입니다. 저희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에 당황한 서아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 서아를 도와줘서 고맙다. 하지만 너무 주제넘게 행동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서아 앞쪽으로 오거라."
미중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고는 돌아갔다.
"...네. 에이든 님 지훈 님이 지금 좀 까칠하셔서 그래요. 평소에는 좋은 분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서아가 나를 보며 말하고는 미중년에게 달려갔다.
미중년은 그런 서아를 보며 웃는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토 나올 정도로 좆같았다.
"뭐야 시발 좆같이 재수 없는 늙은이네. 저 나이에 서아 씨를 저딴 눈빛으로 보다니. 고추도 서지 않을 것 같은데 욕심만 더럽게 많네. 우웩."
나는 굳이 입에서 나오는 욕지기를 참지 않았다.
"...우리 의붓아버지다."
떨떠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온몸에 피를 잔뜩 묻힌 서윤이 서 있었다.
"아. 그렇군. 그러면 인정이지."
나는 그제야 서아와 남자와의 관계가 이해됐다.
그래서 아까 띠꺼운 눈빛으로 나를 본 거구나.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서아와 미중년의 모습이 좆같은 원조교제에서 따뜻한 가족의 모습으로 바뀌어 보였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사과하지 않나?"
서윤이 찡그린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한다 라는 말이 있지. 어차피 주워 담지 못하는데 굳이 사과할 필요가 있나?."
손수건으로 서윤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줬다.
서윤이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지만,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건 그런 의미로 쓰는 말이 아닐 텐데."
서윤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수도."
나도 마주 입꼬리를 올리고 더러워진 손수건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으아아악!!"
그때 앞쪽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명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단번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크! 드숑 동무는 정말 사나이입네다! 머리에 칼이 떨어지는데도 지리지 않다니! 드숑 동무 덕분에 제가 혁명적인 합체를.."
뒤쪽에서 들리는 말을 무시하며 앞쪽으로 향했다.
서쪽 문은 정말 크고 단단했는데 그 앞에 끔찍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병사들로 보이는 투구를 쓴 머리들이 성 옆으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그 앞에는 지금까지 병사와는 다른 복장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제일 앞에 검은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푹 눌러쓴 사내가 앉아 있었다.
혁명군은 그들에게 막혀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뻔한 상황이었다.
계획이 새어나가 미리 탈출로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어쩐지 유난히 쉽더라니.
"... 배신이라니 낭만 없는 행동이지."
중절모를 눌러쓴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손에 들린 검을 흔들었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세에 습관적으로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저릿저릿한 느낌이 전해질 정도로 사내는 강했다.
아마 내가 사내와 싸운다면 단기간에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김 상무는 어디 갔나."
서아의 의붓아버지라던 사내가 물었다.
"저기 잘 찾아보시게. 낭만 없는 자들은 저기에 다 모아뒀으니"
중절모 사내가 손에 들린 피 묻은 레이피어로 효시 된 머리들을 가리켰다.
말투 좆같네.
사내의 말투가 내 심기를 거슬렀다.
"... 우리를 막을 건가?"
서아의 의붓아버지가 멍청한 질문을 진지한 말투로 했다.
"어쩔 수 없네. 내 의무이니. 음 혹시 거기 있는 아름다운 레이디가 내게 키스해준다면 또 모르겠군."
사내가 중절모를 들어 올리며 레이피어로 서아를 가리켰다.
중절모 안에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좆같이 잘 생겼다.
사내의 말에 혁명단이 순간 웅성거렸다.
아마 혁명단도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겠지.
"저..정말 키스만 해주면 되는 건가요?"
서아가 벌레를 만지는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잠깐! 서아야!"
의붓아버지가 황급히 말렸지만, 서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약속은 지킵니다. 그게 약속이니까. 물론 제게 밤새 키스를 해주어야 하겠지만"
중절모 사내가 입꼬리를 건방지게 올리며 대답했다.
그 시선에 잠시 움찔거리던 서아가 나를 힐끔 보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서아야 그럴 필요 없다. 우리라면 충분히 저들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
의붓 아버지가 서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 검은 코트에 중절모 그리고 레이피어까지. 낭만 검사 이미르잖아요. 최상급의 실력을 지닌."
서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그래도. 최상급이라면 우리에게도 김민철이 있다. 굳이 서아 네가"
의붓아버지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김민철 씨보다 쓸모없는 제가 남는 게 더 합리적인 판단이에요 아버지.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혁명단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나를 주면 보내준다는 말은 진실이니까"
나를 돌아본 서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애미 시발.
또 존나 귀찮아지겠네.
병신 새끼들 어디서 계획이 샌 거야.
전부터 느꼈지만 참 답 없는 집단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천천히 뽑았다.
"이지수. 쟤 잘 챙겨라. 입에 이상한 거 넣는 거 꼭 말리고."
천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웩?!"
뭔가를 뱉어내고 있던 천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세히 보니 유난히 검은 돌이었다.
쟤는 시발 돌을 왜 처먹어.
"동.. 동무? 뭡네까?! 연극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기 전에 할법한 말은"
이지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내 옷깃을 잡았다.
이지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말을 해도 시발 존나 불안하게 해요.
그런 이지수의 손을 밀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이지수가 다시금 내 옷깃을 잡았지만, 나는 인상을 쓰며 그 손을 밀어냈다.
"합체는 어떻게 합네까! 저희는 혁명적인 합체를"
애절한 이지수의 말을 무시했다.
"뭐야? 시발 너 개 병신 에이든 맞냐?"
"좆까 병신아."
"맞네! 그럼 잘 가라!"
뻐킹 어글리 오렌지가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몇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었다.
여기 더 오래 있다가는 혁명단원들이 죄다 잡힐 게 분명했으니까.
"안 된다! 절대 안 돼!!"
의붓아버지가 절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 의지입니다!! 저도 혁명단원입니다!"
의붓아버지의 손을 쳐낸 서아가 덜덜 떨리는 몸으로 중절모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런 서아를 보며 의붓아버지란 사내가 손을 벌벌 떨었다.
뭐 하는 거야 시발 끝까지 말려야지.
"자신의 단체를 위해 몸을 바치다니 참으로 낭만 있는 판단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레이디에게는 초콜릿처럼 부드러우니."
중절모 사내가 입꼬리를 삐쭉 올리며 중얼거렸다.
좆같은 소리하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약속은 지키세요."
서아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당연하지. 그게 낭만이니까."
중절모 사내가 웃으며 그런 서아에게 손을 뻗었다.
캉!!
"흐음 이건 또 무슨 낭만 없는 짓인가."
어느새 검을 뽑은 사내가 내가 찔러넣은 검을 막으며 인상을 썼다.
"에이든 님?!"
서아가 나를 보며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매는 표정이 참 애매하단 말이야.
"미안하지만, 내 꺼거든. 침도 발라뒀어."
최대한 이죽거리며 다시금 사내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에엑?! 제가요?! 아니, 왜 진실이죠?! 그그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그렇게까지는 치..침이요?! 침은 또 언제...!? 제가 바른거..아악! 이게 아닌데!! 아니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도망가세요! 에이든 님! 제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까!!"
금세 얼굴이 붉어진 서아가 애매한 표정을 지우고 활짝 웃다가 다시금 인상을 굳히고 말을 더듬었다.
"레이디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낭만 있는 행동이긴 하지만."
내 검을 쳐낸 중절모 사내가 순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찔러넣었다.
피하고자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미처 다 피하지 못했다.
사내의 검이 흩고 지나간 내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그럴 실력이 있는지는 의문이군."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내 속을 긁었다.
솔직히 당황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기운을 담아 찔러넣은 검을 사내가 손쉽게 막아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이미 시작했으니까.
[동감일세. 레이디를 위해 목숨 바쳐 죽는다라 달콤하군.]
죽긴 누가 죽어 시발.
난 존나 오래 살 거야.
"...전진!! 뚫는다!"
뒤에서 서아의 의붓아버지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와아아아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 올랐다.
캉!
사내의 날카로운 검이 다시금 내 몸에 상처를 냈다.
"에이든 님!!"
얼굴에 내 피가 묻은 서아가 수분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날 불렀다.
"빨리 가요! 거치적거리니까!"
그런 서아에게 웃어주며 소리쳤다.
".. 거치적거린다니"
내 말에 서아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가자."
그런 서아를 서윤이 잡아끌었다.
서아를 안고 돌아가는 서윤이 나를 돌아봤다.
돌아가면 알지?
나는 그런 서윤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병신
눈이 마주친 서윤의 표정은 더 이상 애매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영웅이 된 기분인가?
아니 곧 자매 덮밥을 먹을 것 같은 기분이야.
[더 좋군.]
그렇지.
카앙!
억지로 경로를 밀어 넣은 사내의 검이 내 배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내의 속도가 너무 빨라 나는 방어만 하기에도 벅찼다.
이런 방식으로는 사내를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행동과는 달리 자네의 검에는 낭만이 없군."
사내가 띠껍게 웃으며 검을 다시금 찔러넣었다.
"뭐래 시발 애미 터진 새끼가."
나는 이를 악물며 사내의 검에 오히려 몸을 가져다 댔다.
좆같이 아프기는 하겠지만, 잡으면 내가 이긴다.
"회복력을 믿고 싸우는 타입인가? 낭만 없군."
내 반응에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검의 경로를 바꿔 어깨 부근을 베어냈다.
사내는 생각보다 눈치가 더 빨랐다.
지금까지는 다 당해줬는데 말이야.
"낭만은 너희 어머니 가랑이에 내가 어젯밤 두고 왔거든 시발아! 거기서 찾아보던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지만, 사내는 가볍게 피해내며 다시금 검을 움직였다.
크아아악!!
밀어! 밀고 나가!!
막아라!!
강낭콩이 있어서인지 혁명단은 상대를 천천히 밀어내며 서쪽 문에 가까이 갔다.
"그런 낭만 없는 도발은 내게 소용없네."
사내의 말과 함께 내 몸에 상처가 하나 더 늘었다.
존나 따가워 시발.
낭만이라
"어제 자네의 어머니에게 다수의 남성들이 온기를 남겼다고 하던데 괜찮은가? 혹여나 남성들의 세상의 때가 아직 남아 있을까 걱정되는군."
입꼬리를 올리고 싶었지만, 온몸에 새겨진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자꾸만 입꼬리가 흔들렸다.
신성력이 돌면서 내 상처를 치료했다.
다시금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좀 낭만 있군."
중절모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입이 웃고 있었다.
병신 새끼.
하여튼 좆같은 새끼들밖에 없다니까.
서쪽 문을 통과하는 반란군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고 진짜 가니까 약간 섭섭하네.
마지막으로 펑펑 울고 있는 이지수와 눈이 마주쳐 시원하게 웃어줬다.
이지수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반항했지만, 천오가 못 가게 잡았다.
웩
천오가 나를 보며 혀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었다.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말이야.
그런가?
그랬었지.
그랬었군.
이것도 나쁘진 않아.
높이 떠 있는 해가 뜨겁게 땅을 비추었고
나는 그 눈부신 뜨거움에 인상을 굳히며 검을 고쳐 잡았다.
* * *